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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세 | 파 | 인 명(자, 호) | 이력, 주요 직책 |
18 | Ⅰ-2 응교 | 정각(鄭珏) 중옥(重玉) (1765~1812)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글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아 동리에서 칭송하였다
孝友文學見稱鄕中 |
18 | Ⅰ-2 응교 | 정완(鄭垸) 명여(明汝) 여사재(如事齋) (1764~1847) | 글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아 명성이 관과 동리에 자자하였다
文學行誼名冠一鄕, 향년 84세 졸 |
18 | Ⅰ-2 응교 | 정은(鄭垠) 사간(士艮) 죽서(竹棲) (1759~1830) | 태어나서부터 영특하여 7세에 문장을 잘 지었다. 경치에 대한 시를 짓기를,
“풀 돋고 봄기운 따뜻하니 꽃이 만발하였네! 빗소리 그치니 삼년은 족하리“ 하며 연달아 한 구절을 완성하였다 3세에 이러한 문장을 지었다고는 어른이 생각할 수 없었다. 스승의 칭찬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장성하여 경서와 역사에 박학하고 문장이 호한(넓고 큼)이었으며 책(책략)에 관한 한 최고였다.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매우 애석해하였다. 유고 1권이 있다
生而穎悟 七歲能屬文 吟卽景曰 草生春氣暖花發 雨聲疎後三年足 成下聯曰一句經 三歲文章覺不於長 師稱詡藉甚 及長博涉經史文章浩汗尤長於策 屢度發解而畸名未第 論者惜之 遺稿一券 |
18 | Ⅰ-2 응교 | 정기(鄭琦) 경현(敬賢) (1816~1858) | 예법을 스스로 배웠고 글이 뛰어나고 행의가 높아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별세하였다
禮律自修文行著譽遠近來學 不幸早世 |
18 | Ⅰ-3 지평 | 정한필(鄭漢珌) 덕원(德源) 회곡(悔谷) (1858~1916) | 장릉참봉(章陵參奉)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가 우애가 깊었으며 덕행이 높아 행리에서 존경받았다. 족손 월파 정시림이 호기를 쓰고, 조카 준석이 가장을 쓰고, 사위 이병구가 행장을 썼다 孝友德行鄕里推重 族孫 月波 時林撰 號記, 姪 晙錫述家狀, 外甥 李炳龜撰 行狀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章陵 :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元宗)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具氏)의 능 |
18 | Ⅰ-3 지평 | 정굉필(鄭宏珌) 덕빈(德彬) 현재(弦齋) (1851~1872) | 학고 나병식에게 배웠으며 철종 신해년(1851년) 문장과 서필이 뛰어나 일찍부터 중망을 얻었다. 고종 임신년에 졸하니, 고두진 공이 만사에 쓰기를 “높은 재능을 지녀 비록 일찍 이름 높았으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애석해라 충효지사여! 어찌 홀연히 떠나시는가!” 하였다
鶴臯羅秉植門人 哲宗辛亥(1851년) 文詞筆翰早負重望 高宗壬申(1872년)卒 高公㪷鎭 輓曰 “高才雖早挺 大志未曾伸 可惜忠孝士 忽何藏閹塵” |
18 | Ⅰ-3 지평 | 정치필(鄭致珌) 국보(國甫) (1851~1897) | 기개와 도량이 엄하고 바르며 글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氣宇嚴正文學純篤 |
18 | Ⅰ-3 지평 | 정재필(鄭宰珌) 국현(國賢) 효우당(孝友堂) (1859~1895)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과 행실이 세상에 알려졌으며 주위사람을 도와 본인 일처럼 남을 대하였다
資品聰敏文行名世 濟施動靜推己及人 |
18 | Ⅰ-3 지평 | 정형필(鄭泂珌) 여숙(余淑) 만회재(晩悔齋) (1861~1912) | 선함을 추구하며 사람을 사귀었다. 매사에 의를 따르고 만년에 산수 좋는 곳에 작은 집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擇善交人應事推義 晩咏嘯於溪山築小齋 |
18 | Ⅰ-5 능파정 | 정광(鄭垙) 문찬(文贊) 풍암(風菴) (1854~1914) | 문행이 진실되고 독실하므로 세상상람들이 본받아야 한다고 칭송하였다. 수승 통정대부(壽陞 通政大夫) 文行純眞 世人稱效 * 수직은 61세로 대상이 아니고, 일제강압기로서 타당치 않음 |
18 | Ⅰ-5 능파정 | 정재휴(鄭載烋) 진숙(珍淑) 옥재(玉齋) (1882~1951) |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배웠다. 한일합방 시 순창내동에 은둔하여 시를 읊고 독서하며 여생을 지냈다 淵齋 宋秉璿先生門人 韓日合邦時 入淳昌內洞屯門下 吟詩讀書終身
* 송병선(宋秉璿) : 1836~1905 호 연재(淵齋), 학자, 순국지사,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가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8 | Ⅰ-6 승지 | 정규(鄭珪) 치서(致瑞) 추당(楸堂) (1828~1891) | 천성이 바르고 순수했다, 가정을 도(道)로서 제가하고 자녀를 의(義)로 교육하니 동리에서 칭송하였다. 고종 정해 년인 1887년에 동몽교관으로 특진 제수되었다
賦性純正處家有道敎子義方鄕里稱頌 高宗丁亥(1887년) 以特進除童蒙敎官 |
18 | Ⅰ-6 승지 | 정유(鄭瑬) 면경(冕卿) 황곡(黃谷) (1813 ~ 1865) |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있으며 경행이 높아 성망이 우뚝하여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고종 계사년(1893년) 학행이 높아 여러 번 조정에 천거되어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금성군지」와 「기성군지」 그리고 「삼강록」에 실렸다
孝友純至徑行高明聲望蔚然爲世推重 高宗癸巳 以學行累薦贈吏曹參議見「錦城郡誌」 「箕城郡誌」 及「三綱錄」 |
18 | Ⅰ-7 진사 | 정병필(鄭昞珌) 대현(大炫) 심헌(心軒) (1869~1940) |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두문불출하며 은거하고 간소한 음식을 먹으며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乙庚以後杜門遯跡木食澗飮自靖終老 |
18 | Ⅰ-7 진사 | 정영필(鄭英珌) 기옥(器玉) 회산(晦山) 又 인암(忍庵) (1879~1965) | 심석 송병순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학문의 길이 이미 바르고 가훈을 이어받아 경서와 사서를 부지런히 익혔다. 여묘 6년을 하니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표가 되었다
受業于心石宋先生秉珣門 門路旣正承襲庭訓篤於經史居廬六年爲一鄕師表
* 송병순(宋秉珣) : 1839 ~ 1912, 호 심석(心石)
1865년 서원철훼령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동묘를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형 병선이 을사조약을 파기하기 위해 활동하다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 라 했다. 그 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에게 배포하며,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였으나 그 해 9월 5일 투신자살에 실패하자,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
18 | Ⅰ-7 진사 | 정원필(鄭元珌) 효겸(孝兼) 죽파(竹坡) (1888~1946) | 성암 김용선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부친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움이 도타우므로 사람들이 더 이상 달리 할 말이 없었다 受業于省庵金容璿門 惇行孝悌人無間言
* 김용선(金容璿) : 1865 ~ ? 호 성암(省庵), 전우(田愚)의 제자 |
18 | Ⅰ-7 진사 | 정문필(鄭文珌) 광현(光顯) 성헌(誠軒) (1880~1925) | 존성재 서봉관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예학에 밝고 학문과 행의가 높아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受業于存誠齋徐鳳寬門 禮學文行爲時推重
* 서봉관(徐鳳寬) : 1839 ~ ? 조선 후기 관리
