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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문학회 제2회 해외 학술대회 문학기행
장소 :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
일정 : 3박 4일
7월 16일 : 인천국제공항→청도국제공항→청도대학교
7월 17일 : 청도맥주박물관→천막성(sky screen city)→짝퉁 시장
→피차이왠(劈柴院)→독일총독부(청도영빈관)→한인교회→5.4광장
7월 18일 : 청도시 박물관→국학 공원→지모고성→해천만 쇼→야시장
7월 19일 : 노산→청도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
참가자 : 한국출발(18명) – 유영자, 백승언, 김옥희, 류숙자, 김경숙, 김영주,
전옥희, 방영희, 박송희, 임선영, 조형자, 최인자,
조연자, 신미림, 강여진, 유정숙, 허복례, 채기병
청도합류(2명) - 문복희, 이문희
이번 초우문학회 청도 3박4일 문학 기행은 2018년 1월 태국(한·태 학술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중 국제 학술대회 및 세미나를 겸한 것이다. 모두 18명이 한국에서 출발하여 청도에서 문복희 교수님과 이문희 선생님이 합류하여 20명이 함께했다. 모두투어 노용남 사장이 태국 때와 마찬가지로 동행했다.
이번에 중국으로 결정된 것은 문복희교수님께서 안식년을 중국 청도대학교에서 보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교수님의 중국 제자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청도시 여러 대학에서 교수가 돼서 학술대회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산둥성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위도대인데, 그 중 청도는 대전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다. 따라서 기온도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아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워서 봄과 가을에 여행하는 것이 좋다. 중국은 동경 120도, 우리나라는 동경 135도를 표준 경선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1시간 차이가 나며, 따라서 청도는 우리나라 시각보다 1시간이 늦다.
춘추 전국 시대에 제(齊)나라와 노(魯)나라가 산둥성에 위치했으며 공자와 맹자가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산둥성의 자동차 번호판이 노(魯)로 시작하는 것이 여기에 기인한다. 육조 시대 이후 중국 북부의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오랜 세월동안 그 지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중국 왕조 시대에 따라 부침이 계속되다 청나라 이후 중요성이 높아졌다. 산둥성의 면적은 남한의 1.5배가 조금 넘고, 인구는 1억 명 정도 된다. 중국의 1개 성이 이 정도라니 중국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쌀은 생산되지 않고, 밀, 옥수수, 고구마 등이 식량 작물로 재배되며, 상품 작물로 목화, 담배, 땅콩, 과일(복숭아, 살구, 포도, 사과, 배, 감, 대추) 등을 재배한다. 한국과는 가까이 있어서(최단거리 270km) 예부터 교류가 많이 있었고, 장보고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청도(칭다오)시는 청도 맥주와 노산(嶗山)으로 유명한데 산동 반도의 동쪽, 황해에 인접해 있는 대도시다. 청도시의 인구는 900만 명이 넘는데, 행정 구역이 넓기 때문에 실제 시 구역엔 500만 명 정도가 산다. 청도시의 근대 역사는 복잡한데, 1897년 독일에 의해, 1914년에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다. 1922년에 회복되었다가 1937년 중일 전쟁 후에 일본에 의해 또다시 점령당했다. 1945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회복되었고, 공산당이 조금씩 점령해 오다가 1949년에 공산당의 통제하게 완전히 들어갔다.
첫째 날(7월 16일), 맑음
대부분 분들이 약속한 시간에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모두투어 전용테이블 앞에 모였다. 노사장이 일체의 절차를 밟아주시니 우리는 따라다니면서 편하게 출국수속을 할 수 있었다. 백승언 장로께서 이번 여행이 안전하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기도로 시작을 하였다.
중국동방항공 비행기는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였다. 도중에 식사로 빵과 과자, 물이 나왔다. 옆자리에 앉은 방영희선생님이 속이 불편하시다고 반도 안 드시고 주셔서 그것까지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비행시간이 1시간 정도인데, 무슨 이유인지 청도국제공항에 거의 다 와서는 주변을 계속 선회하다가 30분 정도 늦게 공항에 착륙했다.
사회주의 국가라서 그런지, 한중 관계가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지 입국절차가 까다로웠다. 수속 전에 10손가락의 지문을 다 찍고, 입국 수속 때도 한 손가락을 또 찍었다. 우리들은 비자 신청서에 있는 순서대로 줄서서 절차를 밟아야 했다.
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초우문학회’란 종이를 들고 현지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함께 공항을 빠져나와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앞과 중간에 문이 있어서 타고 내리기 편리했다. 버스에 오르니 가이드가 자기소개를 했다. 중국교포(조선족) 3세인 이해호 가이드는 길림성 출신으로 16년 전에 청도시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12년째 가이드를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는 부인과 함께 청도에 거주하는데, 부모는 전북 군산에서 일하고 있고, 하나뿐인 아들도 군산에 있다고 했다. 아들이 3개월 비자밖에 받을 수가 없어서 3개월마다 한국에 온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보다 더 잘 알았다.
시간이 어느새 2시가 되어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경회루(慶會樓)라고 하는 한국전통요리집이었다. 경복궁의 경회루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간판에 한자와 한글을 나란히 썼다. 첫날 비행기도 타고 오고, 아침 일찍 나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테니 잘 먹고 다니라고 한식집을 택한 것 같았다. 김치찌개가 나왔는데, 밑반찬으로 잡채와 부침개 등이 푸짐하게 나왔다. 돼지고기를 많이 넣은 김치찌개는 우리나라에서 먹던 것보다도 더 맛이 있었다. 맛은 좋은데 배가 불러서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서 빵을 많이 먹은 것이 후회되었다.
식사 후에 청도대학교로 이동했다. 3시30분에 청도대학교에 도착했다. 청도대학교 정문엔 2동의 빌딩이 높게 솟아 있고, 그 앞에는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다른 건물로 가는 길에도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서 첫 인상이 참 좋았다. 문복희교수님과 이문희선생님께서 한결 건강해지신 모습으로 우리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가천대학교와 초우아카데미에서 많이 본 조치성, 서전화 교수 등도 나와서 맞아주었다. 학술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청도대학교 박아루 건물에 있는데, 아담한 교실이었다. 강당에서 할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좁은 교실이었지만 참가자들이 많지 않아서 집중력이 있을 것도 같았다. 4시부터 학술대회를 해야 했기 때문에 가지고 간 플래카드를 교실에 걸고, 한국에서 회원들이 가져온 족자로 된 시를 복도에 걸었다.
정병경 선생님이 부채에다 일일이 문복희교수님의 시를 붓글씨로 써서 70개를 선물했는데, 날씨가 더워서 먼저 1개씩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독특한 글씨체가 멋들어지는데, 결이 있는 부채에 글씨를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참 고마운 분이시다. 부채를 부칠 때마다 문교수님의 시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았다.
한중 학술 대회는 ‘생활 속의 문학과 언어, 문화’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문교수님의 중국어 번역 시집 ‘어머니’ 봉정식과 시낭송 및 축하 공연 순서로 진행한다. 시간이 되어서 테이프커팅으로 시작했다. 복도가 좁아 문교수님과 유영자초우문학회 회장님, 그리고 세미나를 할 조치성, 서전화, 양춘연 교수와 내가 같이 했다.
