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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4 : 11 - 13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계 14 : 11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
그것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의 장소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11. 고난의 연기 -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 -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1) 고난의 의미
① 모든 사람에게 고난이 있다.
* 욥 5: 7 -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②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게 하신다.
* 시 81: 7 -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2) 고난을 당하는 자
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고난이 있다.
② 의인
* 시 34: 19 -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
* 사 48: 10 –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 눅 17: 25 -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3) 고난 후의 영광
①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② 고난을 겪는 자를 위로하신다.
③ 고난을 견디게 하신다.
* 고후 1: 4-6 –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④ 고난을 통하여 해방을 얻게 하신다.
⑤ 고난 후의 영광을 얻게 하신다.
* 롬 8: 18, 21-23 –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4) 고난의 떡을 먹어야 한다.
* 신 16: 3 -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5) 고난의 상징
* 살후 1: 5 -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고난 중의 확신
* 딤후 1: 12 -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7) 본 절의 의미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을 무서워하여 짐승을 경배하거나 그의 표를 받으면 세상의 고통은 피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심판을 통하여 받게 되는 고난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세세토록 당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 계 19: 3 -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2) 쉼을 얻지 못한다 -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13절에서 성도들이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그들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과 연결된 표현으로 그들이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영원한 것임을 시사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관한 것을 온전한 기독교 교리로 보지 않고 '준 기독교적'(sub-christian)인 것으로 본다(Glasson).
이들은 배교한 자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예수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저버린 자들이 받게 될 고통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Preston, Hanson).
그러나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의 죄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함을 예수께서 친히 밝히고 있다. (Mounce).
* 막 9: 43, 48 -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 눅 16: 19-31 –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짐승을 경배하며 그를 끝까지 따라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것이다.
'쉼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계 14: 13에서 성도들이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과 연결된 표현으로 그들이 지옥(地獄)에서 당하는 고통이 계속될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면서까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의 죄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밝히셨다(막 9: 43,48, 눅 16: 19-31).
거짓 선지자들이었던 짐승을 경배하며 그를 따라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형벌이 될 것을 말한다.
3) 성도들의 인내가 있어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자들만이 고난을 미리 면하게 된다.
* 계 3: 10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14: 7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경배하라는 천사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경우를 말한다.
계 14 : 12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
미래의 사실들이 이러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오직 인내가 필요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義)이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지만, 의로운 행위로 그 구원을 증언해야 한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구원의 증거가 된다. 사람이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죄 가운데 사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죄와 싸우며 모든 죄를 떠나야 한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참 신앙은 성경에 계시 된 그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것이 보수 신앙이다. 보수 신앙이 바른 신앙이며, 그것만이 영생에 이르는 신앙이다.
12. 인 내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 성도들의 축복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짐승과 함께 그(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고난에 처하게 되지만 성도들은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인해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않으며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본 절에서 성도들에게 인내(忍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충성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 충성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1)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
* 출 15: 26 –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신 7: 9 -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 왕상 2: 3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 대상 28: 8 -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 느 1: 5 -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 요일 5: 2-3 –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2)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
* 마 9: 2, 22, 29 –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눅 8: 15 -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막 9: 23 -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 롬 3: 22, 25-26 –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갈 3: 22 -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 살전 1: 3 -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 히 12: 2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예수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피스틴 예수'(*)는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믿음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계 14 : 13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
‘지금 이후로’라는 말은 ‘복음 신앙을 가진 때로부터’라는 뜻이다.
복음 신앙은 곧 구원이 되며 복음을 믿고 죽는 자는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복되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대 환난 시대에 순교자들이 많을 것을 암시한다(계 6: 11).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과의 영적 연합 속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주 밖에서, 복음 신앙 없이 죽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모든 믿지 않는 죄인들에게 죄의 값인 죽음 곧 단지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둘째 사망인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눅 16: 19-31).
13. 행한 일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1)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본 절은 본서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 중 두 번째 복에 해당한다.
이것은 내용상 12절과 연결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켜 인내할 때 순교를 각오하였음을 의미한다.
믿음을 지켜 순교하였다면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Mounce).
'자금 이후로'는 두 가지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1) '자금 이후로'가 무엇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 '죽는'을 수식한다(Charles, Plummer).
Ⓑ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를 수식한다(Mounce).
두 견해 중 문맥상 뜻을 분명히 해주는 것으로 보아 전자가 타당하다.
(2) '자금 이후로'에서 '자금'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때를 의미한다(Moffatt).
Ⓑ 성도들이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Beckwith).
Ⓒ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최후의 심판 때를 의미한다(Alford).
