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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림 예수님 기다리는 법>의 줄거리:
재림예수님을 기다림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체 그 때를 알 수 없는 예수님을 어떻게 잊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단 말입니까? 기다림의 미학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다림의 지루함, 기다림의 짜증, 기다림의 초조함, 기다림의 한계 대신에 기다림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알아야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죽더라도 이런 기다림 속에 죽어야 기독교 신앙입니다.
재림 예수님 기다리는 법
(마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재림예수님 기다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재림예수님 기다리는 법’
오실 때를 알 수 없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우리가 바쁘게 생활하는 중에 도대체 어떻게 기다리며 사느냐?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재림예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냥 내가 아직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재림예수님이 기다려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바른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알 수도 없는 때에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기다리느냐? 이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거예요.
어떻게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까?
기다림의 미학을 알아야 됩니다.
미학(美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 왜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느냐, 이것이 바로 미학이에요.
그런데 기다림이 즐겁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림이라는 말과 연관된 단어를 생활 속에서 상식선에서 한번 찾아보면 미학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요, 기다림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기다리는 게 아름답습니까? 기다리는 게 기뻐요? 아니에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뭐 많은 경우에 기다림의 지루함, 기다림의 짜증, 기다림의 한계, 이런 부정적인 단어들과 함께 사용됩니다.
기다림의 조급증, 입시를 치르고 나서 합격여부를 기다리고 있는 수험생들, 이거 조급하고 그 지나가는 시간들이 지루합니다.
또, 애인과 다투어서 ‘이젠 다시 안 보겠다’고 헤어진 뒤에 전화나 문자 오기를 기다릴 때의 심정,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요.
그런데 어떻게 기다림이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이 기다림의 미학을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예수님을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 ‘열 처녀 비유’에서 등불은 무엇이고 그 등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그리고 유대인들의 결혼풍습이 어땠는가, 이런 것들이 이 비유의 주안점이 아닙니다.
그냥 기다림 자체가 주제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을 향하여 깨어있음의 이야기를 열 처녀가 -열 처녀는 열 신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들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당시 유대결혼의 풍습에서 비유적으로 따오셔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기다림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될 핵심부분은 기다리는 자세, 기다리는 자들의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유대결혼은 신부들의 들러리가 열 명씩 세워지면,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신랑을 기다립니다.
밤중에 신랑이 오는 이유는 해질 무렵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가 이들의 하루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에 결혼식이 대부분 저녁때 시작됩니다.
그러면 결혼식이 어떻게 시작되느냐 하면,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오게 돼서 그 오는 신랑을 신부의 들러리들이 등불을 들고 맞이해서 신부 집으로 들어간 뒤에 문을 닫아걸고,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 가는 대신에 일주일 이상씩을 잔치를 열고 춤을 추며 결혼 피로연이 진행되는 것, 이것이 이들의 결혼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올 때에 당시의 상황이 핸드폰으로 알릴 수도 없는 것이고 전화로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언제 올지 아무도 예측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더디 옴으로 그들이 다 잘새…’라는 이 말은 이 상황이 늘 결혼식 때마다 반복해서 확인될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신랑이 얼마나 더디 올지를 모르고, 때로는 며칠씩 더디 올 수도 있었다고 하는 것 같아요.
거기서 기다리는 자세를 주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지 않습니까?
자, 그러면 신랑을 기다리는 이 신부의 들러리들, 열 처녀들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두 부류로 나누어서 슬기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들로 분류가 되는가 하는 겁니다.
도대체 기다림의 어떤 마음에서부터 슬기로움이 나오느냐 이거예요.
여기에 나오는 기름이 성령이다, 믿음이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그냥 그런 선입관을 버리고 우리가 한번 이 비유를 대해보자는 거예요.
자, 등불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것을 ‘준비성이 없다’ 이렇게 봐서는 안돼요.
