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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일교신도대책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오종필
‘내가 만난 참부모님’ (가정연합 신앙수기 공모 입선작)
- 목회의 길로 인도해주신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 -
김순환 경북교구 포항교회장
6천 가정 약혼의 몽시
1978년 6천가정 축복서류를 접수하고 매일 120배 경배정성을 들이면서 축복의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군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부대 안에서 정성을 들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매일 냉수목욕을 하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의정부 교회장님이 ‘참부모님께서 한국에 나오시면 갑자기 약혼을 할 수 있으니 사전에 휴가를 받아 놓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1978년 10월 10일부터 7일간 결혼휴가를 받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무런 연락이 없어 그냥 부대로 귀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10월 30일에 약혼후보자들은 수택리중앙수려소에 집결하라고 했습니다. 그 연락을 받고 미군 중대장에게 통일교회의 축복결혼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외출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3일 동안 특별 외출을 허락받아 중앙소련소에 도착했습니다. 카투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외출을 허락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수택리 수련소의 첫날밤 꿈에 참아버님이 오셨습니다. “너 그동안 수고했구나. 너는 이런 사람이 좋을 거야.” 하시면서 저 한 사람을 놓고 이리 저리 다니면서 한 여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참부모님 감사합니다!” 하고 경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그게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 얼굴이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다음날 참부모님께서 낮에는 계속 축복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밤부터 약혼 매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있는 저를 보시더니 “너 군인이구먼! 여기 군인들이 몇 명이나 왔느냐? 다 일어서 보라구.” 라고 하시면서 군인들을 매칭 하시는데 정작 저는 매칭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앉아 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님께서 “너 언제 귀대하는 거야?” 물으셔서, “내일 귀대해야 합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럼 빨리 해야겠구먼!” 하시고는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상태로 저의 짝을 찾으시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지난 밤 꿈에서 찾는 모습 그대로 아버님께서는 “저 뒤, 문 앞에, 아니 그 옆, 고개 숙이고 있는 그 여자!” 라고 부르시며 나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참부모님께서는 “아주 착한 여자야! 만나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난 밤 꿈에 보았던 그 여자와 똑같은 분이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신기하고 감사해서 성도, 이름도, 학력도 고향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경배 드리고 약혼서약서에 사인을 하려고 하니, 대상은 아주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유인즉, 학력이 없으니 불쌍하고 못 배운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 당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상을 끌다시피 하면서 “저는 무조건 괜찮습니다. 사인을 합시다.” 라고 하여, 그렇게 약혼 매칭이 되었습니다.
저는 78년 약혼 후 20일 만에 군 제대를 하고 공무원에 복직을 하여 영월역에 근무하게 되었고, 대상은 약혼수련을 받고 충남 공주와 예산에서 임지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지 기간 중에 대상은 목회자가 너무 힘들고 고생을 한다고 하면서 저에게 많은 요구를 해왔습니다. ‘교역장님의 양복이 너무 낡아서 양복을 한 벌 해드려야 하니 돈을 보내 달라.’, ‘교회 성전이 너무 덥다.’ 며 ‘성전 여러 곳에 선풍기를 달 수 있도록 돈을 보내 달라’ 고 하였습니다. 저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투자를 했습니다.
영월역에 근무 중에 차량 탈선 사고가 일어난 것이 계기가 되어 보다 안전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국세청 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 합격이 되어 영월세무서에 근무하면서 교회 학생부장으로 사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6천가정 임지동원
2년간의 임지를 마치고도 축복이 없었으니까 대상은 축복이 있을 때까지 봉사를 하게 되었고 저는 대상에게 생활비를 계속 보냈습니다. 드디어 1982년 10월 14일, 6천가정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고 나는 대상과의 신혼생활을 위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전셋집도 마련하고 냉장고와 옷장도 준비했습니다.
축복 후 6천가정 남자 동원 특별 수련이 있었는데, 그 때 참부모님께서 6천가정 남자 3년 동원명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중대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3일간 기도를 하면서 정성을 들인 끝에, 3년 동원에 함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세무서장께서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오는데, 동료 친구가 “왜 이 좋은 직장을 그만두느냐? 통일교회에 완전히 미쳤구나! 정신 차리라!”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친구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잘되는지 내가 잘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지금은 네가 나를 미쳤다고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했다.” 고 말하고 사직을 하고 나왔습니다.
임지동원 발령을 받을 때 협회장님께서 불러서 개인면담을 했습니다. “자네는 세무공무원 경력을 갖고 있으니 협회 경리부에 근무하면 좋겠구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전도사 활동을 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1982년 12월 1일자로 서울 마포구 성산 2동 전도사로 발령을 받고 임지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임지에 도착하니 조그만 전셋집에 전화도 없고 교회간판도 없는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2명의 전도사가 배치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공교롭게도 내가 제천교회 총무로 있다가 군에 입대하면서 후임자로 들어왔던 민승기 씨였습니다. 그는 철도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임지 동원을 위해 사표를 내고 나와서 같은 임지에 배치 된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무원도 아니고 전도사로서 생활비도 내야하고 전도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사업(펀드레이징)이라도 해야겠다고 하면서 시작한 것이 수세미 사업이었습니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수세미 가방을 들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니까 방법대원이 우리를 발견하고 수상하게 여기면서 얼마 전에 이 동네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 도둑이 아니냐고 하면서 파출소로 끌고 갔습니다. 파출소 순경이 반말을 하면서 “이놈들 며칠 전 도둑질 한 사람 맞지?” 라면서 바른말을 하라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경상도 사람하고 충청도 사람이, 그것도 멀쩡한 젊은 양반들이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이런 수세미 장사를 하는 거야? 어떻게 둘이 만났어?” 하면서 주민등록증을 조회하였습니다.
