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날
김석희
시작은 항상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
중학교 2학년 가을 무렵, 등굣길에 전단을 한 장 받았다. ‘청룡사 불교학생회’에 가입하라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교문 어디쯤이었는지, 몇 살쯤 되는 여자가 주었는지 남자가 주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그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고 전단을 받았으며 그래서 청룡사의 불교학생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막연한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주 개인적이고 특이한 얘기가 되겠지만, 사실 나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스님이시다. 그러니 불교와의 만남을 불교학생회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그분들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높고 귀한 사람이 스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이 이 세상과 내 곁에 실존한다는 신앙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교가 내 운명이 된 것은 역시 그 한 장의 전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법회를 봉행했으며 사홍서원의 다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전단을 보고 청룡사를 찾아간 그때부터였기 때문이다.
청룡사는 비구니스님 사찰이다.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1440~ 1521)가 18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인 단종을 잃고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구니로 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유명한 절이기도 하다. 앞쪽으로는 야트막한 산봉우리가 있는데 정순왕후가 날마다 이곳에 올라 강원도 영월 방향, 즉 동쪽을 향해 단종의 명복을 빌며 울었다고 전하는 동망봉(東望峰)이 그곳이다. 나는 이 절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이 학교보다 교회에 더 열중해 있는 것처럼, 나도 청소년기 기억의 80% 이상이 불교학생회에 대한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다. 늘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으로 설법을 해주시던 김재영법사님, 무조건 밝고 친절하게 대해준 선배법우님들, 마냥 예쁘게 보였던 후배법우들, 늘 정갈했던 도량과 따뜻했던 스님들…. 질풍노도와 같았던 사춘기 시절 나는 도량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법회를 하고, 용주사 법주사 등 유명 사찰에서 엄격하고 고된 수련을 했으며, 부처님오신날에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제등행렬을 했고, 부처님의 성도일에는 밤을 꼬박 새우면서 좌선을 하기도 했다.
김재영법사님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를 졸업하고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면서 1970년 청소년포교의 새로운 장을 연 ‘동덕여고불교학생회’와 서울 대원정사, 청룡사 등 사찰 학생법회 그리고 청년불자모임 ‘청보리’를 창립하시고 꾸준히 지도하셨다. 동덕여고불교학생회는 창립 초기부터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750명의 학생들이 불교학생회에 가입했고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학교 강당에서 법회를 봉행했다. 법사님이 1999년 정년퇴임을 할 때도 동덕여고불교학생회는 재학생 500여 명이 회원이었으며, 수십 년간 불교학생회를 거쳐 간 학생들이 1만여 명이라고 하니 전법에 대한 법사님의 원력과 정진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히 짐작 할만하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청룡사불교학생회에서 김재영법사님의 지도를 받는 복을 누렸다. 법사님은 늘 진지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생애가 담긴 인쇄물을 준비해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언제나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한 확신에 차있었다. 나는 부처님 생애의 장면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겼다. 지혜가 담긴 한 줄의 싯구를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린 동자의 이야기,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도려낸 왕 이야기,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다가 눈이 먼 아누룻다 이야기, 눈이 예쁘다고 유혹하는 사내에게 눈알을 빼 준 비구니스님 이야기 등 깨달음과 자비와 정진을 위해서 목숨을 선뜻 내놓았던 부처님의 본생담과 부처님의 제자들의 일화가 마치 나의 일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렇게 형성 된 종교적 신념과 의지가 지금껏 내면화되어 있는 것 같다. 내 삶의 중요한 선택의 장면에서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인 이기영박사에게 며칠간 불교기초교리 강의를 들었다. 본래 대학생들에게 하던 것인데 고등학생들에게 처음 시도하신다고 했다. 한 번 강의를 시작하면 세 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하셨다. 교수님은 우리들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정좌한 채 꼼짝도 못하게 하시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교재 내용에 유식학까지 있었는데 그때 배운 내용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특히 십일면관세음보살님을 설명하셨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원을 세웠다. ‘세상의 모든 좋고 나쁜 인연을 관세음보살이 나를 깨우치려고 몸을 나투신 것으로 여기고 소중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체중생에게 자비로운 미소로 다가가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 되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십 오년 전부터인가 석굴암 십일면관세음보살님 사진이 걸려있다.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어 별 뜻 없이 걸어둔 것인데, 아마도 그때의 발원이 무의식 속에 남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나 보다.
