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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씻기시고 먹이심 (최후의 만찬)
2012년 09월09일(일,가창)
(요13:1~11)
0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0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0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0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0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0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0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0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0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몇 번에 걸쳐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씻기시고 먹이심에 대한 말씀이다.
12장 마지막에서 대중들을 상대한 말씀이 끝난 것을 보게 된다. 그 요지는 “나를 본 자는 나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고, 나를 믿는 것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체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다” 이렇게 시작된 요한복음은 12장 마지막에 와서 “나를 본 자는 나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다.”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로 볼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통해서 나타난다. 보내신 자를 봐야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는 이런 뜻이다.
유태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통해서 그들이 여호와를 알았다. 사실은 다 안 것이 아니고 알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또 나타날 것이니까 하나님을 다 안 사람들이 아니고 알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희랍인들은 이미 벌써 자기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여호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대로 설정한 신(神)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마지막에 “나를 본 것은 나 보내신 이를 본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따로 볼 수 없다. 물론 어디 가서 기도해서 봤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 정통의 길은 아니다. 정통의 길은 보내신 이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다.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그것은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1~13장까지의 말씀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끄심을 보여주고 있고, 14~21장까지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로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심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면으로 보면, 요한복음의 전반부는 생명의 건축을 위한 재료를 준비하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생명의 건축을 위해 재료들을 모으시고 세우시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부터 13장까지의 말씀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끌기 위한 모습이고, 14장 이후부터 마지막까지는 부활하신 하나님 아들로서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이끄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 안으로 오시고 또 사람은 하나님 안으로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래서 중보자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로 오시고 사람은 하나님에게로 가는데 이것의 중보역할을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또 다른 면으로 보면 처음 제목을 생명의 건축을 위한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과 후반부에는 생명의 건축을 위한 재료들이 준비가 되었으니까 그것을 모아서 집을 짓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간에 13장이 끼어있는 것이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셨다. 그 분은 대중들에게 마지막 생명을 선포하시고(요12;44~50) 제자들에게 마지막 생명을 분배하려고 만찬을 베푸셨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셔야 할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나 사단은 가룟 유다의 마음에 배반할 마음을 넣었다고 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에 유월절 전에 하는데 그 날이 확실히 며칠인지 모르지만 바로 이것을 바로 전날이었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는데 좌우지간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했다. 유월절은 우리가 설을 새듯이 그들은 가족끼리 모여서 만찬을 하는 그런 절기를 오랫동안 가지고 왔다. 대중들에게 마지막 생명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생명을 베푸시려고 마지막 만찬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에 요점이 있다. 그러나 사탄은 가롯 유다의 마음에 배반하는 마음을 넣었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끝까지 사랑했다고 하는데 한쪽에서는 배반하는 마음을 넣었다고 한다.
1/3. 신성한 교통을 위해 발을 씻기심
유대인들은 손님으로 초대 받으면 목욕을 하고 잔치에 참예하는데, 이때 초대한 주인의 종이 문간에 나와서 손님들의 발을 씻어준다고 한다. 이미 목욕을 하고 왔을지라도 오는 동안에 샌들을 신었기 때문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보아, 남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은 주나 선생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소에도 종은 주인의 발을 씻겨 주는데, 이때가 주인과 종이 제일 가까운 관계가 되는 순간이다.
왜 씻었는가? 그것은 신성한 교통을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손님을 초청하면 손님은 깨끗하게 하고 가야하니까 자기 집에서 목욕을 하고 간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깨끗하게 하고 가더라도 그들은 샌들을 신고 다니니까 아스팔트도 아닌 흙길을 걷게 되니까 더러워지게 된다. 그래서 주인이 종을 시켜서 손님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준다고 한다. 이렇게 발을 씻겨주는 것은 큰 대접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사람은 주인이 아니고 종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생이라고 부르고 주라고 부르는 분인데 이런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것이다. 발을 씻기는 것이 친근해지는 과정이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도 되고 대우도 된다. 주인과 종이 제일 가까워질 때가 발을 씻겨줄 때이다. 평소에는 주인과 종이 거리가 멀지만 발을 씻길 때는 같이 있어야 하고 발을 만져줘야 한다. 더운 지방에서는 시원한 물로 발을 씻겨주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고 추운 지방에서는 따뜻한 물로 씻어주면 기분 좋다. 그러니까 종이 발을 씻는 것은 아주 굉장한 봉사라고 할 수 있는데 만일 종이 아닌 사람이 발을 씻겨준다면 이것이야말로 극진한 봉사라고 할 수 있다.
샌들을 신고 다니는 유대인의 관습으로 보면 발은 늘 땅과 접하기 때문에 쉽게 더럽혀지는 곳이다. 씻는 것은 깨끗하게 하기 위함인데, 물로 씻는 것의 영적인 의미는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서 친밀한 교통을 위한 것이다. 남편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인 아내-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흠과 티나 주름이 없게 한다고 하였다.(엡5:26,27)
샌들을 신고 다니는 유대인들의 관습으로 보면 발은 늘 땅과 접하고 있어서 늘 더럽혀지는 곳이다. 씻으면 다음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씻어도 다음에 더럽혀지는 곳이다.