자는 인행(仁行)이고, 호는 동강(東岡) 또는 존성재(存誠齋)이다.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성리학에 밝았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와 교유하였다.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때 각 고을에 글을 보내 안정을 도모할 것을 권유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다. 유생들이 그의 학행을 기리기 위해 동강사(東岡祠)를 세워 배향하였다. |
18 | Ⅰ-7 진사 | 정재필(鄭載珌) 이현(伊賢) 석헌(石軒) (1872~1950) | 품성이 온화하고 두터웠다. 초야에 몸담았으나 세상에 무심하지는 않았다. 은거한 곳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資性純厚遁世無悶處驗行夷 |
18 | Ⅱ-1 참봉 | 정경수(鄭慶洙) 덕윤(德潤) 용산(龍山) (1790~1844)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덕행이 높고 선조의 행적을 좇아 행하였다
孝友德行 克趾善美 |
18 | Ⅱ-1 참봉 | 정문수(鄭文洙) 덕문(德文) 물염재(勿染齋) (1796~1857)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경서와 학문이 높아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였다.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孝友經術累登剡薦周窮恤貧鄕人竪碑頌德
* 부친(이황 공)과 아들 화익 까지 삼대를 거치며 모두 부부가 효자 효부이며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
18 | Ⅱ-6 양촌 | 정승수(鄭承洙) 경서(景緖) 호암(皓菴) (1822~1867) | 일찍부터 글로서 이름을 드날렸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早負文名累擧不中 |
18 | Ⅱ-6 양촌 | 정홍수(鄭弘洙) 대유(大有) 탑계(塔溪) (1827~1900)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덕과 학문이 높았으며 선조의 아름다운 행적을 본받으니 유림과 벗들이 받들어 따랐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孝友德學克趾先美士友推從爲時師表 |
18 | Ⅱ-8 소강재 | 정익수(鄭翊洙) 우립(羽立) 성재(誠齋) (1866~1933)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덕이 있고 학문도 뛰어나 모범이 되었다 孝友德學 爲世模範 |
18 | Ⅱ-9 성재 | 정택수(鄭宅洙) 인옥(仁玉) (1870~1917) | 1891년 진사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고 문장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다 孝友文章 著名于世 * 子 : 동학선봉장 정필수(鄭弼洙) |
18 | Ⅱ-9 성재 | 정헌수(鄭憲洙) 원로(元老) (1852~1912) | 통덕랑(通德郞) 글이 뛰어나고 행의가 두터우며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文行德望爲世模範 |
18 | Ⅱ-9 성재 | 정일수(鄭一洙) 응오(應五) (1810~1888)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덕이 있고 학문도 뛰어나 향리에서 존경하였다 孝友德學 鄕里欽服 |
18 | Ⅱ-9 성재 | 정관수(鄭觀洙) 국헌(國憲) (1827~1895) | 성품과 도량이 넓고 성실하며, 풍모가 바르고 엄격하였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글과 학문 또한 뛰어났으며 선대의 행적을 본받았다 性度純實風儀端嚴 孝友文學克趾先美 |
18 | Ⅱ-9 성재 | 정도수(鄭導洙) 한경(漢卿) 연곡(連谷) (1877~1943)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글과 학문이 뛰어나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孝友文學 爲世師表 |
19 | Ⅰ-1 절제사 | 정하석(鄭夏錫) 문옥(文玉) 미재(薇齋) (1845 ~ 1896)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움을 타고났으며 문행이 이름났다. 갑오년 동학비적이 날뛰니 엄정하게 이를 물리쳤다. 도를 더해 악독한 일을 당했으나 그 주동자가 연이어 잡히매 초토사 민종렬(閔種烈)을 접견하여 말하기를 “우두머리가 이미 죽었으니 화합으로 다스려 민심을 진정시켜주시오!”하니 초토사가 이를 옳게 여겨 죄수를 모두 풀어주었다
孝友根天文行名世 甲午東匪猖獗嚴正斥邪 饒被螫毒及其株連被執 見招討使閔種烈曰渠魁旣誅恊從因治以鎭民心 招討公然之盡釋罪囚 |
19 | Ⅰ-1 절제사 | 정태석(鄭台錫) 성백(星伯) (1804~1867) | 경서와 학문을 닦고 그 행실이 선조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본받았다 經學行誼克趾先美 |
19 | Ⅰ-2 응교 | 정구석(鄭龜錫) 몽서(夢瑞) 석당(石塘) (1790~1865) | 1865년 효문전참봉(孝文殿參奉) 통례원인의(引儀) 1865년 전라도사(全羅都事) 1868년 별세 후 숭보지전을 입었다(爲請隱卒崇報之典事)
일찍이 가훈을 받들어 경서 학문을 닦고 도와 덕을 숭상하여 유학의 태두가 되었다. 1865년 영상 조두순이 주상에게 천거하여 그해 나이 들어 학문에 힘쓴 즉 효문전 참봉을 제수하고 이어 통례원 인의로 승자한 후 외직으로 전라도사로 나갔으며, 이어 경연참찬관에 추천되셨으나 별세하여 조야에서 애석해 하였다.
早襲庭訓經術道德爲世儒宗乙丑領相趙斗淳筵奏其年老篤學卽除孝文殿叅奉旋陞通禮院引儀以外臺拜全羅都事朝廷擬望於經筵參贊而這爾棄世有文集 * 정구석(鄭龜錫) : 석당집(石塘集)소개 글에서
정구석의 자는 몽서(夢瑞), 호는 석당(石塘), 본관은 광주이다. 1790년 임천 고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6세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평생 율곡(栗谷), 우암(尤菴), 남당(南塘) 삼현(三賢)을 존숭하여 그의 호 석당(石塘)도 율곡의 이호(異號) 석택(石澤)과 남당(南塘)에서 취한 것 같다. 독서에 있어서 『소학』, 『근사록』으로부터 사서오경에 달했으며 『주자대전』을 구극하여 신기(新奇)에 힘쓰지 않고 입론을 즐기지 않아 오직 선성현(先聖賢)의 본지만을 주로 하여 연정담사(硏精覃思)하였다. 만년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전라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이 해 10월에 병석에 누워 1865년 76세로 고암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백석면 지현(砥峴)에 있다. 『석당집』은 4권 2책의 석인본이다. 권1에는 고암팔영(鼓岩八詠), 강행(江行), 어염선래박전강(魚塩船來泊前江) 등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족손 정규종(鄭圭綜)이 편집하여 서(序)를 썼고, 5대손 정환(鄭鐶)이 발(跋)을 쓰고 1970년에 간행하였다.(호남기록문화유산) |
19 | Ⅰ-2 응교 | 정종진(鄭宗鎭) 경증(景曾) (1780~1874) | 성품이 바르고 글과 행의가 일찍부터 뛰어났으나 일찍 세상을 떠 뜻을 이루지 못하니 유림과 벗들이 애석해 했다
性度剛正文行夙著早世未究士友嗟惜 |
19 | Ⅰ-2 응교 | 정창석(鄭昌錫) 순여(順汝) 송헌(松軒) (1824~1890)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온화하고 덕이 높았다. 성리학과 경서에 밝아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孝友順德嚴明道學經術爲世推重 |
19 | Ⅰ-2 응교 | 정동현(鄭東鉉) 우서(禹瑞) 국사(菊史) (1841~1907) | 성품이 순후하고 덕과 학문을 두루 갖추어 사우와 종당에서 높이 추앙하였다. 유고가 있다
天賦純厚德學俱崇士友宗黨推爲標望, 有遺稿 |
19 | Ⅰ-3 지평 | 정옥석(鄭玉錫) 문행(文行) 왕산(旺山) (1829~1887) | 글과 학문이 고명하고 덕을 행하여 향리에서 존경하였다 文學德行爲時推仰 |
19 | Ⅰ-3 지평 | 정준석(鄭晙錫) 평일(平一) 청선(聽仙) (1883 ~ ?) | 일신재 정의림(鄭義林) 공의 문인으로 여력이 생기면 학문에 정진하고 의를 지키며 매사에 임했다
鄭日新門人 餘力求學思義應事 |
19 | Ⅰ-3 지평 | 정위석(鄭暐錫) 도명(道明) 병남재(屛南齋) (1879~1937) | 일신재 정의림 문인. 학문을 좋아하고 덕을 닦고 언행은 진중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필체도 굳건하여 선비와 벗들이 으뜸으로 자랑했다. 소안 나성수와 육봉 이종택 선생이 재기(齋記:號記)를 지었다
日新齋門人 好學尙德言行珍重 優文健筆士友推魁 素安羅性洙 六峰李鍾宅撰齋記 |
