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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59권
6. 변현성품 ③
3. 견도의 가행론(加行論)
3.1. 서언(緖言)
여기서 마땅히 사택(思擇)해 보아야 할 것이니, 성제에 대한 진실 된 관찰[眞見]을 추구하는 자는 처음에 어떠한 행을 닦아야 하는가?
성제의 관찰을 추구하는 이가 초업지(初業地, 초입자의 단계)에서 익혀야 할 행의(行儀)는 지극히 번잡하고 광대한데, [이에 대해] 두루 알고자 하는 자라면 마땅히 여러 성자들이 편집한 관행(觀行)에 관한 여러 논서 중에서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요점만을 간추려 말하면 [이러하다].
처음으로 수행하려는 자는 마땅히 해탈에 대한 깊은 의요(意樂)를 갖추고서 열반의 덕을 관찰하여 생사의 허물을 등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방편으로써 선우(善友)와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니, 선우는 능히 온갖 행(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청문(聽聞) 등의 힘을 갖춘 이를 ‘선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마치 양의(良醫)와 같은 이를 말한다.
즉 [양의는] 질병을 치료하는 단계에서, 먼저 모든 병자의 본성은 어떠하며, [그것이] 어떻게 변이하였는지, 어떤 법도[規度]로써 살았는지, [그는] 어떤 세력을 가졌으며, 어떤 곳에서 [지내야 할지], 어느 때에 [머물러야 할지], 무엇을 익혀 그러한 성품을 성취하였는지, 어떠한 의지[志]를 지녔고, 어떠한 과실을 지녔으며, 어떠한 법에 따랐는지, 무엇을 먹었고, 어떠한 업을 행하였으며, 어떠한 단계[位]로 머물렀는지, 그는 이전부터 어떠한 약을 자주 복용하였는지를 자세하게 관찰한다. 그런 다음으로 온갖 약의 맛과 세력[味勢], 완숙의 공덕[熟德, 효능]을 관찰하여 주어야 할 이에 따라 뜨겁게도 하고 기름지게도 하며, 혹은 탕(湯)으로도 만들어 온갖 병을 이끌어내니, 무릇 투여한 약의 공능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자비와 지혜[悲智]를 갖춘 존자(즉 선우) 역시 이와 같아서, 먼저 번뇌의 중병에 시달리면서 처음으로 업을 익히려고 하는 모든 제자들의 본성은 어떠한지--즉 탐행(貪行)이라 해야 할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잡행(雜行)이라 해야 할지,
[그것이] 어떻게 변이하였는지--즉 무엇이 그렇게 변이하게 되었는지, 오랜 시간 거치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 잠깐 사이에 그렇게 된 것인지, 본성을 어김으로써 어떠한 공덕을 갖게 되었는지,
어떤 법도로써 살았는지--즉 세간의 영예를 추구하였는지, 출세간의 견고한 공덕을 추구하였는지,
[그는] 어떤 세력을 가졌는지--즉 그의 소의신은 지극히 견고하여 노고(勞苦)를 감내하며, 홀로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오로지 두다(杜多, dhuta, 고행)의 공덕을 수행(受行)할만 한지, 지극히 연약하여 [그러한 공덕을 수행할 수 없는지],
어떤 곳에서 지내야할지--즉 어떤 이는 이러한 처소에서 지내면 이러한 공덕이 상실되거나 생겨나고, 처소 역시 그에 따라 온갖 득실(得失)을 낳기 때문에 이치상 반드시 이에 대해 관찰해야 한다.--
어느 때에 머물러야 하는지--즉 어떤 이는 이러한 때에 머물게 되면 흔쾌하게 되고, 이러한 때에 따라 역시 흔쾌한 마음[欣樂心]을 낳게 되기 때문에 이치상 반드시 이에 대해서도 관찰해야 한다. 혹은 여기서 ‘때’라고 함은 근기가 성숙하는 단계를 말한다.--
무엇을 익혀 그러한 성품을 성취하였는지--즉 그는 이전부터 어떠한 공덕을 자주 익혔기에 지금 이러한 성품을 성취하게 되었는지,
어떠한 의지[志性]를 지녔는지--즉 의지가 겁약(怯弱)한지, 강성하고 용맹하여 고요한 곳을 감당할만한지, 의지가 부지런한지, 지극히 용맹하여 능히 무거운 짐을 지는 크나큰 수고를 감당할만한지,
어떠한 과실을 지녔는지--즉 증상만(增上慢)을 지녔는지, 다른 이의 말을 듣고 그것에 잘 이끌리는지, 심사(尋伺)가 많은지, 성질이 어리석고 몽롱한지, 첨곡(諂曲)이 많은지, 성질이 성급하고 요란한지, 공경 받기를 탐하는지, 이양(利養)을 애호하는지, 그릇되게 이해[邪解]한 것이 많은지, 의혹이 많은지, 어떤 법에 따를 경우 어떠한 번뇌가 견고하게 수축(隨逐)하며, 어떻게 가동하는지,
그는 응당 마땅히 무엇을 먹어 그의 몸이 이롭게 하였는지--즉 몸은 먹거리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그는 어떠한 업을 행하였는지--즉 일찍이 행하였던 바를 먼저 닦게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
어떠한 단계로 머물렀는지--즉 공덕과 과실은 나이의 단계[年位]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마땅히 관찰해야 한다.--[관찰하고 나서] 그에게는 어떠한 법의 약을 주어야 할지--즉 그냥 내버려두어야 할 것[捨置]인지, 마땅히 꾸짖어야 할 것인지, 마땅히 칭찬하고 격려해야 할 것인지,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인지 [자세하게 관찰한다].
