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14-25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쓴다
大德아 山僧이 說向外無法하면 學人不會하고
便卽向裏作解하야 便卽倚壁坐하며 舌拄上齶하고
湛然不動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하나니 大錯이로다.
是儞若取不動淸淨境하야 爲是면 儞卽認他無明爲郞主라
古人云, 湛湛黑暗深坑이 實可怖畏라하니 此之是也니라.
《해석》
“큰스님들이여!
산승이 밖에는 법이 없다고 말하면
공부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곧 안으로 알음알이를 지어서
벽을 보고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는 이것을 조사문중[祖門]의 불법이라 여기는데
크게 잘못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저 무명(無明)을 주인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깊고 깊어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강설》
이 단락은 참선공부의 일종인 묵조사선(黙照邪禪)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그 때는 화두의 성격을 띤 법어는 많이 있었으나 특별히
그 법어를 오늘날 화두처럼 참구하기를 지도하는 일은 없었다.
선문답을 알아듣지 못하면 스스로 참구하고 사유할 뿐이었다.
또 묵조사선이라고 지칭하는 말도 없었다.
뒷날 그런 폐단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말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을 뜨는 공부에 있어서
묵묵히 앉아 안으로 관하면서
생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조사문중(祖師門中)의 불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캄캄한 무명의 상태를 대기대용(大機大用),
전체작용(全體作用)의 주인공, 무위진인으로 오인한 것이다.
활발발하게 살아있는 큰 생명이
목석처럼 멍청한 상태가 되어있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임제스님이 삼도발문(三度發問) 삼도피타(三度被打)를 통하여
깨달은 경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불법의 대의를 알고자 하다가
생각이 이러한 무기공의 상태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병을 없애기 위해
뒷날 대혜(大慧)스님은
선문답의 언어인 화두를 들고 참구할 것을 권하게 되었고,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가
불교를 깨닫는 최 첩경의 방편이라 생각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儞若認他動者是면 一切艸木이 皆解動하니 應可是道也니라.
所以動者是風大요 不動者是地大니 動與不動이 俱無自性이니라.
儞若向動處捉他하면 他向不動處立하고 儞若向不動處捉他하면
他向動處立하나니 譬如潛泉魚가 鼓波而自躍이니라.
大德아 動與不動은 是二種境이니
還是無依道人은 用動用不動하나니라.
《해석》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옳다고 한다면
온갖 초목들도 다 움직일 줄 아니 그것도 응당 도이리라.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질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땅의 성질이다.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모두 다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곳에 서 있다.
또 그대들이 만약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은 움직이는 곳에 서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결을 치면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큰스님들이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두 가지 경계이다.
의지함이 없는 도인[無依道人]이라야
움직임도 쓰고 움직이지 않음도 쓰느니라.”
《강설》
우리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옳으냐?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다.
불교를 한마디로 표현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중도(中道)다.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선과 악의 상대적 견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쪽으로든 치우쳐 있으면
그것은 편견이고 변견(邊見)이다.
잘못된 견해다.
그래서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위진인은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쓰고 다 수용한다.
양변을 멀리 벗어나서 치우치지 않는다.
차(遮)와 조(照)의 동시적 삶을 산다.
그것이 불교적 삶이다.
왜냐하면 선과 악과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과
있음과 없음과 사랑하고 미워함과
주관과 객관과 번뇌무명과 보리열반과
부처와 중생과 성인과 범부 등 이 모든 것이 본래로 공인데
다만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의해서 존재하므로 공이다.
공이기 때문에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이런 이치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도라고 한다.
존재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이치를 알아서 거기에 맞게 살면 그것이 중도적 삶이다.
중도적 삶을 사는 사람을 무의도인, 무위진인이라고 한다.
부처요 조사라고 한다.
그들은 혹은 동(動)을 쓰고 혹은 부동을 쓴다.
영가스님이 말씀하시기를,
“행할 때도 선이고 앉을 때도 선이다.
어·묵·동·정에 그 마음 편안하다.”라 하였다.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4-25 無依道人(무의도인)
大徳(대덕)아 山僧(산승)이 説向外無法(설향외무법)하면
學人不會(학인불회)하고 便即向裏作解(변즉향리작해)하야
便即倚壁坐(변즉의벽좌)하며 舌拄上齶(설주상악)하고 湛然不動(담연부동)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취차위시조문불법야)하나니 大錯(대착)이로다.
