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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연대 : 1977~1998
생년월일 : 1955. 02. 06
가족관계 : 1남1녀 (지호,뷰티)
출 생 : 울산 장생포 출신
학 력 : 울산 학성고 - 울산대 건축공학과
스타 특이사항 : 학성고시절 야구부 투수 출신
>>수상경력
1978년 MBC 최고 인기가요상
1978년 KBS와 TBC의 신인 남자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TBC 7대 가수상
1978년~1986년 연말 KBS(TBC), MBC 7대 및 10대 가수상
1987년 일간스포츠 골든 디스크상 수상
각종연말 베스트드레서상 수상 외 다수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가 핍박받고 차별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 분노하지는 않았습니다. 차별받는 입장에 서는 것을 나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혼혈이라고 차별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해도, 음악을 해도 뒤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노래도 상위권에 오르지 않았다면 아예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혼혈이란 것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모든 점에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컬러 TV가 도입된 1980년대 초반 그가 가요 프로그램에 나오면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은 선글라스, 표범 가죽 바지차림에 때려 부술 것 같은 기세로 기타와 마이크를 흔드는 광포한 무대, 그리고 음악 역시 내한공연이라도 하듯이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렬하면서 세련된 수준을 자랑했다. 팝을 숭배하고 가요에는 인색한 팬들도 마치 팝송을 듣는 것 같다고 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노래방의 단골로 사랑받는 ‘아파트’의 주인공이 윤수일이다. 1980년대 그의 이미지는 록의 포효였지만, 그 윗세대에게는 조금 다르다. 그는 ‘사랑만은 않겠어요’, ‘유랑자’와 같은 트로트 성향의 음악으로 사람들과 만났었다. 1977년 그가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데뷔할 때 몰고 온 회오리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조용필에 뒤지지 않았다.
록을 한다는 것은 위험의 소지가 다분한 도전이었다. 그는 1980년대 들어서 록으로 음악 궤도를 수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독자적 입지를 구축하려면 트로트풍을 깨야만 했어요. 음악의 폭을 넓혀야 했고 기혹에 따른 곡에 의존할 수는 없었죠. 내가 곡을 써서 내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트로트가수에서 윤수일 밴드로 바뀐 것에 제작자의 반대는 없었나요? “제작자는 반신반의했지만 과감하게 결정을 했어요. 제 욕구를 어느 정도 이해해 주었던 겁니다. 그래서 록의 냄새가 강한 ‘제2의 고향’이 나오게 되었죠. 1981년에 나온 이 앨범은 제가 지금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앨범입니다. 내 음악을 한다는 기쁨이 담겨 있음은 물론이고 변화의 동기를 찾았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제2의 고향’이나 ‘아파트’와 같은 당시에 발표한 곡들이 전한 록의 울림은 거대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이런 곡들이 나왔나요? “‘아파트’는 5분 만에 완성했어요. 별 어려움 없이 곡을 만들었습니다. ‘제2의 고향’은 한 달 동안 지방공연을 다녀온 뒤 한남대교를 건너오게 됐을 때, 남산의 야경을 보면서 쓴 곡입니다. 이게 고향이구나, 왜 이렇게 서울이 따뜻한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파트’의 경우 1982년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되어 있지만 정작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한참 지난 1984년경이었습니다. 왜 시차가 존재하게 된 거죠?
“제 음악 인생에서 중요했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시 말하면 큰 위기였습니다. ‘아파트’를 만들기 전인 1981년 초반에 MBC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밴드와 땀을 흘려 준비했고 선글라스와 표범가죽 등 파격적인 의상을 갖추어서 ‘제2의 고향’의 녹화에 임했습니다. 잘하려는 욕심에 그만 신입 프로두서와 의견 충돌이 생겨 끝내 다투는 불미스런 사건이 터졌어요. 방송사 출연은 금지되었고 노래도 전파를 탈 수 없게 돼 버렸죠. 아예 틀 수 없도록 제 모든 LP에 금이 그어졌으니까요. 가수를 포기하느냐 재도전하느냐의 중대 갈림길에 섰어요. 이후 ‘아파트’는 MBC에서는 전혀 나오지를 못했죠.”
