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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4권
7. 변현성품⑥
7.8. 도(道)에 관한 여러 이론[2]
3) 37보리분법(菩提分法)
① 명칭과 수(數)
도(道)를 역시 보리분법(菩提分法)이라고도 이름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명칭의 뜻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각분(覺分)에는 서른일곱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4념주 등이 바로 그것으로
‘각’이란 진지와 무생지를 말하며
이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분’이라 이름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경에서는 각분(覺分)에 서른일곱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4념주(念住)와 4정단(正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등각지(等覺支)와 8성도지(聖道支)가 바로 그것이다.1)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각’이라 이름한 것으로,
깨달은 자의 차별에 따라 세 가지 보리(菩提, 즉 覺)를 설정하는데,
첫째는 성문의 보리이며,
둘째는 독각의 보리이며,
셋째는 무상(無上)의 보리이다.
즉 [이러한 두 가지 ‘지’는] 무지(無智, 무명)와 수면(睡眠)을 모두 영원히 끊는 것이기 때문에, 아울러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하였다는 것을 참답게 아는 것이기 때문에 ‘각’이라 이름한 것으로, 서른일곱 가지의 법은 이 같은 보리(즉 覺)에 따르고 보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리분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② 보리분법의 본질
이러한 서른일곱 가지 법의 본질[體]은 각기 다른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의 실제적 본질은 열 가지이니
이를테면 혜(慧)ㆍ근(勤)ㆍ정(定)ㆍ신(信)
염(念)ㆍ희(喜)ㆍ사(捨)ㆍ경안(輕安)과
아울러 계(戒)와 심(尋)을 본질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각분의 명칭은 비록 서른일곱 가지이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實事]은 오로지 열 가지뿐이니, ‘혜’와 ‘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4념주(念住)와 혜근(慧根)ㆍ혜력(慧力)ㆍ택법각지(擇法覺支)ㆍ정견(正見)은 혜(慧)를 본질로 하며,
4정단(正斷)과 정진근(精進根)ㆍ정진력(精進力)ㆍ정진각지(精進覺支)ㆍ정정진(正精進)은 근(勤)을 본질로 하며,
4신족(神足)과 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정각지(定覺支)ㆍ정정(正定)은 정(定)을 본질로 하며,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은 신(信)을 본질로 한다.
염근(念根)과 염력(念力)과 염각지(念覺支)와 정념(正念)은 염(念)을 본질로 하며,
희각지(喜覺支)는 희(喜)를 본질로 하며,
사각지(捨覺支)는 행온에 포섭되는 사(捨)를 본질로 하며,
경안각지(輕安覺支)는 경안을 본질로 한다.
그리고 정어(正語)와 정업(正業)과 정명(正命)은 계(戒)를 본질로 하며,
정사유(正思惟)는 심(尋)을 본질로 한다.
이와 같이 각분의 실제적인 본질은 오로지 열 가지뿐이지만,
앞의 다섯 가지 즉 신(信) 등의 5근은 경계 등의 차이에 따라 서른 가지로 나누어지며,
여기에 다시 희(喜)와 사(捨)와 경안(輕安)과 계(戒)와 심(尋)을 더한 것이 [37각분이다].
즉 [희ㆍ사ㆍ경안ㆍ계ㆍ심에서] 계가 세 가지(정어ㆍ정업ㆍ정명)로 나누어져 다시 모두 일곱 가지가 되고, 여기에 앞의 것(경계 등의 차이에 따른 5근의 서른 가지)을 합하여 서른일곱 종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설하기를,
“각분의 본질은 열한 가지이니, 신업과 어업은 서로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계는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그 밖의 아홉 가지는 앞에서와 같다”고 하였다.2)
③-1 특히 염주ㆍ정단ㆍ신족의 본질
념주 등의 세 가지 명칭은 [열 가지 본질에] 별도로 소속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유독 혜(慧)와 근(勤)과 정(定)을 본질로 한다고 설한 것인가?3)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염주와 정단과
신족은 증상의 선근에 따라
혜ㆍ근ㆍ정이라고 설하였으나
실제로는 온갖 가행선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4념주 등 세 품류의 선법의 본질은 실제로는 온갖 가행선(加行善)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품류인 두드러진 증상(增上)의 선근에 따라 순서대로 혜(慧)와 근(勤)과 정(定)을 본질로 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혜’를 염주(念住)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4)
‘혜’는 ‘염’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소연의 경계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5)
어떠한 까닭에서 ‘근’을 정단(正斷)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올바로 단수(斷修)를 수습하는 단계에서 이러한 ‘근’의 힘이 능히 해태(懈怠)를 끊기 때문이다.6) 혹은 [정단을] 정승(正勝)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신(身)ㆍ어(語)ㆍ의(意)를 올바로 임지(任持)하여 채찍질하는 것 가운데 이것이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정’을 신족(神足)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신령스럽고 미묘한 온갖 공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7)
②-2 5근과 5력, 각지(覺支)와 도지(道支)
어떠한 연유에서 신(信) 등을 근(根)과 역(力)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인가?
