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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신대원 동기 중에 C국에 계시는 어느 분께서 묵상하신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니 저가 작성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 번 읽으면서 함께 묵상하시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한상원목사 올림===
가상칠언 (막15:34)
架上七言, 즉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곱 번의 말씀은 이미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선포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제가 다시 가상칠언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이 한편으로 주제넘은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상칠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많은 교훈 중에서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설교한다기보다는 저 자신이 연구하고 묵상한다는 마음으로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후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은 동시에 주님이 제정하신 첫 번째 성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배신자 가롯 유다가 데리고 온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어 금요일 새벽에 산헤드린종교회의로 끌려 가셨습니다. 거기서 부당한 재판을 받으신 후 다시 총독 빌라도의 관저로 끌려 가셨습니다. 산헤드린에는 사형을 판결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예수님을 헤롯왕에게 보냈고, 교활한 헤롯왕은 다시 빌라도에게로 예수님을 보냅니다. 어둡고 쌀쌀한 새벽에 포승줄에 묶인 채 온갖 조롱을 받으며 끌려 다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런 죽일 놈들”하고 분노가 치밉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예수님을 채찍질 한 후 십자가 처형을 하도록 넘겨줍니다. 채찍질은 중죄인에게만 해당되는 형벌인데, 죄수를 기둥을 껴안은 형태로 묶어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채찍을 휘둘러 때리는 것입니다. 채찍 끝에는 날카로운 쇳조각이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채찍을 휘둘러 때리면 채찍이 몸에 감기면서 쇳조각이 살에 박히고, 다시 채찍을 떼어내면 몸의 살점이 뜯겨나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됩니다. 참혹하지요? 그런데, 이사야서53장5절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고, 8절에서는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혹하다 혹은 예수님이 불쌍하다는 감상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느껴야 하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채찍 형벌을 당하신 후에 예수님은 아침 일찍 자신이 매달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이 길이 바로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빌라도의 법정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올라가신 골고다언덕까지 약 800미터에 이르는 고난의 언덕길입니다. 그래서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로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실 힘조차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하셨습니다. 그래서 구레네인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오전 9시입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모두 여섯 시간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섯 시간 동안 모두 일곱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상칠언입니다. 전통적으로 가상칠언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 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34)
②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③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④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⑥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⑦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눅23:46)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여”라고 가상칠언을 시작하셨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상칠언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매달리신 십자가는 아버지가 함께 하신 십자가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함께 하신 십자가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우리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십자가를 끝까지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태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들을 영원히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잠시 아들을 버리시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그 뜻을 아시고 지금 죽기까지 순종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뜻은 이사야서53:10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그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죄인들을 위한 속건제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는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암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사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는 죄인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다시 말하면 용서-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고, 그들 나름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모르고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동일한 기도를 지금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서 예수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죄 가운데에서 멸망했을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까 심판받지 않는다고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요? 아닙니다! 로마서8:26을 보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왜 탄식하십니까?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무엇을 안타까워하십니까? 우리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즉 죄-입니다. 땅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시고, 하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변호하며 기도하시기 때문에 오늘 나 같은 죄인이 이 자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여!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뜻을 행하게 하옵소서. 어리석은 열심과 시기와 질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처럼 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들도 때때로 욕심과 연약함과 어리석은 열심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주위의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욕심과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주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심으로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 것처럼 저희들도 항상 아버지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너희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 내가 너희를 기뻐하노라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두 번째 말씀은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를 통해서 알게 되는 진리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는 선한 일을 행한 것이 없습니다. 세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무익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오직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자신은 죄인이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예수님의 긍휼을 간구했습니다. 그가 구원받은 이유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강도보다 의롭다고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낙원은 천국과는 다른 장소로 부활하기 전에 의인의 영혼이 잠시 안식을 누리는 곳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계시록 2장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계시록 22장을 보면 새예루살렘에 바로 그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낙원과 새예루살렘은 같은 장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새예루살렘은 어디에 있습니까? 히브리서12:22을 보면 “너희가 이른 곳은…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새예루살렘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히브리서 12장 23-24절을 보면 그곳에는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그곳은 어디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낙원과 새예루살렘은 서로 다른 장소가 아니라 천국의 다른 이름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천국에는 언제 들어갑니까?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바로 그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입니다(계21:4).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그날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입니다.