그런 다음으로 마땅히 온갖 대치문(對治門)을 관찰하여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수여하여 배우도록 함으로써 각기 저마다의 이익을 얻게 하여 [대치문의] 공능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세존께서는 계경 중에서 “선우에 가까이 하는 것을 ‘완전한 범행(梵行)’이라 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1)
3.2. 계(戒)의 안주와 문(聞)ㆍ사(思)ㆍ수소성(修所成)의 3혜(慧)
행자(行者)가 이미 능히 정법을 설해 줄 선우에게 섭지(攝持)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마땅히 어떠한 행을 닦아야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이는
마땅히 계(戒)에 머물면서 문(聞)ㆍ사(思)ㆍ수(修)로써
성취되는 바를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말과, 말과 뜻과, 뜻이 그것의 경계이다.
將趣見諦道 應住戒勤修
聞思修所成 謂名俱義境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유정으로서 발심하여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見諦, 즉 見道]로 나아가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청정한 시라(尸羅, 즉 계율)에 안주하고, 그런 연후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설하기를, “시라에 안주함으로써 능히 두 가지 법(止와 觀)을 부지런히 수습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청정한 계에 안주하고 나서 다시 여러 유가사(瑜伽師)와 자주 가까이하여 유가사의 교수(敎授)와 훈계에 따라 정근해야 한다. 즉 진리를 관찰하는 도에 수순하는 청문(聽聞)을 섭수하고, 청문하고 나서는 들었던 법의 뜻[法義]을 부지런히 추구할 때, 스승의 교수와 훈계에 의해 생겨난 혜(慧)가 증가하게 되고, 점차로 뛰어나게 되며, 점차로 밝아져 마침내 완전히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여기서 기뻐 만족하는 마음[喜足心]을 낳아서는 안 된다. 다시 법의 뜻에 대해 스스로 전념하여 사택(思擇)할 때 이러 이러한 결정적인 혜[決定慧]가 생겨나며, 스스로의 사택을 원인으로 하여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게 되면, 온갖 번뇌 등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이라는 두 가지의 대치(對治) 수(修)를 부지런히 수습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이러한 뜻을 간략히 포섭하면 [이러하다]. 즉 수행자는 계(戒)에 머물면서 [문소성혜를] 부지런히 닦을 때, 문소성혜에 의해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고, 사소성혜에 의해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세 가지 혜(慧)의 차별상은 어떠한가?
세 가지 ‘혜’는 이를테면 순서대로 말[名]과, 말과 뜻[義] 두 가지 모두와, 뜻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이러한 세 가지 ‘혜’가 원만하게 성취되었을 때에는 모두 다 오로지 뜻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 그 때 세 가지 ‘혜’의 차별상을 분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바야흐로 가행위(처음으로 닦는 준비단계)에 근거하여 “문(聞)ㆍ사(思)ㆍ수혜(修慧)는 [각기] 말과, 말과 뜻 두 가지 모두와, 뜻을 반연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여 논설하리라.
