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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여름집회
천국과 하나님 나라
5. 천국이 자라고 확장됨(겨자씨와 누룩)
<마태복음 13장 31절~33절>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오늘은 천국의 확장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오늘까지 우리가 여행한 그 천국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여러분이 보셨고, 어떻게 그것이 확장되는가를 보는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한쪽에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쪽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는 왜 그런가? ‘풀’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풀이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이상 성장을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교회가 국교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입장에서는 아주 부정적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작지만 생명력에 의해서 커진 것이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본다.
이 겨자씨와 겨자나무에 대해서 책을 찾아보아도 두 가지가 있다. 1년생 풀이라고 말하는 곳도 있고, 다년생 나무라서 3m 이상 자란다고 되어 있는 곳도 있다. 3m 이상 자라는 나무라고 생각한다면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맞고, 풀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맞다. 오늘 나는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면으로 보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계속 그런 입장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려왔다.
누룩도 마찬가진데, 이것이 한편으로 보면 부패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 보면 부풀게 해서 맛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누룩은 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괴악한 누룩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인가? 누룩 없는 자다. 무교병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냥 그것 자체만 본다면 부패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아까 겨자씨 모양으로 작은 것이지만 전체를 부풀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긍정적인 면으로 보기도, 어느 것이 꼭 맞다 안 맞다 하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보아도 교회사를 보면 그것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보면 다른 면으로도 맞을 수 있다. 그래서 긍정적인 면으로 보기로 하겠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낮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인격을 무시했다. 왜? 너무나 작은 것이니까. 위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인격을 왜 사람에게 주었는가? 이 무시할 수밖에 없어도 이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라나면 천사들도 수종을 든다.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천사들은 단지 이 아들을 위해서 부리는 영에 불과하다고 되어 있다. 겨자씨와 천사를 비교하면, 다시 말하면 인격과 천사를 비교하면, 인격은 너무나 작은 것이고, 천사는 너무나 위대한 것이다. 하나님과 방불하니까 위대하다. 그런데 결국은 이 인격은 자란다. 천사는 자랄 수가 없다. 그런데 인격은 자랄 수가 있다. 자라면 그 다음에는 그 천사들이 오히려 수종을 든다. 천사들은 이 아들을 수종 들기 위해서 섬기라고 지음을 받은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겨자씨는 작은 인격이지만, 우리가 무시하고 천사들이 무시하는 인격이지만 아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알면 천국이다. 인격은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흙+생기=산혼’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알면 절망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릇이 된다. 이러면 희망이 생긴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릇은 이것밖에 없다. 그럴 때 이것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흙+생기’인 그 사람이다. 천사가 무시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다. 나도 내 자신을 볼 때 무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부여하신 그 인격은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내 인생이 만족한다. 나는 그래서 만족한다. 내가 만족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처럼 큰 능력이 있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 타고 났다고 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이 나쁘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은 아주 귀한 것이다. 이것은 천사도 흠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천사가 전혀 부럽지 않다.
세상의 모든 종교나 사람을 보면 종교인들은 종교적으로 천사를 흠모하고 있고, 그냥 비종교인들은 비종교적인 면으로 천사를 흠모하고 있다. 다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과학은 과학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그 연약한 인간을 극복하는, 연약한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가 다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저것은 신이라고 말한다. 예수님도 물 위로 걸어가시니까 바람을 잔잔케 하시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했는가? “저가 누구길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고”라고 했다. 저것은 신이 아닌가하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을 보면 다 몰려가게 되어 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은 똥파리 한 마리만 살려내도 여러분이 놀라지 않겠는가? 저가 누구길래 죽은 똥파리를 살려낸다고 하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온 대한민국에 퍼지고 전 세계에 퍼져서 사방에서 날 찾아올 것이다. 틀림없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니까 “저가 누구길래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고”라는 말은 저 사람은 신이라는 말이다. 