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 건국은 역성혁명이 아니라 즉 단순히 국왕이 왕씨에서 이씨로 바뀌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와 역사적 발전을 이루었다는 데에 있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이 새 왕조 건설 초기부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고, 또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루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왕조는 주로 과거합격자를 관리로 뽑아 쓴 관료제 사회로서, 정치는 양반관리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방의 공립학교라고 할 수 있는 향교는 일반 양인 출신들이 다수 등록되어 있었고, 국가의 비용으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비가 필요 없었으며, 농사철에는 방학을 하고 추수 뒤에 개학을 했기 때문에 주경야독이 충분히 가능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일반 양인들도 과거를 통해 충분히 출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양반들은 국왕을 견제하고 그들의 정치 권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일반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의 이념과 이론에 따라 덕치주의를 내세워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또 과전법 개혁이 혁명에 협조했던 세력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됐었다. 조선이 건국되기 직전 왕조 교체의 명분이 되어준 개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개혁이 바로 토지제도의 개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관리들에 대한 수조권 재분배 사업, 즉 과전법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 역시 왕조 교체에 협조한 급진 혁명파 신진 사대부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에 그쳤다고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과전법의 시행이 혁명파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됐다는 해석은 과전법의 시행을 공적 목적이 아닌 급진파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소지가 있다. 과전법은 고려 말 권문세족에 의한 불법적인 토지 겸병과 그로 인해 초래된 많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극도로 어려워진 국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추진되어야만 했던 개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 개혁의 필요성에 많은 백성들이 공감했기 때문에 475년이나 이어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이 건국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과전법을 단지 왕조 교체를 획책했던 사람들 개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활용된 개혁으로 평가하는 것은 조선 건국의 의미를 축소시킬 여지가 있다.
조선시대가 관료 사회로 평가받는 이유는 과거 출신이 아니면 청요직과 같은 중요한 관칙에 임명되는 것이 관행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과거 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사람들이 훨씬 더 우대를 받는 사회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음서는 있었지만 그 범위가 크게 줄어들어서 2품 이상 고관의 자손으로 한정되었고 만약 조상을 잘 만나서 음서로 관직을 받으려고 해도 최소한 4서와 5경 중 한 과목씩은 시험을 쳐야만 했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과거 출신자에 대한 우대가 제도상으로 확립되어 있었고, 순수하게 음서에 의한 요직 진출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점에서 혈통이나 가문보다 능력이 더 중시되는 합리적인 관료제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을 관료 사회로 볼 수 있는 무과를 실시해서 문무 양반 제도가 확립되었다는 점이다. 무과를 실시하게 되면서 문반과 무관을 제도적으로 차별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문반이든 무반이든 똑같이 시험을 치르고 올라온 사람들이니까 이제 차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을 올리고 내리는데 순자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임금이 함부로 관직을 올리거나 내릴 수가 없었다. 즉, 관직 승진에서 근무 경력과 소속 기관장에 의해 주어지는 근무성적 평가 등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가문의 힘이나 국왕의 총애를 받아서 높은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도 유교 예속을 많이 권장하였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 약 100년간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평화와 번영을 누리면서 수준 높은 민족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