씻는 것은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다. 물로 씻는다는 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성경에 있는데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엡5:26)하는 말이 있다. “남편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인 아내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흠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게 한다.”는 이런 말이 나온다. 물로 씻는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세례(침례) 말고 결례(潔禮;Purification)라는 깨끗이 씻는 예식이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연루가 되어서 씻는 것이 형식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이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운다는 말이 된다.
신부가 시집을 가면서 목욕도 하지 않고 가면 되겠나. 당연히 깨끗하게 해야 한다. 남자도 깨끗해야 하지만 여자는 더욱 깨끗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남편이신 그리스도는 깨끗한데 아내인 교회가 지저분하면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같이 살 수가 없다. 거지들에게는 이가 득실득실한데 아무리 내가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람과 한 이불에서 잠을 같이 잘 수 있겠나. 그러니까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나를 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씻으려고 하는구나!’나는 그것을 모르고 내가 내 기준으로 씻으려고 했다. 사람마다 이렇게 하면 깨끗해질 것이라는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가지고 씻으려고 오만 가지 방법으로 씻었지만 안 씻어지니까 ‘이거 참~ 인간이 안 되는구나’하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것을 계속 했더라면 나는 평생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신랑이 좋다고 할지 나쁘다 할지 그것도 모르고 내 기준으로 씻고 가는 것이니까! 신랑이 하얀 드레스를 좋아하는지 빨간 드레스를 좋아하는지 모르고 자기 기분 나는 대로 드레스를 입고 가면 신랑이 싫을 것이다. 드레스는 누구 보라고 입는 것인가? 신랑 보라고 입는 것이니까 신랑에게 ‘흰 것을 좋아 하느냐? 빨간 것을 좋아 하느냐?’물어봐서 입어야 하는데 (앞에 누가 없으니까) 나는 물어 보지도 않고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빨간 것이 좋다! 흰 것이 좋다!’생각하고 입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을 보고 ‘아~ 내가 헛일을 했구나! 그 원하는 분이 자기 필요한 대로 씻어야지 내가 필요한 대로 씻으면 안 되겠구나!’ 이 생각을 그 때 하게 되었다.
향수도 마찬가지인데 향수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냄새가 여러 가지인데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냄새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자매들에게 좀 미안한 얘기인데 어떤 분들이 화장을 하고 왔을 때 제가 맡기에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있다. 자기는 좋으니까 하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싫다. 옆에 있으면 구역질이 나려고 하고 머리가 아파서 나와 친한 자매들에게는 ‘이 냄새가 나에게는 너무 싫다. 다음에 나한테 올 때는 이것은 하지 말아 달라!’얘기를 해 주었다.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계통인데 너무 너무 싫어하는 냄새다. 우리 동양의 냄새라는 것은 은은하게 난초의 향기처럼 냄새가 난둥 만둥 해야 하는데 친한 자매들한테만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아~ 내가 씻는 것이 아니구나! 그 분이 더 씻는 것이 필요하구나!’이 말씀이 너무 그 때 내 인생을 바꿔 놨다. 내 수준으로 씻어 봐야 그 분의 수준에 안 맞으면 어쩌겠는가! ‘그 분의 수준에 맞게 씻어야 되니까 그 분이 씻는다고 하는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깨끗이 씻는다고 해봤자 부모의 기준에 안 맞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씻는다는 것이 오히려 안 씻는 것만 못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가 우리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것 같다. 자기 주관대로 하나님이 이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한다. 물론 마음은 좋지만 그것이 마음에 안 맞는다.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 하나님이 씻으셔야 하고, 예수께서 씻기를 더 원하신다. 필요는 내게 있는 것보다 그 분에게 더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밖에 나가서 흙장난을 하고 돌아오면 문 밖에 세워 놓고 씻긴다. 왜? 어린아이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씻긴다. 아이들이 씻는 것을 싫어한다. 놀다가 그냥 뒹굴고 자면 좋은데 엄마가 붙잡아 놓고 씻긴다. 어떤 놈은 울고 떼 쓰는 놈도 있는데 엄마가 왜 씻기냐? 자기는 집안에 이불이랑 이런 것을 다 깨끗이 빨아 놓았는데 이 흙탕 가지고 개판 치면 안 되니까 씻기려고 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어린 아이의 필요가 아니고 어른의 필요에 의해서 깨끗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분이 필요해서 우리를 씻으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 분의 기준에 맞춰서 씻어져야 된다. 나는 그 기준을 정할 수 없고 나는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씻는 것-결례(潔禮)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발을 씻는다는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통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그들과 온전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셨을 것이다. 세상에서 묻은 먼지나 불순물은 몸의 신성한 교통을 방해한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었고 주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먼지는 늘 묻게 마련이다.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써 뭘 하려고 했는가? 온전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싶었다. 예수께서 아내인 교회를 사랑해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려 한 것은 같은 레벨이 되게 하기 위해서 유기적인 교통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다.