신이 내려왔구나.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저기를 따라가면 무엇이 있겠다. 저기에 가서 구하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고 싶지 않겠는가. 가면 무엇이든지 될 것 같다. 내가 못한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것,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다 구하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종교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만들어놓지 않고 ‘흙+생기’로 만들어 놓았는가? 천사만 못하게 만들어 놓았는가?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잠시 동안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심으로~”라고 말했다. 창세기 1장에서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두 번째 가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놓고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그 누군가가 땅을 유린했다는 것이다. 땅을 유린한 것은 누구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군단에서 이탈한 천사들이라는 것이다. 악령들인데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사탄이라는 것이다. 사탄이 온 땅을 다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늘은 어찌할 수 없지만 땅은 자기가 어찌할 수 있으니까 땅을 다 덮어버렸다. 그것을 큰물로 표현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니 앉을 자리가 도저히 없다. 이것은 오늘 인류를 가리켜 말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이 내려와 보니까 앉을 데가 아무데도 없다. 인간이라고 생긴 것은 다 똑같이 바다에 잠겨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너풀거리더라. 앉을 자리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 현상이 그러니까.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천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스겔서 28장에 보면 그런 암시가 보여지고 있다. 네가 태어난 날이 너무너무 영광스럽고, 네가 태어날 때 너무나 영광스럽게 태어났다. 그랬더니 네가 교만하여졌다고 말한다. 두로 왕, 시돈에 대해 빗대어 말하지만 사실은 너는 사탄이다. 너는 광명의 천사였다. 그렇지만 너는 너무 높은 자리였기 때문에 너무 교만하여져서 거역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천사는 사람보다 월등하게 높은 지위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높은 능력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을 반역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는 천사 같은 것을 만든 것이 아니고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차는 천사를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사는 영물로 만들었지만 사람은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육신이 되는 것이다. 연약한 육신을 가지고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천사들은 무시하게 되고, 천사들은 어쩌면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자기를 무시했다. 하나님이 주신 자기 위치를 무시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을 때 보면,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신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인간의 소원 속에는 못 되어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인간에서 가장 높은 사람, 가장 힘이 센 사람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자기를 신이라고 했다. 고대의 모든 왕들은 자기를 다 신이라고 했다. 바로들은 다들 자기를 신이라고 했다. 바로 같은 사람들은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내가 신이라고 했지만 그 밑에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속으로는 다 똑같다. 누가 바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천황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그렇게 되고 싶다. 결국은 그 사람들의 마지막 소원은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이 말이다.
성경은 너무너무 인간을 아주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 같은 이야기인데 지금 오늘 인류를 하나도 빠짐없이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내가 언제 신이 되려고 했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황제가 한번 되어보라. 황제로 만족하지 않는다. 백성들이 자기를 신이라고 해야 만족하지 황제라고 해서 만족하지는 않는다. 지위가 높아지면 더 높아지고 싶고, 권력이 있으면 더 가지고 싶다. 어디까지? 신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성경 말씀이 하나도 틀린 말씀이 없다.
천사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두 번째 창조를 하실 때, 창세기 1장 3절 이하는 사실은 두 번째 창조다. 엄격하게 말하면 1장 1절만 정말 창조다. 무에서 유다. 그 다음은 다 있는 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창조이다. 우리 인간은 두 번째 창조에서 태어났다. 첫 번째 창조의 정점은 천사였다. 두 번째 창조의 정점은 사람이다. 천사와 사람을 비교하면 하나는 아주 위대하고 거창한 존재고, 하나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다. 다른 씨들이 대단히 큰데 겨자씨는 너무너무 적은 씨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이스라엘에 가서 겨자씨를 구해 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손바닥에 놓고 이것이 겨자씨라고 하니까 모두 와서 들여다보는데 너무 작으니까 안 보이지 않겠는가? 가까이 와서 본다는 것이 그만 콧김에 날아가 버렸다. 그만큼 적다.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그렇게 작은 것이다. 그런데 자라서 다른 나무들보다 더 커져서 새들이 와서 깃든다. 3m 이상 자라니까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다.
이 새에 대해서도 생각이 여러 가지이다. 새들은 악한 영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중의 새이기 때문에 악한 영을 상징한다. 이렇게 보면 부정적이다. 하늘의 새들이라고 하면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천사들도 와서 기댄다고 볼 수 있으니까 긍정적이다. 우리는 일단 긍정적인 것을 취해보자.
