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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마태복음 13장은 여러 가지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비유를 하셨는가에 앞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가 중요한데, 천국의 비밀을 모든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신 자들에게만 알리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들이 받아 넉넉하게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역으로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비단 비유로 말씀하시는 내용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성경의 내용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서 교육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딤후3:16). 달리 말하면 이 성경을 통하여 유익을 받는 대상은 다른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비유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살펴보았는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그렇지만 곡식과 가라지 비유 역시 예수님의 직접적인 해설이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해설 자체와 다른 내용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선 비유 자체를 보자면,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지난주 본문에서 씨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그런 말씀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씨를 말씀으로 해석해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면 좋은 씨와 관련해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분명히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천국의 아들들,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좋은 씨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있느냐? 25절에 보면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원수라는 자가 나오는데, 39절에 의하면 원수는 마귀로 해설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가 뿌린 가라지는 누구냐? 38절에 의하면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기자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좋은 씨를 뿌려 좋은 곡식과 열매를 맺기를 바랐지만 거기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될 것은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씨라고 할 때 분명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장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탄식을 하느냐 하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거기서 극상품의 포도가 맺히는 것이 아니라 들포도가 맺혔다는 것으로 탄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씨를 뿌렸다고 해서 좋은 곡식으로부터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과는 분명 멀다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면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일지라도 열매가 없는 것 때문에 그런 탄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택자이며, 택자로서 열매가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때문에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를 놓쳐선 안 됩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기 백성에게서 열매를 찾으십니다. 찾는다고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찾으시는 그것을 친히 주실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방편을 통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도록 하고야 말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체적인 시각 속에서 오늘 본문은 택자를 향하여 좋은 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좋은 씨이기 때문에 좋은 곡식으로 자라나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란 전제가 깔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지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기 때문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26절이 그것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여기에 대해 집 주인의 종들이 그것을 보고 주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27절을 보시면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28절을 보시면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그래서 종들이 뭐라고 말하느냐?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29절과 30절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여기에 대한 해설이 36절 이하에 기록되고 있는데, 36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비유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서두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비유의 목적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택자들에게만 허락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나 알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택자만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받아 누리되 더욱 넉넉하게 받아 누이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로 설명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듣는 즉시 알고, 듣는 즉시 깨닫고, 듣는 즉시 받아 누리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듣고서 알고, 듣고서 깨닫고, 듣고서 받아 누리는 것은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택자라 할지라도 듣고 깨달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이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가룟 유다도 있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로 부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비유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무조건 다 깨달아 알았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비유로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그렇지만, 곡식과 가라지 비유 역시 들을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듣고 난 뒤 주님께서 해설해 주실 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 해설해 주시면 다 깨닫는가? 이때도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해설해 주셨기 때문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런 해설 가운데 성령의 조명이 앞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아무리 명확한 해설을 주실지라도 깨닫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혹 깨달아 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의 유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지난 주에 마태복음 13장 9절 말씀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고 하실 때, 이 귀는 육적인 귀가 아니라 영적인 귀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9절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43절을 통해서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이것을 영적 귀만 있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들으라고 말씀하신 분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들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영적인 귀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의 있어야지만 영적 귀로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는데, 37절 이하 39절을 보시면 비유로 말씀하신 하나 하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우선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라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밭은 세상이라고 되어 있는데, 칼빈의 경우는 세상이라는 말에 대하여 교회로서 이해하기도 합니다. 전체를 그 전체의 일부분으로, 혹은 일부분을 그 전체로 표현하는 방식을 제유법이라고 하는데, 칼빈은 주님께서 도처의 어느 밭에나 관여하셔서 생명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에 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는 교회가 제유에 의하여 온 세상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밭에 대하여 세상으로 이해하든, 아니면 교회로 이해하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씨에 대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의 아들들, 즉 택자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즉 유기자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라고 말하고 있으며,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고 말씀합니다. 주께서 심판하실 마지막 때를 가리킵니다. 