세상에서 묻은 먼지나 불순물은 몸의 신성한 교통을 방해한다. 다른 데는 다 깨끗한데 발만 더럽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어떤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데 몸은 깨끗한데 발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면 그 사람이 섰다가 간 자리까지 닦아야 된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 와도 발 냄새가 나면 (말은 못하고) 얼굴이 찡그려진다. 결국 남의 집에 갈 때 주의해야 한다.
‘미국 사람들은 방에 들어 갈 때 왜 신을 신고 들어가는가?’의아 했다. 물론 우리나라도 대부분 그렇지만 신발을 신고 길을 걸어 다녀 봤자 바닥에 흙 묻을 일이 별로 없으니까 신을 신고 방에 들어가도 된다. 우리 관념으로 생각하면 ‘신을 신고 어떻게 방에 들어가나?’라고 생각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다 카펫이니까 신을 신고 들어가는 것이 맞다. 만약 땀나는 발로 카펫을 밟아 놓으면 그 카펫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그러니까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이 맞다. 우리도 발에 냄새가 많이 나고 그런 경우에는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보다 신발을 신고 그대로 있는 것이 (냄새가 아예 안 나니까!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으니까!) 훨씬 낫다. 그러니까 결국 불순물이나 몸에 더러운 것이 묻어 있으면 교통이 방해가 된다. 아무리 친해도 옆에서 냄새가 팍팍 나면 싫어한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었고, 주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세상에 살고 있는 한은 먼지는 늘 묻게 마련이다. 한번 목욕했다고 영원히 목욕 안 할 수 없는 것이다. 목욕도 자주해야 하는 것이지 한번 했다고 영원히 안 할 수 없다.
우리는 옛날에 목욕할 때가 없어서 여름에는 바닷가에 살다가 가을 찬바람 나면서부터는 목욕탕 없으니까 내년 여름 돌아 올 때까지 목욕 못한다. 그렇게 살기는 살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그러니까 몸도 깨끗하게 씻어야 하지만 발은 늘 먼지가 묻는다. 하루 나갔다 오면 하루 닦아야 되고 이래야 되지 ‘어제 씻었으니까 오늘 안 씻어도 되겠지’이래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먼지들이 온전한 교통을 방해하는 것이다.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세상 문제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세상과 접한 부분을 늘 물-생명의 말씀(엡5:26,27)으로 씻어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것은 온전한 교통을 방해하는 것이다.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아주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소하게 그 사람 발에서 냄새가 너무 난다는 그 한 가지 이유가 별 것이 아닌데, 자기가 타고나기를 그런 것인데, 이해해 보면 별것이 아닌데 하지만 그 사람이 올 때마다 싫을 수 있다. 그러면 사소한 문제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소하다고 생각 된 일들이 세상에서 묻어 온 것들이 오히려 다음에 큰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순모임에서 교제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묻어 온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좋은 영향이 가는 것이 아니고 나쁜 영향이 가서 사람들이 싫어한다. 옛날에 수준이 낮을 때는 세상에서 묻어온 먼지를 가지고 와서 얘기하면 달콤하고 그럴듯해서 박수치고 동의하고 환영하고 했지만 이제 수준이 좀 올라갔기 때문에 그런 어두운 얘기하면 싫다. 밝은 이야기가 좋고 어두운 이야기는 싫어진다. 그렇지 않던가?
제가 여러분 보다 조금 나으니까 나는 어두운 이야기는 아~~주 듣기가 싫고 밝은 이야기만 늘 듣고 싶다. 아마 여러분도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초창기 어렸을 때는 세상 이야기가 재미있고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구미가 땡기기 때문에 누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귀가 솔깃하고 같이 맞장구 치고 이래야 한다. 그런데 조금 성장하고 나면 그것이 싫어진다. 사소하다고 생각되지만 세상에서 묻어온 이야기는 안하는게 좋다. ‘그것을 이야기해서 까발려야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까발려서 좋을 것도 있지만 까발려서 나쁜 것도 있다. 똥은 뒤집을수록 냄새만 나니까 덮어두는 것이 최상이다. 까발리면 까발릴수록 나쁜 냄새가 나는 것이니까!
하나님 나라 안에는 부정적인 것이 없고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세상에서 묻어온 것들이다. 남을 흉본다든지 비판한다든지 모함한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은 전부 하나님 나라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묻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명은 세상과 접한 부분을 늘 물로 씻어야한다. 물은 생명이다. 생명은 말씀이다. 그래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 여기서 ‘물의 말씀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도 씻는 것이고 말씀도 씻는 것이다. 물로는 바깥을 씻고 말씀으로는 속을 씻는다. 늘 이것을 씻어내야 한다. 영원히 안 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원히 죄를 사함 받았다는 사람들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그들은 발은 늘 세상과 접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몸은 구속 안에서 이미 깨끗해졌다. 또 씻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발은 방에 들어갈 때마다 늘 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 번 죄를 사함받았기 때문에 영원히 죄사함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좀 살다보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죄를 용서받았는데 왜 죄를 짓게 되나?’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을 개발해냈다. ‘그래도 한번 용서받은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이것은 옹색하지 않은가?
