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80. 천수에서 서안으로/ 곽거병 무덤, 한 무제陵
장회태자 이현 무덤의 신라 사절 벽화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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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답흉노像> |
사진설명: 실크로드 개척의 일등공신 곽거병의 무덤 입구에 있는 말 조각. 흉노를 밟고 있다. |
2002년 10월4일 오후3시. 서쪽에서 비쳐오는 오후의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하서주랑 일대에 있던 흉노(匈奴)를 몰아내는데 큰 공을 세운 곽거병의 무덤 앞에 섰다.
24살에 요절한 청년 장군 곽거병(기원전 140~기원전 117). 후한(後漢) 이래 ‘동서 문명교류의 간선(幹線)’ 역할을 한 ‘실크로드 개통’도 사실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곽거병의 공은 그만큼 컸다. 반면 그에게 쫓겨나 고비사막 이북(막북이라 한다)으로 흩어져 간 흉노들은 분루(憤淚)를 삼켜야만 했다.
하서주랑 일대의 석굴들을 답사할 때 살펴보았지만, 기련산맥 북쪽에 있는 오아시스를 연결한 하서주랑은 말의 방목지로 최적의 장소였다. 때문에 하서주랑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군사력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왔다. 이곳을 잃은 흉노는 이후 다시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반면 한 나라는 안정된 힘을 가지게 됐다. 하서주랑 옆에 있는 기련산과 언지산에서 쫓겨난 흉노족들은 비통한 심정을 노래로 읊었는데, 〈서하구사(西河舊事)〉에 내용이 전한다.
우리는 기련산을 잃어,
이제는 양과 소와 말과 함께하는 삶이 없네.
우리는 언지산을 잃어,
이제는 처자의 볼에 바를 연지가 없네.
이 노래와 관련된 고사가 하나 더 있다. 한 고조 유방(재위 기원전 202~기원전 195)이 평성에서 흉노에게 대패한 뒤, 한 무제(武帝. 기원전 156~기원전 87)가 등장해 흉노를 토벌하기 전까지, 한나라는 매년 공물을 흉노에게 바쳤다. 대(對) 흉노 융화정책의 일환으로 한나라 황실의 여인들을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냈던 적이 있었다.
한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9~기원전 33) 당시 왕소군(王昭君)은 궁정의 후궁이었다. 소군의 이름은 장, 소군은 자였다.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 우호 수단으로 중국 황실의 여자를 보내 결혼시키고 있었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후궁이 너무 많아 용모를 그린 그림을 보고 보낼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왕소군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화공은 당연히 추녀로 그렸고, 그녀는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됐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했다.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해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했다고 한다.
함께 흉노로 간 감찰관이 소군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디까지나 한(漢)민족입니다. 시집을 가더라도 언지산의 연지로 볼을 물들여서는 안됩니다.” 언지산에서 나는 연지로 화장하는 것은 흉노 특유의 관습이었다.
말을 들은 소군은 “흉노에게 시집가면 나는 흉노의 사람입니다. 연지 바르는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담담하게 흉노 영지로 들어갔다 한다. 기원전 33년. 원제의 명으로 흉노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간 왕소군은 연지(閼氏. 부인)가 됐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해 두 딸을 낳았다. ‘연지 고사’와 관계있는 왕소군의 무덤은 내몽고자치구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 서남 광활할 들판 가운데 있다.
한무제,곽거병 두 영웅 무덤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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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한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 |
각설하고, 다시 곽거병에게로 돌아가자. 한 무제의 아내인 위황후의 언니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천자의 총애를 받아 불과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侍中)이 됐다. 위황후의 동생인 위청(衛靑. ?~기원전 106) 장군과 함께 자주 흉노 토벌에 나섰다. 기원전 121년. 갓 스물이 지난 곽거병은 표기장군에 임명돼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두 번에 걸쳐 하서주랑을 공격했다. 광대한 목초지가 있는 언지산을 공격하고 다음에 기련산 너머로 흉노를 추격, 도합 40,000명 이상의 흉노를 사로잡았다.
그 해 가을. 곽거병은 큰 공을 세웠다. 흉노왕 선우는 서부지방을 통괄하고 있던 혼야왕이 자주 곽거병에게 패하자, 그를 불러 죽이려 했다. 눈치 챈 혼야왕이 한에 항복해 온 것. 항복한 흉노의 군병을 이끌고 도성 장안에 개선했는데, 수가 10만이나 됐다고〈사기〉에 적혀있다. 이후 동으로 금성(난주)에서 서쪽으로 염택(타클라마칸 사막 내에 있는 놉로르 호수)에 이르기까지 흉노의 자취가 사라졌다.