19 | Ⅰ-3 지평 | 정종진(鄭宗鎭) 주현(周賢) 복촌(復村) (1823~1890) | 효성을 타고났다. 어려서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루니 어른과 같았다. 장성하여 힘을 다해 학문을 닦으매 유림들이 추앙하였다. 「광산지」에 실렸다 天賦純孝年幼遭艱送終儀節克如成人及長力學篤行士林推仰 見光山誌 |
19 | Ⅰ-4 자의 | 정태석(鄭泰錫) 찬조(贊朝) 백포(栢圃) (1862~1946) | 1891년 서사 강릉참봉(筮仕 康陵參奉) 1893년(계사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승 통정(陞 通政)
천품이 순수하고 후덕하며 행실이 바르고 무거웠다. 세상이 상전벽해되어 험하니 은둔하여 살았다 賦性純厚 行誼正重 値世滄桑隱遁自終 * 승정원일기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음 |
19 | Ⅰ-4 자의 | 정병석(鄭秉錫) 찬보(贊普) 경재(敬齋) (1857~1938) | 1893년 서사 사헌부감찰(筮仕 司憲府監察) 승자 통훈대부(陞資 通訓大夫)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경서와 행의가 고명하여 명성이 자자하므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孝友純至 經行高名 聲望藹蔚 爲世推重 * 승정원일기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음 |
19 | Ⅰ-4 자의 | 정화석(鄭和錫) 화겸(和兼) 여담(汝潭) (1824~1886)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으며 문장을 세상에 떨쳤다. 어머님 병환에 정성 다해 쾌유를 빌고 똥 맛보며 간호하였다. 한밤이 지나 자정수를 길어다 마시게 하니 마침 소생하셨다. 이에 향도에서 조정에 여러 번 효를 천거하였다
孝友根天 文章鳴世 慈癠危㞃 露禱嘗糞 跨朔夜汲子正水 竟得甦完 鄕道累薦 |
19 | Ⅰ-5 능파정 | 정원석(鄭源錫) 여명(汝明) 복재(復齋) (1886~1906) | 나이 20세의 묘령에 뜻을 세우고 경서와 학문에 밝았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뜨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다 妙年立志經學高明不幸早世人皆嗟惜 |
19 | Ⅰ-6 승지 | 정충국(鄭忠國) 대유(大裕) 만오당(晩悟堂) (1759~1839) | 문숙 체재공 선생과 정간 서활수 선생 두 분에게서 명경(주역·춘추·예기 등)을 공부하였다 從遊 文肅蔡濟恭 貞簡 徐活修兩公門講明經旨
1839년 수승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壽陞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수 82세
* 채제공(蔡濟恭) : 1720 ~ 1799, 영의정, 호 번암(樊巖) ·번옹(樊翁).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천주교(西學)에 대해서도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제도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 중간수탈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奸吏)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이 있고, 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9 | Ⅰ-6 승지 | 정원석(鄭源錫) 노천(老泉) 만회(晩悔) (1847~1906) | 족형 석당 정구석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지조가 굳고 행실이 확실하였고 문장과 글이 매우 폭넓고 박학하였다. 월파 정시림 공을 따라 교류하고,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과 학문과 도의를 고령에 이르기 까지 변함없이 연구 토론 정진하였다
受業于族兄石塘門 操履堅確文詞宏博 從遊月波時林 難窩吳繼洙 後石 吳駿善 講磨道義至老不懈
* 석당 정구석(1790~1865) : 19세 응교공파, 전라도사, 1910년 정구석의 증손 정규종(鄭圭綜)과 5대손 정환(鄭鐶) 등이 석당집을 간행 * 월파 정시림(1839~1912) : 21세 승지공파, 유학자, 기정진의 제자 * 난와 오계수(1843~1915) : 유학자, 항일지사 * 후석 오준선(1851~1931) : 유학자 |
19 | Ⅰ-6 승지 | 정해석(鄭海錫) 진화(振華) 송은(松隱) (1850~1915) | 어버이 병환 때에 겨울시내에서 물고기 잡아 회를 드리고 여름 높은 산에 꿩 잡아 구워드리니 신기한 효험을 보았다. 학문이 깊고 품행과 도의가 높아 여러 번 공천을 받았다
親疾 凍川魚膾 夏岑雉炙得 奏神效 文學行誼 累登公薦 |
19 | Ⅰ-6 승지 | 정용석(鄭聳錫) 경빈(經賓) 어초암(漁樵菴) (1858~1923) | 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학문이 깊고 심오하여 인근 저명 유학자와 학문과 도의를 연구 토론하였다. 1910년 순종 경술국치 이후, 용수 작천에 은거하여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연자적하게 지냈다. 유고가 있으며 송사 기우만과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석전 이병수가 암기를 지었다
孝友純至 學問深邃 與省內名碩講磨道義 純宗庚戌以後 恨深隱居龍峀鵲川間 煙霞詩酒悠然自適 有遺稿 松沙奇宇萬 難窩吳繼洙 後石吳駿善 石田 李炳洙撰 菴記
* 암기(菴記) : ‘어초암’이라는 호를 지어준 뜻 또는 담긴 뜻을 풀어 써 헌정한 글, 호기(號記)라고도 함
* 난와 오계수(1843~1915) : 유학자, 항일지사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이 일어나 일본인들에 의하여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이를 토평하기 위하여 기우만(奇宇萬)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그에 가담하였다. 경술국치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중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한 일로 장성 헌병부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영사재(永思齋)에 들어가 오직 독서만으로 생애를 보냈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 이(理)는 본성(本性)이고, 기(氣)는 기형(器形)으로, 둘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표리와 같이 불리부잡(不離不雜)한 하나라는 일물론(一物論)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난와유고』 17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9 | Ⅰ-6 승지 | 정종석(鄭鍾錫) 창문(昌文) 석산(石山) (1899~1962) | 글과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으로 당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남쪽지방의 학자들이 경서를 들고 난제들을 묻기 위해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추모비를 세웠다. 소파 정현민이 글을 쓰고 자암 김재민이 글씨를 썼다. 유고가 있다
文學德行爲時師範 南服學者執經問難日植門庭 竪追慕碑 韶坡鄭顯珉 謹詞 慈菴 金在玟 謹書 有遺稿
* 정현민(鄭顯珉) :1912~?, 아동문학가, 시조시인, 호 소파(韶坡)
송정공립보통학교(松汀公立普通學校)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문학과 졸업. 귀국후 16년간 행정공무원을 지내고 교육계에 투신, 여수중학 · 여수상고 · 전남여중고교 · 전남상고 · 광주남중(光州南中) · 북성 중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개벽(開闢)〉에 《별건곤(別乾坤)》을 발표한 후 시조를 쓰기 시작. 해방후에도 지방지(地方紙) 공모(公募)에 응하여 4회나 당선되고 제1회 전국 백일장대회(白日場大會)에서 대통령상을 수상, 1957년 〈동아일보(東亞日報)〉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했다. 1959년 전라남도문화상(全羅南道文化賞)을 받았다. |
19 | Ⅱ-1 참봉 | 정화익(鄭和翼) 사홍(士鴻) 국포(菊圃) (1840~1865) | 품성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풍모가 당당하고 뛰어났다. 학문과 기예가 높고 독실이 실행하였다. 어려서 상을 당하였으므로 늦게 상복을 입고 정성을 다하였다. 재산을 나누어 종친을 도우고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므로 여러 번 공적을 천거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니 선비들이 모두 아쉬워하였다. 유고가 남아있다