발은 늘 세상과 접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내가 아무리 몸이 깨끗하게 되었을찌라도 맨발로 샌달을 신고 걸어가면 발에 먼지가 묻기 마련 아닌가? 몸은 구속 안에서 이미 깨끗해져서 씻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발은 방에 들어갈 때마다 늘 씻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화장실 바닥이 전부다 타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발만 씻기가 쉽지만 서양사람들은 그렇게 안되어 있어서 발을 씻으려면 전체 몸을 다 씻어야 하니까 신발을 안 벗으려고 한다. 방에 들어갈 때는 자기들도 할 수만 있다면 씻으면 좋을텐데 화장실 구조가 그렇게 생겨서 발만 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집 지을 때는 발만 씻을려고 꼭 타일을 깔아놓는다.
늘 씻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씻을 것인가? 교회와 그 교통 안에서 이것이 씻어진다. 세상에 계속 접하다보면 씻을 수가 없지만 교회에 와서 접하다보면 씻어지게 된다. 여러분이 순모임에 말씀을 준비해서 나오려면 저절로 자기가 씻어지게 된다. 특히 말씀 섬김이 하는 분들은 그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는 동안에 자기가 씻겨지는 것이니까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좋은 것이다.
2/3. 생명으로 새기기 위해 먹이심
요한은 주께서 발을 씻기신 일이 식사 중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했다. 공관복음에는 이 사건이 빠져 있고, 요한복음에는 각자에게 떡과 잔을 주셨다는 일이 빠져 있다. 요한은 떡과 잔의 의미(성찬)를 일부러 제쳐둔 것일까? 만약 요한이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초대교회의 성찬에 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전11:27~29참) 그래서 발을 씻기는 일로 대체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먹여줬다’는 말이 나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은 주께서 발을 씻기신 일이 식사 중에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밥을 잡수시다가 어떻게 일어나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해서 조금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찾아보니까 그렇게 번역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보통 유대인들은 식사하기 전에 발을 씻지 밥먹다 말고 일어나서 발을 씻지는 않는다고 하니까 ‘만찬석에서 일어나~’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제일 맞는 것 같다.
공관복음(共觀福音:마태,마가,누가복음)에서는 ‘발을 씻었다’는 사건이 빠져있고 또 요한복음에서는 ‘각자에게 떡을 나눠줬다’는 사건이 각각 빠져있다. 왜 그렇게 빠뜨려 놨을까? 요한은 떡과 잔의 의미를 일부러 제쳐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것을 일부러 제쳐놓고 지금 발씻는 것을 이야기했다. 초점을 딴 곳에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데 성경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것은 아마 초대교회에서 성찬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다. 또 한가지는 이미 벌써 공관복음에 있는 것이니까 안 썼다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성찬 때문에 문제가 된 곳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먼저 가져다 먹니 나중에 가져다 먹니’ 이런 문제도 생기고 ‘자기를 살피지 않고 먹는 것은 죄가 된다’는 말도 있고 성찬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이 나온다. 요즘 천주교에서 하듯이 하얀 가운 입고 엄숙한 분위기의 성찬식이 아니라 그 때는 아가페(Agape)라고 해서 애찬(愛餐)이다. 어떤 사람은 먼저 많이 먹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니까 불평이 나오고해서 ‘함부로 그렇게 먹으면 주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고를 바울이 하게 된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초창기에 성찬식을 해보니까 거룩한 성당에서 훈련받지 않은 갈릴리 형제들이 모였기 때문에 내가 한 개씩 일일이 떼어줬으면 그런 일이 없을텐데 일일이 그렇게 할 수는 없고 그래서 판에다가 카스테라빵을 쪼개놓고 포도주 잔을 놓고 했는데 참석자의 1/3도 못가서 다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_^ 요즘 같으면 안 그럴텐데 그 때는 좀 가난할 때니까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한 두어번 해보다가 ‘에이~ 안 되겠다’ 해서 안한 것이다. 성찬을 안하게 된 이유가 그래서 안 한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 이랬겠구나!’
요즘에는 대단하더라. 앞에다 하얀 상을 가져다 놓고 하얀 가운을 다 입고 장로들이 다 나와서 쫘악 서서 배식을 하더라. 아주 엄숙해서 기침도 하면 안된다. 그런 식으로 하면 두세 번씩 먹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는 우리에게 의자도 없어서 그냥 맨바닥에 앉아서 했기에 두 개 먹었는지 세 개 먹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삼분의 일이 지나가면 다 없어져 버렸으니 원색적이고 원시적인 교회를 경험한 것이다.