신랑이 더디 온다고 하는 것은 열 처녀 모두에게 알려져 있는 그 당시 비일비재한 결혼식의 풍습이고 광경입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더디 올 때를 예견해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따라서 ‘준비성이 없기 때문에 슬기롭지 못하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마음입니다.
IQ로 치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 중에 IQ가 더 높은 사람도 충분히 있을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들의 문제가 무엇일까?
기다림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거예요, 기다림 자체에.
이들은 신랑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만 신랑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신랑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그러면 무얼 기다렸다는 겁니까?
이들은 잔치에 들어가서 노는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잔치에 들어가서 노는 일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것은, 신랑을 맞이하는 일은 단순한 형식적인 절차 통과의례에 불과한 것이고 이들의 마음은 잔치자리에 가있었습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에게 마음이 가있었다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차이가 나는 걸까요?
여러분, 이게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납니다.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연애 때 세 시간, 결혼 후 5분’, 못 들어보셨을 거예요.
제가 만들어 지금 처음 하는 말이니까요.
‘연애 때 세 시간’이라는 것은 연애할 때 애인을 기다리는 것은 세 시간도 기다릴 수 있고 다섯 시간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이 가능한 이유가 뭐냐 하면 애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 십 년차 남편들이 아내를 세 시간 기다리는 경우는 아마 역사상 없을 겁니다.
현관에 신발 신고 나갔습니다.
주말에 모처럼 쉬려고 했는데 하도 악다구니를 하니까 ‘좋다,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을 하자’ 그래가지고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대충 주워 입고 신발을 신고 기다리는데, 안 나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와서 짜증을 팍 냅니다, 아무리 기다렸다고 마음은 느끼고 있는데 실지로 시간을 보면 3분도 안 기다린 거예요.
1분도 안 기다린 거예요, 화장하고 있거나 열쇠 찾고 핸드폰 찾고 있는 아내를 기다릴 때 남편들의 심정은 1분이 일 년입니다.
짜증이 팍 나는 거예요, 왜 그래요?
아내와 함께 하는 것이 이미 기쁨이 아니에요, 10년차 남편들에게는.
빨리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고 빨리 돌아와서 누워야겠다는 목적이 따로 있는 겁니다.
외식 안 시켜주면 내가 편하게 쉴 수가 없으니까 빨리 가서 밥 먹고, 시장에 가서 뭐 하나 사주고, 빨리 집에 와서 잠옷 입고 눕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에요.
다섯 처녀의 어리석음이 어디서 발생하는가 하면 어리석어서 어리석은 게 아니에요,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에 따라서 이들이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게 된 거라는 겁니다.
아니 신랑이 더디 오는 게 다반사인데 언제 올 줄 알아서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어두운 밤에 등불을 들고서야 신랑을 맞으러 갈 수 있는데…
이들의 마음이 거기에 가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랑을 향한 기다림이 없는 거예요, 아예.
신랑은 통과의례, 그냥 절차의 문제라는 거예요.
교회에서 일 많이 하시는 권사님들, 예배 자체는 통과의례에요, 예배 끝나고 교제시간을 위해서 빨리 부엌에 가서 음식과 다과를 준비하는 데에 마음이 다 가있어요.
그러니까 설교 들으면서 목사님을 향해 ‘아멘, 아멘’ 하지요, 그 뜻이 ‘빨리 끝내세요, 빨리 끝내세요!’ 이 뜻입니다.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끝내세요, 자꾸 중언부언 하지 말고 빨리 끝내세요! 이 뜻이라는 겁니다.
잔치는 마음이 신랑 위에 얹어지면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황지우 시인이 쓴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시가 하나 있습니다.
좀 길기 때문에 생략을 하면서 읽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제가 시라는 것에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무딘 문학성을 갖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워요.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중
략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
여러분!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이게 핵심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여러분, 진짜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게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거예요.
무슨 얘깁니까?
신랑에게 초점을 맞춘 마음상태에서는 신랑이 그 육체로 기다리는 열 처녀가 있는 공간으로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이 신랑에게 가있는 겁니다.