제1부는 세미나 시간이었다. 유정숙 초우문학회 총무가 사회를 보았다. 문교수님의 제자인 유진중 청도대학교 교수가 환영사를 하였다. 유진중 교수는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학술발표는 4명이 하였다.
첫 번째는 조장대의 조치성 교수가 ‘글로벌 시대의 문화’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생활 속의 문학을 글로벌 시대의 생활로 확대해서 말했다. ‘문학은 삶을 반영하고, 삶은 문학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는데, 문학과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는 글이 나온 그 시대의 배경과 작가의 생애를 염두에 두어야 작가가 왜 이 작품을 창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어서 문복희교수님의 애송시를 중국어로 번영하는 이유는 글로벌 시대의 특징이 국제 교류인데, 국제 교류는 경제, 무역 교류도 있지만 인문 교류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인문교류는 다른 나라의 문화, 정서, 경치 등을 체험할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복희 교수님의 ‘퇴촌 가는 길’과 ‘자유로를 달리며’란 시를 소개하면서 글로벌 시대의 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의미 있는 발표를 하였다.
두 번째는 덕주대의 서전화 교수가 ‘중국과 한국의 언어’에 대해 발표를 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인사말, 존댓말, 단어 등에서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친구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나이 구분 없이 친하게 지내면 친구인데, 한국에서는 나이가 같은 사람을 친구라고 한다. 인사말을 할 때도 한국은 선생님께 ‘안녕하세요?’라고 하면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안녕’이라고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신나게 한다. 유학을 하면 그 나라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다. 한국 유학을 하면서 상황에 맞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서 본인이 연구한 김광규 시인의 ‘서울 꿩’이란 시로 마무리 지었다. ‘서울 꿩’은 도심 속 개발제한구역에 사는 꿩의 삶을 노래한 것인데, 쓰레기 더미에서 콩나물과 멸치 대가리를 먹고 사는 꿩의 모습은 도시민들을 상징한다. 즉 답답한 도시의 모습, 도시 빈민의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세 번째는 노동대의 양춘연 교수가 생활 속의 문학-가족의 의미에 대해 발표하였다. 양춘연 교수는 중국의 가족, 가훈, 유가 사상에 관해서 연구를 하였다. 정약용의 ‘삼별시(三別詩)’와 중국 번의 두 아들에게 보내는 ‘기구시(忮求詩)’를 비교하여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삼별시는 정약용이 유배를 가면서 아내와 이별할 때 애닮은 심정을 토로했고, 기구시는 혼란한 시기에 아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당부하는 부성애가 담겨 있다.
네 번째는 초우문학회 부회장으로 있는 내가 생활 속의 문학을 주제로 문학하는 자세와 생활 속에서 어떻게 문학을 하는지를 발표하였다. 문학은 그림그리기나 악기 연습과 같다. 기본기를 잘 닦고 거기에 독창성을 부여하면 뛰어난 그림과 연주가 되듯이 문학도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기본기를 닦은 후에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있어야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이어 ‘거미줄’과 ‘얼음 세포’라는 시를 예로 들었다. 생활 속에서 주제를 끌어내고,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면 좋은 작품이 된다.
잠시 쉬었다가 제2부 중국어 번역시집 <어머니> 봉정식을 하였다. 쉬는 동안 시집 <어머니>와 간식이 든 봉지를 하나씩 나누어드렸다. 2부 사회는 조치성 교수가 하였다. 먼저 시집 봉정을 하였다. 문복희교수님의 애송시 110편을 중국 대학교수 11명이 <어머니>란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곡부사범대 주뢰 교수와 조장대 조치성 교수가 축사를 썼다. 시집 봉정이 끝나고 주뢰 교수의 축사를 낭독하고, 이어 초우문학회 류영자 회장님이 축사를 하였다. 명품 초우에 대한 소개, 중국과의 교류, 발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두루두루하셨다. 다음 문복희교수님께서 내빈 및 번역자들을 소개하고 인사를 시키셨다. 번역자들 중 절반 정도가 참석하였다.
제3부는 시낭송 및 축하 공연을 시간이었다. 허복례 시인의 사회로 진행되었는데, 중간 중간 적절한 말로 분위기를 띄웠다. 시낭송은 문복희 교수님 시를 낭송하는 것인데, 시낭송반 회원들이 주로 맡았다. 조형자 시인은 ‘나비와 꽃잎’, 조연자 시인은 ‘흔들리는 별’, 신미림 시인은 ‘오아시스’, 최인자 시인은 ‘너를 만나면’, 방영희 시인은 ‘리우에 가고 싶다’, 김경숙 시인은 ‘눈물이 되기 위해’, 류숙자 시인은 ‘밤바다에서’, 박송희 시인은 ‘상표 없는 구두’를 고운 목소리로 낭송했다. 멋진 의상에다 전옥희선생님이 준비한 영상이 흐르는 가운데 아름다운 소리가 교실에 울리니 모두가 감동을 받았다.
다음은 공연 시간 먼저 초우문학회 이사이신 백승언 시조 시인이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태국 문학 기행 때도 멋진 하모니카 연주를 해 주셨는데, 이번에도 맡아주셨다. 첫 곡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셨는데, 다들 너무 좋다고 앙코르를 외쳐서 2번째 곡으로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연주하셨다. 다음은 청도 문인회에서 여러 분들이 오셨는데, 그 중에 두 분이 낭송을 했다. 장수홍 수필가가 ‘빈자리’를 중국말로, 장은미 시인이 ‘싸리꽃’을 우리말로 낭송했다. 마지막 공연은 중국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6학년 박우찬 학생이 클라리넷을 연주했는데, ‘에델바이스’를 불렀다. 앙코르곡은 준비를 못했다며 한 곡으로 마무리 했다. 조금 서툴지만 첫 무대라고 해서 힘찬 박수를 보냈다. 끝으로 진행 목록에는 없었지만 한인교회 목사님이 나아와 이런저런 말씀을 하고 나서 문복희교수님의 시 ‘양평 가는 길’를 낭송하였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지난 6시 30분에 행사가 끝났다. 여러 사람들이 힘들여 준비한 덕분에 잘 마무리된 것 같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정리한 다음 7시에 저녁을 먹으러 청도 대학교를 출발 했다.
저녁은 중국식으로 10명 정도 앉는 원탁 테이블에 밥, 바지락요리, 옥수수, 돼지고기, 감자, 파프리카, 양장피, 국 등 다양하게 나왔다. 맛있는 것도 있고, 입에 덜 맞는 음식도 있지만 대부분 다 없어졌다. 여행은 잘 먹어야 재밌게 할 수 있는데, 다들 잘 드셔서 좋았다.