주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하신 것처럼 아무 공로 없는 저희에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그러나, 저희의 진정한 소망은 대궐 같은 황금집이 아닙니다. 황금집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저희들이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실 그날입니다. 그날에는 고된 시집살이로 힘들어 하던 딸이 친정 엄마의 품에서 모든 설움을 토해내듯이 저희들도 주님 품에 안겨서 펑펑 울 것 같습니다. 주님, 저희들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울음을 삼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음을 지키면서 살기에는 힘든 일과 억울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일 뿐 아니라 C국에서도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저희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때때로 고국이 그립고 천국은 더욱 그립습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외로우셨지요? 그래서 저희들의 설움과 외로움도 아시지요? 주님, 저희가 세상에서 받지 못한 위로와 세상에서 받지 못한 상급이 그날 주님으로부터 있을 줄 믿습니다. 아멘.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세 번째 말씀은 각각 모친 마리아와 제자 요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혈육관계를 부정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만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이므로 이제 하늘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기에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십자가상에서 처음으로 “여자여”라고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요2:4). 예수님이 사용하신 “여자여”라는 호칭은 헬라어로 “구나이”인데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여성” “부인” “아내”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사용하신 “여자여”는 “부인이시여”라는 존칭어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달아났다가 십자가 밑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복음서에서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대신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요한을 편애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요한을 다시 십자가 밑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돌아온 요한을 예수님은 용서하고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오. 제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입니다. 저는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만, 앞으로 요한이 아들처럼 어머니를 보살필 것입니다. 요한아, 보아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이시다. 나로 인해 평생 칼이 마음을 찌르듯이 고통과 슬픔 가운데에서 살아오신 분이다. 이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염려하는 어머니를 너에게 부탁하니 안심이 되는구나”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렇게 마리아와 요한을 새로운 가족으로 묶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혈육보다 믿음의 형제 자매가 더 가까운 가족입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롬16:13). 루포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의 아내입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가족과 친족, 그리고 동족들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 아내도 없었습니다. 그런 외로운 바울에게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루포의 어머니였습니다. 한 사람 위대한 사도 바울의 뒤에는 루포의 어머니 같은 믿음의 어머니기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저절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위인과 영웅도 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청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존경하고 따르는 믿음의 부모가 있습니까? 있다면 참으로 부럽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집사님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친자식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는 주 안의 자녀가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이제라도 만들어 보십시오. 인생 최대의 보람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작년부터 파송교회의 후원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동안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드문드문 저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행20:28). 요한복음19:27은 예수님의 말씀이 있자 그 때부터 그 제자-요한이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기록합니다. “모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람바노”인데 이 단어는 소중한 선물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마리아를 예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처럼 생각하고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있어 교회는 마리아보다 더 소중한 존재입니다. 자기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소중한 교회를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1:12에서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주셨다”는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주님, 충성되지 못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어리석게도 이 직분이 힘들어 그만 두고 싶었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직분이 감사하다고 했지만, 저는 감사하지 않고 불평했습니다. 왜 항상 물질에 허덕여야 하는지 원망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도 섭섭했습니다. 한국에 나갈 때마다 동기 목사들을 만나면 열등감과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무능한 가장의 모습만 보여 미안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이제 눈물로 회개하면서 다시 고백하려고 합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이 직분을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 세상 하직하는 날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이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피로 사신 교회를 저 같은 자에게 맡겨주시니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주님,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죄인이지만, 주께서 붙잡히실 때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죄인이지만,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십자가 밑에 나왔습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렇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비록 주님을 따르는데 여러 번 실패한 죄인이지만, 그러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십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정오 -낮12시- 입니다. 해가 가장 밝을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예수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사방을 덮었습니다. 이 어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은 예수님이 “엘리 엘리 사박다니”라고 크게 외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일상어로 사용하던 아람어입니다. 그래서 이 아람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엘리는 히브리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엘로이는 아람어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어로 된 마가복음에는 “엘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C국어 성경도 마가복음에서는 ‘엘로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엘로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곁에 섰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세 시간 동안의 어둠은 우연히 발생한 일식(日蝕)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컴퓨터로 계산해본 결과 그날 그 장소에는 일식이 발생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의 주석에 의하면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지옥의 형벌을 경험하셨습니다. 저는 칼빈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어둠이 임했을 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과 성경이 묘사하는 지옥의 상황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때문입니다.