오로지 ‘말[名, 단어]’만을 소연의 경계로 삼아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에, 문소성혜도 다만 ‘말’만을 반연하는 것은 아니다.2) 즉 스승이 설한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에 따라 [그것의] 뜻을 차별하는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경우, 이러한 ‘혜’를 일컬어 문소성혜(聞所成慧)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문소성혜에] 드는 방편에 근거하여 [문혜는] 다만 ‘말[名]을 반연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3)
문혜(聞慧)가 성취되고 나면 [말과는] 다른 별도의 뜻을 알기 위해 더욱 정근하여 스스로 살펴 사택(思擇)해야 하는데, 사택에 오류나 과실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시 스승이 가르친 명ㆍ구ㆍ문신을 기억[念]하고, 이에 따라 그 후 그 뜻을 차별하는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경우, 이를 일컬어 사소성혜(思所成慧)라고 하였다. 즉 이는 가행 시(時) 뜻을 사택하는 힘에 의해 ‘말’을 인기하여 기억하기 때문에 ‘[말과 뜻의] 두 가지 경계를 모두 반연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그리고 사혜(思慧)가 성취되고 나면, 등인(等引)이 현전하여 말[名言]에 근거하지 않고서도 뜻의 차별을 증득하게 되는데,4) 이러한 결정적인 ‘혜’를 일컬어 수소성혜(修所成慧)라고 하였다.
여러 유가사(瑜伽師)들은 이에 대해 비유하기를 화가[彩畵者]가 그림 그리는 것을 익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화가가] 그림을 익힐 때, 맨 처음에 스승으로부터 그림본[畵本]을 공경히 받아 그 모양을 자세히 살피고, 본과 마주하여 본뜨기를 배운다. 그러면서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다 마침내 진짜로 지워버리기에 이른다. 그런 후에 본을 등지고서(다시 말해 본을 보지 않고서) 거듭 생각하며 거듭 익히면서, 익힌 것에 오류나 과실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다시 본 뜬 그림을 원본과 비교하여 자신이 그린 것을 원본과 같거나 혹은 더 잘 그리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익힌 [솜씨가] 더욱 향상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그 후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더욱 뛰어나게 되고, [더 이상] 수고스럽게 그림본을 보지 않더라도 원하는 대로 모두 성취하게 되는데, 세 가지 ‘혜’를 익히는 법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시 조금 다르게 비유하였다.
즉 “어떤 사람이 깊고도 빠른 물살의 강물을 건너가려고 할 때, 일찍이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는 능히 강기슭에서 떠날 수 없을 뿐더러 [부목(浮木)과 같은 것에] 의지하여 건너가게 되며, 일찍이 배웠더라도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는 잠시 [그러한 의지처를] 버릴 수 있을지라도 멀리 가지 못하며, 물에 빠질까 두려워하여 다시 강기슭으로 되돌아오거나 혹은 의지할만한 것을 다시 붙잡게 된다.
그러나 일찍이 [수영하는 법을] 완전히 배운 자라면, 능히 힘써 노력하는 일도, [그로 인해] 피곤하게 되는 일도 없으며, 강기슭을 되돌아보지도 않고 의지할만한 것을 찾지도 않는다. 비록 물이 매우 깊고 소용돌이치는 험난한 곳을 지날지라도 능히 빠지지 않고 자유자재로 헤엄쳐 건너가게 되니, 세 가지 ‘혜’의 차별상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같이]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소성혜는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이것은 이미 말을 반연하고 뜻을 반연한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순서대로 문소성혜와 수소성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6) 그러나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건대, 세 가지 [‘혜’의] 상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 [그것의] 차별은, 말하자면 수행자가 지교(至敎)를 청문하는 것에 근거하여 생겨난 수승한 ‘혜’를 문소성(聞所成)이라고 이름하였고, 정리(正理)를 사택하는 것에 근거하여 생겨난 수승한 ‘혜’를 사소성(思所成)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등지(等持)를 닦는 것에 근거하여 생겨난 수승한 ‘혜’를 수소성(修所成)이라고 이름하였다.”7)
그러나 그(경주)는 아직 비바사(毘婆沙)의 취의(趣意)를 통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말하게 된 것이다. 비바사에서 세 가지 [‘혜’의] 차별상을 분별하였던 취의는 이와 같지 않다. 이를테면 만약 어떤 ‘혜’가 가행을 닦을 때 말[名]을 반연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뜻에 대한 이해[義解]를 인생(引生)하였을 경우, 이것(말)에 의해 인기된 ‘혜’를 문소성이라 이름하였고, 만약 가행을 닦을 때 뜻[義]을 사택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말에 대한 이해[名解]를 인기하여 기억[念]하고, 이에 따라 그 후 결정적인 ‘혜’를 낳았을 경우, 이를 사소성이라 이름하였으며, 만약 말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뜻만을 관찰하여 내증(內證)의 ‘혜’를 일으켰을 경우, 이를 수소성이라 이름하였다.