인격은 무시될 만큼 작은 것이지만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라난다. 자라난 후에는 천사들을 다스린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 천국이다. 나는 왜 황제가 못 되는가? 이런 세계에서 황제가 되어도 어차피 죽으면 그만이야. 바로 그것이 인생이야. 이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 세계 속에서 나는 겨자씨 같이 적은 것이지만 자라면 천사들도 와서 수종 들게 된다. 이것을 알면 그것이 천국이다. 천국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천국 중에서도 아주 깊은 천국이다. 이것이 우리 속에 딱 박히면 우리는 어떤 것도 부러운 것이 없어진다. 아주 깊은 천국이다. 여러분이 지금 들어오고 있는 천국의 아주 깊은 곳이다. 맨 처음에는 문턱에 있었다. 지금은 문턱이 아니다. 아주 깊이 들어와 있다.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위력은 대단하다. 생명이라는 것은 아무도 눈으로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위력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다. 큰 것이 지배하는 줄 알지만 작은 것이 커져서 지배한다.
그리스도를 봅시다. 그는 아주 볼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온 세상이 다 그를 버렸다. 만약 그 사람이 그래도 동장이라도 할 만한 사람이었으면 십자가에서 처형을 할 때 동민들이 나서서라도 반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도 그것을 옹호해 줄 사람이 없다. 변호해 줄 사람이 없다. 저 사람을 왜 죽이냐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얼마나 보잘 것이 없었으면 그랬겠는가? 6.25 때 내가 그런 일을 직접 목격했다. 섬에 사니까 전쟁 때 경찰이 다 철수했다. 그래서 무법지대가 되었다. 그런데 군에서 이런 기회에 각 섬을 순회해보면 누가 빨갱이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민군으로 위장해서 배를 타고 들어오는데 인공기를 달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을 쳤다. 도망을 치는데 뒤에 알고 보니까 경찰이었다. 경찰이라고 내려오라고 하니까 다 내려왔는데, 두 사람이 끝까지 도망을 쳤다. 이 두 사람이 붙잡혔다. 고문을 해서 바닷가에 총살을 시키려고 세웠다. 맨 처음 사람을 내놓고, 이 사람을 누가 보증할 사람이 있냐고 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나오더니 내가 보증하겠다고 하여 살렸다. 또 한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친구의 형이었으니까 그때 아마 21살~22살 정도였을 것이다. 이 사람을 보증할 사람이 있냐고 하니까 아무도 안 나왔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면 어렸지만 그때 내가 일어나서 저 사람을 내가 보증하겠다고 했으면 사는 것인데 그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못했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었겠느냐 만은 첫 번째 사람은 그래도 조금은 지위가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니까 보증하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그때는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냥 죽는 것이고, 살리면 그냥 사는 것이다. 지금처럼 재판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냥 즉석에서 총살을 시키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총살을 시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만일 이름이 있었더라면 누가 한 사람이라도 변호사가 있었을 것 아닌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었다. 우리 동네에 아무도 친척이 없었다. 처음에 살려준 사람은 그 사람이 고씨인데 보호자로 나서겠다고 한 사람도 고씨다. 같은 고씨다. 같은 친척만 있었더라도 내가 저 사람을 보증한다고 했을 것이다. 사실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 빨갱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고 끝까지 도망을 쳤는지 모르겠다. 내려오라고 그렇게 해도 안 내려오고 도망을 치는 것이다. 겁에 질려서 그랬을 것이다. 친척도 없고 지위도 없으니까 아무도 그 사람을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자리에서 죽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거기에 누군가 그래도 변호할 사람이 있었더라면 다시 재고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다. 얼마나 그는 보잘 것 없었던가? 볼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우리가 다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회의 주요, 만유의 주고 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세상의 비밀이다. 그 적은 겨자씨가 3m까지 자라는 나무가 된다는 것도 비밀이고, 조그마한 누룩이 온 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도 비밀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비밀이니까 누가 알 수 있지만 십자가에 죽을 때 아무도 변호해주질 않았던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구속자가 되고 우리 모든 인류의 대표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면 바로 천국이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 아닌가! 자기를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자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내가 비록 작지만 하나님을 표현할 수가 있다. 그러면 달라지는 것이다. 천국이 다른 것인가? 그것이 천국이다. 나는 비록 흙이지만 나는 비록 생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다른 것은 못하지만 다른 능력은 없지만 내가 하나님은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 마음은 가질 수 있다. 하나님 마음으로 살 수는 있다. 내가 하나님 마음으로 누구를 사랑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 마음으로 누구를 살펴볼 수 있다. 내가 하나님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다. 이것은 돈 안 드는 일이다. 왜? 내가 내 마음을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회의하지 않고 나 혼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돈 들여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보다 쉬운 일이 없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의 마음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내 마음 바꾸는 것은 쉽다.
