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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일
우두령에서 추풍령까지 9-10구간의 대간을 종주하다.
무더웠던 작년 9월경의 날씨를 감안하여 많은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히 흐린 날씨로 예상보다는 편안한 산행을 하였다.
그래도 이번 코스는 많이 힘들었던 산행이기도 했다.
질매재(우등령, 우두령) 출발점에서...
질매재에 대한 설명은 과거 산행기에 언급한 바가 있어 생략한다.
등산 들입구 :
일단 고지 720m 에서 산행시작이다.
맨 처음 나타나는 작은 봉우리 :
약 870m의 봉우리라고 한다.
아래사진에 가까이 보이는 정상이 삼성산이 된다.
삼성산 정상의 왼쪽 뒷편에 희미하게 보이는 정상은 여정봉이다.
삼성산(986m) :
등산로가 정상의 약간 좌측편으로 지나가기에 정상석으로 보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정상 근처에서 우측으로 난 샛길로 3m 만 올라가면 정상석을 볼 수 있다.(아래 사진 참조)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약사여래 삼불을 모실 명당을 찾다가 금오산과 수도산, 이곳 삼성산을 택해 약사암, 수도암, 삼성암을 짓고 약사여래를 봉안했다는 설화가 있다. 아마도 삼성산은 신라시대 창건된 직지사의 말사인 삼성암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다.
아래는 삼성산 정상석 사진
정상근처에서 푸른 화살표처럼 무심코 정상석을 놓치고 지나치기 쉽다.
붉은 화살표처럼 우측으로 잠시 올라가면 정상석을 볼 수 있다.
등산로에 있는 삼성산 정상근처 이정표
멀리 여정봉이 보인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황악산 능선이다.
우등령, 질매재, 우두령 ㅎㅎㅎ
삼성산과 여정봉 사이의 안부에 위치하고 있다.
진행하다보면 이정표와 쉼터의자가 있는데
여기가 진정한 우두령이다.
실제의 우두령/질매재/우등령은 충북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와 경북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아래지도와 같다.( 붉은색 )
아마도 도로가 생기면서 우두령의 위치가 변동된 듯 하다.
포장도로가 생긴 곳의 고개는 과거 고개보다는 해발고도가 낮지만
포장도로의 고개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굽이굽지 많은 거리를 지나야하기에
옛날 질매재가 고지는 더 높아도 넘어가기는 편하지 않았나 싶다.
쉼터의자
옛 우두령/우등령/질매재의 이정표
깊은 산속의 산행중 들리는 염불소리.
바로 아래 암자가 보이는데 삼성암이다.(붉은 화살표)
여정봉 1,030m
명칭의 유래는 모른다.
단지 안내판에서는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해발 1,030m라고 하기에 정상석 고도보다는 구토지리정보원의 해발고도를 믿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여정봉에서 내려가는 길에 찍은 황악산
좌측 붉은 화살표는 황악산의 지맥인 곤천산이다.
우측의 작은 봉우리는 황악산 능선의 신선봉
.
바람재(810m)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주례리와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 점마마을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바람재는 삼성산과 황악산 사이의 낮은 고도의 안부에 있는 능선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工자 모양의 열려 있는 폭 약 500m의 좁은 통로 모양의 지형을 취하고 있어, 편서풍이나 북서 계절풍이 통과하면서 풍속이 매우 빨라지는 곳이기에 풍속이 빠른 바람이 불어 바람재 또는 풍령(風嶺)이라 하였다고 한다.
황악산 능선에 올라왔다.
바람재갈림길이다.
이제 오르막은 별로 없다.ㅎㅎ
형제봉이다.
형제봉(兄弟峰, 1,040m) :
황악산 정상 가까이 올라가면 황악산 정상 600~750m전에 고도가 비슷한 봉우리가 두 개가 나타난다.
해발고도가 비슷하여 형제봉이라고 한다. 두 번째 봉우리는 약100m 진행하면 나온다. 안내판에서는 300m 떨어져있다고 한다.
여기는 두번째 형제봉 정상부
지나온 형제봉 2개
비로봉 갈림길
붉은 화살표는 삼거리(직지사로 가는 길이 있지만 폐쇄됨)이고
파란색 화살표는 비로봉 갈림길이지만 역시 폐쇄되어 있다.
(직지사로 가는 단축코스는 모두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황악산/황학산에 도착하다.
황악산(黃嶽山 1,111m)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상촌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주봉(主峰)은 비로봉이다.
비로봉(毘盧峰1111m)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백운봉(白雲峰, 770m), 운수봉(雲水峰, 740m), 남으로는 형제봉(兄弟峰, 1,022m), 신선봉(神仙峰, 944m)이 남북으로 직지사를 감싸고 있다.