天賦純厚風儀魁偉 造詣深高踐履篤實 早喪所恃追服盡情 傾財敦族出儲救飢 累登採察公薦 不幸早世 士論惜之 有遺稿 |
19 | Ⅱ-1 참봉 | 정화영(鄭和榮) 익겸(益謙) (1825~1857) | 덕행이 두텁고 올바르며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나 일찍 세상을 떠 학문을 이루지 못하니 사림이 무척 아쉬워하였다
德行純正 文章贍富 早世未究 士論嗟惜 |
19 | Ⅱ-1 참봉 | 정화천(鄭和天) 준겸(俊謙) (1843~1914) | 풍모가 기품이 있고 기개 있고 도량이 컸다. 어려 궁마를 익히더니 나이 들어 경서를 벗했다. 마음이 상할 때는 풍속을 가엽게 여겨 자연을 벗하여 여생을 지냈다
姿稟英邁氣宇磊落 早習弓馬 晩娛經傳 傷時憫俗 放跡山水以終餘年 |
19 | Ⅱ-6 양촌 | 정인직(鄭寅直) 청여(淸汝) 췌동(贅東) (1862~1941) | 중암 김평묵 성재 류중교 양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문장과 학문 행의가 드높아 세상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受業于金重菴平默 柳省齋重敎兩先生門 文學行誼爲世師表
* 김평묵(金平默) : 1819 ~ 1891, 호 중암(重菴), 이항로 문인
5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십구사략(十九史略)』 및 『소학』을 읽고, 13세에 경서를 대략 이해하였다. 24세에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매우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넓고 온건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에 기울여졌다. 또한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기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74년에 스승의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했으며,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81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일로, 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900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미원서원(迷源書院) 및 보산서원(寶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류중교(柳重敎) : 1832 ~ 1893, 호 성재(省齋), 이항로 문인 1876년과 1882년에는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과 사헌부지평에 각각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881년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을 다녀와서 미국과 연합하고 서양의 기술 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책을 세우자, 그는 김평묵과 함께 척사위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대해 김평묵에게 「논조보화서선생심설(論調補華西先生心說)」을 보냄으로써 사칠논쟁(四七論爭)이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버금가는 대논쟁이 이항로 문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즉 유중교는 심(心)을 기(氣)로 규정하고 이항로 및 김평묵은 심을 이(理)로 규정함으로써, 스승의 설과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에 문인들이 두 갈래로 나누어져 논쟁은 더욱 확대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88년에는 두 설을 절충해 「화서선생심설정안(華西先生心說正案)」을 김평묵에게 보냄으로써 잠정적으로 심설 논쟁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임종 직전에 문인들에게 정안(正案)의 문자(文字)는 ‘다시 생각해보니 사실과 도리에 모두 맞지 않는다.’ 하여 거두어들일 것을 명함으로써 결국 두 설은 합일을 보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자양금조후사(紫陽琴調候詞)」·「옥계조(玉溪操)」·「현가궤범(絃歌軌範)」 등을 저술하였다. 제학에 추증되었고, 고산(高山)의 삼현서원(三賢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9 | Ⅱ-9 성재 | 정낙희(鄭樂禧) 치근(致謹) 지곡(芝谷) (1847~1901)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글과 학문이 뛰어나 이름 높았다
孝友文學 著名于世 |
19 | Ⅱ-9 성재 | 정화용(鄭和用) 치도(致道) 경산(景山) (1850~1922) | 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의와 사리가 엄정하였으며 도와 학문이 뛰어나고 경서에 밝아 향리에서 존경하였다
孝友純篤 義理嚴明 道學經術 爲世推重 |
19 | Ⅱ-9 성재 | 정화오(鄭和五) 경원(景元) 석창(石蒼) (1859 ~ 1936) | 성품과 도량이 넓고 성실하며, 풍모가 바르고 엄격하였다. 풍채가 당당하였고 문장도 화려하고 훌륭하니 성망이 높아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존경했다.
風儀魁偉 文章華邵 聲望藹蔚 世皆推重 |
19 | Ⅱ-11 사간 | 정화룡(鄭和龍) 성여(聖汝) 호은일사 (湖隱逸士) (1890 ~ ?) | 타고난 성품이 온화 순수하였고, 모습이 뛰어나고 당당하였다. 문장 또한 뛰어나 선비들이 존경하였다 賦性溫粹風儀魁傑 文章贍富士友推重 有遺稿 |
20 | Ⅰ-2 응교 | 정제오(鄭濟五) 치교(穉敎) (1808~1888) | 일찍 사람들과 교유를 끊고 조용히 지내며 지조를 지켰다. 나이 들어 덕을 갖추니 마을에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早謝交遊靖居操守 齒德俱邵鄕黨敬重 |
20 | Ⅰ-2 응교 | 정제신(鄭濟信) 경중(敬仲) (1854~1889) | 천부적으로 총명하였고 글과 행의로 이름을 떨쳤는데 불행히 단명하여 사우들이 애석해 하였다 天賦穎悟文行夙著不幸早世士友嗟惜 |
20 | Ⅰ-2 응교 | 정제인(鄭濟寅) 문회(文會) 우재(愚齋) (1813~1874) | 모습이 바르고 아름다웠다. 성품과 도량은 대쪽같이 엄했다. 글과 학문 품행이 존엄하여 사우들이 존경했다. 저서로는 「수견록」 십 권과 시를 쓴 유고와 잡저 십 권이 있다
儀容端粹性度簡嚴 文學行誼士友推望 著「隨見錄」十卷又遺詩稿雜著十卷 |
20 | Ⅰ-3 지평 | 정제정(鄭濟廷) 덕휘(德輝) (1841~1885) | 성품이 순실하고 문행이 고명하여 성망이 드높으므로 향리에서 존경하였다
天賦純實文行高名 聲望藹然爲時推重 |
20 | Ⅰ-3 지평 | 정해문(鄭海汶) 치규(穉圭) 간암(艮庵) (1845~1903)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으며 순수하고 바랐다. 지조가 높고 행실이 고결하였다. 산속생활을 고수하여 초야에 은둔하여 지내니 유림과 벗들이 인품을 칭송하였다
孝友純正 志行高潔 固守林焚 林泉隱遁 士友稱頌 |
20 | Ⅰ-4 자의 | 정병석(鄭秉錫) 찬보(贊普) 경재(敬齋) (1857~1938) | 1893년 서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승자 통훈(陞資 通訓)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경서와 행의가 고명하여 명성이 자자하므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孝友純至 經行高名 聲望藹蔚 爲世推重 * 승정원일기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음 |
20 | Ⅰ-4 자의 | 정제현(鄭濟賢) 성의(成義) 매사(梅史) (1851~1914) |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분매산 중에 은거하여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아 지냈다. 세상 사람들이 공을 ‘매산처사’라고 불렀다
早廢擧業 遯跡于盆梅山中琴書自娛與世不關時人稱之以梅山處士 |
20 | Ⅰ-6 승지 | 정해윤(鄭海潤) 학형(學亨) (1871~1898) |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 세자사범
문장에 재예가 넘치고 경륜이 높아 쇄신정치를 베풀 만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뜨니 조야에서 매우 애석해 하였다