우리가 만일 이 진리를 알게 된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구나. 이렇게 쓸려고 만들어 놓았구나. 나는 거기에 쓸려고 부름 받았구나. 이것을 알면 바로 천국이다. 천국이 따로 없다. 세상은 거대하고 위대한 것을 기대한다. 거대해지고 위대해지려고 한다. 이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사탄은 말했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결국 무엇이 되었는가? 바벨탑으로 갔다.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던 그것이 결국 바벨탑이 되었다. 바벨론이 되었다. 인간 문명이 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바벨론은 정점을 이루는 나라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맨 먼저 바벨론이 등장하게 된다. 가장 영광스러웠던 나라니까. 바벨론은 얼마 못가서 망했다. 그 다음에 페르시아가 또 등장했다. 그 다음에 희랍이 등장하고 그 다음에 로마가 등장한다. 계속 강한 자가 나오면 또 그보다 더 강한 자가 나오고 또 그보다 강한 자가 나와서 계속 엎어버리고 또 새로 만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제국은 계속해서 바꾸어져 왔다. 위대한 것을 바라지만 그 위대한 것 밑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려졌고, 얼마나 사람을 못살게 만들었는가? 그렇게 하고 제왕이 되는 것이다. 지금 대통령 되는 것은 제왕이 아니니까 선거를 하지만 옛날에는 왕이 되려면 전쟁에서 이겨야 된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왕이 되는가. 한 사람의 왕이 탄생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한다. 통일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그런데 그것이 얼마 못가서 후삼국으로 다시 갈라져 버린다. 갈라져서 또 다시 통일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는가.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 만리장성을 놓고 인간이 만든 조형물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한다. 달나라에 가서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엠파이어 빌딩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오직 만리장성만 보인다고 한다.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겠는가? 지금도 불가사의라고 한다. 그렇게 큰 돌을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불가사의다. 수십 명, 수백 명이 달려들어서 그 돌을 움직였을 것 아닌가. 그러다가 넘어지면 깔려죽고 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가 있다. 정말 그 시대에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공사를 해 놓았을까 싶다. 교각이 없는 다리니까. 그런데 거기에 이렇게 저렇게 만들었다고 기념비가 써있다. 내 옆에 있던 중국인이 하는 말이 우리는 이것을 보면 비참함을 느낀다고 한다. 중국인 노동자들이 이것을 만들었는데 수없이 죽은 것이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을 때가 아니니까 잘못하여 떨어지면 죽는 것이다. 거기서 떨어지면 밑에는 식인상어가 우글거리기 때문에 내려가자마자 고기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좋다고 감탄하고 대단하다고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는 비참하다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것 뒤에는 속임수다. 위대하다, 찬란하다는 것 뒤에는 반드시 슬픔과 비애가 그 안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를 보면 그렇지 않다. 아주 작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크다. 누구를 잡아먹고 크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기 때문에 크다. 그래서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커져서 하늘의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 성경에는 처음은 미미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했다.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대제국이었는가? 그렇지 않고 중동에서 지극히 적은 나라였다. 지극히 적은 나라를 택했다. 야곱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는가? “이 지렁이 같은 야곱아”라고 했다. 아무에게나 밟힐 수밖에 없는 것이 지렁이다. 햇빛에 나오면 꾸물거리다가 말라서 죽어버리는 것이 지렁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택했다. 왜 그랬는가? 겨자씨 같으니까.
겨자씨의 원리를 우리가 잘 생각하고 여기서 깨달음이 있게 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위대해 보았자 사실은 별 것도 아니지만,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표현할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천국이다. 멀리 갈 것이 없다. 오늘 저녁이 천국이다. 더 이상 생각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더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니까. 눈에 보일랑 말랑하는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된다.
인격은 바로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말이고, 바로 땅 위에서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이다.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히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라고 까지 말했다.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이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본체의 형상이고 영광의 광체시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실제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신성이 있고 인성이 있어야 되고 그런 것은 할 필요 없다. 진짜로 보면 사람이라도 하나님일 수가 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추구하다 보니까 신성이 있느니 없느니 생각하는 것이다. 반신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신이냐 인간이냐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 교리적인 생각이 없었는데, 다만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만 참 하나님이시라고 말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교리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가 있는가?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갈 수가 있다. 비록 적은 것이지만 이 사람 이 사람이 아니고, 인격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신 그 격이 그렇다는 것이다.
