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口卽錯개구즉착과 용수의 論破논파>
형이상적 문제에 대해 어떤 것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는 불가지론자의 주장이다. 부처님 당시 날란다 지방에 행세하던 산자야 벨라티푸타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출가하기 전의 사리불(우파티사)과 목련(콜리타)의 스승이었다.
중관파의 시조 용수존자는 나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가 무엇을 주장하든지 그 논리를 부정의 논리로서 論破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래서 상대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게 해줌으로써 앎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의 분별(이성의 발동)이 쉬게 만든다.
개념이란 자기 혼자 독자적 의미를 가질 수 없고 다만 반대되는 개념의 쌍에 의존할 때에 의미가 발생한다. 그래서 의존적 발생(즉 緣起)이라 한다. 모든 개념은 자체성이 없다(연기적 발생이므로 공성이라 한다). 개념 두 개를 모아 구성하면 추리가 되고, 개념을 세 개 모아 구성하면 판단이 된다. 개념이 의존적 발생으로써 독자적 의미를 갖지 못하므로 개념을 두 개 모으던(판단은 두 개의 개념으로 이뤄지는데, 개념이 무실체이기에 판단은 허구다),
세 개를 모으던(추리는 세 개의 개념으로 이뤄지는데, 개념이 무실체이기에 추리는 오류다) 모두 독자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추리와 판단이란 것도 세간의 언어사용법 상 잠정적 한시적으로 상황적인 유용성을 가질 뿐 불변의 필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말할 수밖에 없는 이 ‘어쩔 수 없음’을 간과하고 말할 수 없는 걸 말로 하고, 또 그 말을 받아, 그 말에다 말을 보태는 일은 번뇌의 확산이라, 똥이 담긴 바가지를 사방으로 뿌리는 꼴이다. 그래서 선종에서 (道, 진리에 대해서 한마디 하겠다고)입 벌리는 즉시 어긋난다. 이를 開口卽錯개구즉착이라 한다. 그리고 선문답에서 아무리 답을 잘했더라도 언어의 흔적이 남기 때문에 소매를 털고 자리를 떠난다든지, 엑 ! 가래를 뱉는 시늉을 한다든지, 할! 하고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면서 이제까지 치열하게 벌였던 문답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린다.
왜 그럴까? 그게 부처님과 용수존자의 설법의도에 최고로 합당한 일이며 그분들의 은혜를 갚는 일이다. 부처님은 세상에 이론을 보태려고 온 게 아니다. 다만 다양한 세간의 논의를 잠재우고 희론을 적멸하여 고에서 해탈하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온 것은 종교나 제도와 조직을 만들기 위함도 아니며 체제개혁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지상천국을 건설하려고 온 것도 아니다.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을 견해의 결박을 풀어주고 정신적 고통을 없애 주기 위해서, 신들과 인간의 안락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첫댓글 선불교에서 말한 후에 가래뱉는 시늉 낸다는것도 모르고 저는 며칠전 스님이 '공연히 말했구나 펫' 하신것이 침뱉는 소리로 오해 받을까봐서 '펫' 소리가 티벳불교 의식에서 정화하는 소리라고 댓글 썼다가 지운적 있어요. 지우기 잘한거죠.
그런데 지금껏 저에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 하라는 조언하신 스님이 두분이나 계신데.. 저는 그 진언이 재미도 없거니와 아미타 신앙의 의미를 몰라요.
제가 우울증이 오래라서 2007년도 보드가야 갔을때도 죽음을 준비하는 수행에 관심있어서 drikung kagyu파 아양 린포체의 포와수행 코스를 들었죠.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됐던듯.
근데 그 수행도 아미타 정토신앙 기반으로 한거라서 이해가 되지 않고 좀 웃기기도 했죠. 스님께서 언제 시간 나시면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토극락 개념은 후대에 생긴 대중 포교 방편이지 부처님의 본래 뜻은 아니잖아요.
티벳불교 의식에서 하는 펫!도 선사들이 법문끝에 외치는 악!과 통하는 게 있어요. 저도 보드가야에서 열린 아양 린포체의 뽀와 코스를 했었지요. 정토신앙을 한마디로 자를 수는 없어요. 방편이기는 하지만 중생에게 유익하니까요. 내가 마음에 안든다고 남이 하는 불교수행을 내 관점으로 비평할 수는 없지요. 🙏
스님 말씀 고맙습니다.
근데 아무튼 예전에 포와코스에서 빈두가 정수리를 뚫고 올라가 바즈라 요기니에 합하는거 관상하며 단체로 Hri Hri Hri !! 할때 웃겼어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