[그것은] 증상(增上)의 법이기 때문이며, 굴복하기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을 앞에서는 ‘근’이라 설하였으면서 뒤에서는 ‘역’이라고 일컬은 것인가?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하품과 상품에 근거하여 전자(5근)와 후자(5력)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또는 굴복할 수 있는 것과 굴복할 수 없는 것에 근거하여 [구분하였기] 때문이다.
즉 하품의 신(信) 등은 세력이나 작용이 저열하기 때문에 여전히 대치되는 것과 동류로서 굴복될 수 있으며,
상품의 그것은 이와 반대되기 때문에 ‘역’이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8)
[앞에서] 설한 각지(覺支)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 것인가?
능히 알고 깨닫는 것[覺悟]을 일컬어 ‘각지’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각지에는 오로지 한 가지(즉 擇法覺支)만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염(念) 등은 바로 택법의 부분[分]으로, 그것들은 모두 택법에 수순하는 것이지만, 수승한 것에 따라 [‘각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혹은 깨달음의 갈래[覺之支], 이것이 바로 ‘각지’의 뜻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각지는 [택법을 제외한] 오로지 여섯 가지뿐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택법은 바로 깨달음[覺]이면서 역시 깨달음의 갈래[覺支]이며,
그 밖의 여섯 가지 종류는 깨달음의 갈래이지만 깨달음은 아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설한 도지(道支)에는 어떠한 뜻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성제(聖諦)를] 살펴 추구하는 것[尋求]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일컬어 ‘도지’라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도지에는 오로지 한 가지(즉 正見)만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견을 제외한] 그 밖의 일곱 가지는 바로 정견의 부분[分]으로, 그것들은 모두 정견에 수순하는 것이지만, 수승한 것에 따라 [‘도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혹은 도의 갈래[道之支], 이것이 바로 ‘도지’의 뜻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도지는 [정견을 제외한] 오로지 일곱 가지뿐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정견은 바로 도(道)이면서 역시 도의 갈래[道支]이며, 그 밖의 일곱 가지 종류는 바로 도의 갈래이지만 도는 아니다.
③ 수행의 계위와 보리분법
응당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수행의] 단계에서 어떠한 각분(覺分)이 증가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업위(初業位)와 순결택분
그리고 수도위와 견도위에서
염주 등의 7품이 순서대로
증가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初業位]에서는 [4]념주(念住)가 증가한다고 설한다.9)
즉 이러한 단계에서는 [4]전도(顚倒)를 종식시키기 위해 염(念)의 세력에 의해 신(身) 등의 경계대상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능히 살피고 요지(了知)할 수 있어 두 종류의 어리석음을 허물어뜨리니, 혜(慧)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난법(煖法)의 단계에서는 [4]정단(正斷)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즉 이러한 단계에서는 생사의 허물과 열반의 공덕을 관찰하여 마침내 능히 용맹 정진을 일으킬 수 있어 생사에 떨어지지 않고 신속하게 열반으로 나아가니, 근(勤)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정법(頂法)의 단계에서는 [4]신족(神足)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즉 이러한 단계에서는 능히 심식(心識)을 제어할 수 있어 물러남이 없는 단계[不退位]로 나아가며, 끝내 신(信) 등의 선근을 다하지[匱乏]하지 않으니, 정(定)의 작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인법(忍法)의 단계에서는 5근(根)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즉 이러한 단계에서는 악취를 영원히 종식하여 마침내 [더 이상] 물러나거나 떨어지지 않으며, 신속하게 이생(離生)의 증상의(增上義, 즉 견도를 말함)에 들게 되니, 성취한 근(根)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세제일법(世第一法)의 단계에서는 5력(力)이 증가한다고 설한다.
즉 이러한 단계에서는 더 이상 번뇌에 의해 굴복되지 않으니, 힘[力義]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비록 인위(忍位) 중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5력이 증가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10)
혹은 이러한 단계에서는 그 밖의 다른 일체의 이생법(異生法, 즉 유루 세속법)에 의해 굴복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세제일법]위에서는 [5]력에 치우쳐 그것만이 증가한다고 한 것이다.
수도(修道)의 단계 중에서는 보리(깨달음)의 단계[菩提位, 즉 무학위]가 가까워져 깨달음[覺]을 돕는 힘이 뛰어나기 때문에 [7]각지(覺支)가 증가한다고 설한다.
혹은 이러한 단계 중에서는 9품의 혹을 끊고 자꾸자꾸 깨닫기 때문에 [7]각지가 증가한다고 한 것이다.
견도(見道)의 단계 중에서는 존재하는 도가 모두 다 갖추어졌기[具足] 때문에 [8]도지(道支)가 증가한다고 설한다.
즉 [성제를] 살펴 추구하는 것[尋求]의 근거가 되고, 아울러 [성제의] 통달(通達)로 나아가는 것[通往趣]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 것으로, 견도위 중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수승하다.