세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 히 11: 35-40 : 순교자 –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 주 안에서 죽는 것은 복이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① 그가 그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수고와 고생이 많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시 90: 10).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1: 28).
세상은 수고로운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에게는 안식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4: 3, 10-11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그 안식의 세계가 바로 천국이다. 천국은 평안이 넘친 안식의 세계이다.
② 그가 이 세상에서 행한 선행들에 대해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이 천국에 들어갈 만한 가치도 없는 누추하고 얼룩지고 보잘것없는 것이며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선한 행위를 귀히 보시고 상 주실 것이다.
* 마 16: 27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고후 5: 8-10 –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계 22: 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4) 주안에서 죽은 자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종들이다.
* 계 6: 9-11 –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계 6: 11에 죽임을 당한 자는 영원한 복음을 전할 종으로 택함을 입고 주안에서 인간성, 죄악성을 죽이는 산 순교자를 말하는 것이다.
* 계 11: 7-11 –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① 최후에는 삼일반 동안 죽는 것이다.
②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쉰다.
③ 복음을 위해 당한 고난이 크므로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이다.
* 살후 1: 5-9 –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계 20: 4-6 –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의 때.
② 성도들이 죽는 때.
③ 대 환난의 때.
2)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다. -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저희 행한 일이 따름이라'에서 성도들이 행한 '일'(*, 에르가)은 핍박에 대한 '인내'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예수께 대한 '믿음'(12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들의 일은 수고와 동일한 것으로 그들이 사단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지치도록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켰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킨 그들은 죽은 후에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 히 4: 1, 9 –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계 22: 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 사단의 핍박과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안식을 누리므로.
(2)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위한 수고가 헛되지 않으므로
* 히 6: 10 -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선포된 영원한 복음을 확신하자.
곧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구별하는 잣대가 된다.
둘째,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한 교회들이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알자.
우리는 장차 멸망할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적 교훈의 터 위에 세워지고 그 교훈만을 전하고 가르치고 그 교훈 안에서 양육되는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
우리는 배교한 교회들의 연합운동을 배격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끝까지 인내로 바른 믿음을 지키자.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바른 믿음이란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 바른 믿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돈과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음란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끝까지 실천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순교를 각오하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 있는 성도다.
이 세상에는 수고와 고생이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안식이 있다. 주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보장해 주셨다.
주님이 삼 일만에 부활하셨듯이 순교한 증인들에게 삼일반 후에 들림받는 축복이 있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자.
형벌과 보응 ( 박 조준 목사 )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음행한 바벨론이 무너지고,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자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는데, 주 안에서 죽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 다 같이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 천사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여기서 말하는 다섯 천사의 소식은 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일어나는 장면입니다. 앞으로 곧 닥쳐올 소식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토대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첫째 천사의 외침과 같이 이것도 환난 시대의 중반기에 벌어진 사건이고 계시록 17장에 기록된 바벨론 교회, 다시 말하면 음녀 종교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계시록을 통해서 이 두 가지의 바벨론 모두가 ‘큰 성읍’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장차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음행의 연고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한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한다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환난 시대의 중반기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종교적인 바벨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의 바벨론 성읍이 멸망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16장 19~21절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17장을 강해할 때 자세히 다루겠지만 구약에 예언된 사실로 보아서는 바벨론 성읍이 망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도시가 재건되어 적그리스도 국가의 상업 중심지가 되지만 환난 시대 말기에 가서 멸망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이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을 뜻합니다. 앞으로 생각하게 되겠습니다만, 니므롯이 건설했던 두 바벨론은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에게 많은 고독과 참상을 가져다주었으며 마지막 때가 되면 멸망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두 바벨론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지 못하고 멸망 받게 될 숫자가 가장 많게 될 것입니다. 니므롯이 건설한 바벨론은 우상을 강조하는 거짓 종교이며, 인간을 물질 세계로 이끌고 가는 상업주의를 말합니다.