즉 그의 종의에서 이러한 세 가지 ‘혜’를 분별하면서 비록 [세 가지] 모두의 결정적인 상에는 차별이 없을지라도 지교(至敎)와 정리(正理)와 등지(等持)에 근거한 것으로, 원인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상에 차별이 있다고 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종의에서도 이러한 세 가지 ‘혜’를 분별하면서 [원만하게] 성취될 때 뜻을 반연한다는 점에서는 차별이 없을지라도 말을 반연하고, 말과 뜻 모두를 반연하고, 뜻을 반연하는 등 가행이 다르기 때문에 세 가지 상에 차별이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8)
바야흐로 사소성은 바로 정리를 사택함으로써 생겨난 결정적인 ‘혜’로서, 이러한 가행의 세력이 견고하고 강성하면 어떠한 오류나 과실도 없다. 그리고 다시금 스승이 가르친 명ㆍ구ㆍ문신을 억념(기억)하니, 이는 바로 사소성의 가행에 보조적으로 수반[助伴]되는 것이다. 이렇듯 [사소성이] ‘말과 뜻 모두를 반연한다’고 설한 것은 가행위에 근거한 것으로, 성만위(成滿位,완전하게 성취된 상태)에서도 역시 두 가지 모두를 반연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결정적인 ‘혜’가 생겨나는 단계에서는 비록 다 같이 뜻을 반연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가행 중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비바사자(毘婆沙者)는 이에 근거하여 [세 가지로] 차별하여 나타내게 된 것으로,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사소성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곳에 머무는 자[閑居者]는 [이같이] 말하였다.
“문소성혜가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경안(輕安)의 광명(光明)이 소의[신]에 두루 하지 않을 뿐더러 역시 견고하게 머물지도 않는다. 사소성혜가 현행하는 상태에서는 경안의 광명이 소의[신]에 두루 하지 않을지라도 약간 견고하게 머물 수 있다. 그러나 수소성혜가 현행하는 상태에서는 선정의 힘에 의해 인기된 수승한 대종이 [소의]신 중에 두루 하기 때문에 수승한 경안의 광명이 [소의]신 중에 변만(遍滿)할 뿐더러 그 상속 또한 견고하게 머문다. 이에 따라 행자의 소의[신]은 지극히 가볍고(경쾌하고) 용모 또한 빛나고 선명(鮮明)하여 일상의 상태와는 매우 다르다. 세 가지 ‘혜’의 차별은 이와 같다. 그 밖의 [수혜가] 결정적이지 않은 상태[不定位]에서도 역시 [용모가] 빛나고 선명한 경우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문혜와 사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앞의] 두 가지 ‘혜’를 ‘소성(所成)’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청문(聽聞)과 사택(思擇)의 힘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지만, 세 번째 수혜를 ‘소성’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수(修, 즉 등지)를 자성으로 삼는다는 뜻이니, 마치 “생명과 그릇은 음식과 보배에 의해 성취되는 것[所成]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9)
3.3. 신기청정(身器淸淨)
1) 총설
그렇다면 온갖 유정으로서 수(修, 수소성혜의 ‘수’로서 等持)에 대해 부지런히 배우기를 원하는 자는 어떻게 신기(身器, 수행의 바탕이 되는 몸과 마음)를 청정히 하여야 ‘수’를 신속하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몸과 마음의 원리(遠離)를 갖추고
만족하지 않음과 대욕(大欲)이 없어야 하는데
이는 이미 획득한 것과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희구함이 ‘없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具身心遠離 無不足大欲
謂已得未得 多求名所無
그 대치와 상위하는 것이고, 3계와
무루에 통하며, 무탐의 성질이다.
4성종(聖種) 역시 그러하여
앞의 세 가지는 오로지 희족(喜足)이다.
治相違界三 無漏無貪性
四聖種亦爾 前三唯喜足
즉 세 가지는 생의 자구(資具)이고, 후자는 업으로
네 가지 애탐의 생기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니
아소(我所)와 아(我)의 개별적인 욕탐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때문이다.
三生具後業 爲治四愛生
我所我事欲 暫息永除故
논하여 말하겠다.