是儞若取不動清淨境(시이약취부동청정경)하야 爲是(위시)면
儞即認他無明爲郎主(이즉인타무명위랑주)라
古人云(고인운), 湛湛黒暗深坑(담담흑암심갱)이
寔可怖畏(실가포외)라하니 此之是也(차지시야)니라.
儞若認他動者是(이약인타동자시)면 一切草木(일체초목)이
皆解動(개해동)하니 應可是道也(응가시도야)니라.
所以動者是風大(소이동자시풍대)요 不動者是地大(부동자시지대)니
動與不動(동여부동)이 倶無自性(구무자성)이니라.
儞若向動處捉他(이약향동처착타)하면 他向不動處立(타향부동처립)하고
儞若向不動處捉他(이약향부동처착타)하면 他向動處立(타향동처립)하나니
譬如潜泉魚(비여잠천어)가 鼓波而自躍(고파이자약)이니라.
大徳(대덕)아 動與不動(동여부동)은 是二種境(시이종경)이니
還是無依道人(환시무의도인)은 用動用不動(용동용부동)하나니라.
그 다음에 무의도인이라고 했어요.
의지할 依자, 의지함이 없는 도인.
또 옷 衣자로 써서 옷 없는 도인 그런 표현도 써요.
왜냐,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아니면 법문을 통해서
이리 저리 알고 있는 것이 전부 하나의 옷이 되니까.
나를 포장하고 있는 하나의 옷이 되기 때문에
또 그 상식과 그 지식에 그냥 의지하니까.
그런데 진정 우리 자신은 무슨 지식도 아니요 상식도 아니요
성인의 가르침도 아니라 어디에 의지할 것도 아니여,
불조에게도 의지할 게 아니다.
그런 주체성을 표현한 말이 무의도인, 이런 표현을 합니다.
또 무의진인, 같은 뜻이죠.
‘大徳(대덕)아 山僧(산승)이 説向外無法(설향외무법)하면’,
늘 말하기를 밖을 향해서 법이 없다,
밖엔 아무 법이 없다라고 했는데도.
‘學人不會(학인불회)하고’, 학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便即向裏作解(변즉향리작해)하야’,
그리고는 곧 반대로 속을 향해서 알음알이를 또 지어.
그리고 ‘便即倚壁坐(변즉의벽좌)하며’, 곧바로 벽을 의지하고 앉아있다.
‘舌拄上齶(설주상악)하고’, 혀는 입천장에 딱 대고,
‘湛然不動(담연부동)하야’, 고요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取此爲是祖門佛法也(취차위시조문불법야)하나니’,
그러면서 이것을 취해서 그 모습을 가지고 조사문중의 불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묵조선을 은연중에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죠.
거기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지
덮어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그건 또 문제가 되는 거죠.
이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는데
‘大錯(대착)이로다’, 앉아있는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다 이 말이여.
조문불법이 아니다 크게 잘못됐다.
‘是儞若取不動清淨境(시이약취부동청정경)하야’,
이것은 그대들이 만약 不動清淨境(부동청정경)을 취해서,
움직이지 아니한 깨끗한 마음 상태, 그게 清淨境이죠.
‘爲是(위시)면’, 그것을 옳은 것이다, 좋은 것이다 라고 삼을 것 같으면
‘儞即認他無明爲郎主(이즉인타무명위랑주)라’,
그대는 곧 저 無明(무명)을 오인해가지고
어진 주인(郎主(양주))으로 삼는 것이다.
무명을 오인해서 본심으로 삼는 것이다,
郎主 라고 하는 건 옳은 주인, 주인을 삼는 것이다 라는 것은
본심을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무명이 본심은 아닌데 그걸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죠.
‘古人云(고인운)’, 그건 예컨대 古人(고인)이 말하기를,
‘湛湛黒暗深坑(담담흑암심갱)이’, 맑고 맑으면서 그리고 캄캄해.
캄캄한 깊은 구렁텅이야.
우리의 의식이 가만히 앉아서 사량분별도 없는 상태에서 있으면
그것이 말하자면 담담흑암심갱이다 이렇게 보는 거야.
그래서 대혜스님이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새로운 공부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 문제를 생각하라, 그걸 화두를 생각하라,
네가 알 수 없는 그런 이치를 하나 생각을 해봐라,
이래서 그 때부터 화두가 개발이 된 거죠.
그냥 앉아있으면 湛湛深坑이 되버려요,
黒暗深坑, 캄캄한 깊은 구렁텅이가 되는 거라.