거짓 종교와 물질 만능의 특색은 음행입니다. 온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이 음행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간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여자가 남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당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첫째가 마음이고 그 다음이 육체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계명 중의 7계명인 이 계명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과 관련된 말씀이라고 하면서 “마음의 청결을 가르친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퍽 의미 깊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깨끗하게 살아라”고 하는 교훈의 집약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본래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배후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같이 하시기 때문에 가정은 신성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서로가 의지하고 상대방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하며 두 사람이 한 몸 되어 사는 생활이 바로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로 비교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가족은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름답고 깨끗한 가정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이 깨끗해야만 그 가정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우리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단위입니다. 사회질서의 기초입니다. 가정이 문란하게 되고 파괴되면 그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옛날 왕성하던 로마가 성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문화를 주름잡던 헬라의 영화도 간음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찬란하던 폼페이 도성도 간음 때문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바벨론도 간음 때문에 망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이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진리에 바다 속의 거대한 암초처럼 개인이나 가정이나 나라들이 다가와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서 가라앉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 보니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살던 생활을 말하면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인간의 도덕이란 자연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럽다고 해서 어떤 행위가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윤리는 그 기초를 천성적인 본능에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도덕관을 자연법에 기초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기초를 둡니다. 한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여자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도덕이란 개인의 욕구나 쾌락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거나 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될지는 몰라도 도의심의 기초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한 근거 위에 있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도덕이란 합리화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그 행위가 옳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못됩니다.
저는 간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품는다”는 말씀이 의미가 깊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쓰고 살며 누구에게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자극을 받을 때 감정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석이 아니라면 다 같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시적으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오래 품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왜요? 알을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알을 깝니다. 음욕을 품고 있으면 간음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내 마음, 내 생활을 깨끗이 가질 수가 있습니까? 소극적으로 악한 생각, 더러운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우리 생각 가운데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바위 위에는 불똥이 떨어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휘발유 탱크 위에 불꽃이 떨어지면 폭발하고 맙니다. 음행에 대한 유혹이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은 불꽃이 물이나 바위 위에 떨어지는 것 같아서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안 계신 사람은 마치 기름 탱크와 같아서 성적인 유혹의 불꽃이 떨어질 때 폭발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해서 어떤 유혹과 시험이 있어도 깨끗하게 살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9~11절 말씀을 같이 봅시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셋째 천사는 환난기 동안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했던 자들의 운명을 선포하게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그 표를 받도록 강요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은 것이 없이 부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절하고 인간의 수단으로 행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불과 유황이 퍼부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영원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 결국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다 살아 있는 동안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 둘째 계명입니다. 본래 인간은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로 만든 어떤 형상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는 인간은 여러 가지 미신에 타락하고 맙니다. 가령 여로보암 왕 때 하나님을 송아지로 만들어 섬기더니 나중에는 바알 우상과 그밖에 여러 가지 우상을 겸하여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종교적인 예술이나 상징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나 교회당 안에 성화나 십자가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상화하면 안됩니다. 성화나 성상 앞에 절을 하거나 기도를 하게 되면 안 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마리아상이 우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는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기도를 드리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 가운데 잘못된 하나님의 영상을 새기고 만듦으로 우상을 섬길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잘못된 형상이 새겨져 있지는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여기 완전 무결하신 참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모습과 순결하신 영상을 주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와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사람의 모습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오셔서 함께 하실 수 있었던 유일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신분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구유 안에 강보에 싸서 누인 그 아기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왕자입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신 갈릴리의 그 사람이, 옷을 입으시고, 발에 신을 신으시고, 식사를 하시고, 물을 드시고, 피곤함을 느끼시기도 하시던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한 번은 빌립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알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이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의 생을 온전히 바치고 의지하는 사람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둘째로, 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시며 우리의 합당한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로, 이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위기나 고통을 당하게 하지 않고 희생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 구절은 성경을 통해서 저주로 내린 영원한 고통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천국의 축복과 놀라운 사실들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그 좋은 곳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따르면 천국을 잃는 것이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이란 곳으 사람에게 잠시 동안 고통을 준 다음에 곧 태워져서 다시 기억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한 번 죽은 후에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성경은 불못이란 영원한 곳이며 불못에 사는 자는 “밤낮으로 쉬임없이 고통을 당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끝으로 환난기 성도들이 축복 받는 모습을 말씀해 줍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변함없는 진리 한 가지는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은 주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해 두신 영원한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 구절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환난 시대에 순종을 보여 준 성도들의 인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적그리스도에게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고통 속에서도 영원한 축복, 다시 말해 마음속에 평안과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란 말의 원래의 뜻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놀라운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세상에서 누가 죽은 사람더러 복이 있다고 합니까? 사람들은 죽음을 공포요, 저주로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을 모르고 죽는 사람에게는 죽는 것이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수고로부터 벗어나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음행하고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와 손에 그 표를 받은 사람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저주 속에 빠지고 마는데, 하나님의 계명과 믿음을 지키는 자는 영원한 안식을 얻으며 그들의 선행이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주님께 충성을 다한 연고로 상을 받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공평하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불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떠나게 되는 시간이 가까워올 때 이미 이것을 신령한 눈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들의 수고가 그 뒤를 따른다”는 원칙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는 축복의 진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급 받는 것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그리고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