추수꾼은 천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미 우리가 살핀 바 있지만 마태복음 9장 37절과 3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도들을 추수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3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선지자들이 수고한 것에 대하여 사도들은 추수하게 될 자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말씀 사역자들 역시 말씀을 씨를 뿌려야 하고 또한 뿌리는 자로서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이 항상 있도록 해야 한다는 분부를 받기도 하는데(요15:16 참조),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 사역자가 아니라 천사를 추수꾼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오늘 본문이 마지막 때라는 특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는 분명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앞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나온 것처럼 말씀이 마음 밭에 떨어져 자라야 하고, 결실도 맺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사역자가 말씀의 씨를 뿌리고 자라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에서 말씀 사역자들을 추수꾼으로 말한다면, 마지막 때는 모든 말씀이 성취되는 때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영광에 이르는 때입니다. 더 이상 말씀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해지는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 이상의 말씀 사역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는 말씀 사역자가 도구가 되기보다는 그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기 위하여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게 될 천사들을 추수꾼으로 말씀하고 계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전체적인 이해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 세상, 아니 가시적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좋은 씨로 말미암은 좋은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섞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좋은 곡식과 가라지가 분리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은 지금 당장 곡식과 가라지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비유 자체로 돌아가서 28절에서 종들이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29절을 통하여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말씀하시는 데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왜 가라지를 뽑지 못하도록 하시느냐? 뽑아 버리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왜 뽑지 못하도록 하시는가? 순전히 곡식 때문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힐까봐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기까지 그대로 두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작정과 그분의 전지하심은 분명 자기 백성들을 아십니다.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하나님께서 누가 곡식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모른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는 지금 곡식을 위하여 가라지는 잠시 동안, 비유 해설로 말하자면 세상 끝 날까지 두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끝 날에는 어떻게 하시는가? 가라지를 먼저 뽑는다고 말씀하십니다. 30절에 언급된 것처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보자면 분명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결국 두 부류로 나눠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유기하신 자들입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가시적 교회 안에도 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기된 자들도 있습니다. 곡식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큰 틀이 택자와 유기자의 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 15권 1에 보면 이렇게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어, 사람의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도성이라는 비유적인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두 사회라는 뜻이다. 그 중의 한 도성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지배하기로 예정되었고, 다른 도성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벌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면서 아담의 자녀들과 관련해 “그런데 인류의 처음 조상에게서 장자로 태어난 가인은 사람의 도성에 속했고, 그 다음에 난 아벨은(창4:1-2) 하나님의 도성에 속했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 세상 기준에 따라 사람을 나눕니다. 부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지식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힘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러나 성경은 인류에 대해 택자와 유기자로 구분합니다. 오늘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씨로서 곡식으로 자라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곡식이 아니라 가라지로 자라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도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이상 그 안에는 좋고 신실한 자들과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가 있다고도 알리십니다. 마지막 때 어떻게 되느냐? 가라지의 경우 심판하여 불사르게 된다면, 곡식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곳간에 들어가게 된다고 알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교훈 받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무장하고 괴로움을 주는 장애물 중에도 철통같은 신앙을 지속해야 한다.”(칼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아니라 가시적 교회만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고 할 때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택자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본문의 비유가 그것을 중심으로 말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문제가 있지만 택자들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교정하시고 결국에는 완성에 이르게 하시며, 그 과정 가운데 열매가 있도록 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란 좋은 씨로부터 나오는 좋은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기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좋은 열매가 아니라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들은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택자와 유기자가 가시적 교회 안에는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어떤 외형을 띨 수밖에 없느냐? 가시적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면서 외형으로 보자면 가라지 때문에 곡식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때문에 우리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며, 괴로움을 주는 장애물 중에도 그들의 참된 신앙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방해가 된다면 세상은 몰라도 가시적 교회 안에서는 그들을 좀 뽑아내 버리면 좋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부분이 그 문제를 없애주시면 좋겠다는 것으로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 문제가 빨리 해결되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종들의 경우 뽑을까 묻지만 주인은 도리어 그대로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가라지 때문이 아니라 곡식 때문에 그대로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외형으로만 보자면 곡식이나 가라지가 자라날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라나는 가운데서는 그 열매를 찾을 수 없거나 매우 미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찍부터 가라지는 뽑는다고 할 때 가라지만 뽑게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경우 그 모양이 비슷해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 자라서 구분할 수 있다 하더라도 곡식과 함께 가라지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 뿌리가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도 뽑힐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자라나 추수할 때까지는 곡식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가라지를 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라지를 그대로 둠으로 가라지 때문에 곡식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곡식에게 이런 저런 영양분이 가야 하는데 가라지 때문에 충분한 영양분이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외형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 때문에 불편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한편으로는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는 것 때문에 문제라고 하는 면이 있지만,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 때문에 전체 교회가 함께 불편함을 겪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혹 가톨릭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개신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구원과 상관없는 교리로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참된 교리요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입장에서 볼 때는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이 진리를 가리는 자들로 있기 때문에 진리 편에서는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그들을 그대로 놔두심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즉 그들이 있다고 해서 곡식이 피해를 받는 일이 있느냐? 