인격을 깨닫게 되면 바로 그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깨닫는 것이다. 천국은 어디로 가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지점에 가면 천국인 것이 아니고, 깨eke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현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바로 천국이다.
작지만 이것은 생명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천국이다. 우리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작았다.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그때 돈으로 한 달에 헌금 만원도 안 나왔다. 그러면 전기요금 전화요금 내면 딱 맞다. 아무것도 없다. 내가 원래 헌금을 잘 거두는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시골에서 와서 하숙하고 자취하는 학생들뿐이었다. 부잣집 아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돈이 나올 데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무시했다. 저것들이 저러다가 말겠지. 학생들 몇 명이 무엇을 하겠냐고 생각했다. 우리도 그것이 큰 나무가 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은 나무가 생명이다. 생명은 자란다. 커도 생명 아닌 것은 안 자라고 작아도 생명은 자란다고 했다. 그러니까 생명이 자란다. 우리가 인위적인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공장에서 물건 만들듯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사업적으로 경영해서 교회가 커진 것이 아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그냥 자란 교회이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다 아신다. 무슨 방법으로 기술로 사업으로 된 교회가 아니다. 아무것도 우리 교회에 없다. 방법도 없고 기술도 없고 사업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는 의식도 하나도 없다. 어떻게 교회가 되겠는가? 교회가 안 된다. 이것은 생명이 아니면 자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이 전혀 없으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제가 원래 그런 방법을 잘 못하지만, 할 줄도 모르고 하기 힘들기도 하다.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은 그런 방법은 주시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것을 잘하는 사람은 정말 잘한다. 일선에 가보면 일 잘하는 사람이 정말 많다. 기획력 좋고 일 잘하고 추진력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나도 해보고 싶었는데 안 된다. 소질이 없다. 소질이 없는 것이 축복이 되었다. 나도 그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 아닌가. CCC 가니까 좋은 방법이 많다. 선교단체에 가니까 정말 좋은 방법이 많다. 그런 것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서 그런 것을 활용해서 목회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도무지 하려고 하면 잘 안 된다. 뭔가 이상하다. 내가 억지로 힘을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못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못한 것이 나에게 복이 되었다.
생명 아니면 안 된다. 생명이니까 씨만 뿌리면 자라기는 쉽다. 저절로 그냥 자란다. 씨만 제대로 뿌려놓으면 제대로 자란다. 지나가다 뱉어 놓은 수박씨도 다음 해 돌아오면 길가에 수박이 열린다. 먹다 보면 수박씨나 참외 씨가 그냥 똥으로 나와 버린다. 그것이 떨어진 데를 다음에 보면 참외가 열린다. 생명은 그렇다. 어려운 것이 전혀 없다. 씨만 확실하면 자라는 것이다. 씨 아닌 것을 가지고 만들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이다.
씨는 작지만 그것을 만들기는 너무너무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지를 못하니까 다른 방법을 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그대로 뿌리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대로 뿌리면 그대로 나게 되어 있다. 생명이니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한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하니까 굉장히 위대한 것처럼 알지만 눈에 안 보이신다. 사실은 위대하다고 할 수가 없다. 눈에도 안 보이는데 무엇이 위대한가? 위대하려고 하면 주렁주렁 달고 나와도 위대할까 말까한데 눈에도 안 보이는데 하나님이 무엇이 위대한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
산 혼인 인생! 숨이 코에 붙은 인생! 이것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인격화시킬 수가 있다. 사람처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해낼 수가 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사람되게 하신 분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해서 사람처럼 내놓은 분이다. 이것을 누가 했는가? 아무것도 아닌 산혼이 그렇게 했다.