그렇다면 어떻게 곡을 알렸나요? “방송국이 안 되니까 매니저 김성일과 함께 전국을 순회하면서 음악다방 DJ들에게 음반을 홍보했어요. 다리품을 판 거죠. 동시에 각 대학의 학생회를 통해 응원가로 채택할 수 있도록 악보와 테이프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죠. 그래서 연고대의 응원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부산의 DJ들 사이에서, 또 대학의 응원가로 인기가 폭발하면서 팬들의 신청이 쇄도하니까, KBS에서 곡을 수용했죠. ‘아파트’는 앨범이 나오고 20개월이 흐른 1984년 2월에 5주 동안 가요 톱10 1위를 차지했습니다.”
전성기 시절 ‘외로운 밤’, ‘외로워요’, ‘내 마음 외로워’ 같은 제목의 곡을 발표했고 <리모델링> 음반을 봐도 외로움을 주제로 한 노래가 많습니다. “고독은 저의 가장 오래된 친구입니다. 누구나 외롭지만 나만이 갖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 가슴앓이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자, 봐요. 제가 1977년 데뷔했던 때에 혼혈하면 외국인도 아닌 것이, 한국인도 아닌 것이 였습니다. 이방인이었죠. 가령 무대에 나와서 가요를 부르면 마치 외국인 노래자랑과 같은 어색함이 퍼졌어요.”
스타가수가 되어 엄청난 인기를 누린 후에도 그렇던가요? “가수가 되어서 무수한 환호와 박수세례를 받았지만 외로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것이 음악 속에 그대로 녹았던 것 같습니다. 신나는 곡을 내면 리듬이 그렇게 경쾌해도 나도 모르게 쓸쓸하고 슬픈 느낌이 묻어납니다. ‘아파트’가 그렇잖아요. 언뜻 듣기에는 빠르고 즐거운데 사람들은 허전한 느낌이 남는다고들 해요. 이것이 윤수일 음악의 강점이 됐어요. 경쾌한 리듬과 외로움의 정서를 잘 믹스한 거죠.”
혼혈이라는 차별이 외로움을 가져왔을 텐데요. 그래서 그동안 인터뷰를 의식적으로 피해 온 건가요. “의식적으로 피한 것도 사실이에요. 인터뷰만 했다하면 꼭 혼혈 얘기가 나왔으니까요. 저는 스스로 극복해 가고 있는데, 매스컴과 주변인들은 저의 출신에만 포커스를 맞추었습니다. 물론 막상 인터뷰를 하게 되면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의 음악과 연관되는 것은 싫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다인종 시대의 영향으로 그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래도 개운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슈퍼볼의 영웅 하인즈 워드의 내한으로 혼혈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되었습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는데, 하인즈 워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다행이지만 행여 일시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겼어요. 혼혈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가 핍박받고 차별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 분노하지는 않았습니다. 차별받는 입장에 서는 것을 나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혼혈이라고 차별받을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해도, 음악을 해도 뒤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노래도 상위권에 오르지 않았다면 아예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혼혈이란 것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모든 점에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윤수일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국 공군장교(칼 보룸 어케스트)와 지복희 사이에서 1955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곧 미국에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아버지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얼마 뒤 시험비행을 하다 추락사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태어나자마자 한국에서 수난을 예약하는 혼혈과 유복자라는 두 가지 약점을 안게 되었으며 숱한 서러움 속에 성장했다. 이후 의부를 만나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울산중학교와 학성고교를 졸업했고 울산공대에 입학했지만, 외로웠던 소년 시절 유일한 벗이 되어 준 음악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는 대학을 포기한 채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이 도우미를 필요로 한다는 광고 하나만을 믿고 겁 없이 서울행 열차를 탔다.
혼혈 출신이 주축이 된 밴드 골든 그레이프스에서 실력을 쌓았다. 1977년 그는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관중들의 압도적 호응을 얻었고, 행사를 주최한 당대 최고의 작곡자였던 안치행에게 픽업되어 마침내 비상의 날개를 달게 된다. 서둘러 제작한 윤수일과 솜사탕의 첫 앨범은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히트를 기록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갈대’, ‘유랑자’, ‘추억’ 그리고 빠른 템포인 ‘나나’가 히트로 이어졌다.
1980년대 들어서는 ‘제2의 고향’을 시작으로 ‘아파트’, ‘아름다워’, ‘환상의 섬’, ‘황홀한 고백’ 등 밴드 록으로 히트를 질주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대중의 사랑을 만끽한 이유를 서로 다른 문화의 장점이 섞여 나온 퓨전의 힘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기나 1980년대 록을 추구했을 때나 제 곡은 분명 서구의 음악이었지만, 내면에 흐르는 멜로디와 곡조는 지극히 한국적이었다고 봐요. 김치햄버거였죠.”