둘째, 지옥은 캄캄한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낯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옥은 못 마른 곳입니다. 이것은 지옥이 뜨거운 불못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지옥은 자비가 조금도 허용되지 않고 극심한 고통만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지옥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말씀은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누가 심판합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누가 심판을 받습니까? 모든 죄인이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버리셨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는 지금 예수님이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의의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과 예수님이 겪으신 목마름 및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예수님을 버리셨습니까? 인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진노를 십자가 위에서 남김없이 그 아들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악한 형벌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관점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저주받은 자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향하여 죄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이 정한 모든 저주를 남김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속건제물과 화목제물이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죄인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 사함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대신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버림받았기 때문에 이제 죄인들은 버림받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를 외면하셨던 하나님은 그 낯을 다시 우리에게 향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밝은 해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는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우리의 죄를 등뒤로 던지셨다고 말하고, 또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찾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고 말하려면 이렇게 해야만 진정한 용서입니다. 다툴 때마다 다시 옛일을 들추어낸다면 그것은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과거의 잘못들을 일일이 들추어내신다면 모두가 죄의 무게에 짓눌려 미쳐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바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까? 어떤 신학자는 숨이 차서 그러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시간 동안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 시간의 단절도 예수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본 사람은 압니다. 나의 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곁눈조차 주지 않을 때, 그리고, 그것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갈 때 참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만 싶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간 사람들은 세 시간 동안만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단절됩니다. 영원히 어둠 속에서 살고 영원히 목마름 속에서 살고 영원히 고통과 번뇌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원한 사망, 혹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주님, 저희 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으니 그 위대하신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대신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기에 저희들은 지옥가지 않을 것도 믿습니다. 바울이 로마서8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줄 믿습니다. 주님, 그러나, 그 은혜를 아는 것에 머물러 있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 저희에게 향하신 그 얼굴빛,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시는 그 빛을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비추어 주십시오. 이 세상 신이 그들의 마음의 눈을 가리워 여전히 어둠 속에서 살도록 하고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명하신 하나님의 그 음성으로 그들 심령 속에 있는 어두움을 제거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들도 혼돈하고 공허한 인생에서 빠져나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5. 내가 목마르다
다섯 번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목 마르다”고 하신 것은 두 종류의 갈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갈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그 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오셨고, 뜨거운 태양 아래 세 시간이나 매달려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목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갈증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목마름은 이것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69:21에“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40:1에서는 고라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고백이지만, 성령께서는 이것을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미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9:28에서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네 번째 말씀을 설명할 때 이미 언급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간 자들의 고통에 찬 부르짖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옥은 불꽃 가운데서 뜨거움과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것입니다(눅16:24). 우리는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너무 목이 말라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적셔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그 간청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시니 십자가 곁에 있던 어떤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스펀지에 적셔서 예수님 입에 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신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지옥은 신포도주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은 영혼의 목마름으로 더 극심한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회환과 분노와 불안과 번뇌와 고통으로 밤낮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까? 지옥의 고통을 교훈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목마르다고 하셨습니까? 우리를 목마르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러 야곱의 우물을 찾아왔습니다. 그 우물에는 마침 예수님 혼자 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목마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우물에 물을 길러 왔지만, 그 여인의 진정한 목마름은 인생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물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시적인 만족, 일시적인 해갈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문제를 말씀하시고 다음에 해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이것이 세상 철학과 예수님의 차이점입니다. 세상 철학은 끊임없이 인생의 문제를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해답은 없습니다. 세상 철학은 우리를 더 목마르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해답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료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7)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
주님, 저는 목마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지식에 여전히 목마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뵌 지가 아주 오래 되었기에 목마릅니다. 내 영혼이 이 일 저 일로 인하여 낙망하므로 목마르고, 주님 아닌 다른 우물을 찾아 다녔기에 더욱 목마릅니다. 또 내 죄가 뼈를 타들어가게 하므로 목마르고, 강팍한 심령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목마릅니다. 주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 같이 저희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 목마르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지난날 여름 햇살보다도 뜨거웠던 그때의 감사의 생활을 회복하여 주시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여전히 찬송하게 하옵소서.