즉 견도위에서는 성혜(聖慧)가 처음으로 생겨나 [4]제의 이치를 참답게 살펴 추구하는 것이 수승하기 때문에, 또한 이러한 단계에서는 [더 이상] 기약하는 마음[期心]을 일으키지 않고, 능히 신속하게 [통달로] 나아가는 것이 수승하기 때문에 [8도지가 증가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계경에서 먼저 7각지를 설하고, 뒤에 8도지를 설한 것은 수(數)의 증가에 따른 것일 뿐, 수습(修習)의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다.11)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이러한 37각분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설정하였다.
“행자(行者)는 최초로 ‘혜’의 세력에 의해 신(身) 등의 경계대상의 자상과 공상을 참답게 요지(了知)하여 여러 선법을 이끌어 일으키니,
이는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여러 맹인들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먼저 4념주를 설한 것이다.
4념주에 의해 여러 경계대상을 요지하고 나면 악을 끊고 선을 닦는 것에 대해 능히 올바른 노력[正勤]을 일으킬 수 있으니, 그래서 두 번째로 4정근을 설하게 된 것이다.
[4]정근의 힘에 의해 상속 중의 과실이 줄어들고[損減] 공덕이 늘어나면[增盛], 비로소 능히 수승한 선정을 수습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4신족을 세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수승한 선정을 근거로 하여 신(信) 등을 출세간법의 증상연(增上緣)이 되게 하니, 이에 따라 5근을 네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5]근이 이미 성립하였으면 악취를 초래하는 악업과 번뇌에 능히 굴복되지 않으니, 이에 따라 5력을 다섯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5]력이 이미 성립하였으면 4성제의 경계대상을 능히 참답게 깨달을 수 있어 [이에 대한] 의심의 생각[疑慮]이 없기 때문에 7각지를 여섯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이미 4성제의 경계대상을 참답게 깨달았으면 생사를 싫어하여 버리고[厭捨], 즐거이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8]도지를 일곱 번째로 설하게 된 것이다.”
[각분] 중의 하나 하나에 대해서도 그 순서를 분별해보면 경과 논에서 해석한 바와 같으니, 마땅히 올바로 생각하고 추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논(論, 『현종론』) 중에서는 법상(法相)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
그러한 순서에 관한 이치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서술하지 않기로 한다.
④ 보리분법의 유루ㆍ무루 분별
지금 여기서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각분 중의 몇 가지가 무루이고, 몇 가지가 유루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7각지와 8도지는
한결같이 무루이며
세 가지의 4와 5근ㆍ5력은
두 종류 모두와 통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 가운데 7각지(覺支)와 8성도지(聖道支)는 오로지 무루이니, 이것은 바야흐로 오로지 수도위와 견도위 중에만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도위에서는 7각지가 증가하여 보리(菩提, 즉 진지와 무생지)에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으로, 말하자면 유정지(有頂地)를 대치하기 때문에 각지의 본질은 한결같이 무루이다.
즉 일체의 각분(覺分, 보리분법)이 모두 보리(菩提)가 [생겨나는] 것을 돕는 것임에도 오로지 이것만을 유독 ‘각지’라고 이름하게 된 것은, 이것이 가장 보리의 과보와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7각지가 [무루임을] 입증하였으니, [여기서는] 다만 유정지를 대치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유정지를 대치하는 7각지)을 위시하여 유사하게 하지(下地)를 대치하는 것도 오로지 무루에 대해 각지라는 명칭을 설정하였으니, 만약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두 가지(유루와 무루)와 통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혹은 일체의 보리분법 중에서 보리에 가깝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각지’라는 호칭을 설정하였다.
즉 [온갖] 도 가운데 수도위의 그것은 보리의 성질에 가까우며, 보리에 가까운 것은 오로지 바로 무루이기 때문에 무루의 수도를 바야흐로 ‘각지’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한 견도위 중에서는 8도지가 수승하기 때문에 이것도 한결같이 무루성에 포섭된다.
비록 정견 등은 유루와도 역시 통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유루의 정견)을 성도지(聖道支)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성도지라는 명칭은 무루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논자(論者)들은 [37]각분법(覺分法)에서 [8도지가] 7각지 뒤에 설해졌으면 결정코 무루이지만, 만약 [7각지] 앞에 설해졌다면 두 가지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다.12)
[여기서는] 이미 [7]각지 다음에 비로소 [8]도지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8도지는 한결같이 무루이다.
그 밖의 각분(4념주ㆍ4정단ㆍ4신족ㆍ5근ㆍ5력)은 두 가지(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은 이에 준하여 이미 성취된 셈이다. 즉 각분 중 앞의 [수행]단계에서 증가한 것이라면, 그것은 뒤의 단계에서도 그 세력이나 작용이 역시 증가하지만, 뒤의 단계에서 증가한 것은 앞의 단계에서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13)
그래서 비바사사(毘婆沙師)는
“[4]념주는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로부터 진지와 무생지가 일어날 때까지 항상 증가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이다.
⑤ 보리분법의 소의지(所依地)
이러한 37각분은 어떠한 지(地)에 몇 가지가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초정려에는 모두가 존재한다.