‘寔可怖畏(실가포외)라하니’, 실로 가히 두렵고 두려운 일이다 라고 하니
‘此之是也(차지시야)니라’, 이것을 바로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의 공부인들의 폐해를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정말 수준이 높고 근기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공부를 아주 잘 할 수 있죠.
아무런 방법이 없잖아요.
뭘 생각하라 한다든지 외우라 한다든지 그런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냥 앉아 있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지어 가는데
이게 하근기한테는 크게 문제가 되니까
그래서 대혜스님이 그렇게 하느니
하나의 문제를 떠올려서 그것을 참구하라,
그것을 의심해 들어가라.
이렇게 그 근기에 맞춰서 개발한 화두법,
참 그거는 아주 잘 만든 거예요.
그래서 정신을 또록또록 차리게,
캄캄한데 빠져있지 말고 정신을 또록또록 차리게 만드는 거지,
惺惺寂寂(성성적적)하게 만드는 거죠.
그런 관계로 이어지기까지의 선방에서 공부하는 것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儞若認他動者是(이약인타동자시)면’,
그대들이 만약 認他動者是(인타동자시)하면, 저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좋은 경계라고 하니까 우리의 마음자리는
여기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죠.
저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一切草木(일체초목)이 皆解動(개해동)하니’,
다 움직일 줄 안다 이거요.
일체초목도 바람 불면 다 움직이니까.
‘應可是道也(응가시도야)니라’, 응당히 가히 이것도 다 도가 아니냐.
초목도 다 움직일 줄 아니까 그것도 도가 아니냐.
‘所以動者是風大(소이동자시풍대)요’,
所以(소이)로 動者(동자)는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이 風大(풍대)요,
‘不動者是地大(부동자시지대)니’,
그 다음에 不動者(부동자)는 是地大(시지대)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지대니.
‘動與不動(동여부동)이’,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
‘倶無自性(구무자성)이니라’, 다 자성이 없다.
그러니까 일체초목이나 지대나 땅이나 이것은 전부 자성이 없는 것이다.
‘儞若向動處捉他(이약향동처착타)하면’,
그대들이 만약 向動處捉他(향동처착타)하면,
움직이는 곳을 향해가지고서 거기에서 그것을 잡으면, 그랬어요.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인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他向不動處立(타향부동처립)하고’,
그러면 그것은 不動處(부동처)를 向(향)해서 서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곳에 가있다 이겁니다.
‘儞若向不動處捉他(이약향부동처착타)하면’
또 반대로 그대가 만약 不動處(부동처)를 향해서
捉他(착타), 그것을 잡으면,
그 주인공을 붙들려고 하면
‘他向動處立(타향동처립)하나니’, 그것은 이미 또 動處(동처)에 가서 서있다,
‘譬如潜泉魚(비여잠천어)가’,
비유컨대 潜泉魚(잠천어), 물에 잠겨 있는 고기가
‘波鼓而自躍(파고이자약)이니라’,
물결을 따라서 타고 스스로 뛰는 거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의식을 그렇게 비유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게 당시 공부 방법을 엿볼 수가 있는데 아주 어려워요.
아주 구체적으로 뭐라고 탁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한다 하지를 않고
잘못 하는 것만 여기서 지적을 해 놨습니다.
‘大徳(대덕)이여 動與不動(동여부동)은 是二種境(시이종경)이니’,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다 두 가지 경계다, 양변이다 이거죠.
우리의 주인공은 마음자리는 양변에 치우친 것이 아니죠.
움직이는 것도 마음이요 움직이지 않는 것도 마음이라.
그러면 움직이는 것에나 움직이지 않는 것에 치우치면
이건 우리 마음자리를 제대로 못 보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 無依道人, 여기 의지할 依자, 의지함이 없는 도인 했잖아요.
그래서 ‘還是無依道人(환시무의도인)은’, 또한 이 무의도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有無에도 의지하지 않지만
부처나 보살이나 조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까,
‘用動用不動(용동용부동)하나니라’,
그러면서 그것을 다 조화롭게 수용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動도 쓰고 不動도 쓴다, 쓴다는 말은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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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길상행님 부처님 지혜광명 충만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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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을 불성이 밖에 있지 않다 하면 안을 보고 사리분별하는 모습을 말씀주십니다
밖에 있다면 밖에 집착하는 모습을 말씀주십니다
집착없음이 , 집착이 끊어진 자리임을 배웁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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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臨濟錄 - 無比스님 講說 84 - 示衆 - 14-25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다 쓴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_()__()_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utmost heart that the holy and holy Buddha's robe and mercy light will shine on it.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