宮內府主事至世子師範 文章才諝 經綸韜略宣可刷新政治 而不幸早世 朝野嗟惜 * 승정원일기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음 |
20 | Ⅰ-6 승지 | 정유택(鄭有宅) 경상(敬祥) (1804~1876) | 부모를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세상을 피해 도를 즐기며 편안하게 살았다 事親至孝遯世樂道 |
20 | Ⅰ-6 승지 | 정제만(鄭濟萬) 시일(始一) 일와(一窩) (1872~1931) |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김동해 문하에서 배웠으며, 경서의 경지와 행의가 올연하여 명성이 드높았고 덕망으로 널리 칭송받았다
受業于金重菴 崔勉庵 金東海 徑行高明 德望著稱
* 최익현(崔益鉉) : 1833~1906, 호 면암(勉庵)
포천에서 출생, 김기현(金琦鉉)과 이항로(李恒老) 등에게 배웠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 병과에 합격, 성균관 전적․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이조정랑․수봉관․언관 등을 역임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중건과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재정파탄 등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으로 삭직 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복직.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 대원군세력과 제휴해 서원철폐 등 대원군의 실정사례를 열거해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무엄하게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후 2년만인 1875년에 석방됐다. 1876년에는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 통상을 논하자 전문 5조로 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부당성을 역설했다가 다시 흑산도로 위리안치되는 귀양을 갔다가 2년 후인 1878년에 석방됐다. 1895년에는 단발령을 반대하다 투옥되고, 1898년(광무 2)에 궁내부특진관․중추원의관(議官)․의정부 찬정․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됐으나 거부하고 향리에서 후진을 가르쳤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이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하여, 왕의 자문에 응했다. 그는 왕에게 일본의 차관(借款)과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을 갖자 말도록 진언했다. 그리고 친일매국노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에 의해 두 차례나 향리로 강제 압송됐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토로하는 한편 8도의 사민에게 항일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내고 국민들의 동참을 간절히 촉구했다. 그는 호소문에서 납세거부, 철도 불이용, 일본상품 불매 등을 투쟁방법을 제시했다.
한편 74세의 노인인 그는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 16조에 이르는 배신행위를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하고, 400여명 의병군을 이끌고 순창에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패전했다. 포로로 잡힌 그는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가 억류됐다. 이때 적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아 굶어죽기에 이른다. |
20 | Ⅱ-1 참봉 | 정양환(鄭陽煥) 창여(昌汝) (1841~1877) | 품성이 따뜻하고 순수하였고 풍채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문장이 세밀하고 민첩하여 문사들이 칭찬하였다
賦性溫粹 風儀魁傑 筆翰精敏 壇譽詞壇 |
20 | Ⅱ-1 참봉 | 정국환(鄭國煥) 국언(國彦) 국사(菊史) (1846~1887)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경서에 이름이 높았다. 예학에도 지식이 깊어 사림에서 본보기로 삼았다
孝友純篤 經術高名 深透禮學 矜式士林 |
20 | Ⅱ-1 참봉 | 정만환(鄭萬煥) 백여(百汝) (1849~1916) | 성품과 도량이 매우 곧고 정직하여 향리에서 존경하였다.
性度剛毅正直 名重鄕里 |
20 | Ⅱ-1 참봉 | 정사환(鄭師煥) 선여(善汝) 농은(農隱) (1842~1865)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경학에도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뜨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孝友根天 經學名世 不幸早世 人惜未究 |
20 | Ⅱ-1 참봉 | 정장환(鄭長煥) 여장(汝章) 만은(晩隱) (1846~1909) | (조상을 받들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덕행이 있었다. 사림들이 인품을 우러러 보았다. 세상이 어지럽게 변하니 깊은 시골에 은둔하여 시를 즐기고 예를 베풀며 여생을 보냈다
(奉先)孝友德學 士林景仰 世路滄桑 遯跡林泉 詩禮自娛 |
20 | Ⅱ-1 참봉 | 정용환(鄭龍煥) 희서(羲瑞) 송사(松史) (1856~1898)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덕행이 있었다. 경학에도 이름이 높아 명성이 우뚝하므로 유림들이 존중하였다
孝友根天 經學高名 聲望藹蔚 士林推重 |
20 | Ⅱ-1 참봉 | 정봉환(鄭鳳煥) 성서(聖瑞) 호련(湖蓮) (1864~1898)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학문이 매우 깊었다. 의와 기개가 서릿발 같아 바름을 섬기고 간악함을 물리쳤다. 학문이 흥하도록 육영하는데 유림으로서 참여하였다. 유고가 있다
자식 규종이 가장행록을 짓고, 승지 송태헌이 행장을 짓고, 송사 기우만이 묘갈문을 쓰고, 지산 김복한이 지명을 짓고, 동강 김영한이 입전을 쓰고, 율봉 신현중이 호련기(호기:號記)를 썼다
孝友純至 學文深淵 義氣霜漂 扶正斥邪 興學毓英 羽翼斯文 有遺稿 男 圭綜述 家狀行錄 承旨宋台憲撰行狀 松沙奇宇萬撰碣銘 志山 金福漢撰誌銘 東崗金甯漢 立傳 栗峯申鉉中撰 湖蓮記 |
20 | Ⅱ-1 참봉 | 정일환(鄭日煥) 원오(元午) 유려(柳廬) (1842~1915) | 고종 임인년(1902년)에 본원(무장군수) 홍봉표가 매년 거둬들이는 조세내역도 실제로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특별히 통정대부에 제수되니 하늘을 속이고 이를 말하는지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으며 덕행이 높아 세상에 추앙 받았다 세상이 바뀌어 어지러우니 두문하여 조용히 살았다
高宗壬寅本倅洪鳳杓不詳實年納單特除通政大夫 以欺天辭之 不許 孝友德行名重當世 値世滄桑杜門自靖
* 홍봉표 : 1902년 6월 茂長郡守(무장군수), 1904년 4월 綾州郡守(능주군수) |
20 | Ⅱ-5 청백리 | 정동환(鄭東煥) 성문(聖文) (1871~1966) | 간재 전우선생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독실하게 실천하였다 田艮齋文人 講究性理踐履篤實
* 전우(田愚) : 1841 ~ 1922,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자 子明(자명). 호 艮齋(간재), 臼山(구산). 본관 潭陽(담양).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거유인 申應朝(신응조)의 권고로 鼓山 任憲晦(고산 임헌회)에게서 20년간 배웠으며 尹致中(윤치중), 徐廷淳(서정순)과 함께 그의 高弟(고제)가 되었다. 그의 학풍은 철저히 栗谷 李珥(율곡 이이), 尤庵 宋時烈(우암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고종 19년(1882) 문벌로 繕工監 監役(선공감 감역), 掌令(장령), 고종 43년(光武광무10년, 1906) 中樞院參議(중추원 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말년에는 서해의 界火島(계화도)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저서로 ‘私稿-原集(사고-원집 67권), 續集-別集(속집-별집 4권), 禮說(예설 5권)’ 등이 있는데, 1984년 ‘艮齋先生全集(간재선생전집 2권)’을 발간하였다.(한시작가작품사전, 2007. 11. 15., 국학자료원) |