외형은 피해를 받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피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좀 넓게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악인들이 있습니까? 특히 하박국 선지자는 악인들이 잘되는 것 때문에, 또 악인들에 의해 의인이 고통 받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악인들이 있다고 해서, 또 악인들이 의인들을 괴롭힌다고 해서 의인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위협하더라도, 혹은 목숨을 죽이는 일까지 있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사는 일에 있어 방해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맨 처음 교회가 아담이 가정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누가 있었느냐? 가인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가인은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 사람의 도성에 속한 자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자가 믿음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느냐? 하나님의 도성에서 지상의 도성으로 떨어지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의 자리에 이를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정 안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만 있었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삭에 앞서 육신의 자녀인 이스마엘이 먼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고, 하나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는 지상에 속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당연히 충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충돌한다고 할 때 누가 누구를 괴롭히느냐?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형태로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9절에 보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는 표현이 있는데, 장난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로 하자면 가라지가 곡식을 괴롭게 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괴롭힌다고 해서 이삭이 믿음에서 떨어졌는가? 믿음을 잃어버렸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가라지가 있다고 해서 곡식이 피해를 입거나 뭔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그들이 있음으로 인내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고, 또한 연단을 받아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소망을 더욱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때까지 그들을 두신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인내가 마지막 때까지 견뎌야 함을 배우셔야 합니다. 지금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지만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지막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는가? 마지막 때까지입니다. 끝까지 인내해야 하며, 인내하면서 믿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0절로 오시면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유기자들의 결국은 무엇이냐? 비유의 말씀으로 하자면 불에 사르는 것이 그들의 결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41절과 42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여기 보면 가라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들은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누구를 넘어지게 하고 누구에 대하여 불법을 행하는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시편을 통해 잘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악인이 의인을 대적하는 형태로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단련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시105:19 참조). 심지어 하나님은 유기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단련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무엇을 맺도록 하시는가?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가라지에 해당하는 자의 결말이 풀무 불, 물론 이것도 비유이지만 풀무 불에 던져 넣는 것이라면, 곡식 된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4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현상적으로 보자면 곡식보다는 가라지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는 그런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칼빈의 주석을 따라 말하자면 더러움에 싸여 있거나, 숨겨져 있고, 무가치한 것처럼, 치욕으로 덮여 있기까지 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자들이냐?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결실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말씀과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결실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살아가는 자들이란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점과 흠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리스도의 거룩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 때문에 우리 역시 의롭다 함을, 거룩하다 함을, 영광스럽다 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과는 달리 우리는 마치 하늘에 해와 같이 그렇게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결말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참된 성도를 향하여 무엇을 교훈하시는가? 가라지 때문에 신앙의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넘어지게 만들고 불법을 행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신앙의 자리에서 이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 때문에 더더욱 견고히 서야만 합니다. 불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규범으로 삼아 그 말씀의 빛을 따라 가야만 합니다. 지금은 힘들 수 있고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힘들 것과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을 소망하면서 인내로서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 한 가지 주의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 위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참된 교회라 할 때 우리는 이러한 표지들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데, 즉 그 안에서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어지고 있는가,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순수하게 거행되고 있는가, 죄를 벌하는 교회의 권징이 실시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벨직 신앙고백 제29장 참조). 다시 말해 교회 안에 신앙의 순결에 영향을 주는 불경건의 잘못들이 있는데도 권징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지금 이런 비유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진리와 상관없는 것들을 몰아내고 교회가 좀 더 순수하게 거룩하게 되도록 해야 합니다. 혹 어떤 죄가 공적으로 드러나게 될 때 그 죄에 대하여 벌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잘못되고 방탕한 자들에 대하여 용납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교회가 정결하게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로 하자면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라 할지라도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문제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한편으로는 진리와 그에 합당한 자세로서 싸워나가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위해 그들이 뽑히지 않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이단들이 많은가?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도 왜 이렇게 다른 교리와 교훈들이 많은가? 거짓된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가 더욱 빛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이 나오기 전에는 진리가 더욱 빛나는 못하다가 거짓 때문에 진리가 더욱 빛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유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선택만 있지 않고 유기도 있는가? 유기를 통해 선택이 더욱 빛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라지로 있는 자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또한 불법을 행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것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즉 저들이 넘어뜨리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르게 서야 하며, 저들이 불법을 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 위에만, 그리고 그 법을 따라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지막이 영광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로서 마지막 때까지 인내하며 그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