신기(身器)가 청정하게 되는 것은 대략 세 가지 원인에 의해서이다.
무엇을 세 가지 원인이라 한 것인가?
첫째는 신심(身心)을 원리(遠離)하는 것이며, 둘째는 희족(喜足)하고 소욕(少欲)하는 것이며, 셋째는 4성종(聖種)에 머무는 것이다.
2) 신심원리(身心遠離)
만약 ‘수’를 신속하게 성취하고자 한다면, 요컨대 먼저 정근하여 신기(身器)를 청정하게 해야 하는데, 신기의 청정을 획득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신심(身心)의 원리(遠離)를 수습해야 한다. 여기서 ‘신(身)의 원리’란 나쁜 친구[惡朋]를 멀리하는 것을 말하며, ‘심(心)의 원리’란 악심(惡尋)을 떠나는 것을 말하는데,10) 몸과 마음이 나쁜 친구와 악심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신기가 청정해져 마음이 선정을 보다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3) 희족(喜足)과 소욕(少欲)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무엇에 의해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의복 등에 대해 희족(喜足)하고 소욕(少欲)함으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이니, 여기서 ‘희족’이라 함은 기쁘게 만족하지 않음[不喜足]이 없는 것을 말하며, ‘소욕’이라 함은 대욕(大欲, 큰 욕망)이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생을 자조(資助)하는 도구들을 많이 추구하는 자는 낮에는 나쁜 패거리들과 가까이하고, 밤에는 나쁜 생각[尋思]들을 일으키니, 이로 말미암아 마음은 선정을 획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것’의 두 가지 종류(기쁘게 만족하지 않음이 없는 것과 대욕이 없는 것)의 차별은 어떠한가?
이를테면 이미 획득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에 대해 이보다 갑절로 미묘하고 갑절로 많은 의복 등을 획득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경우, 여기서는 갑절로 뛰어난 것을 [자신에게] 맞는 것[等]이라고 나타내어 더욱 기뻐하며 욕망[欣欲]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만약 아직 획득하지 못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에 대해서는 그것의 획득을 희구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대욕’이라고 하였다.
즉 소유한 온갖 물건에 대해 만족한다면 능히 괴로움을 다스릴 수 있지만, 만약 더욱 많은 것을 추구한다면 선품(善品)을 어기게 되는 것으로, 이러한 내용[義]은 바로 계경에서 “획득된 것에 수순(隨順)하여 몸이 안락한 자는 마음이 쉽게 안정되며, 아울러 능히 법을 설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이가 괴로움을 물리치기 위해 물건을 희구하는 것은 바로 조도(助道)로서 과실이 되지 않는다”고 설한 바와 같다.11)
그렇기 때문에 경주(經主)가 말한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이같이 설해야 한다. 이미 획득한 것에 대해 미묘하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고 하여 섭섭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아직 획득하지 않은 의복 등에 대해 미묘한 것을 희구하고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을 일컬어 ‘대욕’이라 한다”고 함은,12) 정리(正理)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이미 물건을 획득하였음에도 [그것으로] 능히 괴로움을 대치하지 못하면 섭섭하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지만, 만약 아직 능히 괴로움을 대치할만한 물건을 아무 것도 획득하지 못하여 그것의 획득을 희구하는 경우, 이는 선정을 장애하지 않는데 여기에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13)
또한 [그(경주)는] 대법(對法)에서 분별한 [두 가지의 상을] 탄핵하여 말하기를, “어찌 더 많은 것을 희구하는 것도 역시 또한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을 대상[緣]으로 하는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 두 가지의 차별은 마땅히 이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대법자(對法者)는 “이미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을 획득하였음에도 아직 획득하지 못한 그 밖의 다른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을 다시 별도로 흔구(欣求)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14) 어떻게 두 가지의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대법에서] 말한 바에는 어떠한 의취(意趣)가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능히 괴로움을 대치하기에 충분한 미묘하고도 많은 의복 등을 이미 획득하였음에도 이에 대해 갑절로 뛰어난 것이 [자신에게] 맞는 것[等]이라고 나타내어 다시금 희구하려는 마음을 낳아15) 일찍이 이러한 의복 따위보다 갑절로 미묘하고 갑절로 많은 것을 획득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능히 괴로움을 대치하기에 충분한 것을 이미 획득하였음에도 다시금 그것을 갑절로 희구하는 것은 바야흐로 능히 선정을 장애하지만, 이미 획득한 것이 능히 괴로움을 대치하지 못하여 다시금 그것을 갑절로 희구하는 것은 능히 선정을 장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법자가 설한 것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혹은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 비록 다시금 희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욕(大欲)’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다. 이를테면 일찍이 생을 자조(資助)하는 온갖 도구들을 이미 획득하여 부족[乏少]한 바가 없음에도 희구하는 경우, 이와 같은 희구는 이미 획득한 것에 대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마음에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결과(부족함이 없음에도 희구하는 것)에 원인의 명칭을 설정하여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16)
그리고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생을 자조하는 온갖 도구들에 대해 돌아보는 마음 없이(다시 말해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지나치게 많은 양[過量]을 희구하는 경우, 이와 같은 희구를 일컬어 ‘대욕’이라고 하니, 두 종류의 차별상은 이와 같다.