요즈음은 세월호 때문에 많이 위축됐지만, 그 옛날 신라의 화랑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청소년기에 국토순례나 답사 등의 체험학습을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중요한 교육활동이다. 더욱이 그곳에서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게 되면 무언가 나도 할 수 있다거나 해냈다는 자긍심이 생긴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고 할까. 나 역시 그랬다. 용주사 겨울 수련회에서 얼음을 깨가며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던 일, 스님들의 엄격한 지도하에 하루종일 가부좌를 틀고 법문을 듣고 좌선하던 일, 새벽 예불을 하고 하루 세 때 108배를 했던 법주사 수련회에서 수계를 받았던 경험들이 불자로서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불교학생회를 다녔던 인연으로 나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익진교수님을 만났다. 내 평생을 걸 수 있는 스승이었다. 살아계실 때는 물론 돌아가신 후에도 그분의 가르침은 나에게 목숨을 건 소명 같은 것이다. 필동의 사저에 드나들며 공부하던 시절, 내 마음은 마치 도살장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소의 느낌이었다. 왜였을까? 법회에 갈 때마다 왜 죽으러가는 기분이었을까.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한다. 업장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스승님은 늘 자애로우셨지만 내 업장은 어디에도 숨을 곳을 찾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광동고등학교의 교법사가 되었을 때 스승님은 기뻐하셨던 것 같다. 평상시 보다 많은 말씀을 하시며 이 일 저 일 챙기셨던 것을 보면. 선생님의 당부는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또렷하다. “보살은 속이 푹 썩어야 한다.” “교법사는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 정말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무지렁이인 나에게 우리나라는 여자 도인이 별로 없다고 하시며 “석희가 여자 도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격려의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계셨으면 지금의 나는 스승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도인은 고사하고 죄 짓고도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하고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스승님께서 가신 후에 나는 비로소 스승 없이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교직원불자회, 불교학생회, 불교청년회를 조직해서 함께 길을 갈 도반들을 만들고 법회 준비를 통해 공부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지냈다. 그러다 어느 해인가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일 년 내내 학교 도서관에서 대학 입시생처럼 밤 10시가 넘도록 공부를 하다가 퇴근하기도 했다. 새벽에 출근해서 집에 가면 밤 12시 무렵, 지금 생각하면 한 아이의 엄마로서 무책임한 일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간절함에 대해 불보살님께서 응답하신 것일까, 다행히 스승님의 상수제자인 최봉수박사님께서 열어주신 도량에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스승님 아래 다시 또 십여 년이 흘렀다. 훌륭하신 스승님이 계시니 나는 또 많이 나태해졌다. 꾸준히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무량대복을 누리며 극락세계에 있는 샘이 분명한데 정진은 안 하고 내 마음만 편안해졌을 뿐이니 말이다. 더구나 이제는 스승님이 열어주신 ‘마하나와 아슈람’이라는 인터넷불교대학을 통해 휴대폰으로도 법문을 마음껏 들을 수 있어서, 그 엣날 인도의 나란다대학을 다니셨던 스님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이니 갈수록 마음이 느긋해지고 부처님과 스승님들께 무량한 빚만 더욱 늘어나고 있다. 비교야 되지 않지만 나도 교직생활이 삼십년이 넘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일이 정말 고혈을 짜는 일임을 알고 있다. 스승님을 생각하면 오십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마냥 시간이 많은 것처럼 여기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걱정된다.
나는 젊은 날부터 모든 복 중에 스승복이 제일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의 인격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아버지와 일면 큰스님, 법정스님, 법륜스님, 금강경독송회 김재웅법사님의 가르침을 빼고 나와 내 삶을 생각할 수는 없다. 지난 세월 그분들의 가르침을 배우며 성장했고, 내 삶의 굽이굽이마다 수없이 넘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다. 이렇듯 부처님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갈 수 있었음에 대해 감사한다.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다. 백세가 된 새로운 나의 모습과 그 눈에 보이는 세상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불교 공부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는 조금씩 나아지는 나를 만나는 것이다. 매일 어제보다 좀 더 나은 생각을 하고 좀 더 따듯한 마음이 열리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다. 지금 나의 직업은 불교종립학교의 교장이다. 다음 번 직업은 더 적극적으로 부처님께 빚을 갚는 일을 할 생각이다. 그 일이 내가 청소년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명 받고 그 이야기와 가르침을 내면화 할 수 있던 것처럼 불교를 알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좀 더 쉬워지게 하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에게 언제나 꿈을 갖게 하고 희망을 안겨 준다. 그래서 나의 시간은 늘 새싹이 움트는 아름다운 봄날이다. 방일하지 않는 부지런한 봄이 되어야겠다.
김석희 1985년 졸업. 이후 교법사로 활동하여 왔으며, 광동학원 수석교법사, 광동중학교 교감을 역임하고 현재는 광동중학교 교장으로 봉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