예수는 죽임 당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 이것을 깨달으면 바로 천국이다. 춘천 형제들은 ‘생명은 자란다!’는 이 한마디를 듣고 왔다. 아무것도 없다. 생명은 자란다. 나는 왜 그 말을 했던가? 세상을 모두 보니까 자라지 않는다. 10년을 다녀도 20년을 다녀도 장로가 되어서 노인이 되어도 자라지 않는다. 신천 미루나무 섬에 가니까 미루나무가 포플라 같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본 대로 말했다. 봐라, 생명이 자라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비유로 말했지만 내가 누구 보고 말한 것인가? 자라지 않는 생명 아닌 것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여러분은 생명 없는 것을 가지고 일한다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당장 돌 맞아 죽을 것 아닌가. 그래서 그 말은 안 하고 ‘보십시오, 생명은 이렇게 자라지 않습니까!’, ‘생명은 자랍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달아서 왔다.
이 사람들이 다음에 성경을 쓰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와서 강변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생명은 자란다고 했다. 아주 간단하다. 만물을 보면 다 자라는데 교회만 이상하게 안자란다. 숫자는 불어나는데 생명은 자라지를 않는다. 개신교가 나온지 500년이 되었다. 500년 동안 똑같다. 죽었으니까 똑같지 살았으면 어떻게 똑같겠는가? 살았으면 무엇이 달라져도 달라지지 어떻게 산 것이 그대로 있겠는가. 천주교는 1000년이 되어도 똑같다. 그래서 이것은 안자라는 것이구나. 자라지 않는 것이구나. 작아도 자라야 된다는 것을 생각했다.
작은 것! 하나님은 위대한 것을 원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을 원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부활을 했다. 이삭을 낳았다는 말은 부활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죽게 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삭이 나왔다. 그것이 부활이다. 이삭은 작지만 창대했다. 가는 곳 마다 밀려다녔지만 밀려난 곳 마다 창대했다. 야곱은 가장 약할 때에 바로를 축복할 수 있었다. 자기 일생에서 가장 약할 때. 이재민이 되어서 빈 자루를 가지고 쌀을 구하러 갔을 때, 거지 신세가 되었을 때, 그때 반대로 세상을 지배하는 바로 앞에 가서 두 번이나 바로를 축복하더라고 되어 있다. 눈이 어두웠으니까 축복하지 뻔히 보고는 못했을 것이다. 바로를 보고서 축복하겠는가? 어림도 없다. 벌벌 떨다가 왔을 것이다. 눈이 어두워서 안 보이니까 훈장을 달고 있는지 칼이 있는지 안 보이니까 바로를 두 번이나 축복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축복하는 법이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할 수가 없다. 거지가 어떻게 왕을 축복하겠는가? 그런데 축복을 했다. 야곱의 일생에 가장 영광스러울 때가 그때였다. 야곱은 부활한 것이다. 야곱은 거기서 부활한 것이다. 모세는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한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야훼를 만났다. ‘나는 ~이다.’이신 하나님을 만났다. 나는 해방자다. 나는 구속자다. 이런 하나님을 만났다. 이것이 모세의 부활이었다. 모세는 80세 때 이미 죽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부활했다. 야훼를 만난 것은 부활한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면서 부활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그 계열에 속하여 있는 모든 사람의 부활을 완성한 것이다. 갑자기 부활이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부활하기 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했다. 왜? 나는 아브라함의 부활이고, 나는 이삭의 부활이고, 나는 야곱의 부활이고, 나는 모세의 부활이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그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렇지만 영원한 실재 안에서는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부활했다. 죽음에서 부활했다. 이 부활이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이 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천국이다.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바로를 축복했구나. 눈이 멀어 안 보이니까 하나님 밖에 없다. 안 보이니까 무서운 줄을 모른다. 으리으리한 왕궁에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으리으리한 것이 안 보인다. 그리고 임금들은 위세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단장을 하는가. 중국의 황제는 지방의 사신들이나 변방의 왕들을 만날 때 아주 높은 계단 위에 있다. 저 밑에 계단 아득하게 보일락 말락 하는 계단 밑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다. 왜? 그만큼 위대하는 뜻이다. 스탈린도 사람을 만날 때는 긴 탁자를 놓고 자기는 이쪽에 앉고, 오는 사람은 저쪽에 앉혀 놓았다. 모택동이 스탈린을 만나러 가는데 3개월 동안인가를 안 만나주었다. 그때 모택동이 아쉬워서 갔다. 