나아가 ‘희족(喜足, 기쁘게 만족하는 것)’과 소욕(少欲)은 능히 이(不喜足과 大欲)를 대치하기 때문에 이와는 서로 반대된다.
[그러한 두 종류의] 상의 차별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을 대치하고,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 이것이 바로 ‘희족’의 상이며, 대욕을 능히 대치하고, 대욕과 서로 반대되는 것, 이것이 바로 ‘소욕’의 상이다. 다시 말해 능히 괴로움을 대치할만한 물건을 이미 획득하였을 경우, 더 이상 희구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희족(喜足)’이라고 하였으며, 능히 괴로움을 대치할만한 물건을 아직 획득하지 못하였을 경우, 지나치게 많은 양을 희구하지 않는 것을 ‘소욕(少欲)’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희족과 소욕은 3계 모두에 계속(繫屬)되지만, 역시 또한 3계를 초월하여 무루에 포섭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욕계계인 선심과 상응하는 희족과 소욕은 바로 욕계계이며, [상] 2계와 무루에 포섭되는 것도 이 같은 예에 준하여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치되는 것의 두 종류(불희족과 대욕)는 오로지 욕계계이다.
색ㆍ무색계에도 그것(불희족과 대욕)을 능히 대치하는 희족과 소욕이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현견하건대, 어떤 이가 욕계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그로부터 색ㆍ무색계의 등인(等引)을 일으킬 때, 대치되는 두 종류(불희족과 대욕)의 현행이 멀어지기 때문이며, 능히 대치하는 두 종류(희족과 소욕)의 현행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희족과 소욕의 차별상[別相]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두 종류에 공통하는 상[通相]은 말하자면 무탐(無貪)이니, 두 가지는 다 같이 능히 탐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치되는 것(불희족과 대욕)에 공통하는 상은 말하자면 욕탐(欲貪)이다.
4) 4성종(聖種)
성종(聖種)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능히 대치하는 것[能治, 즉 희족과 소욕]’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 역시 3계와 무루에 통하며,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무색계 중에는 비록 원한의 경계대상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무진(無瞋)의 선근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무색계 중에는 비록 의복 등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역시 무탐의 선근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거기서는 몸에 대해 탐하지 않듯이, 자구(資具)에 대해서도 역시 탐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에도 4성종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17)
수욕(受欲)의 성자는 성종에 대해 아세야(阿世耶, 意樂)를 갖을지라도 가행으로서 [닦는] 일은 없다. 그러나 이는 모든 성자들의 종자가 되기 때문에 ‘성종’이라 이름한 것으로, 성자들은 모두 이 네 가지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전전(展轉) 계승하며 그 순서가 단절되지 않은 것이니, 전자가 후자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적인 사실이다. 즉 모든 성자들의 법신(法身)은 다 의복에 대해 희족을 낳는 등의 힘에 의해 인기된 것으로서, 이는 바로 성자의 족성(族姓)이기 [때문에] ‘성종’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네 성종 가운데 앞의 세 가지의 본질은 오로지 희족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미 획득된 의복(衣服)과 음식(飮食)과 와구(臥具)에 대해 모두 희족을 낳는 것으로, 이러한 세 가지 희족이 바로 세 가지 성종이다. 즉 무탐(無貪) 선근에는 다수의 품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쁘게 만족하지 않는 것’인 탐을 대치하는 것이면, 이것을 앞의 세 성종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성종은 말하자면 요단수(樂斷修)이다. [여기서] ‘단’은 이계를 말하고, ‘수’는 성도를 말하며, ‘요’는 이를테면 그것(이계와 성도)에 대해 마음 속 깊이 흔모(欣慕)하는 것을 말하는데, ‘단’과 ‘수’를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요단수’라고 이름하였다. 다시 말해 이것은 바로 멸(滅)과 도(道)를 흔모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혹은 ‘단’의 ‘수’[斷之修]를 즐기는 것을 ‘요단수’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바로 멸(이계)의 도(성도)를 흔모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번뇌[惑]의 멸을 증득하기 위해 [성]도를 닦는 것’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히 대치하는 도[能治]를 지님에 따라 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역시 무탐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성종은 진(瞋) 등도 역시 능히 대치하는 것이니, 역시 또한 무진(無瞋) 등을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앞의 세 성종을 자량으로 삼기 때문에, 앞의 세 성종은 오로지 무탐의 성질이기 때문에, 이 역시 자체적으로 능히 탐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드러난 사실에 따라 한쪽(즉 무탐)으로 치우쳐 설한 것이다.18)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희족(喜足)만을 성종으로 삼고, 소욕(少欲)은 성종으로 삼지 않은 것인가?
