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참봉전주최공응운지묘(參奉全州崔公應雲之墓){비석}
- 참봉공 묘비(신비) -
전북 임실군 오수면 대명리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선조(先祖)는 중국(中國) 산동(山東) 청하(淸河)에서 살았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칠 때(살수대첩) 포로(捕虜) 되어 고구려 백성으로 살았는데,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고구려가 망하자 금마저(金馬渚)로 옮겨와 살면서 신라에서 육두품에 올라 전주최씨가 되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에 대략 그 내력(來歷)을 적었으나 세대(世代)를 검증할 수 없으므로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성공(文成公) 휘 아(阿)를 시조(始祖)로 세대(世代)를 기록하였다.
문성공께서 중랑장(中郞將) 휘 용봉(龍鳳)을 낳으시고, 중랑장공께서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 동정(同正) 휘 을인(乙仁)을 낳으시고, 동정공께서 월당(月塘) 선생(先生) 휘 담(霮)을 낳으시니 검교(檢校) 호조(戶曹) 참의(參議)이시다.
월당공께서 연촌(烟村) 선생(先生) 휘 덕지(德之)를 낳으시니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자경문(自警文)으로 삼은 순덕고절한 정학지사로 유명하시다.
연촌공이 남원(南原) 부사(府使)로 계시면서 지사방(只沙坊)에 북창(北倉)을 세우시고 건너편에 주암촌(舟巖村)을 개척하여 장남 호군(護軍) 휘 주(淍)를 그곳에서 살면서 종중행사에 참여하라 명(命)하시고 영암(靈巖)으로 낙향(落鄕) 하시니 지금의 지사면 방계리가 그곳이다.
호군공께서 선무랑(宣務郞) 휘 대(岱)를 낳으시니 장흥고(長興庫) 부사(副使)이시고, 선무랑공께서 암계(巖溪) 선생(先生) 휘 연손(連孫)을 낳으시니 이조(吏曹) 참판(參判)이시고, 암계공께서 통덕랑(通德郞) 휘 윤조(潤祖)를 낳으시니 오위부(五衛部) 도사(都事)이시고, 통덕랑공께서 충훈부(忠勳府) 부장(部將) 휘 완(琬)을 낳으셨다.
부장공께서 내금위(內禁衛) 정세안(丁世安)의 딸 의인(宜人) 창원정씨(昌原丁氏)와 혼인하여 공을 낳으시니 공의 휘는 응운(應雲)이시며 벼슬은 참봉(參奉)이시다.
공은 부안김씨(扶安金氏) 김세주(金世柱)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호문(好文)이고, 차남 호무(好武)는 조산대부(朝散大夫)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이며, 딸은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천경(洪天慶)과 혼인하였다.
손자 종립(宗立)은 호군(護軍)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중추부사(中樞府使)이며, 증손 치견(致堅)과 7세손 처림(處琳)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이고,
12세손 영열(英烈)은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제(日帝)에 항거하여 싸운 독립투사이며,
11세손 광우(光愚), 광수(光壽)와 12세손 한호(翰昊), 한민(翰旻)은 효성(孝誠)과 우애(友愛)로 정려를 받았다.
공(公)의 산소는 왼쪽 골짜기 건너편에 있었으나 2007년 27번 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묘지가 수용됨으로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는데 예전 산소에 있었던 구비(舊碑)를 그대로 이전함과 함께 새로이 비석을 세운다.
2007년 월 일.
16세손 순림(順林) 근찬(謹撰).
* note.
이 비문은 국한문(國漢文) 혼용(混用)으로 되어 있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한자를 괄호 속에 넣고 한글 발음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