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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4일 (수요일)
새벽 2시 20분. 어디선가 불꽃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침실 해치로 밖을 내다보니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무슨 총소리였나? 슬그머니 침대를 빠져 나간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온몸이 끈적끈적하다. 일어나 샤워한다. 한밤은 온도가 딱 좋다. 하지만 잠을 자면 온몸의 피로 물질이 다 쏟아지는지, 늘 땀과 끈적한 성분이 남는다. 씻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 지부티에서부터 혼자 길고 긴 여름 속에 있다. 한국에 돌아가도 여름이니,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무려 6개월의 길고 긴 여름을 보내게 된다.
엔진 점검도 마쳤고, 출항 준비는 끝났다. 그러나 출항하려면 늘 뭔가 빼먹지 않았나 걱정이다. 생각했던 부분을 모두 마치지 못하면 더 그렇다. 인터넷이 너무 발달되어 현장에서 부품 구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 인터넷으로 구매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외국에서 외국으로 주문하고, 부품을 기다려 한다. 기다리는 날짜가 너무 길다. 예전처럼 부품을 가지고 있는 수리 샾이 없으니 부품 수급이 인터넷 덕분에 더 느려진 셈이다. 아이러니다.
어제까지 출항 준비로 볶아쳤으니 오늘은 좀 느긋하게 쉬어야겠다. 혹시 모르니 장에 가서 두부도 사고, 인젝터 클리너도 3개 더 사둬야겠다. 한 번에 깨끗이 청소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루 느긋하게 보내고, 내일 오전 출국 수속 마치는 대로 코타키나발루로 출항하자. 코타키나발루에 가는 이유는, 첫째 코타키나발루 마리나 주유소에서 디젤 주유를 하는 것과, 동남아시아에서 코타키나발루를 안 들르고 가면, 세일링 하시는 분들께 정확한 마리나 정보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도 코타키나발루의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다. 마리나 계류비용과 주유소, 인근 마트나 바 등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거다. 코타키나발루에 낮에 도착하려면 몇 시에 출항해야 하나? 그것도 확인해야지. 하지만 싱글 핸드 항해니, 빠르건 늦건 느긋하다. 아무렴 어떤가?
대만 문선장님의 정보에 따르면 타이완에서 보트 변기를 아주 잘 만드는 것 같다. 수동 변기 세트가 18만원이라니 환상적인 가격이다. 주문을 부탁드린다. 아마 6월 29일까지는 도착할 것 같다 하시니, 대만에서 수동 변기 설치하고 한국으로 출발하면 된다. 대만에서는 태풍만 없다면 4~5일 머물고 한국으로 갈 생각이다. 태풍이 발생하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별 수 있나?
https://www.tmcint.com/en/product-c62130/Toilets.html <= 대만 보트 변기 회사 홈페이지.
오전 3시 51분. 그럼 2차로 또 자볼까? 장거리 항해는 잠이 보약이다. 물론 모든 일상에서도 잠이 보약이겠지만.
오전 5시 30분. 알람으로 잠이 깼다. 큰일이다. 낮에는 더워서 아예 선실에 못 들어간다. 낮잠을 못자니까, 마리나에서는 늘 잠이 부족하다. 차라리 바다는 서늘해서 잠깐씩 졸면 되는데. 밖을 아침부터 하늘이 시커멓게 흐리다. 폭우가 예상된다.
감자를 밀가루로 부쳐 어제 남은 찬밥과 함께 먹는다. 혼자니까 식사의 질이 확! 떨어진다. 역시 나는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나보다. 오늘 점심은 City에서 K.F.C. 나 몇 조각 사먹어야겠다. 그래도 고기 구경은 해야지. 식사하고 빨래를 해서 넌다. 비야 맞건 말건, 비 그치면 마르겠지.
우리 딸 김리나가 이번 주(2023년 6월 12일)부터 어린이 집에 간다. 어느덧 그만큼 성장한 거다. 집에서 보내온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마다 나는 기적을 보고 있다. 아직은 징징거리며 어린이집 버스를 탄다. 하지만 막상 어린이 집에 가면 신나게 잘 논 단다. 항해 중엔 다운 받아 둔 우리 딸의 영상을 본다. 귀엽고, 보고 싶고, 가여워 자꾸 눈물이 난다. 곤란하다. 지난 1월 이탈리아 도착 때부터, 지부티에서 이별 할 때, 그때와 비교해도 사뭇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아침에 마리나 관리자 ‘핀’의 직원이 왔다. 마리나 계류 서류를 주니, 금방 인보이스를 가져온다. 206링깃(57,000원)이다. 3박 4일에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하다. 시내 나가서 A.T.M. 에서 돈을 찾아 줘야지.