자기가 국제 공산주의 하에서 스탈린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공산주의 국가로서 완성이 되겠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갔는데 안 만나준다. 그러나 중국 사람답게, 모택동은 삼국지를 많이 읽었을 것이다. 삼고초려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다린 것이다. 스탈린은 왜 안 만나주는가? 저놈이 나에게 충성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시험하느라고 안 만나주었다. 둘이 겨루기를 하다가 결국은 스탈린이 만나줬는데 들어가니까 저 끝에 입구 쪽에 앉아있으라고 했다. 스탈린은 여기 앉아서 말했다. 그만큼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때 ‘스탈린 대원수’라고 했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전부 소련을 종주국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스탈린을 그 대 국가의 황제처럼, 대원수로 생각했다. ‘스탈린 대원수’였다. 다른 나라의 원수들은 그냥 원수들인데, 스탈린 대원수였다.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은 다 소련을 자기의 조국으로 생각했다. 우리 조국 소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황제가 되면 자기 위세를 그렇게 크게 해야 되는 것이다. 사람이 오면 그냥 벌벌 떨도록, 아무리 무슨 생각을 가지고 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오면 그냥 납작 엎드려 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바로도 그랬을 것이다. 이 야곱은 130세에, 더군다나 환도 뼈가 부러져서 절름발이 되었고, 쌀자루도 하나 메고 갔는데, 그 신세에 그 모양에 감히 어찌 거기에 들어가면서 얼지 않겠는가. 그런데 눈이 멀어서 안 보인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없어져 버렸다.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축복을 했다. 여러분! 그런 지경에 이르거든 눈 딱 감고, 보고도 얼지 않으면 괜찮은데 보고 얼 것 같으면 눈 딱 감고 복음을 전하라. 나는 모르겠다. 네가 훈장을 달았는지 부자인지 교수인지 박사인지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다. 이렇게 하고 복음을 전하라. 야곱이 가장 약할 때였다. 그런데 가장 놀라운 일을 했다. 가장 영광스러운 일을 했다. 이것을 깨달으면 천국이다. 천국을 깨닫는 것은 간단하다. 천국에 가려고 생각하니까 어렵지 천국을 깨달으려고 하면 간단하다.
인생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비록 흙이지만, 비록 흙으로 지어졌지만 하나님을 표현할 수가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천국이다. 인격은 반드시 부활한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인격은, 우리 자신의 위치는 반드시 부활한다. 아브라함은 부활했다. 이삭은 부활했다. 야곱은 부활했고 모세가 부활했고 예수가 부활했다. 이것은 모두 무엇인가? 그 인격이 부활했다는 말이다. 다 없어지고 하나님이 주신 그것만 남았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졌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없어졌다. 그런데 무엇이 남았는가? 하나님이 지어주신 것은 안 없어졌다. 딱 그것만 남았다. 그때 부활했다.
우리도 무엇이 부활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 인격이 부활하는 것이다. 인격은 작다. 그러나 부활은 큰 것이다. 인격에 신성의 성품을, 신의 성품을, 하나님의 품성을 더해 놓으면 바로 그것이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흙에 씨를 넣어놓으면 밭이 된다. 마찬가지로 흙인 인생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놓으면 부활생명이 된다. 그때 우리도 “나는 부활이요, 나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인격에 생명나무를 넣으면 부활생명이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이 생명나무를 안 먹었기 때문에 부활생명이 안 되게 되었다.
이제는 이 인격에 부활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넣으면 우리는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바로 천국이다. 인격 천국이다. 이것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장차도 있을 것이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구경할 수 있다. 날마다 볼 수 있다. 날마다 느낄 수 있다. 날마다 누릴 수가 있다. 내 스스로에게서 그것이 표현될 수가 있다. 아무데도 볼 수가 없으면 자기가 표현하면 된다.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편리한 천국이 어디 있는가!
우리 모두가 다 천국이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 나라에 가면 전부 이런 사람들뿐이다. 천국에 가면 훈장 달고 다니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거기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 겨자씨가 돌아다닌다. 모르는 사람이 와서 보면 불면 날아가겠구나 하는 겨자씨만 있다. 그런데 그것이 부활생명으로 나타나면, 거기서 하나님이 나타난다. 이것을 깨달으면 천국이다. 천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에 있다.
