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그루터기 새순
민재가 조셉 할아버지를 택시에 모셨다. 푸푸케 호숫가 펌프킨 카페로 향했다.
호수 건너편에는 노스 쇼어 병원이 보였다.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창가에서 푸푸케 호수를 내다본다고 들었다.
“조셉 할아버지. 저 노스쇼어 병원 보이시죠. 환자들을 많이 태웠거든요. 퇴원하면 저 푸푸케 호숫가를 산책하고 싶어 했어요.
푸푸케 호수가 그냥 호수로 있는 것 같아도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주네요.“
“그려. 존 네 말이 맞다. 그냥 살아가는 것 같아도 주위 사람에게 희망이 되는 사람이 있지.
그런 사람은 한결같아. 남에게 바라지도 않고 구속당하지도 않아. 당연히 자유롭지. 부자지. 진짜 부자야.“
민재가 펌프킨 카페로 들어서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호수위에는 백조들이 평화스럽게 노닐고 있었다.
차를 한 쪽에 세우고 할아버지와 함께 걸어갔다. 펌프킨 카페로 들어서자 창가에 웬 귀부인이 앉아있었다.
챙이 긴 모자를 쓴 채, 선글라스까지 한 모습이 우아해 보였다. 민재와 할아버지의 눈길을 끌만도 했다. 순간 귀부인이 벌떡 일어났다.
“오! 존이네. 얼마만이야? 반가워라.”
갑자기 민재를 귀부인이 꽉 껴안았다. 민재가 어리둥절했다.
“놀라긴. 나야 나. 로사 할머니.”
“네? 로사 할머니라고요? 전혀 알아보지 못 했어요. 할머니가 아니라 귀부인인데요. 와 멋있어요.”
“정말? 내가 음식 값 내야겠네. 뭐 먹을 거야? 참.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 젠틀맨이시네.”
“네. 우리 할아버지요. 조셉 할아버지. 밀포드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에 사세요.
할아버지. 이분은 제 택시 단골, 로사 할머니세요. 간호사 일을 했어요. 나이팅게일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에 살고 계세요.“
갑작스러운 소개에 할아버지가 당황했다. 첫눈에 로사 할머니 인상이 좋았기 때문일까. 할아버지가 공손히 인사했다.
“네. 조셉입니다. 존은 제 손자고요. 지난번 웰링턴 가는 비행기에서 졸도해 죽을 상황에서.
존이 저를 살렸어요. 그 뒤로 제 손자로 삼았어요. 부인. 아주 우아해 보이는데요. 옆에 뭔 시집인가요.“
“네. 고마워요. 그때 뉴스 봤어요. 존이 바로 그때 손을 쓴 거네요. 다행이네요. 존. 축하한다. 인사가 늦었어. 총리 상 탄 것.
우리 존은 어디가나 예쁜 짓만 해. 그러게 존 같은 사람 있으면 연애할 거라고 한 거지. 존. 그 말 지금도 유효해?“
민재가 로사 할머니 말에 직구로 답했다.
“여기 오셨잖아요. 연애하고 싶은 분. 조셉 할아버지요. 전에 건축을 하신 분이고요. 경찰 청장 아들을 두었어요.”
“오. 그러세요? 역시 젠틀맨이란 말이 그냥 나온 건 아니네요. 네. 저 로사예요. 지난번 낙상사고로 왼쪽 다리가 부러져 고생 많이 했어요.
아. 음식 시키시지요. 오늘은 제가 삽니다. 조셉. 뭐 드실 거예요? 존도 뭐 시켜. 여기요. 주문 받아요.“
서빙을 하는 아가씨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주문 표에 쓰려고 준비된 자세였다. 조셉 할아버지가 로사 할머니 쪽 음식을 가리켰다.
“네. 할아버지는 햄치즈 파니니 샌드위치 하나. 여기 멋있는 사장님은 뭘 드시겠어요.”
민재가 웃으며 로사 할머니가 먹는 것과 비슷한 것을 달라고 주문했다.
“전 치킨 치즈 파니니 샌드위치로 주세요.”
“네. 파니니 샌드위치 두 개요. 하나는 햄 치즈. 또 하나는 치킨 치즈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민재가 반 무릎을 한 채, 로사 할머니 왼쪽 발등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전에 할머니를 병원에 태울 때, 유독 부어있었던 왼쪽 발등이 생각나서였다.
“할머니 발등. 붓기가 없네요. 그땐 참 많이도 부풀어 올랐었는데요. 운동하셨어요?”
“존. 내가 존을 좋아하는 이유. 딱 이거야. 그걸 기억하고 왼쪽 발등을 만져보는 손길.
존. 잘도 짚었어. 나. 요즘 걷기 운동 많이 해. 나이팅게일 리타이어먼트 빌리지 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어. 20분 걸려.
조셉은 어디 살아요? 아. 밀포드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에 산다고 했지. 거기서 내가 사는 곳까지 3백m도 안돼요. 가깝지.
조셉도 거기서 여기까지 걸어 다녀 봐요. 이 호수 평화스럽고 좋잖아요. 저는 여기 일주일에 세 번은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다녀요.
