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좌선을 오래 하다보면 다리가 아파서 집중이 안되고 다리에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분 중에 다리를 조복시킨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결가부좌를 한번도 풀지 않고 몇시간이고 계속하여 다리를 조복시켰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결가부좌 장좌불와를 하는데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아프지 않고 편하다고 하더군요. 36시간을 다리를 풀지 않고 한 적도 있다고 수행한 이야기를 하며 육체의 고통이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가부좌를 직접 해보면 1시간 만 지나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선을 넘나드는 통증이 몰려오고 마음의 평정을 지키는게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그 통증을 마주하면 중론에서 배운 만법이 공하다 안과 색이 공하듯이 신과 촉이 공하다는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가 아픈게 정상인데 몸을 조복시키는게 의학적으로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깨달음을 부정할 수 있을까요. 또 의학이나 과학등 세상의 학문은 상을 연구하는 유위법인데 그것을 가지고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무위법인 깨달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답변입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1. 결가부좌를 하면 통증이 오는데, 몸을 조복시키는 게 의학적으로 가능한지 여부와, 2. 깨달음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깨달음을 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1, 2 번호를 붙여서 답하겠습니다.
1. 결가부좌의 통증 - 이에 대해서는 선방에서 오래 수행하신 수좌 스님들께 여쭈어 보면 여러 가지 유익한 조언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결가부좌든 반가부좌든 처음 가부좌 틀고 앉을 때, 다리에 피가 안 통하여 다리가 저리고 아픈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인데 수백 년 내려 온 선방 전통에는 틀림 없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것도 아주 간단하고 쉽게 해결하는 방법 말입니다.
어쨌든 질문을 올리셨기에 제 체험에 비추어 보아 답을 해 보겠습니다. 일단 저의 경우 대학 시절에 좌선을 시작했습니다. 누구에게 직접 배운 건 아니고, 스즈키 젠류가 쓴 참선 방법에 대한 책을 보고서 스스로 익혀서 방석에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간화선과 같은 방식으로 수행을 했는데, 누구에게 화두를 받은 건 아니고, 저 스스로 궁금한 문제를 의문으로 떠올려서 수행을 했습니다. "나는 누군가?", "내가 지금 왜 이렇게 방석 위에 앉아 있는가?", "세상이 도대체 무언가?" 와 같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거해스님께서 쓰신 위빠싸나 지침서 '깨달음의 길'이 출간되었는데, 이를 구입하여 숙독하고서, 마하시 위빠싸나 방식을 흉내내어 여러 해 동안 수행해보기도 했습니다. 2000년 3월 경주 동국대 교수로 부임하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 30분 이상 좌선을 했습니다. 경주 동국대에 부임한 후에는, 공부든 강의든 행정이든 하루 종일 하는 일들이 불교 일들이기에 점차 참선하는 날이 줄어들었습니다. 최근에는 방석 위에 앉아서 참선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방석에 앉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앉습니다.) 제가 불교학을 연구하는 교학자이긴 하지만, 책만 본 게 아니라 좌복 위에 앉기도 한다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해 제 개인적인 얘기까지 꺼내게 되었습니다.
