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존경했던 분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뜨는 것을 보니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신영복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는 아쉬웠다. 심안에서 길어 올린 사색의 목소리를 더이상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백기완 선생의 죽음 앞에서는 의외로 담담했다. 워낙 젊은 시절부터 시대의 선구자로 살아오셨기 때문인지 ‘때가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장일순, 김종철, 이오덕, 전우익 선생도 마찬가지다.
김민기선생이 소천했다. 학전 출신의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너무 뜻밖이다. 종일 김민기선생을 생각했다. 지구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허전함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큰 사람이었나’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설경구, 장현성, 윤도현, 박학기,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등 학전(學田) 출신과 조영남, 이적, 이수만같은 연예계 인사들, 유홍준을 비롯한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했다. 들리는 소문으로 김민기선생은 무위당 장일순선생처럼 위암 발명 사실을 알고도 연명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지난 3월에는 운영하던 학전소극장을 정리했고, 죽은 뒤에도 화환이나 부조금을 일체 받지 말고 오신 분들에게 밥 한 끼 배불리 먹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고맙다, 그동안 할만큼 했다’였다. 참 멋진 죽음이다.
김민기선생은 위대한 채권자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 중에 그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내가 ‘김민기’라는 이름 석 자를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친구는 자취방에서 ‘아침이슬’과 ‘작은 연못’을 불러주며 대학생들이 부르는 데모가라고 속삭였다. 대학 초년생 시절에는 ‘친구’라는 노래를 들었다. MT를 갔던 보길도의 몽돌해수욕장에서 내 친구는 검푸른 밤바다를 바라보며 ‘친구’를 불렀다. 그 뒤로도 ‘상록수’, ‘늙은 군인의 노래’, ‘그 사이’ 등의 노래를 양희은의 목소리로 들었고, 한영애의 목소리로 ‘기지촌’, 김민기와 노찾사의 목소리로 ‘천리길’,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여기에’, ‘타는 목마름으로’, ‘공장의 불빛’ 같은 노래를 들었다. 1980년대 중반 연세대학교 앞에는 ‘목마름’이라는 술집도 있었다. 시대를 고민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던 대학생들의 아지트였다. 술집 ‘목마름’은 이름 때문에 정권의 핍박을 받았다. 이처럼 김민기는 단 한 번도 민주화의 전면에 나서거나 노동운동을 이끌지는 않았지만 ‘뒷것답게’ 1970, 8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사람들의 기억처럼 1950, 60년대생들에게 ‘아침이슬’은 특별하다. 1987년 나는 명동과 광화문, 시청 앞, 서울역 앞, 퇴계로, 원효로에 있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시민들은 시위가 거듭될수록 민주세력과 대학생들 편으로 돌아섰다. 대학생들끼리 시위할 때는 김민기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투사의 노래’를 부르거나 ‘님을 위한 행진곡’, ‘광주출전가’, ‘동지’와 같은 투쟁가를 불렀지만 구름 떼같이 몰려든 시민들은 운동가요를 알지 못했다. 침묵의 엇박자가 몇 번 반복되자 누군가가 ‘애국가’를 불렀다. 그다음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우리의 소원은 민주’로 개사하여 불렀다. 다시 침묵이 시작될 때 내가 벌떡 일어나서 ‘아침이슬’을 불렀다. 아마 서소문 어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를 부를 때는 목청을 한껏 돋웠다. 그 뒤로 시청 앞 광장에서 또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모였던 군중들에게서도 아침이슬이 불러졌다.
개인적으로는 ‘봉우리’라는 노래가 특별하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해서 1985년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는 1993년 김민기가 다시 불렀고, 2003년에는 전인권이 리메이크해서 스터디 셀러가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전인권의 ‘봉우리’를 좋아했다. 포효하는 전인권의 목소리를 사랑해서 듣고 또 듣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도 들려줬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김민기의 봉우리만 듣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노래 ‘봉우리’는 LA 올림픽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송지나 작가의 의뢰로 작곡되었다고 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던 선수들에 대한 위로곡인데 이듬해 양희은이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가사는 이렇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중략)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김민기는 스스로 봉우리에 오르려고 애쓰지 않았다. 봉우리에 오를 수 없어도 좌절하지도 않았다. 의도와는 달리 발표한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고 활동이 금지되어 머슴 생활, 소작농, 공장 노동자로 일해도 우리 사회 어느 구석에서 슬픈 이웃들을 위로하고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 묵묵히 나아갔다. 민주화 이후에는 한겨레신문사와 ‘겨레의 노래 찾기’ 운동을 전개했고, 1991년에는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나 무대를 잃어버린 후배들을 위해 소극장 ‘학전(學田)’을 열었다. 김민기는 수많은 국민가요를 발표했지만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스스로도 목소리 톤이 낮아서 가수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래서 소극장 ‘학전’을 연 뒤에는 줄곧 ‘뒷것의 두목’으로 자처하며 후배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힘썼다.
김민기선생은 ‘학전’을 통해 많은 후배들을 가르쳐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작은 김민기가 되어 김민기처럼 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오늘 김민기선생의 장례식이 엄수되었다. 우리에게 엄청난 빚을 안기고 떠난 사람. 그가 벌써 그립다. (202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