산세는 평평하고 완만한 육산이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살아서 황학산(黃鶴山)이라고도 불렸으며, 조선지형도에서도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보다 더 유명한 천년사찰 직지사는 황악산(黃嶽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택리지>에도 황악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면 산행이 어려운 험한 바위산이라는 속설이 있지만, 황악산은 바위산이 아닌 흙산이다.
흙산이라 흙의 의미를 담은 황黃을 써서 황악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황악산의 주봉 비로봉을 중심으로 봉우리들이 ㄷ자 형태로 연이어 있고 ㄷ자의 열린 곳인 동쪽 산자락에 100대 명산인 황악산보다도 더 유명한 고찰 직지사(直指寺)가 있다. 정상에서 보면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봉우리들이 동쪽으로 뻗어가면서 협곡을 이룬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걷다보면 악산이 아닌 육산(肉山)임을 알 수 있다.
지나가는 길에 본 흑염소
아래의 옆으로 갈라진 나무
세월에 흘러 옆으로 갈라진 것이 숨어 있다.
옛날 산행에서 찍은 옆으로 갈라진 모습
나름 운치가 있었는데...
백운봉
백운봉(760m) :
황악산 정상에서 1,580m 북진하면 방향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백운봉 표식은 없고 트라이앵글의 지도에서는 정상부 위치를 표시하고는 있으나 정상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쉽다.
무언가 표식이 있을까 싶어 아래 푸른색화살표로 진행했는데 아무 것도 없다.
정상부에서 직진하는 희미한 길이 있기는 하지만 그랬을 경우 좌측 다른 능선으로 빠져버린다.
경사도가 높은 오르막이 끝나고 다른 능선과의 합류점이라 봉우리 이름을 붙인 듯 하다.
쉼터 4거리에 도착하여 네로님과 같이 점심을 먹는다.
진행방향에서 남쪽(우측)으로 가면 직지사가 있다.
직지사(直指寺) :
신라 눌지왕 2년(418년) 때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세웠으며, 그 후 고려 태조 19년 (939년) 능여대사가 중건했다.
참조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던 법흥왕14년(527년)이다.
즉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기 109년이나 앞선 시기의 세워진 사찰이다.
직지사의 한자(漢字)는 ‘곧을 직直’에 ‘손가락 지指’를 사용하고 있다. 이 유래는 몇 가지 있다. ① 첫 번째는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왔다가 손가락으로 황악산을 가리키며 절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② 두 번째는 고려 초 능여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자 대신 손가락으로 측량해 지었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③ 세 번째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마음을 직관함으로써 부처의 깨달음에 이른다)’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신라에 불교를 최초로 전파해준 사람이 아도스님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도(阿道)는 아두(我道),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아두(阿頭(언덕 아, 머리 두)는 언덕머리, 즉 머리카락이 없는 승려를 말하는 일반명사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해준 사람은 머리카락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아도라는 이름을 가진 특정인이 아니라고 해석해야 함이 옳을 듯하다.
즉 신라시대에 고구려에서 대머리인 사람이 와서 불교를 전파하고 절을 세웠는데, 이를 대머리화상이라 부르고 그 스님의 이름이 대머리라고 해석하고 있는 형국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라의 불교역사에서도 불교의 최초 전파자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불교가 공인된 시점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라 본다.
쉼터사거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운수봉이 나온다.
운수봉은 같은 말로 천덕산이라고 한다.
운수봉(雲水峰, 천덕산 680m) :
약 200년 전에 직지사를 찾아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근처 골짜기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여 운수리(雲水里)라고 하였으며 이 지명과 연관되어 이름이 붙은 봉우리이다.
운수봉에서 약 400m 진행하면 작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여시골산(621.1m) :
황악산에서 약 400m 북진하면 독특한 이름의 여시골산이다.
과거 여우가 많았다 하여 유래하는데, 혹자는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여시’는 우리말의 ‘옅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시골산은 ‘물이 깊지 않은 골짜기가 있는 산’이란 것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음카카오지도에서는 운수봉에서 1.5㎞ 북쪽으로 진행하면 여시골산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국토지리정보원/국토정보플랫폼(map.ngii.go.kr)에서는 ‘여시골산’은 운수봉에서 400m 북쪽에 위치하고 다음카카오의 지도의 여시골산을 ‘여우굴’이라고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다.(2019년 8월)
국토지리정보원의 여시골산에는 정상 표식도, 정상석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석은 '여우굴'로 가야 있다.
아래는 여우굴이다.
여우굴의 위치는 국토지리정보원의 여시골산과 여우굴 사이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여시골산에 도착한다.
여우한테 홀려서 그런지 정도정보지리원의 정보와 정상석의 위치가 다른다.
트라이앵글 지도에서도 여시골산의 명칭은 2개로 나타난다. ㅎㅎ
괘방령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가성산
지나가야 할 길을 붉은색으로 표시했다.
괘방령에 도착한다.
