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주가 복이 되게
성경본문 : 느헤미야 13: 1-3
1.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
너와 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말을 좋아한다면, 정반대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기분 나빠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저주’라는 말일 것입니다.
예화
미국의 건국 당시 헤리슨이라는 사람이 인디애나 주지사 시절에 인디안 부족을 공격해서 몰살시킨 적이 있는데 당시 패배한 인디안 추장 테쿰 씨가 백인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끝자리 0 년에 당선 된 미국 대통령들이 테쿰 추장의 저주대로 20년마다 0이 붙은 해에 저주를 받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는 저주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테쿰의 저주 때문인지 몰라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1840년 당선된 윌리엄 해리슨은 취임 일 개월 만에 폐렴으로 사망, 1860년 당선된 아브라함 링컨은 암살, 1880년 당선된 제임스 가필드는 암살. 1900년 재선된 윌리엄 매킨리는 암살, 1920년 당선된 워렌 하딩은 심장마비로 사망, 1940년 재선된 루즈벨트는 뇌출혈로 사망, 1960년 당선된 존F케네디는 암살, 1980년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은 겨우 암살 모면, 2000년 당선된 조지 부시는 아직까지는 건재합니다.
만일 테쿰 추장의 저주와 같은 저주가 있다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성도들은 그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비결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느 13:2)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1. 저주꺼리 찾아내기
오늘 성경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하나님께 봉헌식을 드릴 때 단순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사로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처럼 모세의 율법 책을 낭독하여 귀 기울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모임인 총회를 약속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총회에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은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하신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 이유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모압 족속의 땅을 통과해야 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위해 모압 족속에게 아무런 폐해를 끼치지 않겠으니 단지 모압 땅을 지나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압 사람들이 이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발람 선지자에게 복채를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기도를 하도록 사주하였습니다. 물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거듭 거듭 저주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민 22:7)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물론 발람 선지자는 모압 왕 발락이 요구하는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대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처럼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 발락과 모압이 저주를 받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발람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축복의 통로였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저주를 축복을 바꾸신 것입니다.
(민 24: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민 24:10)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오늘 성경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과거 암몬과 모압 족속이 이스라엘을 저주한 사실을 놓고 그들을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모압 자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 안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바벨론에서 3차 포로귀환을 하여 예루살렘에 12년 동안 머물면서 성벽을 재건하고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상을 지도하다가 아닥사스다 왕과 약속한 때가 되어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일년 동안 예루살렘을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그 어간에 성전의 방을 관리하는 제사장 엘리아십이 과거에 성벽 재건을 하지 못하도록 악랄하게 훼방했던 암몬 자손 도비야에게 성전 안에 있는 큰 방 하나를 내어 주어 살림을 차리게 한 것입니다.
본래 그 방은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 노래하는 자들, 제사장들에게 곡물과 식물들을 공급해주기 위해 필요한 십일조 물품들을 보관하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성전 안에서 도비야를 끌어 드린 것은 당시 제사장들이 얼마나 세속화되고 부패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까요? 성전을 섬기면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 레위 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배가고파서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기 위해 성직을 버리고 자기 밭으로 도망치는 일이 발생을 하였습니다.
(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여기서 ‘알아본즉’이라는 말은 느헤미야가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알아본 것이며, ‘도망했다’는 말은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도망치는 심각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예루살렘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고 제사를 드릴지라도 이스라엘 가운데서 뿌리박고 있는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을 제거하지 않으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명하신 율법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 섞여 있는 이방인의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여기서 ‘분리하였다’는 말은 와우 계속 미완료 동사로서 마치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과, 밤과 낮과, 궁창의 물과 땅을 분리하신 것처럼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계속했다는 뜻 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축복받기 원하는 나에게 저주를 가져다주는 도비야와 같은 죄악의 요소가 내 안과 주변에 뿌리박고 있지 아니한지를 계속해서 살펴 분리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도비야가 내게서 아주 먼 곳이 아니라 내 마음, 내 잘못된 습관, 내 가정, 직장, 그릇된 인간관계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찾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 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의 장애물이며 저주의 통로인 죄악을 내 안에서 제거하고 분리하는 것만이 저주가 복이 되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죄로 인한 저주가 축복으로 변환되기를 원하면 오늘 내가 내어 던져야 할 것과 내어 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보고, 느헤미야처럼 과감하게 내어 던지고, 쫓아 버리고, 떠나게 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철석같은 결심을 해 놓고서, 살을 베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잘못된 것을 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다가 얼마가지 못해 포기하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 같은
분리 작업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막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2. 저주꺼리 몰아내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인들이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오랜 기간 동안 심지어 제사장과 족장들까지 연루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섣불리 손을 댓을 경우 오히려 본전은 고사하고 역공을 받게 될 위험천만한 사건입니다.