저녁을 먹고 8시30분에 Holiday Inn(假日酒店) 호텔에 도착했다. 패키지여행치고 상당히 이른 시간에 숙소에 왔다. 백승언 장로님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호텔방은 깨끗하고 시설도 잘 되어있다. 아침마다 짐을 쌀 필요가 없기 때문에, 3일 동안 같은 호텔에서 지낸다고 하니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둘째 날, 약간 흐림
모닝콜보다 먼저 일어났다. 백장로님은 아침마다 기도를 하시고 성경을 필사하셨다. 하루에 한 장씩 쓰신단다. 참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신다. 난 호텔방에서 스트레칭과 가벼운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호텔 음식은 메뉴가 다양했다. 다 먹을 수는 없어서 맛있어 보이는 것만 가져다 먹었는데도 배가 불렀다. 호텔 식사에서는 과일을 많이 먹는 편이다.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오늘 첫 번째 장소는 청도(칭다오) 맥주박물관 견학이다. 오늘도 이동하는 중에 가이드가 몇까지 얘기를 해주었다. 중국 사람들은 저녁 식사만 집에서 만들어 먹는단다. 아침은 출근이나 등교하면서 사먹고, 점심은 직장이나 학교에서 먹는다. 집안일은 주로 남자가 하는데, 장보고, 요리하고, 청소를 한다. 사회주의 국가가 한 일 중에 잘 한 일이 남녀 평등이라고 하던데, 이제는 여성 상위 시대가 되었나 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밀가루를 먹는 나라는 여성 파워가, 쌀을 먹는 나라는 남성 파워가 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도 점차 쌀보다 밀을 더 많이 먹어서 여성 파워가 강해지나 보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아직 집안일을 여자가 훨씬 더 많이 한다.
중국인들은 빨간색을 좋아한다. 빨간색은 복을 주고 행운을 준다고 믿는다. 중국 귀신인 강시는 낮에 안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낮에는 붉은 해가 있어서 귀신을 쫓아낸단다. 어쨌든 지붕의 색도 붉은색 계통이 많고, 가게의 간판도 바탕이 빨간색이든지, 글자가 빨간색인 경우가 참 많았다. 팬티도 빨간색을 선호한단다.
숫자는 8자를 좋아하는데, 8자는 중국 발음으로 대박을 뜻한다. 차량 넘버나 전화번호에서도 8자를 선호하는데, 8자가 많은 번호는 값이 비싸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번호를 사기도 한다. 북경 올림픽 개회식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에 시작했다. 보통 가게의 개업식도 9시 28분에 하는 경우가 많은데, 9시 28분은 8시 88분에 해당되어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크고 웅장한 건물이 있어서 보니 기차역이었다. 중국의 고속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노선이 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속 350km로 달린다. 또 바다 쪽으로 긴 다리가 보였는데, 2011년 완공된 청도 교주만대교로 왕복 6차선 총길이 41.58km로 세계에서 2번째로 긴 다리다. 교주만을 가로질러 청도와 황도를 잇는 다리이다. 멀리 높이 솟은 대교탑이 보이고, 다리 끝이 보이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기서 풀코스 마라톤(42.195km)을 뛰면 거리가 비슷해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홍콩-마카오를 연결하는 55km의 강주아오다리가 건설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단다. 3위는 항저우대교(35.673km)라니 세계에서 가장 긴 3개의 다리가 모두 중국에 있다. 다리만 보아도 중국의 굴기가 느껴진다.
가이드 얘기를 듣고, 창 너머로 이런 저런 구경을 하다 보니 한 시간 만에 맥주거리에 도착했다. 맥주 거리엔 도로 양 옆으로 맥주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아침이라 조용한 거리였지만 맥주 축제가 열리는 때나 밤에는 화려할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바로 맥주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가이드가 표를 끊는 사이에 연기가 나는 맥주공장, 2003년에 세운 청도맥주 100년 기념 조형물, 연못 가운데에 만든 큰 맥주병과 잔 모양의 조형물 등 기념이 될 만한 곳에서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청도는 1897년 독일이 점령하면서 독일인들이 공장을 지어 맥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맥주 도시로 유명해졌다. 일본인들이 점령했을 때도 일본인들이 맥주를 계속 만들었고,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가면서 중국인들이 이어받아 만들게 되었다. 청도는 물이 좋아서 맥주 맛이 좋다고 한다.
청도맥주박물관은 1903년 독일인들이 시작한 맥주공장과 설비를 보존하여 2001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00여 년 동안 이어저온 맥주공장, 맥주제조 과정과 각종 장비, 청도 맥주의 역사, 세계 각국의 맥주 등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거기에 금방 만든 신선한 맥주 맛까지 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초기에 맥주를 만들던 기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비싼 값에 산다고 해도 안 판다고 했다. 관리를 잘 해서 그런지 오래된 기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반짝이는 검정색으로 색칠된 이 기계는 1896년 독일 회사인 Sienens에서 만든 것으로 1903년 맥주공장이 세워진 이후 작동되기 시작했는데, 현재도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계 중의 하나이다. 독일 사람들의 기술이 참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박물관을 따라 가다보면 맥주 만드는 과정이 나타나고, 통나무로 된 맥주 통과 금속으로 된 맥주통도 볼 수 있는데, 통나무로 된 것은 독일인들이 사용하던 것이고, 금속으로 된 통은 일본인들이 사용한 것이다. 조금 더 가면 세계의 모든 맥주를 전시한 전시실이 있다. 이어 기다리던 맥주 시음장에 들어섰다. 줄을 서서 들어가면 먼저 안주로 나누어주는 땅콩을 한 봉지씩 받고, 유리관에서 나오는 맥주를 작은 유리잔에 한잔씩 따라주면 그걸 받아서 테이블에 둘러서서 마셨다. 나는 술을 잘 못해서 맥주 맛을 잘 구분할 수 없지만 맛이 괜찮은 것 같았다.
이어 청도 맥주의 역사가 연대별로 잘 설명되어 있는데, 읽어볼 시간은 없었다. 박물관을 지나면 현재 맥주를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규모의 맥주 사이로(저장시설)가 있고, 이동 통로 양쪽으로 아래쪽에 벨트콘베이어(belt conveyor)를 따라서 수백 병인지 수천 병인지모를 맥주병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든 과정이 자동화 되어 있고, 사람들은 드문드문 서서 관리만 하는 것 같았다.
박물관과 맥주공장을 다 지나니 맥주와 땅콩 등을 판매하는 곳이 나왔다. 이곳에서도 맥주를 무료로 주었다. 땅콩이 맛있기도 하고 선물용으로 적당할 것 같아서 구입을 하였다. 가이드의 할인 카드로 조금 싸게 샀는데, 다른 분들도 많이 구입하였다.
1시간 20분 정도 맥주 박물관 구경을 하고, 패키지 관광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쇼핑센터를 향했다. 진주전람중심(珍珠展覽中心)이란 간판이 있는 네모난 문을 통과하면 진주로 만든 탑이 놓여 있고, 화려한 진주 전시실이 나타났다. 쇼핑센터에 가면 늘 먼저 설명을 듣는다. 진짜 진주와 가까 진주를 구별하는 법, 어떤 것이 좋은 진주인지를 알려준다. 요즘은 진주조개 하나에 여러 개의 진주를 양식한다고 했다.
수백만 원을 하는 비싼 진주 목걸이도 있지만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들도 있었다. 목걸이를 사는 분들도 있지만 진주 가루를 섞어 만든 화장품을 사는 분들이 많았고, 진주 한 알 넣어서 만든 브로치는 예쁘고 저렴해서 구입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나도 하나를 샀다.