6. 다 이루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여섯 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을 성취했다는 것이고, 아버지의 뜻과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3:15의 원복음에서 시작하여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맺은 언약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계획이, 그리고, 가죽옷과 아벨의 제단과 출애굽과 성막과 속죄제사와 절기를 통해 예표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구속이 이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제 구속은 성취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드리워졌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찢으셨다는 것이고,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제 이것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누가복음23:45은 특별히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10:20의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는 구절과 연결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것은 첫째로 상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물건 대금을 다 받은 후에 하는 말이 “테텔레스타이”입니다. 더 이상 받을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째로 화가가 하는 말입니다. 그림을 완성한 후 자기가 뜻한 대로 표현되었을 때 만족해서 하는 말이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또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 의의 대가가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두 가지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는 죄인들을 구속한 것이고 또 하나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의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입니다. 왜 하나님의 의입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도,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도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일 위에 우리가 무엇을 더하려고 하면 그것은 은연중에 예수님의 구속과 의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죄 사함 받는 것과 의롭게 되는 것을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한 예표로 속죄일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성막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고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믿음입니까?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믿음입니까? 의롭게 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행위와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으니까 행위는 상관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니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그 은혜를 알고 감사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철저히 깨달은 사람만이 겸손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정론은 신학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무조건적인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의 겸손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정론을 고백하는 사람은 또한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내가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것은 한 청년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주님, 왜 신앙생활을 힘들게 해왔을까요? 감사함과 기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되는데, 왜 지쳐서 시험에 들 정도로 어렵게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서워하는 종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로서 기쁘게 살아가는 것인데, 왜 어리석게 신앙생활을 종교적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았을까요? 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처럼 연약한 형제와 자매를 비난했을까요? 주님,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저를 위한 구원도,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도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지지 못하는 짐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지지 못하는 짐 때문에 지나치게 괴로워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바울은 로마서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망하며 탄식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찬양합니다. 누가 우리를 이 절망 가운데서 건져내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 바로 그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제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불렀던 아버지의 이름을 다시 부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한 것임을 말합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잠시 버리셨던 것입니다. 이제 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가 부탁하신 모든 일을 마친 아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그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순교할 때 예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 그의 영혼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실 때도 아버지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영혼을 받으셨다고 믿습니다.
거대한 폭풍이 지나가고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지상 최대의 전쟁입니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아마겟돈 전쟁과 곡과 마곡 전쟁을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은유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2:31-32에서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사탄에게 승리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 골고다-해골언덕-에서 사탄의 나라는 결정적으로 격퇴를 당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숙제를 마친 아이는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듯이, 사명을 다한 사람은 고요히 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손에 그 영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썩지 않는 영광과 생명의 면류관이 그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시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셨습니다.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쓴 디모데후서 4장에서 고백했듯이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는 그날에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우리 믿음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소망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과 장소는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병상에서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은 사역현장에서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또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복된 소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품안에서 다시 눈을 뜨는 것이라는 것을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살아서는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고, 죽을 때는 아버지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게 하시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 품안에서 다시 눈을 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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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멘.ㅠㅠ
은헤로운 말씀 갑사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왕으로서 선지자로서 .... 마지막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대 제사장으로 사역을
은혜의 설교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