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84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마는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비개인 남산에(山堂雨後)
일선 정관(一禪靜觀) 선사
우수남악권청람
雨收南岳捲靑嵐
산색의연대고암
山色依然對古庵
독좌정관심사정
獨坐靜觀心思淨
반생견괘칠근삼
半生肩掛七斤杉
비(雨) 거두워 개인 남산에
푸른 산기운 아지랑이 걷히고
산 빛(山色)은 의연하게도
옛 암자(庵子)를 마주하네.
고요히 홀로 앉아 바라보니 생각과 마음마저 맑아져서
이렇게 반평생 어깨 위에
가사 장삼 걸치고 살았네.
"
《산당우후(山堂雨後)》
라고 제목(題目)이 붙어있는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는
서산대사(西山大師)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 선사(禪師)의
제자(弟子)인
일선정관(一禪靜觀,
1533~1608) 선사(禪師)
스님(僧, 大沙門)이
지었다.
비온 뒤
절간(寺刹, 승가람마)에서
산색(山色)을 바라보다
홀연히 심사(心思)가 일어나
반평생(半平生)의
생애(生涯)를 돌아보며
조용히
자신의 심경(修行者 心經)을
읊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人間, 중생)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사는가 ?
하는 것은
어느 개인(各個人)의
인생살이(人生, life style)에
객관적(客觀的)인
정황(程況, 시공간적 상황)으로
화폭(畵幅, 운명)에 그려진
그림의 내용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 평생(一生)을
산 속(山中 사찰)에 살면서
오직 부처님 또는
도(道, 일심청정도리)를 향한
수도(修道, 수행정진)에
종사한 사연 속에도
숱한 애환(愛患)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깨에 장삼(長衫(긴 적삼)을
걸치고 살았다고 언급하며
넋두리(푸념)하듯
말 한다.
※
참고적으로
가사(袈裟)는
승려가 장삼 위,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法衣)를
말한다.
원래는
인도의 승려(僧侶)나
비구니(比丘尼僧)들이
자신의 몸을 감는 옷에서
유래했다.
그냥 펼쳐 놓으면
평범한 직사각형이지만
입는 방법이
대단히 복잡하고
입은 걸 보면
묘한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산스크리트어
캬샤야(Kasaya)의
한자 음역어로
분소의(糞掃衣)
라고도 이칭하는데
수행자들이
버려진 옷감 조각을 기워서
흙과 분뇨를 이용해
염색하여 사용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국 불교에서는
가사(袈裟)를 입는 행위를
" 수(垂)하다. "
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
아무개 스님이
가사를 수하시고..
"
라고 하면
가사(袈裟)를
승려의 몸에 착용했다는
뜻이다.
※
수행자(修行者)
자기 자신(自己自身)에
생(一平生)의 독백(獨白)을
내어서 펼쳐 놓는다.
임진왜란의
전란(戰亂)을 겪으면서
승려(僧侶)로서
남다른 고민(苦愍)을 했다는
일선 정관(一禪靜觀,
1533~1608) 선사(禪師)
스님(僧, 大沙門)은
전쟁(戰爭)을 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殺人)
중생(衆生)의 업보(業報)를
몹시 개탄(慨嘆)했다고 전한다.
업보(業報)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이 것이(업보)
잘못되면 엄청난 악업(惡業)을
지으면서
도(道, 佛道, 사람의 도리,
인간의 도리, 부처님 도리)를
어기는 것이 되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고
반드시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생(人生)을
헛되게 살고 마는 것이다.
※
일선 정관(一禪靜觀,
1533~1608) 선사(禪師)는
1533(중종 28)에
연산(連山)에서 태어난
임진왜란
시기의 선사(禪師)로
성은 곽(郭)
호는 정관(靜觀)이다.
사명유정(四溟惟政)
편양언기(鞭羊彦機)
소요태능(逍遙太能)과 함께
서산대사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15세에 출가해
백하선운(白霞禪雲)에게
≪법화경≫을 배우고
그의 법화 사상(法華思想)을
전수 뒤 법화 신앙에 심취해
≪법화경≫을
부지런히 독송했고
그 공덕의 뛰어남을
역설하는 한편
시주를 얻어
3000권의 종이를 마련하고
3000부의 경전을 인출해
보시(布施)하는
등(等)
경전 유포에
큰 공훈을 남겼다.
한 때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
머물렀고
만년에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강석에
참학(參學)해
그의 심인(心印)을 이어받았다.
1608(선조 41)년
가을에 병(病)을 얻어
덕유산 백련사(白蓮社)에서
입적했다.
임진왜란 중에
승려들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승군(義僧軍)으로 나아가
전쟁에 참여함을 보고
승단(僧團)의 장래를 걱정했고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승려의 본분인가에 대해
개탄했다.
또한
도반인 사명당
유정(惟政)에게 글을 보내
전쟁이 끝났으니
한시바삐
관복을 벗고
승가(僧家)의 본분을 다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수도승이 보여 줄 수 있는
다양한 양상 중
청정 수도의 측면을
몸소 실천한 인물로 꼽힌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문하
4대 문파 가운데 하나인
정관문(靜觀門)의
창시자이다.
저서로는
[ 정관집 ] 1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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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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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