좋은 밭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다.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산을 보고 깨닫고 물을 보고 깨닫고 바다를 보고 깨닫는 것이다. 내 인격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내 인격을 못 보겠으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면 된다. 그것이 내 인격이다. 그것이 참 인격이다. 그 인격을 보고 깨달으면 천국이다. 거기 있는 것이 말씀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 예수는 말씀이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보고 깨달으면 천국이다. 말씀이 꼭 말로 해서만 말씀인 것이 아니고, 산도 말씀이고 바다도 말씀이고 돌도 말씀이고 소나무도 말씀이고 다 말씀이다.
보고 듣고 깨달으면 천국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복이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깨달으면 천국이니까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들을 귀가 있어서 여기 왔다. 옛날에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너희 보는 이것을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고 너희 보는 이것을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기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자리에 와 있는가! 그 기라성 같은 선지자들도 아직 못 보던 것을 듣고 싶었는데 못 듣던 것을 보고 싶었는데 못 보던 것을 지금 듣고 지금 보고 있다. 그 사람들은 그때 이런 말씀을 못 들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듣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서 지금 그 다리 때문에 여기에 왔지만 그 사람들은 아직 그것을 못 누려보았다. 못 누려보았던 것을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 쉬워질 것이다. 누가 이것을 더 쉽게 번역하고 더 쉽게 번역하면 점점 듣는 사람들이 더 쉬워지게 될 것이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너희 보는 것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우리는 지금 천국에 와있고, 천국을 보고 있고, 천국을 듣고 있고, 천국을 깨닫고 있다. 다 보고 있다. 다 듣고 있다. 이제 깨닫는 사람만 필요하다. 없어서가 아니다. 있는데 못 깨달아서 그렇다. 산이 언제 없는가? 산이 항상 있다. 우리가 자도 있고 일어나도 있고 낮에도 있고 밤에도 있고 비가 와도 있고 바람이 불어도 있고 산은 항상 있다. 그런데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는 것이다.
도가 사람을 떠났고 도가 사람을 멀리하고 도가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산이 속세를 떠났다. 이렇게 해서 속리산이라고 한다. 너무 안 맞아서 떠나버렸다. 산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도는 아무리 사람에게 가서 말씀해도 못 알아듣는다. 그래서 사람은 떠나버렸다. 산은 사람에게 아무리 보여줘도 못 깨닫는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버렸다. 그래서 속리산이다.
우리는 속리산에 와서 선지자와 의인들이 보고 싶었던 것을 보고 있고 듣고 싶었던 것을 지금 듣고 있다.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것은 시시한 일이 아니다. 어디에 다 있는 줄 아는가? 그렇지 않다. 가보아도 들을 데가 없다. 오늘 못 들으면 못 듣는다. 속리산에서 못 들으면 못 듣는다. 우리 연희동 형제들이 어떻게 이렇게 가사를 잘 지었는지 모르겠다. 가슴에는 하나 가득 교회뿐이네. 어떻게 이렇게 가사를 잘 지었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여름집회 주제가는 연희동 교회에서 맡아주면 좋겠다. 나와 마음이 딱 맞았다.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더니 내 마음에 딱 맞게 지었다.
천국은 여기에 있다.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에 있다. 나한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다. 속리산에도 있다. 금강산에만 꼭 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속리산에도 있으니까 굳이 총알 피해가면서 금강산까지 갈 필요가 없다. 위험한 데 왜 갔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천천히 보면 될 것을 가지고 성급해서 난리를 치더니 총 맞아 죽으니까 북한에서는 모른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북한은 국제 재판소도 소용없고 아무 소용없다. 우리는 모른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공산주의 국가가 무서운 것이 그것이다. 세계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 나는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고, 안 했다고 하면 그만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하면 그만이다. 항의하려고 해도 할 데도 없고, 뭐라고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방법이 없다. 그런데 왜 거기를 갔는지 모르겠다. 돈이 남아서 쓸 데가 없으니까 갖다 주는 것이다. 속리산만 와도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가! 속리산 집회에 오니까 천국이 있는데 금강산을 왜 가겠는가!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선지자들이 보고 싶고 의인들이 보고 싶은 것을 우리가 보게 해 주시고 그들이 듣고 싶었던 것을 우리에게 듣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그들보다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우리가 더 약해서 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지렁이 같은 야곱을 택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택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은 모든 것을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게 해주시기를 원하고 당신의 하신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교회를 보고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구나. 천국이 여기 있구나. 그렇게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좋은 밭처럼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60배 100배 1000배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