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머리/미사
정성화 작가의 동생을 업고-라는 수필을 읽다가 상고머리라는 말에 나의 눈길이 한참 머물렀다.
아버지는 우리 동네 이발사였다. 간판도 없는 그냥 동네이발소였다.
주로 연세 드신 동네 노인들과 아이들이 단골손님이었다.
우리 삼남매도 아버지의 고객이었는데 아버지는 이발하실 때 그냥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른 것은 아니었다.
우선 바로 밑에 남동생, 우리 집 장남이었지만 머리는 늘 빡빡이었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늘 사고뭉치였던 동생을 아버지는 의자에 앉혀놓고 타이르기도 하면서 너 지난번에 그렇게 한 것은 어떻게 잘못인지 알지, 하면서 이번에는 빡빡머리다. 네가 좀 더 나아지면 그때는 스포츠 머리로 해주마.
하지만 동생 머리는 조금도 길어질 수 없었다.
삼 남매가 싸우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회초리를 드셨는데 그 때마다 곰처럼 미련하게 도망가지않고 그 매를 다맞은 건 동생이었다.
돌이켜보면 동생의 깊은 뜻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때 왜 도망가지않고 저리도 미련하게 구는걸까, 하고 생각하였다.
막내동생은 언제나 스포츠 머리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막내동생은 늘 어긋나가는 형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의 대리만족을 해주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국민교육헌장을 어깨 너머로 배운 막내동생은 아버지 친구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나의 머리는 언제나 상고머리였다.
머리카락이 뻣뻣하고 직모여서 나는 언제나 곱슬머리 친구 정이가 부러웠다.
산으로 놀러가면 바구니를 만드는 줄기를 따서 미장원 놀이를 하곤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면 도로 풀어져 뻣뻣한 머리카락으로 돌아오곤하였다.
언젠가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촌오빠가 카메라를 사온 기념으로 우리집 마당에 삼남매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마도 나는 박수근의 아이 보는 소녀-그림처럼 막내동생을 업고있다가 사진을 찍는다는 말에 얼른 동생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른다.
가지런히 잘려진 앞머리, 꼭 다문 입술 그리고 미군들에게 얻어입은 하얀 브라우스와 멜빵달린 치마
그 사진은 내 생애 최초의 사진이 되어 이민가방에 실려왔다.
아버지가 이발을 하면서 주로 나누던 대화는 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것이었다.
농산물도, 해산물도 아버지의 고향에서 나는 것은 모두 좋았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 수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표현하셨을까.
어쩌다 아이들 손님이 올 때는 고향이야기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린 아기들도 아주 잘 달래어서 울지않도록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기를 데려온 엄마들은 한시름 놓았다고 하면서 돌아가서 과일이나 텃밭 야채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얼마 전 여행을 가면서 지인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 아버지는 이발사였다고, 하자 누군가 아, 그래서 남편 머리도 잘 자르는구나 하였다.
가만히 돌이켜본다.
온 동네 아이들 다 불러모아 동네 보모를 자청하였던 것도, 이야기책 읽기를 좋아하였던 것도 모두 그분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구나.
책상 위에 놓여진 삼남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가을이면 피어나던 노란 국화꽃 사이로 상고머리, 빡빡머리 그리고 스포츠머리를 한 삼남매 웃음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