20 | Ⅱ-9 성재 | 정인환(鄭麟煥) 공서(公瑞) 도곡(道谷) (1887~1966) | 천성이 과묵하고 사람을 대함이 엄하고 진중하였다. 처세는 편하게 하였으며 멀리 바라보면 신선을 대하는 것 같았다
天性沈黙對人嚴重處世晏然望若神仙 |
20 | Ⅱ-9 성재 | 정구환(鄭龜煥) 성징(聖徵) 조은(釣隱) (1877~1947) | 효도가 극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으며, 학문이 높아 존경받았다 孝友文學 爲時推重 |
20 | Ⅱ-9 성재 | 정익환(鄭益煥) 덕화(德化) 노농(老農) (1890~1950) | 지조와 행실이 성실하고 부지런하였다. 특히 뜻이 확고해 초야로 물러나 시를 짓고 예를 지키며 여생을 지냈다
操履篤實志介堅確遯跡林泉詩禮自娛 |
20 | Ⅱ-9 성재 | 정장환(鄭章煥) 문약(文若) 성암(成菴) (1881~1947) |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고 행실이 예절이 있으므로 존경받았다. 유고가 있다
文學行儀 名重鄕邦 有遺稿 |
20 | Ⅱ-9 성재 | 정문환(鄭文煥) 무겸(武兼) 도곡(道谷) (1883~1953) | 세상이 상전벽해 되니 초야로 물러나 조용히 지냈다. 후학을 잘 가르쳐 후회 없도록 깨우치며 여생을 살았다
値世滄桑杜門自靖敎誨後進以終其世 |
20 | Ⅱ-11 사간 | 정규환(鄭珪煥) 오정(烏庭) (1897 ~ 1981)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아 마을에서 존경하였다. 효성에 대하여 군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효자비*가 세워졌다
以孝友文學 士林推重 郡縣表彰 建立孝子碑 |
21 | Ⅰ-1 절제사 | 정기림(鄭祺林) 기채(琪采) 월호(月湖) (1883~1921) | 문필의 재주가 뛰어난데 일찍 별세하니 사람들이 그 재주를 다하지 못함에 아쉬워했다
文翰才諝見稱於世不幸早夭人惜未究 |
21 | Ⅰ-2 응교 | 정창림(鄭昌林) 경방(敬方) 구계(九溪) (1847~1916) | 노사 기정진 선생에게 배우고 또 족대부 석당 정구석 공에게 배웠다. 정학(공자의 바른 학문)을 익히고 밝혀 사문(유림, 향교)의 일을 맡았다. 문집이 남아있다
奇蘆沙(正鎭)門人 又從學族大父石塘(龜錫)門下 講明正學羽翼斯文 有遺稿
* 정인채(鄭仁采)의 시문집인 「志巖文集 」의 서문을 썼다
* 기정진(奇正鎭) : 1798 ~ 1879), 호 노사(蘆沙)
전라북도 순창 출신. 7세에 이미 성리철학의 깊은 이치를 깨우쳤고, 10세에는 경서 · 사서 등을 통독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서양세력의 침투를 염려하여 그해 7월 흔히 〈육조소(六條疏)〉라 불리는 〈병인소(丙寅疏)〉를 썼다. 이 소는 고종에게 받아들여지고, 조정에서 식견이 높이 평가되어 그해 6월 사헌부집의, 7월 동부승지, 8월 호조참의, 10월 가선대부의 품계와 함께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등이 주어졌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동지돈녕부사를 사양하는 소장으로 두번째의 〈병인소〉를 올렸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국가적 폐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지도층인 사대부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음을 우려하여 삼무사(三無私)를 권장하도록 강조하였다. 1877년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주어졌다. 그해에 장성 하리 월송(月松 : 지금의 高山里)으로 이사하여 다음해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과 함께 거처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학문은 스승으로부터 직접 전수받거나 어느 학파에 연원을 둔 것이 아니라 송대의 철학자 주돈이(周敦頣) · 장재(張載) · 정이(程頣) · 주희(朱憙) 등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궁리와 사색에 의하여 대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후 근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학문이 점차 원숙기에 들던 40세 이후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어 제자의 예를 갖추었지만 한번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고 성현의 도를 닦고 성리(性理)의 학을 탐구할 뿐이었다. 1927년에 고산서원(高山書院)이 건립되어 조성가 등 문인 6인과 함께 봉안되었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 |
21 | Ⅰ-2 응교 | 정의림(鄭義林) 계방(季方) 일신재(日新齋) (1845~1910) 대유학자 | 노사 기정진의 문인으로 대곡 김석구, 애산 정재규와 함께 3대 제자로서 학문을 전수하였다. 문집이 남아 있으며 금곡사, 영귀사, 동산단, 평일사에서 배향하였다. 송사 기우만이 행장을 지었다
蘆沙(奇正鎭)門人 與金大谷錫龜 鄭艾山載圭爲蘆門嫡傳 有文集 腏享于金谷祠 詠歸祠 東山壇 坪日祠 松沙奇宇萬撰行狀
* 정의림(鄭義林) : 1845~1910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3대 제자 중 1인으로, 노사학파의 인물 중 비교적 큰 규모의 문인 집단을 형성한 사람이다. 1868년 기정진에게 집지하여 스승의 학설을 계승하면서 율곡의 학설을 주리적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변전우소저노사선생납량사의기의(辨田愚所著蘆沙先生納凉私議記疑)」와 「변전우소저노사선생외필변(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을 써서 노사의 학설을 옹호하였다. 또한 나라가 일제에 의해 잠식되어 가자 호남대의소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정의림의 문인 수는 『일신재집』의 문인록에는 265명으로 수록되어 있고, 『노사선생 연원록』에는 재전제자까지 합쳐 879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정의림은 1893년에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 칠송 마을에 영귀정(詠歸亭)을 축조하고 9성(聖)의 진영을 봉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영귀정에서는 호남의 유림들이 모여 스승의 이기론에 대한 변론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영귀정 옆에 칠송사(七松祠)를 세우고, 정의림과 그의 제자인 홍승환(洪承渙), 김윤형(金潤亨), 민병춘(閔丙春), 문제술(文濟述), 배현기(裵玄基), 임태주(任泰柱), 홍찬희(洪纘熹), 이승복(李承福) 등을 배향하였다.
* 김석구(金錫龜) : 1835~1885,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경범(景範)이고, 호는 대곡(大谷)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전라북도 세산(細山 :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에서 태어났다.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일신(日新) 정의림(鄭義林)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의 3대 제자로 불렸다. 『맹자(孟子)』에 통달하여 김맹자(金孟子)로 불렸다.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담양군(潭陽郡) 대전면(大田面) 대곡리(大谷里)로 이사하였으나, 이후에도 27년간을 기정진의 문하를 왕래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로 인하여 노사학이 더욱 정밀해졌으며, 저술 「자경편(自警篇)」과 「사문문답(斯文問答)」은 학문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진원면(珍原面) 진원리(珍原里)의 고산서원(高山書院: 전라남도 기념물 제 63호)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대곡선생문집(大谷先生文集)』이 있다.
* 정재규(鄭載圭) : 1843~1911, 조선 후기 유학자, 호 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1864년(고종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은 1879년에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계속되었다.