미지정에는 희근이 제외되고
제2정려에는 심(尋)이 제외되며
제3ㆍ4정려와 중간정에는 두 가지가 제외된다.
앞의 세 무색정의 단계에는
계(戒)와 앞의 두 종류가 제외되며
욕계와 유정지에는
각지와 도지가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초정려 중에는 서른일곱 가지가 모두 존재한다.
미지정의 단계에는 희각지(喜覺支)가 제외되니, 하지의 법에 대해 여전히 의심의 생각[疑慮]을 품고 있어 능히 믿음[信]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희’를 낳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미지정이 처음으로 현전할 때에는 하지의 번뇌를 끊고 제거할 수 없으며, 후시에 비록 이미 끊어졌다고 할지라도 존재하는 유형[類, 즉 의심의 생각]은 이전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미지정)을 일으킬 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일체의 근분지(近分地)의 도는 다 [갖은] 힘을 다하여야 일어나기 때문에 ‘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14)
제2정려에는 정사유(正思惟)가 제외되니, 그러한 정려 중에서는 이미 심(尋)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그러한 경지에는 ‘심’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러한 상지의 등지가 일어나면 적정(寂靜)하게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러한 두 지(미지정과 제2정려)에 존재하는 [각분의 수는] 각기 서른여섯 가지이다.
제3ㆍ제4정려와 중간정에 존재하는 [각분의 수는] 각기 ‘희(喜)’와 ‘심(尋)’을 제외한 서른다섯 가지이다.
앞의 세 무색정에는 각기 계(戒)의 세 갈래를 제외하고,15) 아울러 ‘희’와 ‘심’을 제외한 서른두 가지 각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욕계와 유정지에는 각기 [7]각지와 [8]도지를 제외한―거기에는 무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스물두 가지의 각분만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온갖 경지[地]에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각분이 현전한다.
그러나 [각분의] 적고 많음은 결정되어 있지 않으니, 이를테면 단계[位]의 차별에 따라 뒤의 것은 반드시 앞의 것도 겸(兼)하고 있을 뿐더러16) 하나의 본질[體] 상의 뜻이 다수의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17) 다수의 종류가 구시(俱時)에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4념주만은 필시 구생(俱生)하지 않으니, 그것은 소연(즉 身ㆍ受ㆍ心ㆍ法)에 근거하여 네 가지로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두 가지의 ‘혜’가 구시에 생겨나는 일도 없는데, 하물며 일시에 네 가지 ‘혜’가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을 것인가?
또한 하나의 ‘혜’가 경계대상에 근거하여 다수로 나누어질 수도 없으니, 만약 총연(總緣)인 법념주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필시 어떠한 ‘혜’도 1찰나에 네 경계를 반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낳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로 볼 때, 초정려 중에는―그것을 전체적으로 말하면―서른일곱 가지가 모두 존재하지만, 1찰나[一念]에 단박에 현재전하는 것은 최대[極多]한 다만 서른네 가지가 있을 수 있다.18)
이와 마찬가지로 미지정과 제2정려에 중에는 최대한 다만 서른세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제3ㆍ제4정려와 중간정에는 최대한 서른두 가지가,
앞의 세 무색정에는 최대한 스물아홉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욕계와 유정지에는 오로지 열아홉 가지만이 있을 수 있다.
즉 그러한 일체의 모든 단계에는 다 세 염주가 제외되기 때문으로, 거기서 감소된 것을 단계에 따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⑥ 보리분법 여설(餘說)
⑥-1 의근을 각분(覺分)으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심왕(心王, 즉 意根)은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이치상으로 볼 때 [마음] 역시 염주 등에 포섭되고 있으니, 그것은 실로 온갖 가행선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혜’ 따위처럼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마음은 잡염분(雜染分)과 청정분(淸淨分)에 대한 세력 작용[勢用]이 균등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무리를 짓는 일[偏黨]이 없지만, 각분은 오로지 청정분 중에 있을 때만 그것의 세력 작용이 더욱 강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심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각분은 대개 제법(諸法)의 공상(共相)을 반연하여 생겨나지만, 심왕은 대개 자상(自相)을 반연하여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여사는 다시 설하기를,
“각분을 수습하는 것은 본래 일체의 번뇌를 대치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온갖 번뇌는 심소(心所)이지 마음이 아니며, 따라서 능히 대치하는 법도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심]소여야 하니, 장애(번뇌)와 대치는 서로 반대로 건립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각분은 깨달음[覺, 즉 진지와 무생지]을 보좌(輔佐)하는 것으로, 깨달음은 바로 심소로서 ‘혜’를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왕은 마치 왕이 신하를 보좌할 수 없는 것처럼 심소를 보좌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심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설하기를,
“마음은 세간을 이끄는 것으로, [3]계(界)ㆍ[5]취(趣)ㆍ[4]생(生)에서의 윤회를 단절됨이 없게 한다.