결론적으로 서양의 피가 리듬과 비트로 표현되었고, 어머니의 피는 멜로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바람을 타는 변화무쌍한 삶을 산 남자를 가리켜 바람의 아들이라고 한다. 아마도 가수 가운데 이 표현이 가장 적당한 인물은 윤수일 아닐까. 혼혈을 극복하고 당대 최고가수로 우뚝 선 것이나, 위기를 음악으로 정면 돌파한 것이나 그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든 풍운의 삶을 살아왔다. 자연인으로의 인생 그리고 공연으로 사는 삶 모두가 바람을 가르며 숨차게 달려온 것이었다. 이 바람은 도전을 의미했다.
비록 1990년대 들어서 인기대열에서 멀어져 갔지만, 그는 음악의 품질을 높이려는 치열한 노력, 도발본능으로 뮤지션의 절대 덕목이라 할 도전의식을 뒤 세대 뮤지션들에게 물려주었다. 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소개된 ‘황홀한 고백’을 비롯해 그의 히트곡들 역시 지속적으로 애청되고 있다. 사업을 위해 음악과 작별하는 바람에 한동안 무대에서 볼 수 없었지만, 2006년에 발표한 앨범 <리모델링>을 계기로 음악에 복귀, 이후 활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바람의 아들이다.
-가수를 말하다에서-
1976년 장충체육관에서 그룹 사운드 경연대회가 열렸다. 1976년이라면, 불과 5-6년 전 경연대회가 그룹 사운드 붐의 견인차 역할을 하던 때와 달리, 연이은 장발단속(스트레이트?)과 1975년 대마초 파동(피니쉬 블로우?)으로 그룹 사운드 씬이 급격히 와해되던 시기이다. 따라서 이 경연대회가 우후죽순 아류행사들이 꼬리를 잇던 시절과는 퍽 다른 분위기에서, 이를테면 초조한 기대 속에 준비되었을 거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행히도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경연대회로는)’오랜만에’ 그리고 (그런 것치고는, 어쩌면 그 때문에)’성황리에’ 열린 경연대회라는 기억을 남긴 걸 보면.
이 경연대회에 가장 좋은 기억을 갖고 있을 인물이 윤수일이다. 윤수일은 이후 10여 년간 “아파트(A.P.T.)”, “제2의 고향”, “황홀한 고백”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정상급 인기 가수로 군림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바로 경연대회 입상과 그 부상에 다름 아닐 데뷔 음반 녹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랑만은 않겠어요](1977)는 윤수일의 가요계 공식 데뷔작이다. 물론 이 음반은 6인조 그룹 ‘윤수일과 솜사탕’의 음반이지만, 음반 커버의 타이포그래피가 설파하듯 윤수일의 솔로 음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신인의 음반은 어떤 반응을 얻었을까. 타이틀 곡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1978년 MBC 최고 인기가요상을 수상할 만큼 빅 히트를 기록하였고, 윤수일은 1978년 KBS와 TBC의 신인 남자가수상, MBC와 TBC의 10대/7대 가수상을 안았다. 이와 같은 성공의 배후에는 앞서 경연대회를 주최하고 이 음반을 제작한 안타 프로덕션이 있었다.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그룹 사운드 씬에서 ‘한 음악’하던 인물들(안치행, 김기표, 이태현)이 만든 이 신생 음반기획사의 성공이 단지 ‘단타'(“오동잎”(최헌)의 대박)로 끝나지 않고 ‘연속안타’로 이어질 것임을 증명하는 곡이었다.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성공, 나아가 1970년대 후반 이후 안타 프로덕션의 성공은 양적인 의미 이상이었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더불어, 트로트 선율과 록 스타일의 사운드를 결합한 이른바 ‘트로트 고고'(트로트에 고고리듬을 접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란 트렌드를 가요계에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들어보자. 짧고 구성진 동일한 동기를 섹서폰과 전기 기타가 반복하는 전주가 귀를 잡아끈 후, 전형적인 트로트 멜로디의 노래가 ‘버스-코러스’ 형식으로 전개된다. 코러스에서 한 차례 절정을 맞은 이후, 버스 부분의 노래 멜로디가 색서폰의 구성진 간주 형태로 반복되고 나면, 코러스 부분이 윤수일의 노래로 반복되며 다시 절정이 반복된다. 다시 전주 부분이 후주로 반복되면서 페이드아웃 된다. ‘전주→버스→코러스→간주(버스’)→코러스→후주(=전주)’로 이어지는 익숙한 구성이다.