성찬의 의미에 대해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을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고전11:24참) 주님의 죽으심이 몸 안에서 계속적으로 기념(각인) 된다면 몸은 정결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주께서 발을 씻기신 일은 결국 씻음으로써 한 공동체를 정결케 함이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성찬에 의미에 대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다시 오실 때 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기념한다는 말은 마음에 새긴다는 뜻이다. 주님의 죽으심이 몸 안에서 계속적으로 새겨진다면 몸은 깨끗해질 것이다. 계속적으로 주님의 죽으심이 생각나고 항상 새겨져 있다면 몸은 정결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먹는 것과 씻는 것의 목적은 결국 한 공동체 안에서 정결한 교통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이 이것을 빼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 복음에 비해서 자세히 해석하는 책으로 요한은 떡을 먹고 잔을 주고 했던 그것을 그냥 사실대로 기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씻는 것으로 해석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하나는 빼고 다른 하나를 첨가한 것이다.
신성한 공동체의 유기적인 연합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묻은 때를 씻어냄이 필요하고,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듯이 또 우리 서로가 행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는 ‘지금은 너희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리라’ 고 하셨다. 이것은 교회생활 안에서 알게 될 일이다.
목적이 같으므로 먹는 것도 씻는 것이고 씻는 것도 씻는 것으로 신성한 공동체의 유기적인 연합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묻은 때를 씻어낼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성격이 세상과 다르고 모임의 성격도 다르기에 우리는 성질도 달라야한다.
서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상인연합회나 음식점하는 사람들이 모인 음식점 연합회는 우리의 순모임과는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 성질이 전혀 다르니까 준비도 다르게 해야 한다. 서문시장 상인조합에서 모임을 가질 때는 서문시장의 번영을 목표로 모일 것이고 우리는 유기적인 연합과 하나님 나라의 전파를 목적으로 해서 모이는 것이니까 모임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므로 내가 여기에 올 때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내가 서문시장 연합회에 왔는지, 아니면 음식점 연합회에 왔는지, 아니면 병원연합회에 왔는지 이것을 알고 참석을 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참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유기적인 연합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묻은 때는 씻어내야 한다. 세상에서 묻은 때는 이 유기적인 연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그렇게 행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너희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리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교회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혼자 살면 이런 것이 필요가 없는데 연합적인 생활을 하려면 남의 발을, 남에게 묻은 허물을 내가 씻겨줘야 된다. 그것을 씻어주지 않고 ‘왜 냄새가 나냐? 왜 안 씻고 왔느냐?’고 만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이 못 씻고 왔으면 내가 씻어줘야 될 일이지 ‘왜 안 씻고 왔느냐’고 자꾸 뭐라고만 하면 안 된다. 발 냄새 심하게 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올 때 화장실로 끌고 가서 발을 씻겨주면 된다.
주님은 먼저 본을 보여 주셨다. 교회는 섬기는 자들로 인하여 정결케 된다. 주님이 우리의 허물을 씻어 주시듯이 우리는 서로 섬김으로 씻긴다. 씻어주는 것이 섬기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는 서로 씻어줄 수 없다. 생명의 사랑을 먹이고 섬김으로 씻어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통 안에서는 서로가 씻겨 줘야 하는데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지식으로는 할 수가 없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 이것이 딱 박혀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이 먼저 본을 보여줬다. 교회는 섬기는 자들로 인해서 씻겨지는데 알고 보면 발을 씻어주는 자가 섬기는 자다. 허물을 씻어주기 위해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서로 섬기면서 서로 씻는 것이니 간증을 하던지 순모임을 할 때는 ‘내가 누구의 발을 씻어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가 씻어짐을 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발이 씻어진다. 자기의 정결함을 내놓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발도 정결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할 것이 아니고 ‘아! 이것은 발을 씻기는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오형제가 제사를 지내러 왔는데 제사라는 것이 사실은 후손들이 연합하여 친근한 생활을 가지라고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이 와서 그것을 먹겠는가! 그런데 자기들이 먹고 나서 싸운다. 술 한 잔 먹고 나면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형님과 형수님은 왜 그 모양입니까?”하고 대부분 아랫사람이 그렇게 하기 쉽고 형님은 또 아랫사람들에게“너희들은 왜 그 모양이냐? 왜 부모를 돌보지 않느냐? 큰집을 돌보지 않느냐?” 이렇게 시작해서 싸우게 된다.