결가부좌도 해 보았는데, 말씀대로 다리가 너무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진작부터 반가부좌 방식으로만 좌복에 앉습니다. 방석을 두 개 사용하는데, 하나를 반만 포개서, 엉덩이를 약간 높게 걸치는 데 사용합니다. 저의 경우는 반가부좌로 앉아서 엉덩이를 받친 방석의 위치를 잘 조절하면 오래 앉아 있어도 다리가 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일이긴 하지만, 이 정도 되기까지도 몇 달 걸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질문에서 결가부좌의 통증 조복에 대한 의학적 소견을 물으셨는데, 대학 때 배운 건데 의학이론 가운데 혈관의 아나스토모시스(Anastomosis)란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로로 달리는 혈관들이 있을 경우 가로 방향으로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처음 좌선을 할 때에는, 결가부좌는 커녕 반가부좌만 해도 다리에 피가 안 통해서 나중에 방석에서 일어날 때, 다리가 심하게 저릴 뿐만 아니라 감각도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석에 앉을 때마다 약간씩 위치를 조절하면서 몇 달 지나니까 피가 통하고 다리가 저리지 않는 반가부좌 자세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생각에 아나스토모시스를 통한 혈류의 우회가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즉 다리를 꼬면 근육이 눌리고 근육 속의 혈관 역시 압박되어 피가 흐리지 못하는데, 그 때 아나스토모시스를 통해서 피가 우회하는 것입니다. 우회 혈관의 굵기가 가늘기에 처음에는 혈액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다리가 저리지만, 꾹 참고서 몇 달 기다리면 우회 혈관이 점차 굵어져서, 가부좌의 압력으로 혈액 공급을 못 받던 근육에도 점차 혈액 공급이 많아지기에 어느 순간부터 다리 저림이 없어진다고 제 나름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따라서 가부좌 틀고 앉을 때, 압박으로 인해 다리 근육의 혈관이 막혀서, 다리가 저리고 아파도 그대로 버티면서 몇 달 지나면 적절한 혈관의 굵기에 변화가 일어나서 다리 저림이 없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썼듯이 이런 체험에 대해서는 저보다 선방 수좌 스님들께 여쭐 경우 더 좋은 조언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좌선에 대해 얘기를 꺼낸 김에 한 가지 더 소개하겠습니다. 앞에서 썼듯이 저의 경우 대학 재학 시절부터 제 나름의 좌선을 시작했는데, 2000년 3월 경주 동국대 부임한 후부터 점차 좌선하는 회수가 줄어들다가, 방석 위에 앉는 날이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4년에 명상기계(촉각자극분배장치)인 'Sati-Meter(사띠 미터)'를 고안, 제작하면서, 사띠-미터의 훈련 방식을 개발하고, 훈련 효과에 대한 가설을 세우기 위해서 소위 '기계명상'을 해 왔습니다. 처음 몇 년 간은 거의 매일 사띠-미터를 이용한 명상(?, 또는 주의력 훈련)을 하였고, 최근에는 노화(老化)로 인한 기억장애(기억이 깜박거림)가 심해지면 사띠-미터를 이용하여 집중적으로 며칠 동안 훈련하여 기억력을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훈련할 때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훈련 내역을 메모합니다. 메모장 일부와 메모 내역을 스크린샷으로 찍어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맨 왼쪽은 2014년 11월부터 자가 실험을 시작하면서, 사띠-미터 관련 아이디어를 메모한 내역입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의 숫자는 사띠미터를 이용한 주의력 측정 또는 훈련을 시작한 시간입니다. 새벽잠이 없어서 대개 새벽에 일어나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진은 가장 최근의 것으로 작년 6, 7월의 집중 훈련, 10월의 훈련 등이 보일 겁니다. 위에서 썼듯이 최근에는 깜박거림이 잦아질 때만 훈련합니다. 네 번째 사진은 각 메모들의 내역 중 하나입니다. 2019년 10월 오전 8시 6분에 훈련을 시작했는데, 8시 10분까지 4분 동안은 촉각자극기의 랜덤한 갯수를 동시에 작동시킨 후, 좌우 각각 몇 개가 진동했는지 떠올리고 이를 사띠미터 본체의 문자판에 표시되는 실제 작동 갯수와 대조하는 훈련을 했고, 그 후에는 10개의 촉각자극기를 임의의 순서로 각각 0.1초씩 순차적으로 작동시킨 후, 그 순서를 맞추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8시10분에 시작하여 6분이 지난 8시16분에 모두 맞추었다고 메모했고, 다시 8시20분까지 4분동안 동일한 순서로 촉각자극기의 작동을 되풀이하면서, 촉감의 변화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해당 촉각자극기의 번호를 떠올리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8시20분부터 새로운 임의의 순서로 작동시켜서 11분이 지난 8시31분이 되어서야 순서를 모두 맞추었고, 이어서 34분까지 3분동안 촉각의 이동에 맞추어 숫자 떠올리기 훈련을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2014년부터 여러 해 동안 거의 매일 아침 훈련하면서 기록했습니다. 2014년 말부터 시작했기에 근 2000일 이상의 매일매일의 기록이 축적되어 있는데, 조만간 시간 여유가 생기면 이 자료들을 분석한 연구도 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사띠미터를 개발한 후, 불교계 언론 여러 곳에서 이를 크게 보도했는데, 보도 관련 댓글 가운데 '사띠미터를 이용하여 수행의 깊이를 측정하여 큰스님을 선발하자"는 농담같은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사띠미터 관련하여 이런 댓글이 올라온 보도 한 가지 링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4239 (법보신문)