이런 익숙한 구성과 관습적인 트로트 선율이 빅 히트로 이어진 것은 어떤 요소 때문일까.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단번에 귀와 입에 달라붙는 선율의 탁월함을 제외한다면, 사운드에 있다. ‘트로트 고고’라고 할 때 ‘고고’에 해당될 리듬과 사운드 말이다. 색서폰 연주는 기존의 ‘악단 반주’의 느낌 이상이 아니고 윤수일의 창법 역시 트로트 문법에 충실하지만, 여기에 서정적인 선율과는 달리 리드미컬한 템포와 그루브(특히 1, 3박을 강조하는 베이스 기타), 그리고 이를 적절히 수식하는 전기 기타 연주를 결합한 것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것이었다. 자칫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트로트 고고가 대중적 공감을 얻으며 히트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룹의 사운드와 트로트 선율’이란 신구(新舊) 감성의 결합(혹은 온고이지신)에 있었다.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작사·작곡가가 안치행이란 사실은 이 곡의 팔할을 설명해준다(영 사운드의 리더 출신인 그는 그룹 생활을 그만둔 후 안타 프로덕션의 대표이자 작곡가 생활에 전념하였다. 트로트와 젊은 감성을 결합하는데 비상한 재능을 발휘한 그는 “오동잎”, “앵두”, “연안부두”, “아 바람이여”, “울면서 후회하네”, “연상의 여인” 등의 히트곡들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렇다면 이 음반은 “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트로트 고고 스타일의 곡으로만 채워져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워낙 인상이 강해서 그렇지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음악 스타일, 하다못해 작사·작곡자로 보아도 오히려 예외적인 곡이다. 나머지 곡들은 모두 장경수 작사, 함정필 작곡이다. 함정필? 펄벅재단 출신의 혼혈아들로 구성되어 신중현의 지도하에 1970년대 초중반 활약한 그룹 사운드 골든 그레입스를 기억한다면, 음반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곡한 인물이 함중아와 함께 골든 그레입스를 이끌던 함정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윤수일이 골든 그레입스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다는 사실까지 안다면 금상첨화일 테고, 그렇다면 윤수일과 함께 이 음반의 주인공을 이루고 있는 ‘솜사탕’이 골든 그레입스의 후신이란 추론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당시 함중아는 양키스라는 그룹을 이끌고 있었다).
윤수일은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76년도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우리가 1등 했는데 그 덕분에 안타음반에 가수로 등록이 됐다. 그 이후에는 내 의지와는 별개로, 기획실에서 장사가 되는 쪽으로만 분위기를 몰고 갔다. “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트로트 풍의 노래들도 그때 나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트로트 풍이 아닌 곡들, 앞서 ‘우리’라고 말한 그룹(이 음반에 윤수일과 솜사탕으로 나오는)의 곡들은 어떤 음악들일까. 당시 기준으로 말하자면 ‘젊은 그룹 사운드 음악’이다. 템포로 나누자면 빠른 곡과 느린 곡이 반반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엉뚱하고 짓궂은 연인을 노래한 “청개구리 마음”(같은 색서폰 연주라도 “사랑만은 않겠어요”와는 감성이 매우 다르다)이나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을 일명 시카고 사운드 풍으로 풀어낸 “설레이는 마음”은 발랄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기다리는 마음”과 “해 저무는 언덕” 같은 곡은 이들이 젊은 감각을 가진 동시에 선배 그룹 사운드의 음악적 자양분을 잘 흡수했음을 보여준다. “꿈이었나봐” 같은 발라드는 당시 대학가요제에 나왔던 곡이라고 해도 감쪽같이 속을 정도다.
그러니까 이 음반은 9할의 ‘그룹 사운드’와 1할의 ‘트로트 고고’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1할은 대박이 터졌고, 9할은 묻혀졌다. 윤수일은 그 1할에 따라 이후 몇 장의 솔로 앨범을 더 내고 “갈대”, “추억”, “나나” 등을 히트시켰다. “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성공만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이것은 역전되었다. 9할의 전통을 되살려 윤수일밴드란 이름의 그룹을 조직하여 더 강렬한 사운드로 승부한 후부터이다. 백밴드를 대동하고 나와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 차림으로 건들거리며 “아파트”, “제2의 고향”, “황홀한 고백” 등을 부르던 전성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윤수일에 대한 이미지로는 후자가 지배적일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윤수일의 공식 가수 경력을 맹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20030510 | 이용우 garuda_in_thom@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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