한 무제는 황하 서쪽에 처음으로 하서4군이라는 직할군을 설치했다. 서역으로 통하는 통로를 확보한 것. 후일 ‘실크로드’로 불리는 길이 마침내 개통된 것이다. 이 길을 통해 불교도 들어오고, 서역의 각종 문물들이 유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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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당 고종의 무덤인 건릉 입구에 있는 무자비(無字碑). |
상념을 정리하고 곽거병 무덤 밑으로 갔다. 사진으로 많이 본, ‘흉노를 밟고 있는 말 조각’(馬踏匈奴像)이 거기 있었다. 한족(漢族)에겐 좋은 조각인지 모르나, 나에겐 그다지 좋은 조각으로 보이지 않았다. 승리자는 항상 역사에 좋게 기록되고, 패자는 언제나 나쁘게 정리되게 마련이다. 그것을 조각으로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 나라가 얼마나 흉노를 두렵게 생각했는지를 ‘마답흉노상’에서 읽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곽거병 무덤 정상에 올라 관중평야를 일별했다. 중원(中原)지방을 차지한 사람과 세력이 항상 중국 역사를 좌지우지해 오지 않았던가. 관중평야는 참으로 넓었다. 들판 곳곳에 일하는 사람이 보였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약동하는 ‘중국의 현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무덤을 내려와 바로 옆에 있는 한 무제의 무덤, 무릉(茂陵)으로 갔다. 자연적인 산의 정상에서 밑으로 판, 당 고종의 묘인 건릉과 달리 평지에 흙을 쌓아 만든 무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役事)에 동원됐을 것이다.
〈사기〉 등에 의하면 무릉은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즉위 2년째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세수(稅收)의 3분의 1이 소요됐다. 무제가 한나라 최고의 실권자였기에 무덤 안에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보물들이 매장됐을 것이다. 아마 수많은 도굴로 다 사라졌으리라. 무릉에 올라갔다. 한 무제 유철! 흉노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 한 고조 유방 이래 항상 밀려던 대(對)흉노 세력을 역전(逆轉)시킨 인물. 16세에 즉위한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영명한 군주이자 지략가”로 평가된다.
무제가 위청·곽거병·이광리 등을 동원해 하서주랑과 실크로드를 개척한 이후인 기원전 60년. 한 나라는 서역 쿠차의 오루성에 서역도호부를 두고, 서역길을 개척했다. 이 길을 따라 고도의 정신문화인 불교와 근동의 문화들이 물밀 듯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발 딛고 서있는 무덤의 주인이 바로 그 길을 개척한 주인공이며, 좀 전에 본 무덤은 무제의 명을 충실히 이행한 장군의 무덤. 중국역사의 주역 중 주역인 사람들의 무덤을 밟고 서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레었다. 한반도에 한4군을 설치했던 인물도 한 무제지만, 지금은 내가 그의 무덤을 밟고 서있는 것이다.
당고종, 측천무후의 4형제 중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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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장회태자 이현묘의 신라사절도. 오른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신라 사신으로 추정된다. |
무덤을 내려와 장회태자 이현(李賢. 654~684)의 무덤으로 갔다. 오늘은 이래저래 무덤만 순례하는 날인 것 같다. 굳이 이현 무덤에 가려는 것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연도에 신라사절상 그림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현은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나은 4형제인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중종), 이단(李旦) 중 둘째다. 형 이홍이 24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이현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평소 지혜롭고 결단력 있는 그가 즉위하면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측천무후에 의해 누명을 쓴 채 자살하고 만다. 동생인 이현(李顯. 656~710)이 중종으로 즉위한 후 아버지 고종의 건릉 옆에 묻었고, 이단이 예종이 된 후 장회태자로 추증했다.
입구를 따라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무덤 안은 서늘했다. 중간쯤에 과연 신라사절상이 있었다. 그림을 살피고 있는데 안내인이 “이 그림은 모사고, 진품은 서안(西安)에 있는 섬서성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진품이 아니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떨떠럼했다. 그래도 진품 못지않은 모사(模寫)라는 말에 다시 그림을 보았다. 6명의 인물이 그림에 있는데, 인쪽 3인은 당(唐)문관, 오른쪽 3인은 외국사절이었다. 외국사절 3인 중 중앙에 새 깃을 꽂은 모자를 쓰고, 헐렁한 바지에 넓은 소매도포를 걸친 사람이 보였다. 신라사절인 것 같았다. 무덤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니 저녁햇살이 서쪽에서 겨우 빛을 발하고 있었다. 힘없는 빛을 받으며 함양으로 내쳐 달렸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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