오전 9시 20분. 비를 맞을까봐 서둘러 시내로 나간다. 쓰레기장까지 어제 뽑은 오일 폐유와 며칠 동안 생산한(?) 쓰레기 봉지들을 들고 낑낑대며 간다. 도착해서 Grab 어플로 택시를 부른다. 8링깃이다. 4분 만에 온다. Permaisuri Imperial City Mall에 도착하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 럭키다. 몰에 들어와 보니 가게들이 다 닫았다. 헛! 혹시 휴일? 그건 아니고, 오전 10시에 다들 장사 개시 한단다.
일단 A.T.M.을 찾는다. ‘현금 자동 입출금기’ 라고 한글로도 설명이 있다. 혹시 몰라 300링깃을 찾아둔다. 남은 링깃은 코타키나발루에서 계류비로 사용하면 된다. 나는 현지 통화로 카드를 사용하게 해 두었다. 원화로 변환하면 수수료가 상당하다. 그러다 보니 외국 A.T.M.에서 돈을 못 찾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비밀번호 입력하고, 금액 입력하고, 영수증 안 받는다, 입력하고 나면 Transfer (변환) 하겠느냐? 고 묻는다. 이때 NO를 누르거나 변환 안하는 키를 누르면 된다. 한국의 은행에서 원화 변환 안하는 것으로 신청해 놓고, 여기서 변환을 누르면 당연히 돈이 안 나온다. 이런 것도 항해의 깨알 Tip 이다.
오전 9시 40분. 대만의 문선장님과 이야기 해보니 대만도 엄청 더운가보다. 그럼 마리나 근처 싼 호텔에서 며칠 자면 되는데, 그분 말씀이 대만 호텔비는 미쳤다고 하신다. 코타키나발루나 대만에서 이동형 에어컨을 사는 것도 방법이다. 호텔비 대신으로 이동형 에어컨을 사면된다. 그게 훨씬 나을 것 같네. 말레이시아에서는 1.5Hp 짜리가 40만원 정도. 모두 중국제다. 대만은 전압이 110Vac. 그럼 코타키나발루에서 적당한 것을 사야 하나? 고민이다. 어차피 한국도 여름이니, 한국서도 사용 가능하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적당한 이동형 에어컨을 찾아보자.
오전 9시 45분. 아직 문이 닫힌 Permaisuri Imperial City Mall 의 스타벅스 바깥 테이블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엄청난 폭우다. 배의 해치를 다 닫았나? 갑자기 걱정이다. 임대균 선장이 기다리던 폭우다. 이런 폭우가 오면 배 갑판에서 샤워하고 싶다던 임선장이 귀국하자, 제대로 폭우가 내린다. 임선장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그렇게 샤워하고 싶지는 않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기다리는 사이, 대만 문선장님께 답이 온다. 대만은 배의 사이즈 뿐만 아니라, 전압, Hz, 사용 전력에 따라 선석과 가격이 달라진단다. 엄청나게 세밀하다. 어쨌든 4~5일 호텔비로 이동 에어컨을 사는 것은 좋은 선택 같다. 호텔은 잠만 자면 끝나지만, 에어컨은 남는다. 한국서도 사용 가능하다. 그렇게 결정! 한다.
그런데 Permaisuri Imperial City Mall 에 오래 있기도 힘들다.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다. 몸이 차지고 목이 뻑뻑해 지면서 컨디션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어서 밥 먹고 인젝터 클리너를 사러가자. 거기 가서 이동형 에어컨을 어디서 사야하는지도 알아보자.
오후 12시 몰 내의 K.F.C. 로 간다. 어차피 입에 잘 안 맞는 음식들이다. 랑카위에서는 그렇게 맛있던 말레이시아 음식이 Miri에서는 입에 맞는 것이 없다. 치킨 두 개와 프렌치프라이, 콜라, 햄버거 같이 포장한 밥이다. 한국 돈 8,400원. 프렌치프라이와 닭고기, 콜라만 먹는다. 밥은 역시 별로다. 보르네오의 말레이시아 음식은 정말로 내게 안 맞는다.