우리 뒷집에도 아들네들이 많아서 늘 그렇게 모인다. 그동안 조용했는데 요번에 할머님이 허리에 척추결핵이 걸려 편찮으셔서 요양병원에 계시게 됐는데 이번에는 싸움을 했다. 어느 동생인지 모르겠는데 “형님 섭섭합니다!”하면서 우리 집 앞에 있는 정좌에 앉아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유인 즉 ‘왜 어머니가 저 모양이 되도록 놔뒀느냐!’이 말인 것 같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상 사람들은 모이면 시시비비(是是非非)부터 가리니까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시비를 가려서 안 싸울 방법은 도저히 없다. 이것은 허물을 씻어주러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물을 들추러 간 것이 된다. 동생이 하는 말이 “ 나도 안 하려고 했는데 할 수 없이 합니다.”이런 식으로 한다. 안 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안 해야지... 이 말은 자기가 하고 있는 말을 더욱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안 하려고 했는데 합니다.”그러다 보니까 싸움이 벌어진다. 형의 입장에서는 “너는 그럼 뭐했냐? 너는 한번이라도 와 봤냐?” 이런 식으로 된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는 씻어질 수 없다. 씻어질 수 없기 때문에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씻는 일은 섬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먹여주고 씻어주고 이렇게 해야만 유기적인 연합이 되고 교통이 되지 먹여주고 씻겨주는 것이 없으면 유기적인 연합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허물을 까발려 놓으면 뭐 되는 것이 있나? 뭐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의만 상하지 좋아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술 한 잔이 들어가면 왜 그런지 모르겠다. 술 먹고 하는 것은 평소 생각이고 본심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 먹고 하는 것은 “에이 술 먹어서 그래!”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술 먹고 하는 것이 본심이다. 술먹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말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일부러 술 한잔 마시고 와서 대드는 것이다. 술기운에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은 결국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고 시시비비를 가리므로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다.
우리의 섬김은 씻어주는 것이다. ‘순 섬김이 하는 사람들은 씻어주는 사람들이다’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순 섬김이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하기 때문에 다 씻어주는 섬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주신 교훈은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본을 보였으니까 너희도 서로 씻기는 것이 옳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서 이렇게 했으니까 너희도 서로 씻기는 것이 옳다. 그러면 복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씻어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 섬기는 사람이 언제나 복이 있는 것이다.
3/3. 가롯 유다는 떡을 먹고도 세상으로 나감
주님은 씻어주시고 먹여 주셨다. 요한은 가롯 유다에게 주님이 특별히 떡을 포도주에 찍어 주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떡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예수를 넘겨주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씻어주시고 먹여주셨으나 사단이 벌써 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주님을 팔았다는 것이다.
가롯 유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런 와 중에 특별하게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떡을 떼서 제자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말이 없는 대신 ‘가롯 유다에게 특별히 떡을 줬다’이런 말이 나온다. “찍어 주었다.” 이 말은 포도주에 찍어 줬다는 뜻이다. 한편에서는 포도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견과류인 아몬드를 섞어 소스처럼 만든 거기다가 찍었다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찍어 줬다는 말은 “특별한 손님에게 더 특별한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서 주인이 찍어 준거라는 말이다.” 보통은 그냥 먹는데 그것을 찍어서 줄 경우에는 그렇다는 뜻이다. 포도주에 찍어서 줬는데 가롯 유다는 그 떡을 먹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예수를 넘겨주기 위해서 나갔다. “씻어주고 먹여 주었지만 사단이 벌써 그 마음에 들어가서 주님을 팔았다” 이렇게 요한은 얘기하고 있다. 특별히 사랑과 존경을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기를 팔 것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유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시했던 것이다. 혹시나 하고 유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안 하는 것을 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서 바로 나갔다는 것이다.
사단에게 점유된 사람은 은혜를 헛되이 할 뿐 아니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이 달라지고 목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표와 입장에서 이탈함으로써 모든 것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마다 자기 목적대로 오용했으며, 자기 소원대로 목표를 세워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가 되었다.
왜 그런가 하면 사탄에게 점유된 사람은 은혜를 헛되게 할 뿐만 아니라 욕되게 한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주어도 좋게 안 되고 주는 것마다 더 나쁘게 해석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표와 입장에서 이탈했는데 그것만 이탈된 것이 아니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다 이탈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마다 다 자기 목적대로 오용하고 그리고 자기 소원대로 목표를 세워가지고 하는 일이 전부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만 했다. 길이 한번 틀어지고 나니까, 위치가 틀어지고 나니까 자기는 잘하려고 해도 안되고 다른 길로 가고 만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떡을 떼어서 포도주에 적셔 주니까 그때 ‘아! 내가 지금 잘못 생각했구나’ 이렇게 돌아 설 줄로 알았는데 반대로 ‘알고 있구나. 벌써 알고 있구나. 아! 벌써 눈치 다 챘구나! 아! 내 정체가 이제 폭로 됐구나. 나를 이미 예수께서 알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을 받고 바로 나갔다 빨리 결행했다. 내 생각은 그렇다. 그것을 줬는데 바로 밖으로 나갔다고 써있다. 그러니까 딱 받자마자 ‘아! 알고 있구나’ 그래 알고 있으니까 “잘못했습니다” 하면 될껀데 ‘알고 있구나’ 그러니까 밖으로 나갔다. 이런 경우가 많다.