그렇지만 각분을 수습하는 것은 생사[윤회]를 끊기 위한 것으로, 이에 따라 심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설하기를,
“무시(無始) 이래 마음은 수많은 번뇌에 잡염(雜染)되어 온갖 경계로 치달리니, 사나워서 조복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마음을 조복시키기 위해 각분을 수습하는 것으로, 조복되는 것은 능히 조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⑥-2 네 대지법만을 각분으로 설정한 이유
어떠한 연유에서 온갖 대(大)심소법 가운데 오로지 네 법만을 보리분법으로 설정한 것인가?19)
실제로 그것들(대심소법)은 모두 염주 등에 포섭되고 있으니, 실로 온갖 가행선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염(念)ㆍ정(定)ㆍ혜(慧)를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은,
이러한 세 종류의 심소는 청정한 품류에 수순하는 세력 작용이 더욱 강성하기 때문에 각분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상(想)ㆍ사(思)ㆍ촉(觸)ㆍ욕(欲)은 염오분(染汚分) 중에서 세력 작용이 더욱 강성해지기 때문에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가상관(假想觀)에서는 승해(勝解)가 두드러지게 증가[偏增]하지만, 각분은 오로지 진실관(眞實觀)에 수순하는 것만을 포섭한다. 이에 따라 승해도 각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이같이] 설하였다.
“승해는 무학위에 이르러 비로소 증가하는 것으로, 경에서는 다만 그것을 무학의 갈래[無學支]로 설정하였을 뿐이다.
즉 보리분법은 유학위에서 증가하니, 이를 원인의 힘[因力]으로 삼아 능히 세 가지(즉 3승) 보리(菩提)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승해를 각분에 포섭시키지 않은 것이다.”20)
[또한] 작의(作意)의 세력은 능히 마음을 발동시켜 소연에서 쉽게 벗어나게 하고 집중[定]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각분은 경계 대상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한결같게 하는 것[專一]으로, [이러한 점에서] 그것(작의)과 서로 어긋난다.
그렇기 때문에 작의도 각분에 포섭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심(尋)은 각분으로 설정하는 것인가?
‘심’은 비록 경계 대상에 대해 마음을 채찍질하여 발동시키는 것[策發]이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여금 이치를 추구하게 하여 거기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지 경계대상을 떠돌아다니게 하여 그것에서 쉽게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심’에는] [4]제를 관찰하도록 [마음을] 채찍질하여 발동시키는 공능이 있으니, 이러한 힘은 능히 정견(正見)을 책려하는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21)
이에 따라 작의는 ‘심’의 예(例)가 될 수 없는 것이다.22)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염오법이나 혹은 청정법을 처음으로 경계대상으로 취하는 단계에서 작의의 힘이 증가할 때, 이를 설하여 비리작의(非理作意), 혹은 여리작의(如理作意)라고 하는데,
이는 경계대상과 직접 관계[至境]하여 상속하지만 그 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에 번뇌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번뇌나 각분은 요컨대 경계대상과 직접 관계하여 상속하는 상태 중에서 바야흐로 [그 세력이] 더욱 더 왕성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수(受)’는 잡염분과 청정분 중에서 다 같이 세력 작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각분으로 설정하였으니,
이에 따라 유전(流轉)의 연기지(緣起支) 중에서는 수지(受支)로 설정하였고, 환멸(還滅)의 보리분(菩提分) 중에서는 희각지(喜覺支, 즉 喜受)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수(受)가 비록 잡염품에 대해 뛰어난 것[增上]이라 할지라도 청정품에 대해서도 역시 요익(饒益)의 사업을 짓는 공능이 있으니,
마치 전다라(旃茶羅)의 성품이 비록 비루하고 저열할지라도 능히 호족(豪族)에 대해 요익의 사업을 짓는 것과 같다.23)
그래서 정려에서 요익의 갈래[支, 즉 희수]가 되었던 것을 보리분 중에서 각지(즉 희각지)라는 이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세 가지 수(受, 희수ㆍ낙수ㆍ사수)는 모두 무루와 통하는 것임에도 어떠한 연유에서 각분은 오로지 ‘희’뿐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각분이 되지 않는 것인가?
각분이 될 수 있는 것은 행상이 지극히 예리한 것으로, 낙수와 사수의 행상은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각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낙’과 ‘사’의 두 가지 수(受)는 경안락(輕安樂)과 행사(行捨)에 가려져 그 상이 명료하지 않다.24) 그렇기 때문에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⑥-3 네 대선지법만을 각분으로 설정한 이유
어떠한 연유에서 온갖 대선(大善)의 심소법 가운데 오로지 네 법만을 보리분법으로 설정한 것인가?25)
실제로 그것들(대선의 심소법)은 모두 염주 등에 포섭되고 있으니, 실로 [온갖] 가행선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信)ㆍ근(勤)ㆍ경안ㆍ사(捨)를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은, 이러한 네 종류의 심소는 깨달음[覺]에 수순하는 [세력 작용이] 강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종류는 깨달음에 수순하는 작용이 어떻게 강성하다는 것인가?
