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홀로 바라본 석양빛 하늘
하늘에 번지는 석양을 나는 구태여 바라보지 않는다
벌레를 죽이는 모습이 곧 석양이니
- 유승도의 시 「석양」중에서
김선주 / 시인, 문학평론가
1.
벚꽃이 한창일 때 근린공원을 거닌다. 사방에서 내리는 하얀 꽃잎 때문에 눈앞이 어지럽다. 나는 무엇인가? 순간 나인지 꽃잎인지 모를 정도로 맹렬히 달려드는 무수한 눈꽃들…
그들의 전쟁 같은 몸짓 언어에 시계는 멈추고, 어느새 그림처럼 펼쳐지는 동화적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이다. 꽃들과 나와, 공원안의 모든 동식물과 사람들이, 인간세계 저 너머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모습은 지상에서 천상을 향해 나아가는 천사들처럼 평온하고 엄숙하다.
뱃속에서 닭이 걸어 다니나 추적추적
추적추적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제 겨울이야 세상을 꽁꽁 얼리며 바람이 오고 갈 거야
떠나야겠지?
추적추적 닭이 뱃속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그래 그래도
- 「닭백숙을 먹은 저녁」전문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지는 어스름 저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닭백숙을 먹는다. 푹 삶아 익힌 닭이건만, 웬일인지 식사를 마친 후 “뱃속에서 닭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 젖은 걸음걸이로 “추적추적” 힘없이 다니는 닭들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 급기야 뱃속에서는 “추적추적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모처럼 영양가 높은 단백질을 섭취한 저녁인데 뱃속은 요동치고 점점 배가 아파온다.
유승도 시인은 기존의 여러 시편들에서 의성어나 의태어를 통하여 시적 세계의 심오함을 다양한 형태로 구현해왔다. 신작시 「닭백숙을 먹은 저녁」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걸음걸이와 비가 내리는 모양으로 표현한 “추적추적”이 지닌 위상은 언어유희와 함께 삶과 죽음에 대한 포괄적 현상을 다양한 의미로 함축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얼결에 생명을 잃어 저녁식사로 전락한 “닭”을 통하여 생태계의 순환관계를 떠올린다. 뱃속에 밀어 넣은 닭백숙이 살아서 “추적추적” 걷는 움직임이 느껴지고, 그 걸음걸이는 자연스레 비오는 모양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뱃속 닭의 움직임을 활기찬 희망으로 읽어내기에 “추적추적”이란 의태어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것은 바싹 말라 있다가 곧 비에 젖은 나뭇잎처럼 허약하고 위태롭다. 재생을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추적추적”에 내재한 물기어린 이미지는 축 늘어져 젖은 종이처럼 힘없고 공허하다. 이처럼 “추적추적”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차원에서 하늘의 “비”를 소재로 죽음, 즉 생명의 스러짐을 단계별로 형상화한다. 스러져가는 위태로운 생명 앞에 안타깝게도 “겨울”이 펼쳐지고 있다. 하염없이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계절을 뒤로하고 북풍 몰아치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떠나는 준비를 한다. 아직 채 소화되지 않고 정체된 “추적추적 닭이 뱃속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스스로 위로하며 조용히 떠나자. 다시 살아올 그날을 위해 오늘은 잠깐 죽는 것이다.
2.
물론 위 시에서 추출할 수 있는 의미와 역학관계는 이외에도 다각도로 수렴된다. 어쩌면 영원히 소멸할 것 같던 생명체도, 흙과 함께 영영 사라질듯 한 미물들이 어느새 싹을 틔우고 부활하는 과정이 흡사 “4월은 잔인한 달”이 내포하는 엘리엇의 시「황무지」를 연상시킨다.
북풍이 몰아온 얼음의 밤이 지났다
햇살이 비치자 노오란 잎이 녹으며 가지에서 땅으로 스윽슥 떨어진다
환하다
파고드는 추위를 받아들이며 너는 잠에 들었었구나 햇살이 닿기 전 너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잎 아닌 잎
툭, 가지에서 땅으로의 여정 끝에서 침묵의 소리가 반짝인다
- 「준비된 자의 죽음」전문
드디어 “북풍이 몰아온 얼음의 밤이 지났다” 그토록 염원하던 새날이 오는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온종일 기다리지만 한줌의 “햇살이 비치자” 겨울 세찬 바람에 꽁꽁 얼었던 “노오란 잎이 녹으며 가지에서 땅으로 스윽슥 떨어지는” 자연현상이 경이롭다. 태양보다 “환하다”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이 작은 나뭇잎의 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겨우내 얼음에 갇혀있던 연약한 “노오란 잎”이 천천히 녹으며 땅으로 스러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찬란한 슬픔”의 전주곡과 함께 ‘죽음의 미학’으로 귀결된다. 어쩌랴, 그 자체로도 더없이 아름다워 “환하다”는 찬사를 연신 뿜어내는 순간 세상도 숙연하다.