그럴 때가 참 중요한 때인데 그 때 “아!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왔으면 좋은데 딱 어긋나서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아! 알고 있구나. 이제 끝장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수가 있는데 그러면 이제 더 나빠진다. 그래서 성경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까 또 끝까지 배신하게 된다. 모르지만 그 날 차라리 예수님께서 그냥 모른 체하고 그냥 놓아뒀으면 바로 안 나가고 며칠 후에 나갔을지 모르겠는데 떡을 찍어주니까 바로 나갔다.
동산을 지킬 자가 바벨을 건설했고, 성막을 건축할 자가 자신의 국고성을 건축하는 데 하나님의 백성까지 동원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까지도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제국을 소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롯 유다의 배신이 나온 것이다.
동산을 지킬 자가 바벨을 건설했다. 성막을 건축할 자가 자기의 국고성을 건축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까지 동원했다. 근데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택함 받은 이스라엘까지도 하나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의 제국을 소망했다. ‘우리도 바벨로니아처럼 메데파사처럼 우리도 희랍처럼 로마처럼 이런 나라가 되어야 된다’는 것만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롯유다의 배신이 나온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가롯유다도 그 중에 한사람 이었다. 물론 제자들도 처음에는 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왔다. 오기는 왔는데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는 하지 않았는데 가롯유다는 여기서 그런 적극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인 그 나라의 회복, 즉 제국의 영광을 소망하다가, 결국 백약이 무효여서 주님을 팔기에 이른 것이다. 후에 사도들은 그가 불의의 삯을 받았다고 했으나 돈이 욕심나서 주님을 팔았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은 세상 영광을 바라다가 주님을 판 것이다. 돈은 세상을 대표한다.
그래서 제국을 소망하다가 예수를 보니까 ‘틀렸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될 것 같지 않고 이러고 있다가는 자기만 당할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예수가 만일 실패해버리면 자기들도 다 실패자가 될 것이니까 그 실패를 안 하려면 뭔가 내가 도망가던지 해야 할 것이다.
아주 머리가 좋고 영리한 사람 같다. 금고를 맡았다니까 상당히 신용도 있는 사람이고 우리가 볼 때 그렇지 않은가? 금고라 봐야 돈이 얼마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대를 맡은 사람이니까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시시한 제자가 아니었다. 자기대로는 똑똑한 사람이다. 똑똑하니까 뭘 생각하겠는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생각한다. 멍청하고 고기나 잡던 사람들 같으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할 수 있지만 조금 잘난 사람 같으면 자기 장래가 걱정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계산하다가 결국은 제국의 영광을 소망하다가 예수께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썼지만 백약이 무효가 됐다. 그래서 주님을 팔기에 이르렀다.
그 후에 사도들은 “그가 불의의 삯을 받고 예수를 지로(指路)했다”라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다. 지로했다는 말은 예수 죽이는 길을 인도해 줬다는 말이다. “불의의 삯을 받았다.” 라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은 돈 욕심이 나서 그랬다. 라고 얘기한다. 돈 때문에 예수를 팔았다.
그는 은 30냥이 탐이 났던 것이 아니다. 돈 뒤에 있는 세상이 탐이 났던 것이다. 은이 탐이 났다면 왜 그 은을 성전 금고에 반납하고 자결했겠는가? 그는 자기목적에 따라 예수님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를 따르다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것 같지 않다. 내 생각인데 은 30냥은 당시에 노예 한사람의 몸값이라고 한다. 적은 돈은 아니겠지 만은 그러나 3년간이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닌 사람이 은 30냥 때문에 선생을 팔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저질이었겠느냐.
돈 3만원에 운전사를 죽인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니까. 운전사 죽이고 털어보니까 돈 3만원밖에 없었다. 이것은 3만원 때문에 죽인 것이다. 오래된 일인데 그런 일이 대구에서 있었다. 이런 일이 가끔 있기는 있다. 있지만은 자기가 3년이나 친하게 따라다닌 사람이 은 30냥 때문에 선생을 팔아 넘기겠냐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저질이겠는가? 세상에는 저질도 많지만 이런 저질은 없을 거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팔았는가? 세상의 영광을 바라다가 주님을 판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다른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몆권 열람해 보니까 다 돈 때문에 팔았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아니고 불의의 삯을 받았다고 베드로가 말했는가? 돈과 세상은 같은 말이다. 내 생각인데 그 때 당시에 로마 정부와 관계된 일,이스라엘 독립과 관계된 일, 이런 일은 말을 못할 때다. ‘저 사람이 이스라엘 독립을 위한 것 때문이다’이렇게 말 못할 때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겠나’라고 나대로 생각해본다. 하여간 돈때문에 판 것은 아니다.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면 그가 좌우간에 그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예측대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삼년간 따르던 스승만 죽음에 넘겨지고 말았다. 그래서 돈을 다시 반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고 세상의 영광만 좇던 인류를 대표해서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분명히 그 사람은 세상의 영광을 바라다가 결국 선생을 판 것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따르다가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 않으니까 예수의 메시아되심을 시험한 것이다. ‘이 사람이 과연 메시아가 될 것인지! 과연 우리를 구원 할 자인지! 과연 이스라엘을 구원 할 자인지! 과연 이 사람을 따라가면 영달할 것인지! 궁지에 몰아 놓으면 좌우간 어떤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막판에 결과를 보자’막판에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자기의 예측대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3년간 따르던 스승만 죽음으로 넘겨 주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돈을 다시 성전고에 던져 버리고(반납하고)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돈이 만일 탐이 났더라면 돈을 가지고 도먕치지 돈을 갖다가 던져 버리겠나? 자기는 그럴 줄 모르고 예수를 넘겨주면 뭔가 거기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든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든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고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라다녀 본 결과 그 분이 행하신 일을 볼 때 그냥 그렇게 허망하게 붙잡혀 가서 죽는다는 생각이 안된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자기생각과 정반대로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돈을 던져버리고 목숨을 끊었다.