보리(菩提)를 일으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신(信)’을 으뜸[上首]로 삼아서이고,
장차 여러 행[법]을 닦게 되는 것은 ‘신’을 기초[初基]로 삼아서이며,
청정한 과보의 원인으로서 ‘신’을 근본으로 삼아서이니,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행법을] 닦아 [보리로] 나아가 [청정한 과보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근을 각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물을 맑게 하는 구슬[淸水珠]을 더러운 물 가운데 놓아두게 되면, 물은 바로 맑고 깨끗해져 눈을 갖는 모든 이로 하여금 여러 가지의 색상(色像)을 살펴보게 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마음의 품류 중에 있게 되면 함께 생겨난 마음의 품류를 능히 맑고 깨끗하게 하니, 이에 따라 능히 4성제의 이치를 관찰하고 점차로 증장하여 3[승]의 보리를 성취하게 된다.
따라서 [대선의 심소법 중] ‘신’을 가장 먼저 각분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근(勤)은 여러 행[법]을 두루 책려하고 일으켜 그로 하여금 신속하게 3승의 보리로 나아가게 한다.
만약 정근(正勤, 올바른 노력)이 없다면, 비록 이미 [보리를] 일으켜 나아가게 되었을지라도 중간에 게을러져 그만두게 되고, 끝내 그것을 성취하는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근’을 각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무시(無始) 이래로 능히 4성제를 관찰하지 못한 까닭은 모두 게으름[懈怠]으로 인해 4성제의 이치를 즐거이 청문(聽聞)하지도 참답게 사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근’은 그러한 [게으름을] 능히 대치하여 4제의 이치를 즐거이 청문하게 하고 참답게 사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히 4제를 관찰하여 신속하게 보리를 증득하게 한다.
그래서 ‘근’ 역시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경안(輕安)은 사무(事務)를 쉬어 마음을 편안하고 적당[調適]하게 하는 것이며, 행사(行捨)는 올곧은 것[正直]으로 마음을 평등(平等)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26) 온갖 출세간의 행을 능히 증장시켜 그로 하여금 신속하게 삼승의 보리로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경안과 ‘사’를 각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무시 이래로 혼침(惛沈)과 도거(掉擧)의 난심(亂心,어지러워진 마음)으로 인해 [4]제의 이치를 관찰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따라 삼승의 보리를 증득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경안은 혼침을 버리게 하고, 행사는 도거를 멈추게 하는 것이니, 이에 따라 [4]제를 관찰하여 신속하게 보리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이것(경안과 ‘사’) 역시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참(慚)과 괴(愧)도 자성선(自性善)에 포섭될 뿐더러 여러 가지 선품(善品) 중에서 백법(白法)이라고 말할 수 있어 역시 마땅히 보리분법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땅히 [보리분법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즉 무참(無慚)과 무괴(無愧)는 오로지 일체의 악심과 상응하는 것으로, 산계(散戒)에 대해서는 뛰어난 장애가 될지라도 [4]제의 이치를 관찰하는데 장애가 되는 힘은 미약하다.27)
그리고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을 일컬어 ‘참’과 ‘괴’라고 하는데, 이는 자성선에 포섭되고, 백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비록 산계에 대해서는 뛰어난 공력이 있을지라도 선정의 선[定善,즉 정려율의]에 대해서는 그것을 돕는 힘이 미약하다.
즉 보리분법에는 선정의 선에 수순하는 법과 [4]제의 이치를 깨닫는데 도움이 되는 법만이 포함되기 때문에, 그것(참ㆍ괴)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탐(無貪)과 무진(無瞋)도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바로 선근이고 자성선이기 때문이다.
역시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즉 모든 ‘탐’과 ‘진’은 6식(識)과 상응하고, 5부(部, 4제소단과 수소단)와 두루 통할 뿐더러 바로 수면의 성질로서 추악업(麤惡業)을 일으키는 뛰어난 가행이 되기 때문에 선근을 단멸하고 산선(散善,욕계의 선)을 장애하는 데에는 강력하지만, [4]제를 관찰하지 못하게 하는 힘은 저열하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탐과 무진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선근으로 일컬어지고 자성선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비록 산선(散善)의 업에 대해서는 공력이 강성할지라도 선정의 선[定善]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세력 작용은 미약하고 저열하다.
즉 보리분법은 선정의 선에 수순하는 법과 [4]제의 이치를 깨닫는데 도움이 되는 법만이 포함되기 때문에, 그것(무탐과 무진)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방일(不放逸)도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방일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행[법]을 모두 성취할 수 있으며, 부처님께서도 매번 [기회 있을 때마다] 불방일을 닦도록 권유하였던 것이다.
역시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산심의 상태[散位]에서 방일은 마음으로 하여금 5욕(欲)으로 치닫게 하며, 보시 등 산선(散善,욕계의 선)을 능히 어기게 하는 작용이 강하지만, 선정의 상태[定位]에서는 이러한 장애의 세력 작용이 뛰어나지 않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불방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다만 5욕에 대해 능히 마음을 방호(防護)하여 그것으로 치닫지 않게 하며, 오로지 한결같이 보시 등을 닦게 한다.
