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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신심명』⑭ 신심에는 언어 끊기고 현재도 없다 (끝) 신(믿음)과 심(마음)은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닌 신과 심이다.(信心不二 不二信心)
신은 심을 믿는 용(用)이며 심은 신의 체(體)이다. 이 용과 체는 불이의 일체이며 정혜일체이다. 불이의 신심을 혜능스님은 ‘무상(無相)의 자기’라고 했고 황벽은 ‘무심’이라 했으며, 임제는 ‘일무위(一無位)의 진인’이라고 했다. 이 신심은 한없는 영겁의 존재로서 무시무종에도 해당되지 않는 세계임을 나타낸 것이다.
유무, 색공, 미오라는 양자는 근원적으로 하나에 의해 존재한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몸으로 체득하기는 어렵다. ‘일역막수’의 선수행은 ‘정념상속’이라야 한다. 정념은 무념이며 무념은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는 경지이다.
일역막수의 현전이 ‘지도(至道)’의 세계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의 세계가 ‘일역막수’임을 스님은 천명한 것이다. 이는 신심명 전편의 골자가 된다. 일심불생(一心不生)으로 일체를 포용시키고 유즉무, 무즉유, 일즉일체, 일체즉일의 무애자재한 행실이 신심불이의 경지다.
승찬스님은 불심과 자심이 둘이 아님을 신심불이라고 일갈한다. 신심불이의 신은 중국선의 맥이 된다. 보리달마의 선은 일체중생이 동일한 진성 즉 불성이 내재하는 것을 깊게 믿는 것 즉 깨달음이 기본적인 입장이다. 중국선에 있어서 본래의 신은 이처럼 역사적 인간의 자각을 말한다.
화엄에서 말하는 ‘신은 도의 근본, 공덕의 어머니’와 같은 신해행증(信解行證)적인 것이 아니라 본각적인 것이다. 이 같은 자각의 길로서의 신에는 두가지 입장이 있다. 증(證, 깨침)과 수(修, 닦음)의 신인데, 증의 신은 ‘믿음’ ‘진실심’으로 비역사적인 법의 입장이지만, 수의 신은 ‘믿는다’의 역사적 변증의 길이다.
대승의 모든 교학은 거의 본각적인 신의 실천에 의미를 둔다. 달마선의 신은 증의 신이다. 달마선이 대승불교의 일파로서 본각문에 선 것은 당연하다.
승찬스님의 신심불이는 이러한 달마선의 계승임을 보인 것이다. 스님의 이러한 신심의 세계는 이후, 초당 영가현각의 증도가, 중당 석두희천의 참동계, 만당 동산양개의 보경삼매에 널리 퍼져 나간다. 선의 대의는 이렇게 전하여져 신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가 있는 한, 승찬 스님은 계속 살아 갈 것이다. 혜원 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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