소욕자(少欲者)의 경우, 의복 등의 물건에 대해 희구하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요(意樂, 즉 阿世耶, 뭔가를 희구하려는 마음)의 성질이 하열(下劣)한 자는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경계대상에 대해 감히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지만, 설혹 이미 많은 것을 획득하였더라도 쉼 없이 추구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현]견하건대, 희족자(喜足者)의 경우 아무리 적은 것이더라도 이미 획득한 것이 있으면 더 이상 희구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다시금 많은 것을 획득하려고 하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희족만을 성종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혹은 고행자(苦行者)의 욕탐을 억지하기 위하여 소욕을 성종으로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 같은 외도의 마음에는 뛰어난 욕탐[勝欲]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저열한 욕탐이 훈습되어 상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획득된 것에 수순하여 기뻐하는 마음[歡喜心]을 낳아 더 이상 흔구하지 않는 것을 ‘희족’이라 하였는데, ‘욕락을 즐기는 것’을 끊는 것으로는 이것이 가장 수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욕계의 유정은 대개 욕락을 즐기는데, 이같이 욕락을 즐기는 마음은 출가의 마음[出家心]에 위배되는 것으로, 번뇌를 떠나려고 할 때 마음을 어둡고 무디게 하여 능히 범행(梵行)과 정려(靜慮)가 현전하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그 허물이 가장 심대하다고 할 수 있다. 희족은 [이 같은 욕락을 즐기려는 마음을] 능히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희족만을 성종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즉 아직 획득하지 않은 많은 의복 등에 대해 희구(즉 大欲)할 때에도 마음에 환희가 생겨나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적은 의복 등을 희구(즉 少欲)할 때 환희가 생겨날 것인가? 그러므로 소욕은 능히 ‘욕락을 즐기는 것’을 대치하는 것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종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의복 등을 반연하여 생겨난 희족을 어떻게 무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이와 같은 희족을 무루라고 하였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성종은 모두 무루와 통한다고 한 것인가?
그것(즉 희족)의 증상(增上)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성도는 그것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같이] 말하게 되었던 것으로, 그래서 “성종은 모두 무루와 통한다”고만 말하였지 “의복 등을 반연하여 존재하는 희족은 모두 무루와 통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소욕이 무루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증상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성도는 그것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이같이] 말하게 되었던 것으로, [무루의] 성도가 의복 등의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세존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4성종을 설하였던 것인가?
모든 제자는 세속에서의 생의 자구[生具, 즉 의복과 음식과 와구 등]와 세속의 사업(事業)을 버리고 부처에 귀의하여 출가하였으므로, 그들을 위해 부처의 성법(聖法)과 비나야(毘奈耶) 중에도 능히 도를 닦는 것을 돕는 생의 자구와 사업이 있음을 나타내고자 하였다.19) 즉 유정으로서 생사의 집을 싫어하여 버리고서 출가하여 해탈을 추구하는 이는, 어떠한 생의 자구를 지닐지라도 획득된 의복 등에 대해 깊이 기쁘게 만족해야 하며, 어떠한 사업을 조작하더라도 깊이 단수(斷修, 번뇌의 ‘단’과 성도, 혹은 번뇌를 끊기 위한 성도)를 즐겨야 하니, 그렇지 않다면 능히 열반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성종에] 오로지 네 가지만이 있다고 하여 더 설하지도 않고 덜 설하지도 않은 것인가?