따라서 [불방일은] 산선에 대해서는 비록 세력 작용이 강성할지라도, 선정의 선[定善]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세력 작용은 미약하고 저열하다.
즉 보리분법은 선정의 선에 수순하는 법과 4제의 이치를 깨닫는데 도움이 되는 법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것(불방일)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불해(不害)도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야 할 것이니, 해(害)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능히 핍박하고 뇌란[逼惱]시킴으로써 3악도(惡道)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불해)은 능히 이를 대치하기 때문이다.
역시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
즉 ‘해’는 현실의 일[事]을 반연하여 생겨나 온갖 유정을 뇌란시키는 것으로, 산선(散善)을 닦는 것을 장애한다.
그리고 불해는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산선에 대해서는 강성하지만] 선정의 선[定善]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힘은 미약하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각분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대선지법 가운데 만약 [이것에 의해] 대치되는 것이 강성하고,28) 자성(自性)이 뛰어난 것을 각분으로 설정하였으며, 그 밖의 것은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대치되는 것이 강성한 것’이란 일체의 염오심과 상응하는 것을 말하며,
‘자성이 뛰어난 것’이란 [4]제를 관찰한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즉 신(信)과 근(勤)과 경안(輕安)과 사(捨)는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참(慚)ㆍ괴(愧) 등의 여섯 가지는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참’ 등의 다섯 가지는 두 가지 뜻을 모두 갖추고 있지 않으며,
불방일의 한 종류는 오로지 ‘자성이 뛰어난 것’이라는 [성질을] 결여하였다.”
⑥-4 그 밖의 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이유
어떠한 연유에서 흔(欣, 좋아함)과 염(厭, 싫어함)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이치상 그것 역시 실제로 염주 등에 포섭되고 있으니, 실로 [온갖] 가행선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두 종류는 행상이 [각분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다 같이 4성제를 두루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으며, 어떠한 지(地)에서도 항상 현전하는 일이 없을 뿐더러, [그것과 구행(俱行)하는] 마음의 품류가 협소(狹少)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설하기를,
“혜(慧)는 경계대상(즉 4제)을 관찰하는 세력으로 인해 각분을 인기하여 낳게 되지만,
대저 ‘흔’과 ‘염’은 말하자면 능히 깨달음[覺]을 순생(順生)하는 ‘혜’와는 그 뜻이 상위하기 때문에 마땅히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심(尋)과 사(伺)의 두 종류는 다 같이 가행선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아울러 유루와 무루도 될 수 있는 것이거늘, 어떠한 연유에서 한 가지(‘심’)는 각분(즉 8도지 중의 正思惟)에 [포섭되고], 한 가지는 각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실로 [이러한 법] 역시 모두 [각분과] 통하는 것으로, 그 뜻은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29)
그럼에도 ‘심’을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고, ‘사’는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심’은 성도상에서 정견을 책려하는 [성질이] 강성하고, 그것이 일어날 때 행상이 맹리하여 [4]제의 이치를 살펴 추구[尋求]하며, [정]견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공능이 있기 때문에 도지(道支)로 설정하였지만,30) ‘사’는 그렇지 않으니, 행상이 일어나더라도 지극히 미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설하기를,
“두 가지가 구행(俱行)할 때에는 ‘심’의 행상이 거칠어 ‘사’를 가리고 은폐하기 때문에,
오로지 ‘사’만이 일어나는 상태에서는 그 행상이 미약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사’를 각분 중에 별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견을 책려하여 발동시킨다고 할 때, [거기에는] 자연히 정근(正勤, 즉 正精進)이 존재할 것인데, 어찌 다시 ‘심’을 각분으로 설정한 것인가?
‘근(勤)’이 정견을 책려하는 것일지라도 ‘심’과는 다른 점이 있다.