오후 12시 20분. 마침 비도 그쳤기에 슬슬 걸어 인젝터 클리너가게로 간다. Tyre Plus – Capital tyre 다. 타이어 가게에서 인젝터 클리너도 같이 판다. 인젝터 클리너 3통을 사고, 이동형 에어컨 파는 곳을 물어본다. 걸어서 500미터쯤 된다. 슬슬 걸어서 Bintang Plaza로 간다. 강변 테크노 마트 같은 곳인데 훨씬 작다. 1층과 3층에 들렀지만, 모두 1Hp 짜리 작은 이동 에어컨만 있다. 코타키나발루에 가면 큰 것도 있을 거란다. 어쩌지? 고민이네. 오늘밤도 제대로 잠자긴 틀린 건가?
오후 1시 30분. 전자용품점 바로 곁에 맥도날드다. 에라 쵸코콘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자.
1,5Hp 짜리 에어콘은 어디서 산다? 흠...
오후 2시. harvey norman miri 라는 곳을 소개 받는다. 거기도 결국 1.0Hp 에어컨 밖에 없다. 오늘도 잠 설칠 것이 겁나, 그냥 그걸 사기로 한다. 택시에 싣고 배로 끙끙 끌고 와서 테스트 해본다. 약하다. 그래도 써 볼까 했는데 갑자기 에어컨에서 굉음이 난다. 5분 간격으로 5번 테스터 해봐도 계속 굉음이다. 할 수 없이 그걸 다시 포장해서 끄질고 harvey norman miri로 간다. 거기서 테스트 해보니 똑같이 굉음이다. 같은 기계가 그거 하나 밖에 없다고 해서 결국 환불 받았다. 내가 이 엉터리 에어컨 때문에 굉장히 힘 들었으니 다른 가게를 소개하라고 하니 kennedy electrical을 소개해 준다. 또 택시를 타고 간다. 택시비가 싸서 다행이다.
오후 3시 30분. kennedy electrical에 가니 1.5 Hp 짜리가 있다. 그런데 전시용 에어컨 하나뿐이다. 할인가로 팔라고하니 그건 안 된다고 한다. 그럼 다른 가게를 소개해 달라니 여기저기전화를 해본다. 성의가 괘씸하다. 결국 한 가게에서 1.5 Hp 짜리를 구했다. 퇴근시간이라 도로가 막힌단다. 1시간을 기다렸다. 1,520 링깃이다. 바로 포장을 뜯고 전원을 켜본다. 20분간 켜도 별 문제가 없다. 에어컨에는 1.5 미터 짜리 기본 자바라 덕트만 들어있다. 100링깃 주고 2미터짜리 알미늄 덕트를 더 산다.
오후 5시. 그랩 앱으로 8링깃짜리 택시를 불렀다. 에어컨 박스가 안 들어간다. 택시 기사가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예약을 취소한다. 12 링깃짜리 6인승 차량을 예약한다.
Kennedy Electrical & Electronic Sdn Bhd Lot 9591 , 9592 Assar Commercial Centre Main Junction for Jalan Cahaya and, Jalan Miri By Pass, 98000 Miri, Sarawak
Phone: 011-5353 8585
오후 5시 30분. 마리나로 돌아와 다시 운반수레에 싣고 끙끙거리며 배로 왔다. 더 낑낑거리며 간신히 배에 올렸다. 에어컨 포장 골판지를 오려 온기 배출용 덕트를 설치하고 시험 운전을 해본다. 해치와 선실 문을 모조리 닫고, 갤리만 에어컨 찬 공기가 돌게 만든다. 오, 유레카!
오후 6시 30분. 라면 하나 끓여 찬밥 말아 먹고, 샤워하고, 한결 쾌적한 갤리에 앉아 차가운 오렌지 쥬스를 마시고 있자니 신선놀음이다. 이제 코타키나발루나, 대만에서도 마리나 계류장에서 서늘하게 잘 수 있다. 귀국하면 강릉항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원하게 대기할 수 있겠다. 이래서 세일 요트에 에어컨들을 설치하는 구나. 동남아 세일링 스키퍼들에게 강력히 권장한다. 에어컨을 설치해라. 꿀잠이 보장 될 것이다.
오후 8시. 리나와 통화하고 나니, 무거운 에어컨을 몇 번이고 끌고 다닌 피로가 확 몰려온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모처럼 편한 잠을 청해 보자. 내일은 오전 일찍 세관과 이미그레이션에 출항 수속을 하러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