신랑에게 가있으면서 신랑에게 맞추어지고, 신랑과 같은 입장이 되고, 신랑이 오고 있는 길을 같이 오고 있을 때, 당시 신랑이 더디 오는 일이 다반사인 경우 신랑의 입장에 맞추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남편이 외국지사로 나가 있다가 일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이미 마음이 외국에 가있는 남편과 함께 있는 경우에는 남편이 돌아왔을 때 이 집안이 어떻게 되어 있으면 남편이 좋아할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반면에, 아이를 키우느라 바빠서 남편에게 전혀 신경을 못 쓴 상태에서 남편이 들이닥칠 때 상황은 완전히 반대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남편이 ‘이렇게 성의가 없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자, 재림예수님을 어떻게 기다리겠습니까?
황지우 시인의 말대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재림예수님을 기다리는 법은 우리 마음이 주님이 계신 승천하신 하늘로 가는 겁니다.
이게 재림예수님을 기다리는 가장 정확하고 올바르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의 길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로 우리 마음이 가는 거예요.
그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게 될 일들, 잔치, 그분 때문에 일어나게 될 역사, 이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거예요.
신랑에게 마음을 얹어놓으면 잔치염려 안 하고 잔치 기다리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어요, 그 신랑이 들어가는 대로 따라 들어가면 되고, 신랑과 만난 상태에서는 그 신랑이 가는 대로 가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승천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 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마침내 나는 주님에게로 가는 겁니다, 마음이 이미.
단순히 황지우 시인이 말할 때, ‘애인에게로 마음이 간다’라고 하는 심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기독교에서의 신앙은 재림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내가 승천하신 주님께로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이, 이미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승천하신 주님께서 누리시는 천국을 같이 느끼도록 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놓인 그 상황을 그대로 느끼도록 해주고 있다는 거예요, 성령님께서.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늘에 앉히운 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이게 바로 재림예수님을 기다리는 법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인의 타이틀을 걸고 삶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재림예수님을 기다리는 거예요.
그게 우리 일의 다예요.
사업 할 것 없어요, 취직할 것 없고, 결혼할 것 없어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진행해 나가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런 잔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아요, 그냥 신랑에게 마음을 얹어두면 신랑이 들어가는 대로 따라 들어가 잔치에 참여하면 되는 거예요.
직업, 직장, 사업, 자식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로 일어나게 될 겁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면 돼요.
이 땅에 아직 오시지 않은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가는 것이 바로 이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겁니다.
기다림이 기쁠 수 있고, 기다림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예수님께로 가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이미 천국을 느끼게끔 해주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 가겠다는 나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합니까?
길에 올라서야 되지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하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한 나의 기대, 소망, 바람, 나의 생각, 계획이 다 죽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가 죽는 자리입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기다림의 미학 안에서 예수님께 마음이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 살아있는 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똑같아요.
예수님을 찾는 것은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찾아서 이 땅에서 이루게 될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처녀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야 내 일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 이건 안 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대해 소원이 죽고 바람이 죽고, 계획이 죽고, 생각이 죽어야 우리 마음이 예수님께로 가는 겁니다.
지금 애인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이미 마음이 애인에게 가고 있는 거예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결혼 10년이 된 남편이 왜 짜증을 냅니까?
빨리 갔다가 집에 와서 쉬어야 된다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괴로운 거죠.
재림예수님 기다리는 법, 기다림의 미학을 깨달아야 되고, 기다림이 아름다우려면 내가 기다리는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먼저 가는 겁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기다림의 미학 가운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게 하여 주셔서 우리 마음이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께로 미리 갈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성령의 감각을 통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을 느끼며 예수님과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여 주셔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그리고 연이어 나타나는 천국의 삶도 다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축복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나의 애인이시고, 나의 남편이신, 나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께로 가는 길, 십자가의 길에서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하늘로의 데이트 길에 나섭니다. 내게 주시는 사랑의 밀어로 이 세상은 종이조각처럼 말려 없어지겠지요.
오! 놀라운 하나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