진주 쇼핑센터에서 한 시간을 보내고 천막성((sky screen city)을 향했다. 천막성은 2008년 관광 특구로 조성한 실내 복합 상업거리이다. 청도에 있는 20개의 유명한 건물을 축소해서 만들어 놓았다. 천장은 해돋이, 저녁노을, 별과 달이 떠 있는 밤하늘, 정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입구로 들어가니 지붕 위로 돔 모양의 거대한 천막을 쳐서 하늘과 구름을 그렸는데, 마치 실제 하늘 아래를 걷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하늘의 색은 조명에 따라 조금씩 달라 보였다. 직접 볼 때는 별로였는데, 사진을 찍으면 엄청 화려하고 멋있게 나왔다. 특이한 모습이라서 관광 코스이긴 하지만 지금은 쇠퇴해 가고 있어서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았다. 가게가 모두 열고,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으면 훨씬 화려할 것 같았다. 사진만 화려하지 실제로는 볼 것이 없는 천막성, 1호문(號門) 정문에 쓰여 있는 미경(美景), 미식(美食)만이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천막성을 구경하고 가까운 음식점에서 중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중식은 감자·파프리카·두부 요리, 탕수육 등 다 비슷비슷한데, 해항주점(海港酒店)에 있는 음식점이라서 그런지 여러 가지 조개로 만든 조개찜이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오후 1시 30분경에 짝퉁 시장에 들렀다. 중국은 짝퉁 물건을 대놓고 파는데, 요즘은 단속을 하는지, 아니면 단속을 하는 척 하는 건지, 1층은 전시를 하면서 파는데, 2층은 비밀의 방이라고 커튼을 처 놓고 있어서 커튼을 열고 들어가야 전시된 물건들을 볼 수 있다. 별로 살 것도 없어서 밖으로 나와서 건물 주변을 빙빙 돌았다.
1시간 정도 짝퉁 시장에서 머물다가 피차이왠(劈柴院)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에 갔다. 입구에 피차이왠 간판이 있는데, 1902년에 조성되었다고 쓰여 있다. 길 양쪽으로 음식점이 이어져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아 편도 50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맛있다기보다는 특이한 냄새가 풍겨왔다. 삭힌 두부 냄새 같았다. 주로 꼬치 음식과 면류인데, 해산물이 많았다. 오징어·문어·새우·꽁치·육류 꼬치 등이 있는데, 하나맘 먹어도 배부를 정도로 꼬치가 아주 컸다. 파인애플 밥, 불가사리, 각종 곤충 등 신기한 것을 파는 곳도 있었다. 사서 먹지는 않고 구경만 하고 나왔다.
피차이왠에서 독일 총독부를 가는 동안 청도의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인 잔교(棧橋)를 차에서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바다 쪽으로 길게 난 다리인데, 다리 위에 사람들이 가득했고 주변 해안에도 사람들이 아주 많아서 관광지다운 느낌이 확 들었다. 잔교는 부두와 연결된 다리인데, 청도 앞바다가 얕고 조차가 꽤 크기 때문에 해안에 배를 댈 수 없어서 바다 쪽으로 다리를 놓아 만든 시설이다. 잔교는 청나라 정부가 1892년 서양 열강의 침략에 위협을 느껴서 건설한 것인데, 청도에 항구가 없어서 군사물자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도록 해군의 화물접안기지로 만들었다. 처음엔 240m였던 것을 일본이 점령하면서 440m로 연장하였다. 현재는 청도항이 건설되어 잔교는 청도의 역사 유적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3시 30분 경 독일 총독부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은 밖을 잘 감시할 수 있게 높은 곳에 세워졌는데 외관만 보아도 독일이 지은 건물답게 아주 튼튼하게 생겼다. 4층 정도의 건물인데, 1층은 화강암 벽돌 그대로, 나머지 벽은 옅은 노란색으로 칠을 하였고, 지붕은 붉은색 기와를 얹었다. 각층 외벽 중간 중간에 돌로 장식을 했고, 내부는 전부 나무로 만들었는데,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를 보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에 유명 건축디자이너가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1897년 독일이 청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이 건물은 총독 관저로 1905년에 시작하여 1908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초대 총독이 자기가 살려고 돈을 많이 들여서 잘 지었지만 초대 총독은 살지 못하고 2대 총독부터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2층까지만 개방되어 있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내부엔 온실 시설, 가구, 피아노, 침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에 실내 온도 조절을 위해 천정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온실을 만들었다니 놀랍고, 창문에 성에가 끼어 녹으면 물이 흘러내리는데, 창문 아래 홈을 파서 그 물이 모여 밖으로 빠져나가게 만들 것을 보고 그 치밀함에 놀랐다. 하인은 같은 층에 거주할 수 없다고 하여 하인의 방을 3~4계단 아래에 만든 것도 특이했다.
1934년 영빈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중국 유명인사와 해외 귀빈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용되다가 1996년부터 박물관으로 개방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오늘이 가장 많은 곳을 보러 다닌 바쁜 날이다. 독일총독부건물을 나와서 몸을 풀러 마사지 집으로 향했다. 부교족도(富僑足道)라고 쓰여진 마사지집으로 갔다. 남자들은 여자마사지사가 여자들은 남자마사지사가 해 준다고 하는데, 남자들은 모두 여자마사지사가 해주었지만 여자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는데, 옷 왼쪽 가슴에도 상호가 쓰여 있었다. 1시간정도 마사지를 받았는데, 주로 엎드려서 받았다. 베개에 구멍을 뚫어서 얼굴을 묻으면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기본요금을 내긴 했지만 한 시간 동안 정성껏 하는데 팁을 10위안만 주려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사지를 받고, 청도대학교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예정에 없던 한인교회를 갔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개적으로 예배를 하는 한인교회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첫날 한중 학술대회 때 함께 했던 목사님과 신도들이 행사가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수요 예배 때 꼭 와서 그날 한 것을 교회 신도들 앞에서 다시 했으면 하고 문교수님께 여러 차례 의사 타진을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못하고, 백승언 장로님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찬양만 하기로 하고 갔다.
차에서 내리니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교회 건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서 본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교회 본당 안은 가운데 십자가가 걸려있고, 별 장식을 되어 있지 않은데, 좌석이 4열로 배치되어 약 500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꽤 규모가 컸다. 거기서는 주일 예배만 하는 모양이었고, 수요 예배는 별관 작은 방에서 약 50여 명 정도의 신도들이 모여서 하고 있었다. 우리는 뒷좌석에 앉았다. 처음엔 찬양으로 시작하여 기도, 담임 목사님이 요한복음에 대해 설교를 하고 이어서 통성 기도 순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는 목사님 설교 전에 앞으로 나가서 ‘내게 강 같은 평화’를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불렀다. 중국에 가서 생각지 못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예배가 다 끝나지 않았지만 1시간만 있기로 해서 우리는 먼저 빠져나와 청도의 야경을 보러 5.4광장으로 향했다. 5.4광장은 청도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3.1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났다는 5.4 운동의 도화선이 된 곳이 청도이다.
5.4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이, 산둥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권리와 이권을 일본에게 양도하게 된 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의 학생 3,000여 명이 1919년 5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반대 집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급속도로 확산되어 두 달간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마침내 1922년 일본군은 청도에서 물러났다.
가는 도중에 차창 밖으로 청도의 신시가지 모습을 보았다. 고층 빌딩이 많이 들어서 있고, 시원하게 뚫려있는 길을 따라 많은 차량이 다녔다. 건물과 상가, 도로, 차량 등을 보면 중국의 발전상이 잘 보인다.