그래서 도지(道支) 중에 [정정진과] 더불어 [‘심’ 즉 정사유를] 함께 설정하게 된 것으로,
이를테면 ‘근’이 그것(정견)을 책려하여 신속하게 승진하며 닦게[進修] 하는 것이라면,
‘심’의 세력은 [그것을] 책려하여 신속히 성제(聖諦)를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표업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각분은 오로지 선정의 선[定善]에 수순하는 법으로, 마음과 함께 하는 무표업에는 [그러한 선정의 선에] 수순하는 수승한 공능이 존재하지만, 표업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불상응법(不相應法)을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그러한 법에는 깨달음[覺]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 별도의 수승한 공능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것(깨달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으로,―그러나 무표업의 경우, 비록 불상응법이지만 도의 수레바퀴[道輪]에 바퀴통이 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지 않다.31)―그래서 [불상응법을]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두 가지 무심정(無心定, 즉 무상정과 멸진정)은 능히 마음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즉 진지와 무생지)과 상위하는 것이며,
4상(相)과 득(得)은 소상법(所相法, 生ㆍ住ㆍ異ㆍ滅하는 유위제법)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변천과 성립[遷成]의 작용을 갖는데, 이러한 작용은 잡염법과 청정법에서 평등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보리분법은 청정법에 수순하는 작용만이 뛰어나다. 그래서 [불상응법을]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⑥-5 특히 도지(道支)와 각지(覺支)의 불포섭 관계
어떠한 연유에서 ‘신(信)’을 각지(覺支)와 도지(道支)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보리를] 처음으로 일으켜 나아갈 때에는 ‘신’의 작용이 뛰어난데, 이미 성자위에 들어서도 [그러하다면] 각지와 도지로 설정하겠지만,
‘신’은 그때 세력 작용이 미약하고 저열하기 때문에 각지와 도지 중에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32)
어떠한 연유에서 각지에서는 ‘희’와 경안과 ‘사’를 설정하였으면서, 역시 또한 도지 중에는 그것을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다만 깨달음[覺]에 수순(隨順)할 뿐, 도(道)에는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수순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수도위 중에서는 각각의 지(地)마다 9품의 수승한 깨달음을 닦아 여여(如如)하게 [4]제에 대해 자꾸자꾸 각오(覺悟)하는데, 그때 그렇고 그러한 수승한 ‘희’가 발생하며, 수승한 ‘희’가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다시 즐거이 [4]제를 관찰하게 되니,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땅을 파 보물을 획득하면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다시 즐거이 땅을 파는 것과 같다.
그래서 ‘희’는 깨달음에 수순하는 힘이 뛰어나다[增]고 한 것이다.
[또한] 요컨대 경안에 의해 온갖 사무(事務)를 종식하게 되고, 아울러 ‘사’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평등하게 될 때 비로소 능히 경계대상(즉 4제)을 자세히 살펴 깨달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경안과 ‘사’를 각지 중에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세 가지(喜ㆍ경안ㆍ捨)는 도에 수순하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빠르게 일어나는 것[運轉], 이것이 바로 성도의 뜻이지만, 이 [세 가지는] 빠르게 일어나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더러 아울러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안온하게 머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도지에서는 심(尋)과 계(戒)의 갈래를 설정하면서도,33) 역시 또한 각지 중에는 그것을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그것은 다만 도에 수순할 뿐, 깨달음에는 수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에 수순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견도위 중에서 ‘심’은 정견을 책려하여 상ㆍ하 8제(諦)의 경계대상을 매우 빠르게 관찰하게 하며,
‘계’는 능히 바퀴통이 되어 견도의 수레바퀴를 성취할 뿐더러,34) [4]제 중에서 매우 빠르게 회전하게 한다.
그래서 ‘심’과 ‘계’를 다 같이 도지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尋과 戒)은 다시 어째서 깨달음에 수순하지 않는다고 한 것인가?
먼저 ‘심’은 [4]제상에서 고요[寂靜]하게 일어나지 않으니, 그것의 상(相)은 성제(聖諦)의 이치를 살펴 추구하는 것[尋求]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覺]은 이미 [4]제를 관찰하여 안온하고 고요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심’과 깨달음은 약간 상위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또한 깨달음은 바로 상응법으로서 [마음과 평등하게] 소연의 경계와 소의와 행상을 갖지만,
‘계’는 이와 상위하기 때문에 그것을 각지로 건립하지 않은 것이다.
즉 [4제를] 통달하여 일어나는 것[通運]만을 ‘도’라고 이름하기에 [이것들은 각지의] 예(例)가 될 수 없는 것이다.
⑥-6 성종(聖種)과 증정(證淨)이 각분이 아닌 이유
어떠한 연유에서 성종(聖種)은 각분(覺分)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35)
분별논자(分別論者)는 [성종이] 각분에 포섭된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들의 종의에서는 마흔한 가지의 각분을 설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염주 등에 포섭된다는 사실만을 인정할 뿐, 별도의 각분으로는 설정하지 않는다.
즉 온갖 각분은 재가자와 출가자가 다 같이 능히 수지하여 행[受行]할 수 있고, 아울러 [그것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欣樂]하는 것이지만,
성종은 오로지 온갖 출가자들만이 수지하여 행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재가자가 [그것에 대해] 즐거워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필시 수지하여 행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말하기를,
“만약 성종[의 본질]이 모두 무탐(無貪)이라고 인정한다면 앞에서 이미 해석한 바와 같을 것이지만,
만약 네 번째 성종(즉 樂斷修)의 본질이 바로 근(勤)이라고 인정할 경우 각분 중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애써 따져 힐난할 것도 없다.36)
어떠한 연유에서 증정(證淨)은 각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37)
실로 이것 역시 염주 등에 포섭되지만, 별도의 각분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모든 각분은 승진하며 수습[進修]한다는 뜻이 강하여 자주 익혀야 비로소 능히 보리를 증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종류의 증정은 증득(證得)의 뜻이 우세하여 성제를 관찰할 때 점진[漸]적으로, 혹은 단박[頓]에 증득하기 때문이니, 이에 따라 증정은 각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것은 바로 신(信)과 계(戒)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각분 중에 포섭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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