1860년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정부에 제출하고 개화를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아직 약한 상태이므로 일시적인 고식책에 불과하다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魯城 : 논산군)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거의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후 일제가 저명인사에게 주는 은사금을 물리쳤다. 1911년 오랑캐의 침략이 서서히 이루어져 빠져 들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니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1903년「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 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합천 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 49권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21 | Ⅰ-3 지평 | 정홍림(鄭鴻林) 종여(宗汝) 송원(松源) (1844~1899) | 경서에 밝고 행실이 고명하여 세상의 사표가 되었다 經明行高爲世師表 |
21 | Ⅰ-3 지평 | 정희림(鄭烯林) 경춘(景春) 경산재(耕山齋) (1869~1930)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있었다. 마음과 기상이 추상처럼 매서우나 매사에 공명정대하고 정직하므로 사우들이 공경하였다
孝友純至 意氣霜烈 公明正直 士友景仰 |
21 | Ⅰ-4 자의 | 정원식(鄭元植) 내춘(乃春) 죽헌(竹軒) (1885~1942) |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음을 칭송했다, 글과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고, 조상을 마음 다해 모셨으며 주위 사람들을 구휼하므로 그 명망이 자자했다
孝友稱服 文學名世 篤於奉先 周恤鄕里 聲望藹蔚 |
21 | Ⅰ-6 승지 | 정시림(鄭時林) 백언(伯彦) 월파(月波) (1839~1912) 대유학자 | 노사 기정진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성리학(性理學)의 지식이 깊고 천문역수(天文曆數)까지 깨우치지 않음이 없고 그 행실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였다. 어사(御使) 심동신(沈東臣)이 궁한 것을 잘 견디고 경서를 연구함이 굳건하다 하였다. 전라감사 김성근이 조정에 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천거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송사 기우만과 같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냈다. 임자년(1912년) 3월 29일에 졸하시자 74명의 문인(제자)이 상여를 매었다. 책으로 내어 유고를 간행하였다. 후학 문인 황철원 등이 보성 미력면에 사당(景慕齋)을 지어 제사지냈다
受業于蘆沙奇先生門深於性理之學 以至天文曆數無不通曉至行篤實 御史沈東臣 稱以固窮守拙硏究經籍 完伯 金聲根薦于朝擧孝廉 抄選不赴 與勉庵崔益鉉 重庵金平默 松沙奇宇萬 從遊講磨 壬子三月二十九日卒 七十四門人架床 致典出儀刊行遺稿 村後門人黃徹源等建祠享之于寶城
* 월파 선생은 노사 기정진 선생의 제자인데 대대로 가문이 빈한하였다. 노사 기정진 선생을 모신 고산서원이 세워질 당시 배향인물로 정해졌으나 여전히 집안이 빈한하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결국 배향되지 못하고 말아 많은 유림의 한탄을 자아냈다.(1998년 보성향교 발간 국역 월파집 소개 글에서) * 정시림(鄭時林) 호 월파(月波), 백언(伯彦)
1833(순조 33)~1912.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 본관은 광산(光山). 보성(寶城) 출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수학하였는데, 노사 문하에서 학문과 문장이 탁월했던 인물로 평가받았다. 빈한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그는 천리(天理)를 지키고 인욕(人欲)을 억제하는 것을 수양의 기본과제로 제시하였고, 나아가 선비는 모든 물질적 욕망을 억제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최대의 임무라고 강조하였다. 만년에 보성군 문덕면 법화(法化)에 있는 강습재(講習齋)에서 학문활동을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월파는 주리(主理)․주기(主氣)의 문제를 사물이 본연의 이치에 합당한가, 합당하지 못한가라는 가치론적 입장에서 파악했다. 성리학의 본령을 주리론으로 인식했던 그는 〈외필상질설(猥筆相質說)〉에서 율곡을 주기론자로 보는 견해를 일축하고 주리론자임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노사가 〈외필(猥筆)〉을 저술한 까닭도 세상 사람들이 율곡의 학설을 후학들이 잘못 볼까 염려한 까닭이며, 후학의 잘못된 견해를 구하려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물성(人物性)의 동이(同異) 문제에 대해, ‘이(理)는 본래 동일하나 그 기품의 다름[理同氣異]에 따라 인물의 본성이 동일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인간과 동물의 성(性: 氣質之性)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인간과 동물의 본성[天命之性]은 같을 수밖에 없다. 본성이라는 글자 자체가 기품 속에서 이(理)만을 끄집어내어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고는 천명의 성이 지닌 선(善)의 본래적 절대성․참된 근본성품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성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문집으로는 제자들에 의해『월파집(月波集)』이 발간되었다.(호남인물검역시스템, 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참조) * 南道 정자기행(1552)-보성 강수정(薑樹亭) : 2014.10.20. 한국매일
전남 보성군 미력면 강수동에 조선조 말 호남 사림의 중요한 위치에 선 문장가요 유학자 월파(月波) 정시림(鄭時林1839-1912)의 은거터 강수정(薑樹亭)도 있었다.
* 月波 鄭時林의 生涯와 詩文學 硏究(김귀석, 한국시문학연구)
월파 정시림은 조선조 말 호남 사림의 중요한 위치에 선 문장가요 학자이다. 그는 노사 기정진의 고족제자로서 시서예악을 학문의 토양으로 삼고 공맹정주를 학문의 사표로 본받아 문풍교화와 전통윤리교육의 진흥에 헌신하였다. 또 그는 경술의 국치를 당해 조선신민으로서 지조와 절의를 꺾이지 않았던 의인이기도 하다. 월파는 글재주가 뛰어난 문사에 앞서 경전과 도의에 밝았으며, 학문적 사유 외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과 낭만이 그의 시편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의 문학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물심일여의 자연친화적 성정과 함께 불의가 앞서는 시대에 방외의 객을 자처하며 세상을 초탈하고자 하는 정신세계를 그의 시편에 담고 있다. 월파는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후윤 정예산, 일신 정의림 등 경기, 영·호남의 수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며 一時의 선비들과 종유는 명분과 대의가 상실된 시대를 살아가는 월파의 삶에 있어 정통학문을 수호하고 시대를 소통하고 울분을 치유하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월파는 경학을 중시하는 도학자였지만 그의 시에는 자연을 통하여 성정을 도야하고 진실한 인간적 삶을 추구하려는 순수한 정신세계가 농축되어 있다.