그 돈을 제사장들은 받아다가 이 돈이 성전고에 넣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래서 나그네를 위한 밭을 샀는데 그것을 ‘피밭’으로 했다. 결국 그 돈은 나그네를 위한 밭인 피값으로 지불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고 세상의 영광을 좇던 인류의 대표로 저지른 일이다.
꼭 가롯유다 한 사람만 그런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본다. ‘예수 믿으면 뭐 되나? 예수믿으면 진급 잘하나? 예수 믿으면 영달하나? 예수믿으면 만사형통하나? 예수믿으면 남보다 잘 사나?’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하는데 내가 생각 할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 안 믿어도 잘 되는 사람 많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 세상에서 출세한다든지 영달하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하나님이 그거 도와 줘서 영달하고 이러면 하나님 안 믿을 사람 다 망한다. 이병철씨가 하나님 잘 믿어서 그렇게 되었나? 정주영씨가 하나님 믿어서 저렇게 되었나? 그렇다고 하나님 열심히 믿는 사람이 다 잘 되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예수 믿어서 예수 따른다고 해서 세상의 영광이 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이 점점 분명해져 간다. 옛날에 비해 가지고 어두웠던 시절에는 그럴 거 같은 생각이 더러 있었지만 점점 시대가 밝아질수록 ‘예수 믿어서 잘된다’ 이것은 없다.
‘잘된다’는 말은 세상적이다. 세상에서 영달(榮達)했다 이말이다. 우리가 그런 꿈을 꿨다가는 가롯유다처럼 된다. 우리는 다른 것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된다. 내가 사람되기 위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으니 삼중 축복이니 오중 축복이니 그것은 가롯 유다가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렇게 하다가 안되보면 정말 내가 열심히 충성을 다하고 했는데 불의의 사고가 자기집에 나가지고 환란이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봐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버렸는가’ 의심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가롯 유다는 그냥 혼자 가롯 유다가 아니고 세상영광을 좇는 인류의 대표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대표자가 예수라면 그 대표자를 죽인 자가 가롯 유다이다.
가롯 유다는 세상의 영광을 바라던 인류의 대표자이다.
가인이 그렇지 않은가?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인정을 받으려고 갔다가 안 되니까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을 죽인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똑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세상영광을 바라고 예수를 믿어서는 안 된다. 세상영광을 성취하려면 내가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보다 더 열심히 해서 영광을 성취한 사람들을 당연히 존경해야한다. 왜? 나보다 더 열심히 해서 된 것이니까.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이 해준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해준다고 생각하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 예수가 분명히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안 되어 버리니까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물위로 걸어가는 것을 보니까 ‘이 사람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이는 것을 보니까 ‘되겠구나’ 생각했다. 바람을 잠잠케 하는 것을 보고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러니 실망이 얼마나 컸겠는가.
가롯 유다는 뭐하던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데 대부분의 제자들은 갈릴리의 어부들이었다. 어부들이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가졌던 청운(靑雲)의 꿈은 대단한 것이었다. 바닷가에서 고기만 잡던 사람들이 새로운 정부의 장관이 된다. 야~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은 고기 잡던 사람이었으니까 사실은 밑져야 본전이다. 별로 손해난 것도 없다. 자기들은 생각할 때 3년 손해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3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아봤자 얼마나 잡았겠는가? 별로 밑진 것도 없고 손해 본 것도 없다. 그러니 또 갈릴리로 가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가롯 유다는 어부가 아니고 좀 다른 사람 같다. 자기 나름대로 출셋길이 있던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랬으니까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세상 영광을 좇던 인류의 대표자이다. 절대로 은 30냥 때문에 배신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은30냥 때문에 예수를 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영광 때문에 예수를 팔 사람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우리도 여기서 중요한 지로(指路)가 있다. 내가 세상영광을 좇는다면 예수는 실망을 줄 것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좇는다면 예수는 우리에게 갈수록 소망이요 능력이 될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우리가 살아서 보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주님 어디로 가시던지 그 길이 영광으로 가는 길인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주께서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이 길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순수한 찬양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