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택 목사님의 약력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서 옮겨본다.
교회관계 활동을 좀 추가하였다.
전영택(田榮澤, 1894~1968) : 소설가 , 목사.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따뜻한 인간애를 그려냈다.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늘봄 ,추호(秋湖), 장춘(長春), 불수레. 아버지 석영(錫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10년 평양대성중학교 3년을 수료하고 진남포 삼숭학교에서 잠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고등부 문과를 거쳐 1918년 아오야마학원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곧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이때 김동인, 주요한, 김환 등과 한국 최초의 문예동인지인「창조」동인으로 참여하였다. 3 - 1운동이 일어나기 전 동경에서 진행된 유학생독립선언에 참여했으며, 잠시 귀국하여 채혜수와 결혼하였다. 일본에 다시 건너가 1922년 신학부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전영택 목사님
1927년 아현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퍼시픽 신학교에 입학하고 재학시절 흥사단에 입단했으며, 1932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그리스도교 잡지「새사람」, 「예수」의 발간에 힘썼고, 일제 강점기말에는 평양 근교에 숨어살며 요한학교에 출강하였다. 8 - 15해방 이후 1946년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 1947년 국립맹아학교 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49년 감리교신학교 교수,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 1957년 크리스천문학가협회 초대 회장 등 학계와 언론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과 1963년 기독교계명협회 회장, 1967년 찬송가위원회 가사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8년 종로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갔으며, 크리스천문학가협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금촌에 묘비가 세워졌다.
내가 전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기독교서회 편집부 말단사원 시절인
1954년이었다.
편집부장 고영춘 목사가 미국 유학을 떠나고그 후임으로 일본 YMCA 총무로 계시던
전영택 목사님이 부임하시면서다.
전 목사님은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당신의 자녀들 앞에서 '내 아들' 이라고 소개시켜주실 정도였다.
신학을 하고 고달픈 문단의 길을 가는 내 모습에서당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시는 것 같았다.
기독교서회 말단 편집부원이던 시절,
점심 때만 되면 "오군, 냉면 먹으러 갈까?" 하시고는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당시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무교동의 [삼오정]으로 가셔서,
"여기 냉면 둘이요" 하고 시키시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냉면 맛을 모르고, 설렁탕이나, 갈비탕, 육개장 등을 좋아하여
따라 가면서 무얼 먹을까 생각하던 나는 멋도 모르고, 맛도 모르고 냉면을 먹었다.
"어때? 맛았지?"
내 심정도 모르고 전 목사님은 맛있게 잡수시며
"서울에서는 이 집 냉면이 최고야."그러시는 것이었다.
이렇게 몇 년을 따라 다니다 보니까, 나도 냉면의 참 맛을 알게 되어,
지금도 겨울에 냉면을 먹는다.
이런 나를 보는 친구들은
"오 목사 고향이 평양이야?" 하고 물을 지경이다.
그런데 박봉에 아홉식구를 거느린 나는
생활하기에 쩔쩔매어 한 번도 냉면을 사드린 일이 없다.
어쩌다 월급 날 큰 맘 먹고 내가 먼저
"목사님, 오늘은 제가 냉명 대접할게요." 하고 삼오정으로 가면
목사님은 들어가는 입구 카운터에서 선금을 내시면서
"냉면 둘이요."하시는 것이었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웃으며 항의를 했지만
"나 하늘나라에 가서 받아 먹을께."
하시며 미소를 지으시는 것이었다.
목사님 가신 지 어언 40년, 그 사랑의 미소가 그립다.
나 하늘나라에 가면 제일 먼저 주님께 찬양 드리고
곧장 전목사님 찾아가
"목사님, 저 이제서야 왔어요.
이제 약속하신 대로 하늘나라 냉면 사 드릴께요." 하련다.
전영택 목사님과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