월 수 금. 3일이면 딱 좋더라고요. 아침 10시 쯤 나왔다가 시집도 보고 글을 끄적이기도 해요. 음식도 시켜먹고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에 세 번. 월 수 금. 아침 10시 쯤요? 저도 그 시간 내볼까요. 규칙적 운동도 될 거고. 로사도 만나고.”
“호호호. 조셉. 나한테 호감가나보다. 참 순진하시네. 내일모레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연애하게 생겼네.”
“허허허. 다 같이 늙어가는 인생길. 이야기 친구라도 되면 덜 적적할 거 아닌가? 맞지 않아요?”
그때 주문한 음식이 두 접시 나왔다. 민재와 조셉 할아버지가 로사 할머니 맞은편에 앉아 들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터라. 민재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로사 할머니가 그런 민재 입을 쳐다봤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곁눈질하던 조셉 할아버지도 민재처럼 맛있게 먹어보려 애를 쓰셨다.
로사가 빙긋 웃었다. 순진한 할아버지시네. 흉내 낼 것을 내야지. 그 때였다. 민재 휴대폰이 울렸다.
“네. 존입니다. 아. 덩컨 형사님. 수고가 많으시지요. 다니엘에게 문제가 있다고요?”
“존 말대로 다니엘이 물적 변상만 잘 해결하면, 형사상 책임은 봐주려는데. 돈이 모자라는 가 봐.
회사 택시 번호 판, 5개도 팔아야 겨우 변상 액이 되나봐. 아. 다니엘이 바꿔달라고 하네. 잠깐만.“
“존입니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종전 다니엘 의장님. 덩컨 형사에게 형사상 책임은 면해 주십사. 요청해 뒀습니다.‘
“존. 고마워. 부탁하나 들어줘. 부족한 금액이 10만 달러인데. 내가 가지고 있는 택시 번호판, 쉐어 5개를 급히 팔아야겠어.
지금은 5개 모두. 남한테 빌려줘서 리스비를 받고 있어. 요즘 번호판, 쉐어 시세 알아보니. 많이 내렸네.
존이 일괄적으로 내 쉐어 5개를 다 구입해주면 안 될까? 현 시세가 1만 8천 달러래. 1만 7천 달러씩 팔고 싶은데.
그 돈 합하면 얼추 40만 달러 변상 액이 나오는데. 일이 이렇게 된 것. 바로 해결하려고.
도와줘. 존. 이 낯짝으로 회사 들르기가 부담스러워서.“
민재가 잠시 침묵을 가졌다. 곧 생각을 정리해 바로 다니엘에게 대답했다.
“좋아요. 내일 봅시다. 그래도 회사에서 봐야지요. 쉐어 판매일은 엘리가 담당하니까요. 덩컨 형사 좀 바꿔 줘 봐요.
네. 덩컨 형사님. 제가 다니엘 택시 번호판, 쉐어 5게 구입하기로 했어요. 그돈 합하면 다니엘이 갚을 변상 액 40만 달러에 근접하네요.
내일 회사에서 만나 계약하기로 했어요. 그럼. 형사책임은 면해주세요. 이 일 끝나고 제가 덩컨 형사님을 맛있는 한국음식점에 한번 모시겠습니다.“
민재가 덩컨 형사와 다니엘과 전화를 하는 사이, 로사 할머니와 조셉 할아버지가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진도가 참 빨랐다.
민재가 못 본 척 했다. 이쯤해서 자리를 살짝 비켜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80이 내일 모레인 두 그루터기에 새순이 싹트고 있는데.
됐다. 또 울리는 전화 벨소리. 민재가 다시 폰을 받았다. 토니 의장이었다.
“존 부의장. 어디야? 지금 중요한 일이 터졌어. 존이 꼭 와 봐야겠어. 참. 제니가 전에 호주에서 회계를 전공하고 그 일을 했다고 했지?
현재 자금과 회계업무를 맡고 있는 사라가 사표를 썼어. 내가 잠시 기다리라고 한 채 존에게 전화한 거야.
내일부터 사라가 아예 회사에 안 나올 거라고 해서. 인수인계는 제대로 하고 가야할 텐데. 막무가내네. 내 생각에 제니만 좋다면 제니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전에 존이 내게 그 이야기 한 게 생각나서. 지금 제니에게 전화해 회사로 나오라고 해줘. 존 말은 잘 듣잖아. 존도 빨리 달려오고.“
“토니 의장님. 알겠습니다. 급하네요. 사라는 제가 맡아서 기를 꺾어 놔야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그냥 도망간다고요?
곧 갈게요. 한 20분 걸려요. 곧 봐요. 제니한테도 바로 연락해서 회사로 오도록 할게요.“
존이 조셉 할아버지와 로사 할머니에게 회사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리를 떴다. 두 분은 서로 마음이 맞는지 제법 호탕하게 웃어가면서 이야기를 했다.
차속에서 블루투스를 이용해 스피커 폰을 켜고 제니에게 전화했다. 마침 제니가 쉬는 중이었다.
