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 만세! 인천 사람 만세!”
1945년 8월 15일. 인천 곳곳에서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인천창영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인천의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강화도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8·15광복은 처절한 독립운동의 결과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우리 민족은 국내는 물론 만주, 하와이 같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마침내 8월 15일,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다. 싸워서 쟁취한 결과였다. 우리가 그날을 해방절이라 부르지 않고 ‘광복절’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인천은 훨씬 이전부터 위기 때마다 나라를 지켜낸 땅이었다. ‘광복 78주년’을 맞아 ‘인천 호국 보훈의 현장’을 찾아갔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홍승훈 포토그래퍼
1919년 4월 2일 만오 홍진이 ‘13도대표자회의’를 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 자유공원. 13도대표자회의는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 공원의 상징인 맥아더 장군 동상이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한 인천항을 바라보고 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모태
‘한성임시정부’의 탄생지 자유공원
장맛비에 촉촉이 젖은 땅을 밟으며 자유공원을 오른다. 물기 머금은 풀나무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중구청 뒤 ‘연오정’을 지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노인, 하얀 털로 뒤덮인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산책하는 여인. 자유공원 산책로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롭기만 하다.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는 자유공원 광장. 그 많던 비둘기들은 어디로 간 걸까.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광장 한편에 걸린 플래카드가 비둘기가 사라진 이유를 말해 준다.
응봉산 자유공원의 옛 이름은 만국공원이었다.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선 ‘전국13도대표자회의’가 열린다. 때는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탄압과 경계가 극도로 높았던 시기였다. 극비리에 회의를 주도한 만오 홍진(1877~1946)은 이날 한성정부의 조직안과 헌법인 약법을 통과시키며 한성임시정부를 탄생시킨다.
문학산에 선영이 있던 풍산 홍씨 집안에서 태어난 만오는 1919년 3월 17일 전도사 이규갑 등과 함께 동료 검사 한성오의 집에서 ‘한성임시정부’의 조각組閣 명단을 구성한다. 4월 2일 만오는 전국의 대표자들을 만국공원으로 불러 모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할 대표자와 정부 조각 명단을 추인받는다. 그렇게 ‘한성임시정부 수립선포식’이 4월 23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열렸고, 이는 1919년 9월 상하이 통합임시정부 출범으로 이어진다.
만오가 독립을 도모했던 응봉산 자유공원은 지금 인천항이 잘 내려다보이는 바다 뷰를 즐기려는 사람,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 등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13도대표자회의를 열어 한성정부를 탄생시킨 자유공원의 표지석
백범 김구가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인천항과 김구의 신포동 거리
자유공원 광장을 지나 신포동 방향으로 내려가는 모퉁이 길을 돌면 금빛으로 반짝이는 2개의 상징물을 만난다. 백범 김구와 그의 모친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다. 인천항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 여기서부터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비탈길을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천항은 백범이 여러 차례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옥살이를 하며 중노동에 시달렸던 장소다. 1896년 3월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쓰치다(土田)를 죽이고 체포된 청년 김창수는 그해 8월 인천감리서에 수감된다. 인천과의 첫 인연이었다. 1898년 3월 9일 밤 인천감리서를 탈옥한 김구는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던 사실이 발각되며 160명과 함께 검거된 ‘안악사건’으로 체포된다. 서울에서 옥살이를 하던 김구는 1914년 또다시 경성감옥 인천분감으로 이감된다. 이 시기 백범은 인천항 제1부두인 축항 공사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린다. 백범은 바다에 떨어져 죽고 싶었으나 함께 쇠사슬에 엮여 있는 다른 죄수들도 바다에 떨어질 것을 염려해 참고 또 참았다고 <백범일지>에 적고 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 경성감옥 인천분감에 있는 동안 백범은 인천 개항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한다.
1898년 탈옥 당시 용동 마루턱에서 김구가 본 ‘뾰족집’(답동성당)은 앞이 훤하게 트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성당 앞에 있던 가톨릭회관을 헐고 광장과 녹지가 어우러진 쉼터로 변신한 답동성당의 십자가가 여름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백범 김구가 인천감리서를 탈옥한 뒤 이동한 경로를 따라 조성한 청년 백범 김구 역사거리. 김구와 모친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인천항을 향해있다.
강화 3·1운동 기념비에 새겨진 독립운동가들
인천 최초의 만세운동이 펼쳐진
인천창영초등학교
지난 6월 22일 인천창영초등학교 문화재관에선 ‘인천창영학교 존치·발전과 개교 연도 정정 위한 자료집 증정식’이 열렸다. ‘인천창영학교 발전을 위한 시민모임’(공동대표 지용택·신용석, 이하 시민모임)이 최근 이전 위기를 겪은 인천창영초 존치 과정을 자료집으로 만들어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행사였다.
인천창영초는 지난해 인근 지역 재개발로 이전이 논의됐으나 시민모임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서 현재 교정을 존치시키며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시민모임은 이런 과정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50권 한정판 자료집을 엮어 이날 증정식을 가졌다.
자료집은 토론회·학술모임 발표문과 토론문, 언론 보도 등 시민 활동을 담았다. 개교 시기를 바로잡는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개교 연도를 1907년에서 ‘1896년’으로 수정한 성과도 수록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며 인천창영초등학교는 우리 자랑
이고 경쟁력”이라며 “인천창영초등학교 존치를 위해 노력한 많은 분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용석 대표는 “인천의 자존심이자 역사의 현장인 인천창영초등학교가 명실공히 인천의 자랑스러운 교육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합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행사가 치러진 인천창영초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1919년 3월, 인천창영초 운동장에선 “대한 독립 만세!”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이 3월 6일 동맹 휴학을 단행하고 교문 밖으로 뛰쳐 나온 것이다. 학생들은 3월 8일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천창영초에선 지금 “만세” 소리 대신 “깡깡” 야구공 치는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울려 퍼지고 있다.
백범 김구는 인천감리서를 탈옥하며 “천주교당의 뾰족 지붕이 보였다”고 묘사한 바 있다. 지난 6월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으로 새롭게 단장한 답동성당 전경.
인천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하늘에서 본 인천창영초 전경.
‘1919년 3월, 인천창영초 운동장에선 “대한 독립 만세!”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이 3월 6일 동맹 휴학을 단행하고 교문 밖으로 뛰쳐 나온 것이다.
학생들은 3월 8일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며 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천창영초에선 지금 “만세” 소리 대신 “깡깡” 야구공 치는 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울려
퍼지고 있다.’
인천창영초등학교 옛 교사
병인양요, 신미양요 맞닥뜨려
‘조선범’처럼 싸워 외세 쫓아낸 강화도
안개에 휩싸인 전등사 대웅보전이 신비롭게 다가온다. 장마철에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사찰을 찾은 사람들의 표정이 평화롭기만 하다. “딸랑” 빗물에 젖은 풍경 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산사의 고요를 깨뜨린다.
1866년 전등사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등사를 오르는 길 중턱에 위치한 삼랑성(정족산성)에서 전개된 조선군과 프랑스군 간의 전쟁이었다. 승려·의병·관군, 범포수 등으로 구성된 조선군은 아래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프랑스군을 맹렬히 격퇴한다. 전등사 대웅전과 약사전에 기록된 무수한 병사들의 이름과 동문 앞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는 이곳이 병인양요 격전지였음을 말해 준다. 병인양요 당시 전등사 승려들은 경내 정족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문서를 토굴로 옮겨 온전히 지켜내기도 했다. 이 서적들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옮겨진 뒤 지금 까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정족진을 품은 전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