그런데 사띠미터는 '깨달음'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즉, 계정혜 삼학 가운데 혜학이 불교수행의 목표인데 이는 기계로 측정 불가합니다. 다만 위빠사나 수행자에 한하여 그 집중력, 주의력의 깊이를 측정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한 실험 결과가 실린 논문을 아래에 올립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깨달음의 과학적 입증 불가능 - 말씀하신 대로 깨달음은 과학적으로든 의학적으로든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깨달음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할 때 그 사실은 본인만 아는 것이고, 남은 절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라한일지라도 다른 누가 아라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불전의 가르침입니다. 불자들 가운데 깨달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누가 깨달은 사람이고, 누가 아닌지 제3자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할 때 본인은 알 수 있어도 남은 알 수 없습니다. "깨달음 여부는 남이 알 수 없다."는 초기불전의 가르침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입니다.
깨달음이란 번뇌(漏)가 완전히 사라지는(盡) 것입니다. [참고로, 유체이탈이나 신통력은 불교의 깨달음과 무관합니다.] 아라한은 탐욕, 분노, 교만, 우치와 같은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 분입니다. 탐욕은 재물욕, 음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과 같은 욕심을 말하고, 분노는 화를 내고 질투하고 저주하는 것 등을 말합니다. 교만은 잘난 체를 말하고, 우치는 종교적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재물욕, 음욕 ... 분노, 잘난 체, 우치 등의 번뇌가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뿐입니다. 내가 꿈에라도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 즉 음욕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가장 잘 압니다. 내게 잘난 체 하고 싶은 교만심이나 명예욕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가장 잘 압니다. 내가 꿈에라도 화를 낸 적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가장 잘 압니다. 내가 이 세상과 나, 삶과 죽음에 대해 의문이나 모르는 점이나, 모호한 점(우치)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가장 잘 압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남아 있다면, 미진한 게 있다면 나는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 양심에 비추어 봐서 이런 번뇌가 나에게 전혀 없다면, 즉 탐욕, 분노, 교만도 없고 세상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의문에 대해서도 다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내가 깨달았다는 자각'이 생기며 불전에서는 이를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 부릅니다. 예불문 독경 시작할 때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오분법신 향례의 '해탈지견'이 바로 '내가 깨달았다는 자각'입니다. 초기불전을 보면 이런 자각이 생긴 아라한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삶은 이미 다했다.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고, 할 바를 이미 했으니, 다음의 존재를 받지 않을 것을 나 스로 안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이것이 해탈지견의 노래입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과 같은 분들이 갖추신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하나입니다. 깨달으면 생명의 세계에 대해 한 맺힌 게 모두 사라지기에, 즉 번뇌가 모두 사라지기에 다음에 자신이 다시 생명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세상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하고(作) 싶은 게 없어지는(無) 경지를 '무작(無作)삼매', 또는 '무원(無願)삼매'라고 부릅니다. 아라한이 되면 생명의 세계에서 아무것도 원(願)하는 게 없기(無)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순 없어도, 번뇌를 제거하는 게 깨달음이기에 누구나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으며,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할 경우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남은 절대 모릅니다. 본인만 압니다. 양심에 비추어 봐서 본인만 압니다. (추가로 말씀드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경우는 누가 깨달았는지 아닌지 모두 아십니다. 초기불전을 보면 특정인을 지목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깨달음 여부를 아는 사람은 본인 스스로와 석가모니 부처님 둘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깨달음은 부처님과 자신만이 안다는 것은 교수님의 편견으로 보입니다. 교수님께서 아함의 경전을 근거로 말씀하셨지만 부처님 열반후 아난존자의 깨달음은 마하가섭존자가 인가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선생님도 학생의 공부 수준을 바로 알아 볼 수 있는데 하물며 도인이 도인을 어찌 알아 보지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깨달음의 기준을 아함에 두고 계시나 대승경전에서는 꼭 무원삼매가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선사의 오도송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노래하지 나의 생이 다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는 깨달음의 근거를 탐진치의 소멸로 보고 계시지만 대승경전과 선어록을 보면 탐진치도 방편으로 걸림없이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의 좌선 경험에 대한 말씀은 잘 읽었습니다. 저의 경우도 20대 초반에 불교를 접하고 이제까지 나름대로 공부해 왔습니다.
