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산전투하면 68년의 북베트남군의 포위전이 유명하지만 실제 치열했던 전투는 67년의 고지확보전이다.
당시 참여한 해병들에 의해 "힐 파이트"라고 불리던 이 전투는 케산 고원의 구 프랑스 군진지를 사용하는 그린베레와 소수의 미해병대의 안전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라오스의 북베트남군 보급기지를 견제할 최전선 작전기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하에 주변의 감제고지들을 점령하려는 67년 작전에서 시작되었다.
작전초기 미해병대는 그지역에 북베트남 정규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동시기 미해병과 월맹군은 보다 북쪽의 비무장지대인근에서 격전중이었고 대부분의 침투는 그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최근들어 이지역에 주둔하던 그린베레 정찰팀도 월맹군의 흔적을 잡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주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차원에서 정찰 중이던 미해병 수색대가 월맹군의 흔적을 발견하였고 이내 교전이 벌어졌다.
적의 규모나 위치를 제대로 파악치 못한 해병대는 무모하게 교전에 들어갔고, 압도적인 규모의 적에 포위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전폭기의 지원으로 간신히 퇴각을 할수 있었지만 "전사한 동료의 시체를 그냥두고 가지는 않는다"는 해병의 전통을 지킬 여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제3 해병상륙군 사령부는 믿지못하는 분위기였다. 월맹군의 주력군은 미해병대와 북부 비무장지대의 콘치엔 등지에서 연일 격전중인데 그럴리 없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현장지휘관을 의심한 사령부의 고위 장교들이 케산 현장을 직접찾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결국 드러난느 피해와 정보에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오키나와에 주둔중인 서태평양 미해병대 예비병력들이 케산으로 증파되었고 그 선봉이 해병 9연대였다. 9연대는 오키나와에서 통상적인 훈련을 하며 새로 지급받은 신예 자동소총에 대한 적응훈련중이었다.
케산의 전황에 따라 이들은 사단사령부가 있는 베트남의 동하에 공수된후 케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미 고지에 자리잡은 북베트남군들은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고 결국 이들 9연대도 케산의 감제고지인 881,881S,861등지를 오르내리며 격전을 벌여야 했다.
사실 881을 비롯한 케산고원의 주요 감제고지들에는 북베트남군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거미줄같은 교통로를 고지정상은 물론 주요 전진로에 확보해 두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미 해병대는 정상도달은 커녕 고지 사면의 주요지점에 배치된 월맹군 매복병으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적진 후방에 고립되는 소대가 발생하기도 하였고 그 소대는 적의 매복을 각오한 야간 적진돌파로 겨우 사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대 피해에 제3상륙군 사령부는 큰 피해를 입은 9연대의 전방 대대 일부를 사단 사령부인 동하로 이동시켜 휴식을 취하게하고 추가로 다른 대대를 투입하는등 물량공세를 퍼부었다.
이 지역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듯, 양측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이 고지 전투에 참여한 해병들 중 무전병과 의무병은 살아남은자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와관련해서 "미해병대 전사"라는 책에 보면 당시 전투에 대해 이런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전투가 치열한 와중에 월맹군 부상자가 영어로 위생병을 부르자 해병대 의무병이 포로를 돕기위해 달려갔지만 부상한 월맹군이 숨겨둔 권총으로 그를 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그결과 안전을 위해 월맹군 부상자에 접근하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 미 해병대 베트남 전쟁 참전수기. 케산 편 -
양측의 의지가 전례없을 정도로 강하다보니 미군 전사자만 100명이 넘는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미해병대측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새로 지급된 신형소총 M16의 문제였다. 다른 어떠한 전투보다도 67년의 이 "힐파이트"전투에서는 병사들의 소총에 재밍현상이 많았고 그결과 결정적인 순간에 응사하지 못해 전사하는 병사들이 속출하였다.
처음에는 병사 개개인의 관리부족이나 새로 지급된 소총의 청소도구 지급이 원활하지 못해 재밍현상이 잦은게 아닌가 하였지만, 재밍사고가 속출해 전사자가 늘자 장병들의 불만이 높았고 일부 병사들은 반납하지 않은 M14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미 본토에서는 국방성에 대한 원성이 높아져만 갔고 결국 미의회의 조사까지도 있었다.
미의회의 조사는 소총에는 이상이 없는것으로 결론내려졌지만 , 이후 소총에 사용한 탄약제작사가 슬그머니 소총탄의 장약을 교체하였고 이후 극심했던 재밍사고가 잦아들면서 소총탄의 장약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의 피해자를 낸뒤였다.
한편 전투는 연일 이어지는 격전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월맹군이 사수를 포기하고 철수한 고지를 미군이 접수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이후 치열한 전투중 실종된 사망 동료들의 시신수습에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이 전투의 미군 전사자만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후 미군은 이 고지에 중대규모의 병력을 배치하여 전진기지를 세웠고 이들이 한해뒤 68년의 전투 당시 케산고원의 미군을 구했다. 68년 당시 월맹군은 케산기지의 미군을 공격하기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지만 67년에 해병이 확보한 감제고지는 이러한 월맹군을 견제하며 제역할을 수행하였고 그결과 월맹군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디엔비엔푸에서와 같은 결과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디엔비엔푸때는 고지대를 점령한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항공기를 요격하며 프랑스군의 항공지원을 방해하였고 고지대의 베트민 포병대들은 마음놓고 프랑스군에 포격을 가했다)
아래 사진들은 67년 "힐파이트"를 대표하는 연재사진시리즈다.
당시 케산에 취재차 있었던 프랑스 종군기자 캐더린 르로이의 작품이다. 케산 북부의 고지전투의 한 장면으로 적을 향해 착검돌격
하는 병사들과 쓰러진 동료의 생사를 살피는 해군위생병의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다.
당시 전투는 적 부상병이 위생병을 노릴정도로 치열했기에 전투에 참가한 위생병 중 전투 종료시까지 살아남은 자는 드물었다고 한다.
반격에 나서는 미 해병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케산전투는 미군 280여명, 월맹군은 15000여명 죽은 베트남전 최대의 전투지요
확실히 베트남전(2차 인도차이나전) 월맹군,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전 베트민에 비하면 뛰어난 성과를 낸 것이 별로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