“제니야. 너. 택시 운전 끝내고 회사에서 자금 회계 업무 맡아줘.”
“민재야. 웬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늦었네. 축하인사. 존 부의장님 축하드려요. 부의장 취임하자 저를 사무실로 스카웃하는 겁니까?
급하기도 하셔라. 나야 좋지. 민재 부탁인데. 뭘 못하겠어. 존 부의장님 잘 보필해야지요. 지금 회사로 오라고?
나. 지금 퇴근하려는데. 아주 고단해. 오늘. 다른 날 두 배 수입을 벌었거든. 벌 때 벌어야지. 알았어. 곧 갈게.“
“제니야. 사실. 오늘 자금 회계 담당 일 보는 직원. 사라. 다니엘 측근이잖아. 오늘 지금 사표를 낸 거야.
내일부터 안 나온대서. 바로 네가 업무 인수인계를 맡아야 해서. 나도 지금 밖에서 회사로 가는 중이야.
사라. 요것. 다음 차례가 자기 순서인줄 알고 내 빼려는 거야. 내가 그냥 안 놔두지. 법 무서운 줄 알려줘야지.
너한테 업무 인수인계 제대로 안 하면 해고 시키고. 형사책임도 물을 거고. 잠시 뒤에 의장실에서 보자.
제니야. 잘 됐어. 이번에 완전 개혁할거야. 회사 경영체제를 확 바꿔 놓을 거니까. 제니도 큰 몫을 맡아주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요. 존 부의장님. 이끌어 주십시오. 잘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히히.”
“하하. 제니가 말 잘 듣네. 고맙다. 맛있는 것 사줄게.”
민재가 다시 하버브리지를 건너 시내 쪽으로 넘어왔다. 하버브리지를 건널 때마다 출애굽 하는 느낌이었다.
바다를 건넌다는 것.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것. 생각도 의식도 건너뛴다는 것. 좋았다.
회사에 도착하자, 제니도 막 들어왔다. 둘이서 의장실로 함께 올라갔다. 토니 의장과 저스틴 컴플레인 매니저가 이야기 중이었다.
“존. 제니. 잘 왔어. 우선 제니에게 의장으로서 제안할 게. 이번에 자금과 회계 업무를 맡아주면 좋겠어.
갑자기 공석이 될 자리를 제니가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시켜줘. 사표 낸 사라가 곧 올 거야.“
제니가 토니 의장에게 머리를 끄덕였다. 민재에게 미리 들었던 터라 마음에 준비는 다 돼 있었다.
“토니 의장님과 존 부의장님 그리고 저스틴 매니저님 체제에서 함께 잘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니가 전화를 걸어 사라를 올라오라고 했다. 잠시 뒤 사라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의장실로 들어왔다.
민재가 바로 품에서 경찰 청장 자문 위원증을 꺼내 사라 눈앞에 내밀었다. 사라가 움칠했다. 이게 뭔가?
“사라. 잘 들어. 시간 없어.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협조 부탁해. 오늘 저녁부터 제니에게 인수인계 업무 바로 들어가.
밤 12시까지. 내일도. 모레도. 3일 연속 강행군이야. 사표내고 내일부터 안 나온다고? 그럼 징계절차를 밟을 거고.
사라의 징계 사유. 차고도 넘쳐. 하나만 이야기 할까. 하얏트 호텔 택시랭크 입찰 경쟁 때. 기억나나?
입찰 성공 후, 답례로 전 의장 다니엘이 총 지배인 헨리에게 봉투하나를 내밀었지. 내 눈에 보이는 금액이 2천 달러였어,
나중에 회사 장부를 보니까 사라가 7천 달러로 경비처리 했던데. 이런저런 경우로 다니엘과 빼돌린 회사 돈이 엄청 많아.
전 다니엘 의장. 지금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는 중이야. 알지? 티나도 해고 됐고. 다니엘도 해고됐어.
다음은 당연히 사라 차례야. 사람이 갈 때 가더라도 뒷마무리는 잘 하고 가야지. 이번에 특별히 선처해 주는 거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 마지막 기회야. 할 말 있나. 사라? 사라의 선택에 달렸어.
살 거야? 죽을 거야? 원하는 대로 해줄게. 자. 결정하라고. 사라!“
사라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인수인계 업무 제대로 하고 갈게요. 잘못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토니 의장님. 존 부의장님. 저스틴 매니저님.”
민재가 울먹이는 사라 어깨를 툭 치며 손을 내밀었다. 사라가 두 손으로 민재 손을 붙잡았다.
민재가 사라 손을 꼭 쥐어 주었다. 용서의 악수. 마무리 잘 하라는 악수였다. 민재가 제니에게 말했다.
“제니는 어서 사라 데리고 사무실로 내려가 봐요. 지금부터 자정까지. 인수인계 업무 부탁해요.”
잠시 후, 내가 야식 준비해서 갈 테니까. 패밀리 피자에 콜라면 되겠지. 나도 자정까지 기다릴게.“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사람들은 잘 모른다. 오늘의 일들을. 오클랜드 택시 회사. 새로운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었다.*
82화 끝(6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