한없이 불어대던 바람에 “파고드는 추위를 받아들이며” 겨우내 곰처럼, 여타의 동물들처럼 겨울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나브로 “햇살이 닿기 전 너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잎”이 되어 부활을 꿈꾸고 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삶이야. 아니 누군가는 목적 없이 초연하게 “아닌 잎”이 되어 묵묵히 그냥 있어도 좋다. 절로 살아지는 삶에서도 충분히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으니까. 처절하게 애쓰지 않아도 딱 그만큼만 순리대로 살면 그만이기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툭, 가지에서 땅으로의 여정 끝에서 침묵의 소리가 반짝”이는 이 황홀한 광경을 목격할 이 누구인가.
등성이의 털을 곧추세운 산들이 맥을 일으켜 달리는 12월,
바람 일어 눈과 햇살이 흩날리는 문밖으로 나선다
가자, 나도 산이다
- 「산에 사니 산이요」전문
이 시는 “산에 사니 산이요”, 들에 살면 들이요, 물에 살면 물 그 자체가 되는 ‘물아일체’의 삶을 그린다. 불현듯 산의 등줄기들이 “털을 곧추세운” 저들끼리 힘찬 기운을 뿜어내며 세차게 “달리는 12월”이다. 척박한 겨울에도 햇볕은 내리쬐고 그 틈에 만물도 소생한다. 북풍한설 세찬 바람에도 겨울산은 장엄하고 끄떡없다. 면면히 이어지는 산의 등줄기는 동물의 터전이 되고 시적 화자에겐 어느덧 그만의 안식처가 된다.
이제나 저제나 열리려나? 내심 기대하던 문밖의 세상은, 지금도 “바람 일어 눈과 햇살이 흩날리는” 채로 적막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따스하고 환한 햇살을 비춰줄 희망의 창문은 굳게 닫혀있을 때가 많다. 화자는 사계절 중 가장 황량하고 시련이 잦은 겨울어귀에서도 잊지 않고 “문밖” 나들이를 한다.
왜 그럴까? 그야 산에 사니까. 무릇 산은 산이고, 산이 내가 된다. 또 내가 산이고 나는 나로 자리한다. 그렇기에 언제든 “가자, 나도 산이다”라고 힘차게 외칠 수 있으리라.
십여 년 전에 나를 욕하며 화를 내던 놈
오년 전에 죽었는데
에이 자식, 성질이 그렇게 더러우니 그리 빨리 죽었지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서산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욕을 하는 나를 보았다
옆을 스치는 바람인지도 모르고 발에 밟히는 눈일 수도 있는 사람을
허허 참
허깨비와 살아가는 허깨비를 보았다
- 「허깨비」전문
시의 화자는 어느덧 흙으로 돌아간 고인을 생각한다. 그는 살아생전 때때로 “나를 욕하며 화를 내던 놈”이었는데, 왠지 마음이 착잡하다. 무심코 허공에 대고 “에이 자식, 성질이 그렇게 더러우니 그리 빨리 죽었지”라며 혼잣말을 해본다. 아니, 생전의 그처럼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일정한 간극 사이에 “서산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욕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어쩌면 나를 떠나간 고인이 금방 “옆을 스치는 바람인지도 모르고 발에 밟히는 눈일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죽고 없는 지금에야 원망 섞인 “욕”아닌 욕이 흘러나오니, 무모한 행위를 자책할 수밖에. 환상처럼 가고 없는 그가 새삼 그리워져 “허깨비와 살아가는 허깨비”처럼 휘청대는 것이다. 결국 실재하는 많은 것들이 허상일 수 있음을 시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허깨비”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3.
숱한 언어로 자신을 가꾸고 만물과 소통하려 애써도 자연의 소리만큼 탁월한 것은 없다. 시인은 겨울이 지나고 맞이하는 “봄”의 이미지를 “초록의 아가들”로 비유하여 “까르르르 까르르”와 같은 웃음소리로 환원한다.
까르르르르르르르 까르르 르르르 까르르르 까르르
까까까까 라라라라 까라라 라라라라 까라라라까라라
- 「봄, 초록의 아가들이 부른다」전문
평소 시인의 말처럼 “나뭇잎, 풀, 새처럼 사람도 하나의 환경이고 배경일 뿐” 더 이상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는 것은 지양할 일이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생명이 다하고 한줌 흙으로 돌아갈 때, 후회하지 않을 만큼의 자기위안을 꿈꾸며 오늘도 거친 세월을 꽁꽁 숨어 견디는 것이다.
그는 강원도 산속에 묻혀 자연과 교감하며 묻고 답하는 가운데 스스로 삶의 도리를 깨우치고 있다. 유승도 시인은 여타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포근한 전원생활을 즐기며 여유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깊은 산골에서 자급자족의 농부를 자처하며 만족하고 또 극기한다. 고립되고 단절된 가운데 자연 속에 동화되어 시인도 하나의 배경이 되고 있다. 작디작은 풀처럼, 저 멀리 흐르는 시냇물처럼 미미한 형태로 거대한 자연 속에 스며든다. 미세한 이슬방울이 모여 큰 강물을 이루려면 얼마만큼의 물량이 필요할까? 글쎄, 시인은 자연 속에 절로 살아지고 있다.
- 2013년 봄, 계간 《시에》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