* 심동신(沈東臣) : 1824 ~ ? 본관은 청송(靑松)
1850년(철종1)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관직에 올랐다. 1863년 사헌부장령이 되었으며, 1871년(고종 8) 성균관대사성의 직에 올랐다. 1876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이듬해 승정원의 좌승지를 지냈다. 1878년 전라좌도암행어사로 제수되어 전라좌도 지방수령들의 시정을 규찰하여 왕에게 보고하기도 하였다. 1880년 조선과의 통상을 맺기 위하여 내항한 미국함대에 관한 동정을 일본을 통하여 연락받아 조정에 보고하는 일을 맡아 처리하기도 하였다. 1882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임 시에는 청나라와 연접한 대청도(大靑島)의 설진문제, 청나라 상인들의 무단 항해문제 등을 조정에 보고하여 처리하였다. 1885년 의금부사로 재임하면서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로 잡혀간 대원군의 송환문제를 김홍집(金弘集)·심순택(沈舜澤)·심이택(沈履澤)·김병시(金炳始) 등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다. 188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성근(金聲根) : 1835 ~ 19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원(仲遠), 호는 해사(海士). 186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검열에서 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88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88년 이후 공조·형조·이조·예조 등 각 판서직을 두루 거쳤다. 1894년 개화파정권 성립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8년 궁내부특진관으로 다시 등용되어 1900년에는 의정부참정, 1902년에는 탁지부대신이 되었다 서예에 뛰어났고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로서 사공도(司空圖)의 「시품(詩品)」 중 제1항을 쓴 「시품」 등 유작의 글씨가 전한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때에는 일제에 의하여 자작이 수여되었다. 또한 1911년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5만원의 은사공채를 수령하였고, 1912년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는 등의 활동으로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21 | Ⅰ-6 승지 | 정원림(鄭源林) 원오(元五) 오와(梧窩) (1838~1913)
*문인중복기재 | 박학하였고 부지런히 학문은 연마하였다. 주위의 가난한 친척을 도왔으며, 종제인 월파 정시림과 일신재 정의림과 함께 도의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博學篤行 敦族周窮 與從弟月波 日新義林講磨道義
1890년(고종 경인) 영릉참봉(除 英陵參奉) 승 통훈대부행 사헌부감찰(陞 通訓行司憲監察) 1902년(고종 임인) 승 통정대부 오위장(陞 通政 五衛將)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21 | Ⅱ-1 참봉 | 정규남(鄭圭南) 우서(禹瑞) (1864~1898) | 성품이 효성스러우며 지조가 높고 고상한데 일찍 세상을 뜨니 선비들이 애석해 하였다. 삼종 아우인 규종이 가장을 짓고 족형 구계 정창림이 묘갈문을 썼다
性孝純至 志氣高尙 不幸早世 士論惜之 三從弟圭綜述家狀 族兄九溪昌林撰碣銘 |
21 | Ⅱ-1 참봉 | 정규관(鄭圭觀) 일준(日俊) 만오(晩悟) (1869~1943) | 깊이 은거하여 살며 시를 짓고 예를 지키며 살았다
遯居林泉 詩禮自娛 |
21 | Ⅱ-1 참봉 | 정규상(鄭圭祥) 인옥(仁玉) 송초(松樵) (1883~1949) | 문장과 학문이 깊고 품행과 도의가 높아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文學行誼 爲世模範 |
21 | Ⅱ-1 참봉 | 정규채(鄭圭彩) 상익(相益) 탁청재(濯淸齋) (1887~1949) |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 문장과 학문이 높아 사림이 추중하였다
奇松沙門人 文學行誼 士林推重 |
21 | Ⅱ-1 참봉 | 정규삼(鄭圭三) 여백(汝百) 난곡(蘭谷) (1876~1941) | 정미년(1907년)에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8년 옥고를 치렀다. 항절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丁未義擧 累建奇功 八年縲絏 抗節不屈 |
21 | Ⅱ-1 참봉 | 정규종(鄭圭綜) 국진(國珍) 송남(松南) (1889~1972) |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서 가훈을 받들고 예학에 정통하여 이를 강구하여 밝히고 실천하였다.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높이는데 힘을 썼다. 가사를 돌보지 않고 조상을 받들고 집안을 섬기는데 일생을 바쳤다. 실로 영원히 문중 일에 봉사한 조종이다
奇松沙門人 能承庭訓 博通禮學 講明踐履 用力於格致誠正之學 不顧家事 尊祖敬族爲一生己任 實萬世爲門事者之宗 |
21 | Ⅱ-9 성재 | 정용칠(鄭用七) 자량(子亮) 도은(陶隱) (1911~ 1990) | 경서에 밝고 행의로 명망이 높아 유림과 벗들로부터 존경받았다 經行高名 士友推望 |
22 | Ⅰ-2 응교 | 정상덕(鄭尙德) 자원(子元) 식당(植堂) (1870~1928) | 성리학을 배우고 연구했다. 사문(유림, 향교)의 일을 맡았다. 송사 기우만(奇宇萬) 선생에게 배웠다 講究性理羽翼斯文 奇松沙門人
* 기우만(奇宇萬) : 1846~1916, 본관 행주, 의병 독립운동가
호는 송사(松沙). 전라남도 장성 출신.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
22 | Ⅰ-4 자의 | 정상욱(鄭尙昱) 영중(永仲) (1872~1961) | 정릉참봉으로 관직을 시작하다(筮仕 貞陵參奉) 통훈대부(通訓大夫)
만년에 집 한 채를 지어 지내며, 시를 짓기를, 산에 들어가려는데 너무나 험하구나! 다시 바다로 가 물에 떠있기에는 바다는 끝이 없다네! 산도 아니요 바다도 아닌 중간지에 초가삼간 지어 만년을 지내보세!
晩構一屋 有詩曰 將欲入山山有險 更營浮海海無緣 非山非海中間地 建草三間送暮年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900년에 29세, 을사보호조약 체결 년도인 1905년에 34세 |
22 | Ⅰ-6 승지 | 정상조(鄭尙祚) 송헌(松軒) (1837~1899) | 참봉(參奉)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위의 곤궁하고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다(孝友篤學 周窮恤貧)
1890년(고종 경인) 공릉참봉, 승훈랑으로 승자(筮仕 恭陵參奉 陞 承訓郞) 1891년(신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22 | Ⅰ-6 승지 | 정상민(鄭尙玟) 화윤(和允) (1832~1886) | 글과 학문이 뛰어나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文學德行 爲世推重 |
22 | Ⅱ-1 참봉 | 정건호(鄭建鎬) 낙경(洛京) 남강(南岡) (1908~1985) | 가훈을 받들어 병신년(1956년) 정사년(1977년) 수보에 참여하였다. 전국을 순회하며 족보수단에 힘쓰고 항상 문중 일을 맡았다. 가문에 보답하고 애족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힘을 다했다
能承庭訓 丙申丁巳二次修補 巡廻全國克勤收單常臨有司 報本愛族不墜家聲 |
23 | Ⅰ-3 지평 | 정남규(鄭南圭) 석완(錫完) 금서(錦西) (1896 ~ 1927) | 효행이 지극하고 학문이 높았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뜨니 사우들이 애석해 하였다
孝行極至文學夙就 不幸早世士友惜之 |
24 | Ⅰ-6 승지 | 정충모(鄭忠謨) 구서(龜瑞) 소암(素庵) (1881~1951) | 연재 송병선 선생에게 배우고 시암 이직현과 교유했다. 글과 학문이 저명하였고 겸산 김정기가 「경독와기」를 지었다
受業于淵齋宋秉璿門又從遊是庵李直絃文學德行著名于世兼山金定基撰耕讀窩記 * 또 다른 호가 ‘경독와(耕讀窩)’?
* 김정기(金定基) : 1885 ~ 1947, 청도 출신 일제강점기 유학자
호는 겸산(兼山)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제대로 책을 읽고 공부를 하지 못하다가, 30여 세가 되던 해에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4∼1931)을 만나 일찍이 의심을 가졌던 것들을 묻고 답을 들을 기회를 가졌다. 이후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을 따라 고금(古今)의 학술에 대해 수학하였다. 그는 매년 수십일 씩 조긍섭을 방문하여 학문을 닦았으며, 조긍섭이 죽은 이후, 그가 남긴 글들을 모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 유학자들의 불참하게 된 것을 통분하여 1919년 경남 거창(居昌)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星州)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가지고 상해(上海)로 갔다. 이 장서는 파리에 한국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전달되었고,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만년에는 산수(山水)에 유람하면서 지냈는데, 멀리 만주(滿洲)에 다녀온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2009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25 | Ⅰ-6 승지 | 정효일(鄭孝壹) 우해(宇海) 회봉(悔峰) (1906 ~ ?) | 덕천 성기운 선생에게 배웠다. 인암 박효수 선생이 호기를 썼다
受業于德泉成璣運門 忍庵朴孝秀撰號記 * 성기운(成璣運) : 1877 ~ 1956 , 호 덕천(德泉). 전우(田愚)의 문인 12세에 회산 반동락(潘東雒)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임재 서찬규(徐贊奎)·간재 전우·연재 송병선(宋炳璿)·심석재 송병순(宋炳珣)·난곡 최영준(崔泳俊)·면암 최익현(崔益鉉)·지산 김복한(金福漢) 등을 찾아보고, 24세 되던 1900년 간재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기운은 34세 되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2년 스승 간재를 따라 부안 계화도(繼華島)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7년 5월 24일 호적령(戶籍令)에 반대하여 호적을 거부하였다. 그는 1917년 5월부터 8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는 일을 거듭하였다. 1953년에는 충현 서원(忠賢書院) 원장을 역임하였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