차에서 내려 5.4광장까지는 안 가고 야경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5.4광장의 상징인 빨간색 조형물과 건물 전체에 설치한 조명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고, 다리도 항구도 밝은 조명으로 빛났는데, 조명 색도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본 이후 처음 보는 화려한 야경이었다. 그 중에 광장 중심에 있는 빨간색의 5월의 바람(五月的風) 조형물이 눈을 끌었다. 이 조형물은 바람을 형상화하고, 전체를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색으로 칠을 해서 마치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사람들도 많이 나와서 감상하고 있었다. 중국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일종의 전시성 정책으로 보였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저녁 식사 시간이다. 호텔 안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이 호텔은 우리가 묵고 있는 곳보다 조명과 장식이 훨씬 화려했다. 삼겹살과 된장찌개, 깍두기, 김치, 콩자반 등 한국 식단이 그대로 나왔다. 중국에 와서 어제 점심에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고 오늘 삼겹살을 배터지게 먹으니 어느 나라에 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꾸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너무 많은 곳을 다니면서 구경을 하느라 숙소 가는 시간이 많이 늦었다. 11시가 거의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한여름 같지 않게 기온이 높지 않아서 다니기에 좋은 날씨였다. 청도의 이튿날은 이렇게 바쁘게 지나갔다.
셋째 날(7월 18일, 흐리고 가끔 비)
아침에 커튼을 여니 맑은 하늘에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평소 마라톤을 즐겨 하다 보니 외국에 와서도 한두 번은 달리기를 하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호텔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나오면 왕복 8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는데, 도로를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가로수가 아직 크지 않아서 그늘이 별로 없었다. 그 도로 옆쪽으로 지하철 철로가 고가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밑으로 보도가 나 있어서 다행히 그늘로 달릴 수가 있었다. 약 1km정도를 달리다 보니 전철역이 나왔다. 더 이상 갈 수가 없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꿔 약간의 오르막을 달려 올라갔다. 여기도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보이는데, 어떤 여성분은 범상치 않은 복장으로 인도가 아닌 차도 가장 자리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중간에 꽃이 핀 무궁화나무가 있어서 반가워서 사진을 찍었다. 청도에서 무궁화 꽃을 보다니,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더 볼 수 있었다. 약 2km를 더 간 다음 되돌아 왔다. 햇볕을 피하려고 했지만 다 피할 수는 없어서 땀이 많이 났다.
어제 밤늦게 호텔에 도착하여 오늘은 늦게 출발을 하였다. 9시 넘어 출발하려고 하니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그렇게 맑았는데, 날씨 변화가 심하였다. 우산을 챙겨들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은 노산을 가려고 그쪽으로 가는데, 노산의 정상부에 구름이 많이 끼고 비가 온다고 가이드한테 연락이 와서 내일 가기로 하고, 청도시 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에 가는 동안 가이드가 중국 역사를 간단하면서도 알아듣기 쉽게 요약하여 설명해 주었다. 하, 은, 주나라부터 시작하여 춘추 전국시대, 최초 통일 왕국 진나라로 이어졌다. 은나라 때 갑골 문자가 생겼고, 춘추 전국시대 공자, 맹자 이야기, 진나라 때 국가뿐만 아니라 문자,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 했다는 이야기까지 하는데, 박물관에 도착했다.
청도시 박물관은 1965년에 세워졌는데. 역사, 예술, 인문학을 포합하는 종합적이고, 다기능적이고, 현대적인 1급 국가 박물관으로 30개의 다른 유형의 문화재가 12만 세트 24만 점 이상이 3층으로 된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2001년에 새로운 청사가 건립되었다. 새로운 청사는 학이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아주 웅장했는데, 지붕이 파란색으로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박물관 앞에 펼쳐진 넓은 광장을 지나서 문 위에 ‘청도시박물관(靑島市博物館)’이라고 쓴 아치형 출입구로 들어서면 그리 넓지는 않지만 수십 개의 원기둥으로 둘러싸인 중앙광장이 나온다. 중앙광장을 가로질러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에 한글 설명이 없어서 내용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30여분 동안 빠르게 둘러보았다. 1층 첫 번째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진시황이 신하들하고 서 있는 조각상이 있다. 아마도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으러 사절을 보냈다고 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다양한 유물 중에 높이가 4m에 달해 2층 높이까지 차지하고 있는 목이 긴 두 개의 대형 불상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는데, 이 불상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런 불상이 박물관의 중앙에 상징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도 특이했다.
박물관을 나와 쇼핑센터 방문 중 2번째로 차를 파는 곳에 갔다. 백차(白茶)와 보이차(普珥茶)가 가장 유명한 듯 입구에 두 차의 이름이 쓰여 있다.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으니 차를 설명하면서 백차를 한 잔씩 돌렸다. 차 맛이 괜찮았다. 차는 보통 6가지로 분류하는데, 백차, 녹차, 보이차, 황차, 홍차, 우롱차가 있다. 차는 등급에 따라 가격대가 다른데, 어느 지역에서 언제 만들어졌느냐가 중요하단다. 그 외에도 차와 관련 없는 일상 용품도 홍보를 하였다.
12시가 넘어서 현지 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 지역에 한국인들이 대부분 살고 있어서 그런지 식당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간판에 한글로 쓴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 부동산, 마트, 각종 음식점, 당구장, 편의점, 마사지 등의 이름이 한자와 한글로 나란히 쓰여 있고, 개이쁨 개 미용실 같은 이름도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은 공장이 베트남으로 많이 이전하여 전보다 거주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한쪽에 ‘순희’라고 쓰여 있는 청향관(淸香館)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한국인 식당답게 인절미, 송편, 시루떡, 꿀떡 등 다양한 떡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온 음식을 보니 한국 음식과 중국 음식이 혼합된 듯한데, 두부찌개 맛이 좋았고, 고추 잡채는 한 그릇을 비우고 나서 더 시켰다. 최고 인기는 단연 김치였다. 특히 총각김치가 나오자 다들 환호성이었다. 양이 많지 않아 잘라서 나누어 먹었다.
1시간여 식사를 배불리 먹고, 근처에 있는 국학공원(國學公園)에 갔다. 공자 유적지인 곡부는 거리가 멀어서 가기 힘든데, 대신 공자상과 논어 말씀이 돌 벽에 새겨진 이곳으로 왔다. 이름에서 보듯이 공자 이외의 여러 성현들의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다. 국학 공원은 고대 중국 문명 연구란 이름으로 최초로 만들어진 고대 건축과 조경 공원이다. 약 7만㎡의 면적의 땅에 2년 동안 공사를 하여 2014년 봄에 완공을 했다. 명·청 시대의 건축 양식과 양쯔 강 이남 즉, 강남의 정원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이 공원에서는 5천 년 중국의 문화, 역사, 철학, 과학, 기술 등을 볼 수 있다.