혼자 공부하기도 하고 인연이 닿아 스승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스승이 없을때는 경에 의지하여 공부하다가 중론도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론을 열심히 공부한 만큼 중론의 한계를 여실히 보기도 하였습니다.
게송을 이해하고 공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은 환희와 경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분별심의 이해로는 진리의 문을 열 수 없다는 것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불교 공부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다고 봅니다. 불교 공부 과정에 교학을 만날 수는 있지만 교학이 목표가 되는 것은 전도된 것 이라고 봅니다. 분명 지금 우리나라에 실제 진리를 체득한 선지식이 계십니다.
경에 의지하여 혼자 공부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더없이 좋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은 학문적으로 훌륭하지만 그건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별심의 발로일 뿐인게 분명히 보입니다. 둔하고 미련한 저도 알고 있는데 교수님처럼 지혜로운 분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 것 입니다.
제가 주제 넘고 건방지지만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제라도 아시는 것 모두 내려놓고 선지식을 만나 진정한 진리를 찾기 간곡히 기원합니다.
그렇지 않아아도 <붉은 노을>님은 회원자격을 중지할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셨던, 경계선에 있던 분인데, 이제 속 마음을 다 보여주셨네요. 몇 달 전에 <진정한 사랑>이라는 아이디로 들어오셔서, <중론> 관련하여 한 가지 질문 올린 후, 바로 다음날 새벽에 깨달음을 말씀하시는 어떤 사이트 광고하시기에, 제가 광고 글 삭제하고 회원자격 영구 중지시켰는데, 다시 <붉은 노을>이라는 새로운 아이디로 본 카페 가입하신 후 하루에 너무 많은 질문을 올리셨는데, 답변자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 상식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으로 보여서 회원자격 중지했다가, 질문에 낱낱이 답하면서 이메일 주고 받은 후 다시 회원 자격 복구해 드린 분입니다. 질문의 성격도 그렇고(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맞는가?와 같은 질문), 위의 조언도 그렇고 저에게 무언가 묻기 위해 들어오시는 분이 아닌 것 같기에 회원자격 중지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본 게시판을 통해서 누군가와 논쟁할 정도의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동안 질문을 연출하셔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답변을 작성하게 해 주셨기에, 감사드립니다. 정진하시어, 우리 사회를 밝히는 맑은 등불의 역할 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삼아,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면, 선불교의 '인가(印可)'는 초기불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깨달음과 무관합니다. 소위 '깨달은 선승'의 경우 아라한일 수도 있고, 보살행자일 수도 있고, 궁극의 지혜와 복덕을 모두 갖추신 부처님과 같은 분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내생에 대해 다시 태어난다는 말씀을 하지 않고 돌아가시면 아라한이고, 오도송을 노래하셨지만 내생에 인간계든 천상이든 어디에 태어나겠다고 발원하고 돌아가신 분들은 보살행자이시고, 내생의 발원은 하지 않았지만 최상승의 교화로 수많은 제자를 두신 복력 높은 분은 부처님과 같은 분입니다(육조단경을 남기신 혜능스님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가 종교적으로 발전한 것이 대승불교이고, 이심전심의 샤먼적으로 발전한 것이 금강승의 밀교인데,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사자상승의 방식이나, 이심전심의 전법 등 모든 면에서 밀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앞으로의 큰 연구과제입니다. 종교화 된 대승이나 인가 전통의 금강승 모두 '원래의 불교'를 보다 풍요하게 만들어 준 소중한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