근처 주막이 있다. 쉬었다 갈 줄 알았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선두는 보이지 않는다.
괘방령(掛榜嶺, 357m) :
충청북도 영동군의 매곡면 어촌리에서 경북 김천시 대항면 향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고개의 북쪽으로 흐르는 물길은 금강의 물줄기가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의 물줄기가 된다.
인근의 추풍령이 국가업무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로(官路)였다면 괘방령은 과거시험 보러 다니던 선비들이 즐겨 넘던 과거길이며,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장사꾼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로서 추풍령 못지않은 큰 길이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급제자들의 이름을 거는 '괘방(掛榜)'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고개를 지나 다녔다고 한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이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즉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괘방령(掛榜嶺)'이 기록되어 있지만, 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고, ② 관로(官路)가 아닌 상로(商路)에 ③ 그것도 마을이 아닌 고개에 급제를 알리는 방이 붙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듯하다.
괘방령에서 가성산으로 가는 들입구
괘방령 지나 첫 봉우리 418봉 도착 전 공터
괘방령에서 가성산 가는 길의 첫 봉우리이다.
붉은색은 진행방향, 푸른색은 다른 샛길로 합류점이다.
지도상 삼거리 지점이다.
합류점인데 다른 쪽 길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오른쪽으로 멀리 김천시가 보인다.
가성산 도착전의 산성터 흔적,
사진이 뚜렷하게 나오니 않았다.
가성산에 도착
가성산(柯城山, 729.9m) :
산의 동쪽인 경북 김천시 봉산면 신암리에 가성마을이 있다.
즉 이 동쪽의 가성마을과 외가성마을에서 유래하는 봉우리로 추측된다. 가성로서 '가성(柯城)'은 나뭇가지 가(柯)를 사용한 것을 보아 화령의 '작점'이나 '사기점'처럼 소규모의 나무로 만든 진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조선지형도(1,918년)에서는 가성산(可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상 근처에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 보인다.
장군봉
장군봉(張君峰, 627m) :
괘방령을 지나면 장군봉을 만나는데 무사 장군이 아니라 장가 성씨의 총각 장군(張君)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인근 마을에 장씨 성을 가진 총각들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즉 장군봉(將軍峰)이 아닌 장군봉(張君峰)이다. 가성산과 눌의산 사이에 있는 작은 봉우리이다.
눌의산 정상부 사진이다. 아래에는 헬기장이 있다.
눌의산(訥誼山, 눌이항산訥伊項山, 누리산, 744.4m) :
장군봉에서 작은 봉우리 능선 690m 봉우리를 거쳐 우측으로 650m 진행하면 눌의산이 나온다. 눌의산은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에 위치하고 있다.
눌의산은 ‘눌이항산(訥伊項山)’ 또는 ‘누리산’이라고도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는 현 괘방령을 추풍령으로, 그리고 추풍령의 북쪽에 눌이항산(訥伊項山)을 표기하고 있으며, 현 추풍령 위치를 오도치(吾道峙)라고 잘못 표기하고 있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러 다니던 많은 선비들이 넘어간 괘방령을 몰랐을 리는 없으리라 보인다.
너무 잘 알려진 과거길이니 이전 기록과 주위의 다녀본 사람의 정보를 토대로 답사·확인없이 기록하여, 황악산 인근의 석교산, 괘방령, 추풍령, 눌이항산(눌의산), 석교산 등 통째로 위치오류가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눌의산은 세상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인 ‘누리’의 누리산으로 불린다.
누리산의 발음과 비슷한 눌의산(訥誼山), 눌의항산(訥伊項山)의 한자가 사용된다.
즉 원래 누리산이라는 순수 우리말의 지명을 표시하기위해 한자(漢字)의 음을 차용하였기에 눌의산, 눌의항산 이라는 두 개의 한자명(漢字名)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본다.
누리산을 눌의산으로 듣고 ‘눌’의 한자(漢字) 표기화하면서 드문 한자음인 말더듬 눌(訥)을 사용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고등교육용 한자 1,800자에 ‘눌’발음을 가진 한자는 '말더듬을 눌訥 ' 1개 밖에 없다.
발음에 맞추어 말더듬을 눌[訥]에 뜻없는 어조사 이[伊]를 이용하여 눌이항산(訥伊項山)이라 했을 것이고, 말더듬을 눌(訥)에 비슷한 한자인 의논할/옳을 의[誼]를 이용하여 발음에 가깝게 눌의산(訥誼山)이라 했을 것이다.
그 덕택에 어눌하다. 더디다라고 억울하게 해석하여 여러 설명이 나오고 있지 않나 싶다. 어디까지나 개인생각일 뿐이다.
① 누리산은 남동쪽으로 김천(金泉)을 바라볼 수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충북 영동(永同)을 볼 수 있다. 비슷한 고지의 주위 지장산, 용문산, 웅이산, 가성산과 달리 주변 전망이 뛰어난 곳이다.
