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애지 여름호 카페시 3편
선정자 이수
매몰지
김 기 택
풀이 땅에 구멍을 뚫고 있다
땅속에 숨통을 심고 있다
수백 개의 콧구멍이 흙덩어리 숨을 들이쉬다가 멈춰 있는 곳 놀란
순간이 떨어지고 있는 흙으로 덮인 채 눈 뜨고 있는 곳 뒤틀리는 살
덩어리와 흙 먹은 비명이 막힌 숨을 뚫고 나가려다 굳어있는 곳 필사
적인 꿈틀거림이 두꺼운 살갗에 숨구멍을 뚫다가 부러져있는 곳 다
썩지 못한 가죽과 팔다리가 검은 핏물과 악취 가스가 되어 땅속을 발
버둥으로 긁어대는 곳 한 삽 흙을 뜨면 두개골과 다리뼈가 뿌리처럼
우두둑 뜯겨 나올 것 같은 곳 봄이 되면 땅속을 긁는 발톱들 때문에
땅거죽에 소름이 돋는 곳 바람도 부스럼이 생겨 가려운 등을 나무와
바위에 비벼대는 곳 진저리치던 뿌리가 맹렬하게 말라 죽어 가는 곳
풀이 썩은 어둠에 푸른 파이프를 박고
여린 숨을 퍼 올리고 있다
― 계간 《애지》 2022년 봄호
스탠드 아래
박소란
책을 읽고 있다
새카만 글자들이 꿈틀대고 있다 금방이라도 책을 떠나려,
책장을 덮을 수 없다 언제나처럼
주위는 캄캄해
마침표보다 작은 한 마리 벌레가 기어오고 있다
빛이 펼쳐놓은 수상한 이부자리 속으로
한쪽 더듬이가 꺾여 있다 없는 다리를 절고 있다
병든 것들은
왜 하나같이 이리로 몰려드는지
왜 나는 이 낡은 방을 떠날 수 없는지 쓸모없는 자책을 하며
책을 읽고 있다
벌레를 어쩔 수 없다 죽은 척 동작을 멈춘
벌레가 잠시 어떤 생각에 잠긴 동안
또 다른 벌레가
어둠을 덕지덕지 껴입은 수십 수백 마리 벌레가
나는 놀라서
겁에 질려서 자꾸만 스멀거리는 문장을
읽고 또 읽고
아버지 피하세요 얼른 도망치세요
언제 벌써 알을 깠나봐요 우리의 신실한 불행이
그 해쓱한 얼굴 위로 기어가고 있어요
아버지는 꼼짝 않고 누워 있다
너무 깊이 잠들어 있다
영영 눈 뜰 수 없는 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대로 빛을 개키면
책장을 덮으면
아무것도 아프지 않다고
―계간 《문학동네》 2022년 봄호
미도착
서윤후
양생 중인 바닥을 갖고 싶다
지금은 도착에 대해 생각 중이니까
기다리는 동안 어떤 무지가 될래?
약속에 늦는 사람은 내 기다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
이것은 불시착일 수도 있고
게워낼 수 없는 주소일 수도 있다면
천장을 하늘이라 여길 만큼
어둡고 깊은 곳에 나는 먼저 와 있었다
매일 시동 거는 꿈을 꾸고
매일 난분분한 바닥을 짐작했으며
떨어지는 법을 배운 적 없이 추락을 쌓고
들이닥친 빛 한 줌이
내가 누비던 바닥을 훤히 비췄을 땐
내 손바닥 자국을 누더기로 쓴
악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라서
먼저 갈게, 말하고 여태껏 기다리게 된 진동하는 심장
나는 몇 시간째 양생 중인 바닥을 보고 있다
우리 산업의 도착은 콘크리트 재질
끝없는 나락 속에도
콘크리트 입장을 앞둔 사랑의 반죽이 있고
누가 나를 낳았던 깊은 지하에도
휘갈긴 우중충한 사랑이었고
그 후로 나는 도착하지 않는 생각이다
흐르러진 벚나무 보며 걷다가
양생 중인 바닥에 발을 푹 담그고는
신발 밑창을 다시 콘크리트 바닥에 긁으며 나아가는
사람의 운세가 되고 싶다
약속에 늦게 나타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길 하자
자꾸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가 나를 근처 스키야끼집이나 우동집에 데려가면
나는 양생 중인 바닥을 잊고 만다
그건 내가 지워지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뜻
아무도 도착할 수 없는 바닥이 될래?
식당 앞에는 끝없는 줄이
끝없게도
― 계간 《시산맥》 202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