이를 닦을 때 성자의 생인(生因)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즉 성자의 생인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과실을 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공덕을 섭지(攝持)하는 것으로, 차례대로 앞의 세 성종과 네 번째 성종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종에는 오로지 네 가지만이 있다고 하여 더 설하지도 않고 덜 설하지도 않은 것이다.
혹 [그렇다고 한다면] 문ㆍ사ㆍ수소성의 온갖 선도 모두 다 성종이 되어야 할 것이니, 해탈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종은] 네 종류의 ‘애’가 생겨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해 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그것을 간략히 네 종류로 설한 것으로, 계경에서는 네 종류의 ‘애’가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필추들은 잘 들어라. ‘애’는 의복을 원인으로 하여 마땅히 생겨나야 할 때에 생겨나고, 마땅히 머물러야 할 때에 머무르며, 마땅히 집착해야 할 때에 집착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식과 와구(臥具)와 유(有)ㆍ무유(無有)를 원인으로 하는 ‘애’에 대해서도 모두 이와 같이 설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니,20) 바로 이러한 네 가지 ‘애’를 대치하기 위해 오로지 네 가지의 성종만을 설한 것이다.
그렇다면 약(藥)에 대한 희족은 어째서 성종이 되지 않은 것인가?21)
그것에 대해서는 “‘애’가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성종은 ‘애’가 생겨나는 것을 대치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인데, 계경에서는 오로지 “네 종류의 애가 생겨나는 일이 있다”고만 설하였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에 대해서는 성종을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약은 앞의 세 가지 중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즉 약은 의복 중에 포섭되기도 하며, 음식 중에 포섭되기도 하며, 와구 중에 포섭되기도 한다. 그래서 약에 대한 희족은 별도의 성종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만약 이(생의 자구)에 대해 교만[憍] 등의 과실을 인기하는 경우, 그것을 대치하기 위해 성종을 설정한 것이지만, 약에 대해서는 교만 등의 과실을 인기하여 낳는 일이 없다. 그래서 성종에는 약에 대한 희족이 없는 것이다.
혹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수용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희족을 성종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약은] 저 존자 박구라(縛矩羅) 등에게는 수용되지 않았으니, 일찍이 병에 걸렸음에도 약을 수용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22) 혹은 모든 때에 항상 수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희족을 성종으로 설정할 수 있지만, 약은 모든 때에 항상 수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의방론(醫方論)』에서도 역시 약에 대한 희족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으며, 비나야(毘奈耶) 중에서도 바야흐로 그렇게 설하고 있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지만, 의복 등에 대한 희족의 성종은 오로지 내법(內法)에서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비록 약에 대한 희족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성종으로 건립하지 않는 것은, 온갖 약은 능히 범행에 수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즉 세간을 현견하건대, 즐거이 계(戒)를 배우는 자에게 있어 약에 대한 희족은 범행을 장애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23)
혹은 부처님께서는 아(我)와 아소(我所, 나의 것)에 대한 욕탐[欲]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네 가지 성종을 설하였다. 즉 아소에 대한 욕탐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 앞의 세 가지 성종을 설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아(我)에 대한 욕탐을 영원히 소멸하여 제거하기 위해 네 번째 성종을 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스스로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말하였다.
“여기서 ‘아소’란 의복 따위를 말하고, ‘아’란 자신을 말하며, 그리고 그것을 반연하는 탐을 일컬어 ‘욕[탐]’이라고 하였다.”24)
그러나 이와 같이 해석할 경우, 그 뜻이 앞에서 해석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본송 중에서 별도의 문구(文句)로 [시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바로] 앞에서 “네 가지 애탐의 생기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고 설한 것과 비록 말은 다를지라도 뜻에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25)
이에 따라 우리 부파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다시 다른 갈래에 근거하여 이 문구를 해석하였다. 즉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욕탐[欲]’이라는 말로 설정한 것으로, 말하자면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 세존께서는 앞의 세 성종을 설하였으니, 의복 등에서 생겨난 희족과 그것의 증상에 의해 인기된 성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아(我)에 대한 집착을 영원히 소멸하여 제거하기 위해 세존께서는 네 번째 성종을 설하였으니, 요단수와 그것의 증상에 의해 인기된 성도를 모두 [네 번째] 성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갈래의 뜻은 바로 유신견(有身見)을 잠시 멈추게 하고, 영원히 제거하게 하기 위해 4성종을 설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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