용머리로 장식된 3단 지붕의 웅장한 정문은 닫혀져 있고, 옆문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공자님이 서서 우리를 반긴다. 꿩 대신 닭이라고, 여기서라도 공자님을 뵈니 반가웠다. 공자상 뒤에 긴 돌 벽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 공자와 관련된 듯한 그림이 부조로 그려져 있고, 뒷면엔 논어의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돌 벽 뒤쪽으로 큰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건너편으로 국학강당(國學講堂)이라고 쓴 큰 건물이 세워져 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공원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공원 중앙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언덕과 그 주면에 구역별로 다양한 나무를 심어서 예쁘게 조경을 잘 해 놓았다. 다른 쪽에도 또 다른 더 큰 연못이 있는데, 가장자리에 연꽃이 조금 피어 있었다. 두 개의 큰 연못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수로에도 연꽃이 자라고 있었다. 한쪽에는 소를 타고 가는 노자상도 있고, 원로야화(園爐夜話)라고 쓴 돌 비석 옆에는 화로를 가운데 두고 세 명의 성현이 앉아서 담소를 하는 조각상도 있다. 두 명이 장기를 두는 조각상도 있고, 이태백도 술 한 잔을 권했다. 그 외에도 산책로를 따라 많은 성현과 학자들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중간 중간 쓰레기통도 참 예쁘게 만들어 놓았는데, 사각으로 된 두 개의 쓰레기통 앞면에도 도지소존(道之所存) 사지소존(師之所存)이라는 글이 두 줄로 세로로 쓰여 있었다.
약 1시간 동안 관람을 하고 나서 고성(古城)으로 출발했다. 이 고성의 이름은 지모고성(即墨古城)이다. 지모고성은 지모(即墨) 고대 도시의 성곽이다. 1351년 원나라 때 흙으로 된 성곽과 세 개의 문이 만들어졌다. 1578년 명나라 때 벽돌로 세 개의 문을 튼튼하게 쌓았다. 1600년 왜구의 침입에 놀라 사람들이 초기 토성을 벽돌로 대체하였다. 동문을 조해문(潮海門)이라 하는데, 이는 바다와 면한 동문에서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곽 안 시가지는 천원지방(天員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사상을 반영하듯 정사각형 모양이다. 사방에 성곽을 쌓고, 동서로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동문리대가(東門里大街), 서문리대가(西門里大街)가 가로지른다. 대로 북쪽 중앙에 행정 중심지인 현아(縣衙)가 있고, 현아 좌우로 현아동가(縣衙東街), 현아서가(縣衙西街), 그리고 현아 중앙에서 남문으로 뻗은 남문리대가(南門里大街) 등 5개의 도로가 간선 도로이도, 나머지는 작은 도로가 직교형으로 나 있다.
최근에 보수 및 개조가 완료되어 깨끗한 모습인데,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보수 중인 곳이 보였다. 모두 3개의 출입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동·서 두 출입문은 옹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문은 그냥 문만 있고 북쪽은 문이 없다. 우리는 서문(通濟門)으로 들어갔다. 관람 시간이 많지 않아서 나는 빠른 걸음으로 혼자 동서로 난 간선도로를 지나 동문으로 나가서 보니 서문과 구조가 같았다. 다시 들어와서 남쪽으로 성벽을 따라 돌다가 남문으로 나가보니 남문은 동문, 서문과는 달리 옹성이 없이 문만 있었다. 다시 들어와서 작은 도로를 따라 성내 시가지를 지나서 서문으로 되돌아왔다. 성내의 가옥엔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고, 가게들만 있는데 특히 동문과 서문을 따라 이어지는 간선도로 주변으로 2층으로 된 상가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리 알려진 관광지가 아닌지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출입하는 성문 위에 야고성(夜古城)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야경이 더 멋있는 것 같아서 밤에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1시간 정도 고성을 관람하고, 해천만(海泉灣) 쇼를 보러 30여분 달려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공연장에 가려면 유럽풍의 상가 건물을 한참 지나서 바닷가까지 가야했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공연장 건물 벽엔 공연 중인 포스터(청도의 꿈-Dreaming of Qindao)가 붙여져 있고, 천창대극원(天創大劇院-Haven creation grand theater)이라고 간판이 크게 걸려있었다. 공연장은 바닷가에 있는데 들어가기 전에 시간이 남아서 바다 쪽으로 갔다.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고, 높은 파도가 방파제에 부딪혀 방파제 너머까지 물이 흘러나왔다. 이때는 몰랐는데, 일본과 한국 쪽으로 태풍이 지나가서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니 족히 천 명 이상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큰 공연장이었다. 의자의 색깔이 진한 빨간색이었다. 앞쪽 자리는 좀 더 넓고 편안하게 되어 있는데, 이 자리는 가격이 좀 비싼 것 같았다. 우리는 좋은 좌석 바로 다음 자리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였다. 공연은 매일 4시 30분에서 6시까지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된다. 마술과 묘기, 발레, 춤 등이 어우러진 공연인데 실화에 근거한 러브스토리로 대형 무도(舞蹈)극이었다. 오늘이 1991회 공연이니 5년하고도 거의 반 년째 이어지고 있는 장기 공연이었다. 쇼는 거의 대부분 춤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감정을 춤으로 묘사하려면 무척 어려울 텐데, 참 잘하고 있었다. 격렬한 감정, 애틋한 마음, 간절한 그리움 등이 춤사위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연극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공연의 시대는 항일 전쟁, 공산 혁명, 문화 혁명기와 그 후 등소평의 개혁개방 시기까지 이어졌다. 내용은 청도에 온 독일 마술사가 일본인들한테 위협을 당하는 중국 여자를 구해주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져서 딸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공산 혁명 이후에도 다행히 조선소에서 일자릴 얻어 계속 머물 수 있었는데, 문화 혁명기에 외국인이 다 추방되면서 이 남자도 결국 아내와 딸을 남겨놓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개방 정책으로 30년 만에 청도에 온 이 남자는 모든 게 다 바뀌어 아내와 딸을 찾을 길이 없었다. 옛날에 찍은 사진 달랑 몇 장 가지고 아내와 딸을 찾아 헤매다가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는 해피엔딩의 러브스토리였다. 전광판에 독일 남자가 회고하는 장면에서 한국어 자막이 나와서 대충 흐름을 알 수 있었다. 스토리가 있는 쇼라서 좋기도 했지만 잘생기고 예쁘고 잘 생긴 배우들, 화려한 의상과 현란한 군무(群舞)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보통 중국에 오면 서커스 공연을 많이 본 것 같은데, 이번 공연은 스토리가 있고, 감동이 있어서 좋았다.
공연을 보고 나서 버스에 올라 야시장으로 향했다. 야시장이니만큼 밤에 보아야 하는데,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지만 하늘에 먹구름이 덮여서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조명이 환하게 켜지기 시작하여 야시장의 분위기가 났다. 낮에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밤에 시장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우리나라 모란 시장도 평상시에는 주차장으로 쓰다가 5일에 한 번 시장이 열리는 날만 이용하는데, 여기는 매일 열리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들어선 곳 입구는 각종 과일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오랜만에 개구리 참외를 보았고 복숭아를 발로 밟은 듯 납작한 못난이 복숭아가 특이했다. 이어서 옷과 신발, 장신구, 장난감 등을 파는 가게들이 주를 이루었다. 한참을 가다가 돌아서 다른 쪽 라인으로 되돌아 나오는데, 그쪽에는 음식을 파는 곳도 있고, 개, 고양이 새끼들도 팔고 있었다. 물건은 좀 싸게 파는 것 같았다. 나도 달리기할 때 입을 반바지를 살까 했는데, 언더팬티가 있는 반바지가 없어서 고르다 말았다.