1)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내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의 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2) 하나님이 보실 때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었습니다.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만든 악한 일을 안지라”
3) 느헤미야도 인간이기 때문에 고심을 하였습니다.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여기서 ‘심히 근심하여’ 라는 말은 엄청나게 떨다, 걱정하다, 근심하다는 말로 계속와우 미완료 동사임을 볼 때 느헤미야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문제를 고민하며 해결하였을까요?
1) 내어 던지기-비우기
느헤미야가 만일 도비야를 방치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미 받은 축복조차 저주꺼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어떤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하루 속히 제거해야만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결단하고 과감하게 행동하였습니다.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도비야 만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지도층의 가정마져 이방여인들과 깊은 교제를 맺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한 일은 심지어 그들 가운데 대제사장의 손자마저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어 쫓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25)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내가 쫓아내어 나를 떠나게 하였느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힘든 것은 내가 그동안 사랑하고 즐기던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내게서 제거하는 영적인 암수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동안 즐기던 담배나 술이나 도박이나 그릇된 오락이나 취미나 나쁜 친구나 잘못된 이성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끊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동안 즐기던 담배나 술이나 도박이나 그릇된 오락이나 취미나 나쁜 친구나 잘못된 이성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2) 들여 놓기-채우기
그러나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도비야를 내 속에서 몰아내었다고 다가 아니라 그 빈자리에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으로 다시 채우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방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사단이 알고 더 악한 귀신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마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느헤미야는 단순히 도비야의 세간을 성전 방 밖으로 내어 던진 것만으로 성전 개혁을 다한 것처럼 만족한 것이 아니라 본래 그 방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십일조를 채워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들이 생계 문제로 걱정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9) “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
물론 여기서 ‘정결히 하고, 들여 놓았다’는 말은 모두 와우 계속 미완료 동사로서 그 방이 비워지지 않도록 계속 채웠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레위 인들이 배가 고파서 성전 일을 버리고 도망친 것을 알고 그들을 불러 모아 책망하는 대신 그들을 제자리에 세우는 일을 하였습니다.
(11)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13)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를 창고지기로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을 버금으로 삼았나니 이는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30)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열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그렇습니다. 성전을 청결히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계속해서 비우는 것만으로 다가 아니라 거룩한 것으로 계속해서 채워져야만 온전한 개혁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충성스런 사람들을 발굴하여 새로운 일꾼으로 세우고 그들에게 걸 맞는 대우를 위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같은 십일조를 가져다가 성전의 곡간을 채워 직분자들이 생활에 대한 걱정 없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주었습니다.
(12)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3) 안식일 지키기
농부가 씨를 밭에 나가 씨를 뿌렸다고 다가 아니고, 싹이 났다고 다가 아니고, 김을 맺다고 다가 아니라 마지막 풍성한 결실을 위해서는 김을 매고 돌아서면 다시 싹이 나는 잡초를 계속 뽑아야 하고, 약을 한번 쳤다고 다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약을 쳐야만 합니다.
개인의 잘못이나 공동체의 부패를 개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은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후 수문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가 읽어 준 모세의 율법책을 듣고서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다짐한 것 중에 하나가 안식일 준수였습니다.
(느 10: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층에서부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서 뻔뻔하게 안식일에 열심히 물건을 사고팔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것이 작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차고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자초하는 악한 죄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민 15:32-36)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
하나님께서 왜 안식일에 대해서 그처럼 단호하게 다루신 것일까요?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고리입니다. 만일 이 고리가 끊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세속화를 막는 방벽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깨닫고 안식일을 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심히 책망하고, 장사꾼들이 안식일에 물건을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안식일에는 성문을 열지 못하도록 레위 사람들을 성별하여 성문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17)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도 오늘 우리들과 똑같이 연약한 인간으로 어떻게 그렇게 큰 시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1) 지속적으로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민감하게 그 말씀을 통해 나의 내면에 무슨 잘못된 죄를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참조, 롬 3:20). 하나님의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인 줄을 모릅니다.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의하여 비로소 각성하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보시기 나쁜 죄악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안식일 지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출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3) 방심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개혁의 고삐를 놓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탄에게 추호의 틈을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축복의 통로로 구별하신 성도와 세상과의 관계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믿음이 없는 불신자와 같은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섞여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각자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의 한 평생 동안 많은 축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축복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치 저주받은 사람처럼 고통스럽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도비야의 죄가 뿌리박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고, 그것을 분리하는 회개의 작업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하나님께서 저주를 복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 설령 그것을 깨닫고 고치려는 결단과 다짐을 여러 번 했으나 잘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지는 않습니까?
그 결과 얼마가지 못해서 다시 원 상태로 되돌아가 버리고 마는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로지 우리 그리스도인들 속에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롬 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복적인 종교 의식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절박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마음먹은 결심을 이루게 하시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걸리는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였습니다.
(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몸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29) 내 하나님이여 그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더럽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어겼사오니 그들을 기억하옵소서 (31)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헤미야 강해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그 뜻을 거역하는 삶은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용납하지 말고 끊임없는 회개와 개혁과 더불어 그것을 성공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지속적인 기도 만이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는 최선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