즉 널리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누리산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다. 봉수대가 있다는 말도 있으나 봉수대 흔적은 보지 못하였지만 헬기장의 바닥이 돌로 만든 산성의 형태를 띠어 아마도 봉수대가 있다면 헬기장에 있었던 듯 하다.
봉수대가 있다는 듯은 주변 조망이 뛰어나고 또한 옛날에는 요긴한 거점 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
아래 헬기장 아랫부분, 산성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봉수대 바닥일 수도...
경사도가 높은 하산길을 거의 다 내려오면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하는 터널지역으로 들어간다.
추풍령에 도착했다.
과거 추풍령에서 들기산으로 산행하면서 오류가 있었고 해서 추풍령에 대한 추가 글을 올려본다.
추풍령(秋風嶺, 220.3m) :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과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 대간의 고개 중에서 가장 낮은 해발220m이다.
본래는 추풍(秋風)이라해서 풍요로움을 뜻하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여지승람" 등에 추풍(秋豊) 또는 추풍역리 (秋豊驛里)라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 령 (嶺)자를 붙여 고개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은 윤두서의 (동국여지도東國與地圖)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기록이 처음이라고 한다.
원래는 추풍령 일대가 분지이다 보니 인근의 지역보다 가을물이 일찍 들고, 고개치고는 발달한 분지 덕에 가을걷이가 풍성하다 하여, 추풍(秋豊)이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추풍(秋風)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산군 편에 실린 조위(曹偉 1454-1503)의 글에는,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 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에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추풍령길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경새재에 비하면 턱없이 한가로운 길이었다고 하며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9개 국도는 모두 추풍령과는 무관하게 이어진다.
다만 문경새재를 넘어 유곡역에서 제4로(영남대로)와 갈려 상주를 지나 통영으로 가는 제5로와, 천안·공주로 이어지는 제6로에서 각각 지로(支路,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날의 지방도이다)를 내어 추풍령을 다스렸다.
그것은 추풍령이 다만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고개였음을 의미한다.
추풍령은 결코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역로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부산을 잇는 작은 사잇길에 불과했으나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넘나드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참조로
金의 발음 ‘김’과 ‘금’ 으로 2개가 된다. :
추풍령면에 대한 설명에서 金山의 표시가 ‘금산’ 또는 ‘김산’의 혼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조선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왕건이 세운 고려를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무너뜨린 것과 연관이 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이 있다.
왕씨(王氏)나라에서 이씨(李氏)나라를 세웠으니 다른 성씨가 와서 또 다른 역성혁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예방하고자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로 이씨(李氏)의 성씨는 나무 목(木)이 들어 있고, 목(木)을 이기는 것은 금(金)이니 금씨(金氏)를 없애면 되리라 생각했다.
이전 500년간의 고려시대의 왕씨 씨족을 모두 없앤(소위 킬링필드?) 이성계는 금(金)씨를 멸족하려고 보니 너무 사람이 많아서 금(金)씨의 기세를 줄이고자 金으로 물건을 상징할 경우에는 ‘금’으로 사람을 상징할 경우에는 ‘김’으로 발음하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이름에는 金은 ‘김’으로 발음되고 황금(黃金)은 ‘금’으로 발음된다.
금관가야(金官伽倻)는 ‘금’으로 김해평야(金海平野)는 김씨가 소유한 평야, 김천(金泉)은 김씨가 관리하는 샘물로 그 유래를 해석할 수 있다.
추풍역의 위치인 금산(金山)도 곳으로 고려시대에는 ‘금산’으로 불렸을 것이다.(추풍령에서 백두대간길로 500m 북진하면 금산(金山)이 나온다.)
반면 추풍령 남쪽에 있는 도시인 김천(金泉)은 조선시대 명칭이니 김천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러니 금(金)에 대한 혼동이 계속 있을 수 밖에 없다.
신라시대 김유신(金庾信)장군도 고려시대까지는 금유신 장군이었을 것이다. ㅎㅎㅎ .
첫댓글 삼성암 염불소리에 황악산 쉽게 올랐네요ㅡ궁금증 해소 ㅎ
먼~길 수고하셨습니다
깊은 산중에 지장보살을 되뇌이는 염불소리가 깨달음을 주는 듯 했슴다. ^.^
나도염불소리 들었는데, 고요한적막속에 은은한목탁소리 기분짱이데요
구경잘하고 갑니다
이젠 제가 따라 가기 힘들 정도로 체력이 좋아지셨네요. 감사합니다. ^.^
고산자김정호의 오류까지 ~ 열공하였읍니다ᆢ 감사 *.*
대동여지도도 같이 보고 있습니다. 고산자 호를 안붙이면 회장님께서 오해하실것 같네요.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