이제 늦은 시간이라 시장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늘은 특별식으로 무한리필 양 꼬치 집으로 향했다. 가미정곶성(可味正串城)이란 간판에 네온사인이 들어와 있다. 꼬치가 나오기 전에 탕수육이 먼저 나왔다. 아마 꼬치를 무한리필하려니 탕수육으로 먼저 배를 채우게 할 모양이었다. 파, 오이, 마늘 등의 채소는 직접 가져다 먹어야 했다. 이문희 선생님은 대파를 익혀서 잘 드셨다. 생양고기 꼬치를 기구에 꽂으면 자동으로 돌면서 익었다. 접시에 두 종류의 소스가 있어서 취향대로 찍어 먹으면 됐다. 무한리필이라고는 했지만 처음에만 떨어지면 잘 가져다주더니 나중에는 잘 가져다주지도 않고 양도 조금씩만 가져왔다. 아마도 남길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냉면도 시킬 수 있었는데, 난 배가 불러서 냉면은 먹지 않았다. 다른 분들을 보니까 냉면 맛이 별로였던 것 같다. 양 꼬치 집은 양고기로 배를 채우는 것이 순리이다. 청도 맥주엔 양고기 안주가 최고라는데, 술을 잘 못 먹어서 맥주 1잔만 먹었지만 양 꼬치로 배를 채우니 기분이 좋았다.
오늘도 10시 넘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아침에 출발할 때 비가 조금 내려서 관광 중에 비가 올까봐 걱정을 했었는데, 중간 중간 이동 중에 비가 오기는 했지만 다행이 내려서 다닐 때는 잘 피해 다녀서 한 방울도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
넷째 날(7월19일, 금, 흐리다 맑음)
오늘은 여행 마지막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1시간 정도 산책을 하였다. 어제 달리기 할 때 가지 않은 다른 길로 돌아서 전철역까지 갔다 왔다. 도중에 비가 조금씩 내려서 나무 아래로, 고가 철로 아래로 걸어 다녔다. 전철역에 가보니 전철역은 2층에서 탑승을 하는데, 출근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전철을 타는 데도 보안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보안대 앞에는 일분안검(一分安檢) 십분안전(十分安全)이라는 배너를 설치해 놓았다. 현재 운행되는 전철은 3개 노선이었다. 개통된 역은 2,3,11호선이다. 이 역은 11호선인 세박원참(世博園站)이다. 전철은 15호선까지 건설한다고 하는데, 순서대로 개통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출입구 번호를 우리나라는 아라비아 숫자로 하는데, 여기는 알파벳으로 했다. 내가 들어간 출입구는 A출입구였다.
어제는 아침 달리기할 때는 해가 쨍쨍했지만 출발할 때는 흐리고 비가 조금 내렸는데, 오늘은 아침 산책할 때부터 비가 조금 내리는데, 낮에는 반대로 쨍쨍해 지려나?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도 선택의 여지없이 라오산(노산-嶗山)을 가야했다. 8시40분에 호텔을 출발해서 30분 만에 노산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중국에서 해안가에 있는 산 가운데 가장 큰 산인 노산은 청도시 동쪽에 위치하는데 바위로 된 웅장하고 험준한 산봉우리들과 물, 구름 등으로 “태산(泰山)이 구름 위에 솟았지만 동해의 노산(崂山)만 못하다” 는 찬미를 받고 있는 산이다. 봉우리마다 둘러싸고 있는 기암괴석, 동굴, 폭포, 숲길 등이 절경을 이루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이러한 수려한 풍경으로 ‘바다 위의 첫 번째 명산’으로도 이름이 나있다. 노산은 중국 정부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이며, 1982년 중국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가급 ‘풍경명승구’ 중 하나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사절을 보냈다고도 하는 노산은 또한 도교의 발상지로 도교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많이 어려 있어서 도교 사원이 많이 있다. 노산은 여러 개의 높은 봉우리들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의 높이는 1132.7m이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큰 대합실 건물이 나오는데, 건물 위에 큰 글씨로 노산풍경구대하동검표처(嶗山風景區大河東檢票處)라고 쓰여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노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코스가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코스를 택했는데, 이쪽으로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것 같았다. 보안 검사를 하고 셔틀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버스는 대관령을 올라가듯 굽이굽이 올라갔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산 정상 쪽은 구름에 가려져있다. 올라가는 도로 옆엔 큰 바위들이 많은데, 바위마다 성현의 모습이나 글귀들이 새겨져 있었다. 담쟁이들이 바위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 굽이 돌아 올라갈 때마다 내려다보이는 경치도 좋았다.
셔틀버스에서 내리니 거대한 거북이 조각이 우리를 맞았다. 이곳은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정상은 여전히 구름에 가려있지만 골짜기 아래와 건너편 암벽이 절경이었다. 수평 절리가 잘 발달하여 갈라진 바위들이 마치 책을 수천 권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땅이 융기한 후에 오랜 세월 동안 풍화되어 바위들이 둥글둥글했다. 흙산보다는 돌산이 풍경은 더 멋있는 것 같다. 케이블카를 타는 건물 입구엔 천지순화(天地淳和)라고 쓰여 있다.
노산거봉색도(嶗山巨峯索道)라고 쓰인 건물에 들어가서 케이블카를 탔다. 약 10분정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맑은 날이면 아래쪽을 내려다 볼 때 아찔했을 텐데, 구름에 가려서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10시 30분에 최종 목적지에 올라갔는데, 여기는 물안개가 아주 심해서 가까이 있는 것만 보이고, 그 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는 구름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맑은 날에는 바다 쪽으로 보이는 경치가 아주 좋다고 하던데, 아쉬움이 컸다. 30분 정도 머물다가 내려가겠다고 했다.
한쪽을 보니 계단으로 더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고 싶은 마음에 계단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몇 분이 같이 올라갔지만 난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전날 비가 많이 왔는지 스며 나오는 물이 계단 위로 흘러 내려와서 오르기가 불편했다. 조금 올라가면 끝인 줄 알고 오르기 시작했는데, 한참을 가도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울창한 숲과 멋진 바위들이 중간 중간 나타나서 잠깐잠깐 감상할 수 있었다. 저기만 올라가면 끝일 거야라고 생각하고 올라가면 또 이어지길 여러 차례 출발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계단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더 올라가니 빙하의 흔적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빙하에 의해 형성된 동굴과 빙하에 의해 침식되어 위에서 아래로 홈이 파인 바위들도 나타났고, 기반암에도 수로가 나 있어 빙하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빙기 때는 노산도 빙하에 덮여있었다. 노산엔 빙하에 의해 형성된 동굴이 많은데, 원래 큰 돌기둥이었던 것이 빙하에 의해 서서히 이동하다가 돌 위로 누여졌고, 빙하가 다 녹고 나서 그 사이에 구멍이 생겨 동굴이 된 것이다. 그 구멍 사이로 올라갈 수 있었다. 빙하가 녹아 흐를 때 빙하에 의해 깎여 나간 돌기둥도 서 있는데, 깎인면이 매끄러웠다. 바위 위에 또 다른 바위가 올라가 있는 것도 빙하의 운반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시간의 2/3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시계를 보고 계속 올라가는데, 10시 46분이 되어서야 계단의 끝에 오를 수 있었다. 거기에 대피소로 보이는 건물이 있었는데, 여기가 정상은 아니었다.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길밖에 없어서 급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려오는 시간이 올라가는 시간보다 별로 빨리 내려올 수가 없었다. 워낙 가파른 오르막에 돌계단을 만들다 보니 계단의 폭이 좁아서 올라갈 때는 잘 몰랐는데, 내려올 때는 똑바로 내려오면 뒤꿈치가 자꾸 걸려서 넘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약간 옆으로 조심조심 내려와야 해서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거기다가 올라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서 사람을 피해서 내려오기도 해야 했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뭐라고 자꾸 물어본다. 얼마나 가면 되느냐고 묻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손을 흔들며 그냥 내려올 수밖에..... 오르내리는 동안 날씨는 변화가 없다. 가까이 있는 나무나 바위는 그런대로 보였지만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희미해지고, 멀리는 아예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구름 속 산길이 나름대로의 운치는 있었다.
간신히 11시가 조금 넘어서 내려오니 우리 일행들이 갈 생각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제야 화장실 가는 사람들도 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 내려오는 건데...... 20여분이 지나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데, 유영자 회장님께서 앞에 봉우리가 붓같이 생겼다고 문필봉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청도에서 성현들이 많이 나왔나보다.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굽이굽이 내려오다 보니 빨간 지붕을 한 가옥들로 가득 찬 시가기자 내려다보이는데, 주변 산들과 아우러져 볼만했다. 시가지 뒤쪽 협곡에 댐이 건설되어 있었다. 댐 아래 이렇게 많은 시가지가 있다니, 혹시 댐이라도 붕괴되면 저 시가지가 다 수몰될 것 같았다.
노산입구에 도착하니 12시가 넘었다. 밑에서부터 걸어서 올라가는 코스도 있는 것 같은데, 그래야 노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언제가 시간이 나면 다시 와서 걸어서 올라가고 싶다.
점심때가 되어 식사를 하러 갔다. 어제 점심 식사를 한 한인 타운의 식당에서 우리 일행의 반응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오늘도 그 집인 청향관(淸香館)식당에 갔다. 오늘은 담근 깻잎이 추가로 나왔다.
공항엔 저녁 6시20분 비행기로 출발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그 사이에 전신마사지 집으로 갔다. 엊그제는 발마사지를 빼고 1시간을 했는데, 오늘은 발마사지를 포함하여 90분간 전신 마사지를 했다. 엊그제는 시종 엎드린 자세로 마사지를 하였는데, 오늘은 주로 누워서하다가 하다가 엎드려서 마무리를 했다. 팔부터 시작하여 머리로 가더니 다시 발에서 시작하여 다리로 올라왔다. 앞을 충분히 마사지 한 다음 누워서 어깨, 등, 다리 순으로 하였다. 누웠다가 엎드릴 때 마사지사들 대부분이 ‘뒤집어’라고 말했는데, 나를 마사지 하는 사람은 ‘엎드려’라고 해서 제대로 배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방에서 마사지를 받은 여자분들은 바로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여기도 시간은 길었지만 봉사료는 엊그제와 같았다.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났다. 청도맥주를 나중에 사기로 해서 공항 가는 길에 맥주를 파는 가게에 가서 맥주를 샀다. 캔 맥주 6개나 12개를 한 묶음으로 포장해서 가져갈 수 있게 팔고 있었다. 난 술을 못 마셔서 낱개로 1캔만 샀다.
청도국제공항에 도착하여 그동안 고생한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하였다. 탑승 수속을 밟는데,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검색을 하는데, 온 몸을 구석구석 스캔하듯이 했다. 나는 가방에 보조배터리를 넣었는데, 질문하는 것을 잘 못 알아듣고, 없다고 했더니 검색대 통과 후 가방을 뒤져 보조배터리를 이러 저리 보더니 다시 통과하라고 했다.
비행기는 거의 지연되지 않고, 6시30분에 이륙하였다. 올 때도 갈 때와 마찬가지로 빵과 몇 가지 간식이 식사로 나왔다. 1시간여 비행을 하고 한국시간으로 8시40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늦은 시간이라 서둘러 귀가를 하였다. 꿈 같이 흘러간 3박4일의 청도 여행이었다.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을 가기 시작하여 이번이 6번째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중국의 모습이 무척 놀랍다. 이번에 오랜만에 중국에 가보니 이제 예전의 중국이 아니었다. 높은 빌딩, 넓은 도로망과 많은 자동차, 깨끗한 거리, 잘 조성된 가로수와 공원, 인도를 따라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참 잘되어 있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여 세계 1위를 꿈꾸는 중국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첫댓글 기행문을 너무도 자세하게 기록해 주셔서 읽어 내려 가는 매 순간 순간이 참석 한 것 처럼 착각 할 정도 였습니다~ 멋진 글로 생생한 현장을 표현 해 주시니 감동으로 다가와 잘 보고 느끼고 갑니다 ~ ^^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함께 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드디어 고대하던 기행문이 당도했습니다.
도여 부회장님 몇일간 애쓰신 기행문 잘 읽고 찬사를 보냅니다.
원래 꼼꼼한 선생님인줄 짐작은했지만 이렇게 한소절도 안빠트리고 한곳도 지나치지않고
세세히기록한 기행문은 첨봤습니다.
4일동안 스무명 그도 년세든 할매들 인솔하느라 신경섰습니다 .
벌서 어디다녀왔는지 새까맣게 잊어불번 했는데 이제 필림이 제대로 돌아가게
일깨워주심 감사합니다.
다 회장님 덕분에 잘 된 문학기행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다녀온 기분입니다
장문의 문학 기행문
생생하게 잘 보았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도여 선생님
여름이 쫓기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같이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세밀하고 생생하게 일정을 기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까지 제공하며 배경을 설명해주셔서 풍부한 기행문이 되었습니다.
대서사문학의 장을 멋지게 펼쳐주신 도여 채기병 선생님, 훌륭하십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가능한 일이지요.
첫 머리 글에서 여행 새로 하는 기분입니다. 덕분에 잘 더듬습니다.
구상하며 쓰시는 수고 말 할 거 없습니다 만, 읽는 데도 수고 많이 했답니다.
장편의 지리적 여건 가미한 글은 영락없는 지리 선생님이 맞습니다.
조목조목 솔피 마다 잘 다듬으셨습니다.
푹 쉬고는 단숨에 읽었습니다.
장문의 기행문 쓰시느라 시간 투자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노산은 아예 계단도 안 밟았는데 느낌 그래도 조금 전해 받았으니 저도 갔다 왔습니다.
돌아 보니 더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돌아와서 생각해야 더 재미있지요.
채기병회장님
엉덩이 불났겠네요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두고두고 좋은 기억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며칠 동안 꼼짝 못했습니다.
채기병회장님!
이번 여행 기록문은 어떻게 나올까 고대하며 기다렸지요~
역시 훌륭하시고 다시한번 동행한 영광을 되새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하니 더 기뻤습니다.
채기병회장님 기행문 훌륭하고 대단합니다.
배경을 설명해 주시니 새롭고 감동입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다니셔서 아주 좋았습니다.
채기병선생님, 고맙습니다. 와아~~ 행복한 청도 여행 함께 했습니다. 초우 가족 모두 늘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이 같으면 좋았을 텐데요. 4째 토요일 작가회 시간에 봬요.
다시한번 청도에 다녀온 느낌입니다 어찌이리 상세하게 기록을 하시는지요 이런저런 기록하시면서 또한 정리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청도의 기억을 되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큰 일을 하시는 전옥희선생님의 노고가 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