차마 우리는 통일교회 전도사라는 말은 못했지만, 주민등록증을 조회해보고 아무런 전과가 없으니까, 그 때 서야 파출소장이 나와서 “아이고 죄송합니다. 이 동네에서 장사를 하면 또 신고가 들어오니까 제발 못 사는 다른 동네로 가서 하세요.” 라며 내보내 주었습니다.
파출소 문을 열고 나오는데 분하고 억울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세무공무원증을 내밀고 조사를 나왔다고 하면 회사 사장이고 순경이고 “예, 예.” 하면서 협조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하면서, 그 순간 나는 참아버님의 억울한 옥중생활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참부모님은 나보다도 더 억울함을 당하시고 더 분통했겠구나! 그래도 그 모든 걸 감내하시고 사탄세계를 사랑하시지 않았던가! 내가 여기서 낙오자가 될 수는 없지. 나도 참부모님처럼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온 몸에 강력한 영적인 힘이 솟구치고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장 한가운데로 가서 수세미를 들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수세미는 특별히 정성을 들인 물건입니다. 이 물건을 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면서 얼마나 큰 소리로 힘차게 외쳤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수세미가 다 팔렸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 그때부터 펀드레이징 사업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후 대바구니 사업, 깨엿사업, 양말 사업, 찹쌀떡 사업 등 별의별 사업을 다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루 건설 노동자 일용직 일당이 1만원을 받았는데, 저는 하루 펀드레이징을 하면 3~4만원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임지대원들은 다시 전국 기동전도단으로 편성되어 저는 서울 제1 기동전도단원이 되었습니다. 임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대바구니 사업을 나갔습니다. 어느 다방에서 물건을 팔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공교롭게도 1년 전에 같이 근무했던 세무서 동료를 계단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친구는 도대체 이런 허름한 옷을 입고 장사를 할 것 같지는 않은데 분명히 내 얼굴이 맞는 것 같다고 보고, 둘이 서로 뻔히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그 수많은 서울 사람들 가운데 피할 수도 없는 막다른 길에서 서로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는 어이가 없어하면서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시간이 있으면 용산세무서에 놀러오게.” 라면서 헤어졌습니다.
그 친구를 만난 이후 나는 사업이 되지 않았습니다. 며칠간 생각을 했습니다. ‘3년 후 네가 잘되나 내가 잘되나 보자’고 그렇게 내가 큰 소리를 쳤는데, 지금 나의 이러한 초라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통일교회를 뭐라고 설명할 건가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왜 그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이제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공부를 하라. 신학대학을 가서 목회를 하라.’는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 제1기동전도단을 그만두고 통일신학대학교 3학년에 편입해 4년간 공부를 마치고 졸업해 목회를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를 출발하면서…, 참부모님께 붙들린 자가 되다.
희망을 품고 첫 임지 전남 곡성 옥과교회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식구라고는 전도된 할머니 한 분과 청년 1명 학생 1명이 있었는데, 전임교회장이 성화를 한 이후 1년간 비어 있던 교회라. 예배는 할머니 한 분만 유일하게 나왔고, 1주에 500원의 헌금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와서 교회 담장이 무너져 담을 쌓아야 하는데 협회 지원은 안 되고 해서 제가 가지고 간 돈으로 해결을 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교회 지붕에 비가 새서 성전 마루에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지붕도 수리를 하였습니다.
사모가 둘째 아이를 갖게 되어 배가 불러서 우물에서 펌프물을 퍼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동펌프를 달고 나니 스위치만 올리면 물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쓰다 보니 제가 가지고 있었던 돈 300만원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쓸 돈도 없고 아이들은 태어나고 전도할 대상자는 없었습니다. 시골에는 전부 농사일을 하기가 바쁘다 보니 매일 농사일만 도와주고 겨우 밥 한 끼 얻어 먹는 일상이 계속되면서 목회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남교구 참부모님 집회를 끝으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부모님의 교구 집회에 많은 식구님들이 모이다 보니 공직자들은 앞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디에 앉아 있었는데 점점 밀려서 결국 참부모님 단상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1시간 동안 말씀을 하시다가 저를 쳐다보더니 “너 누구야! 사마귀처럼 못생긴 놈이 왜 앞자리에 앉아 있어! 기분 나쁘게!”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정말 내 얼굴이 사마귀처럼 생겼는가 하고 거울을 쳐다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무슨 뜻이 있을까? 하고 계속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사나이가 한 번 뜻을 품었으면 끝까지 가야지! 여기서 목회를 그만두려고 하는 너의 마음이 못생긴 놈이야!” 하는 응답이 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다시 정신을 차리자 다시 시작하자!‘ 정말 열심을 다하여 목회를 하자!’ 하고 다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아이 둘을 하나는 걷게 하고 하나는 엎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가정방문을 하였습니다. 어느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50대 아주머니가 “아이구! 내 다리야!” 하면서 빨래방망이로 두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십니까? 했더니 5일장 장터에 장사를 나가야 하는데 도대체 다리가 아파서 걸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침 며칠 전에 곡성교역장님으로부터 수지침을 배워 보라고 해서 받은 수지침이 있어서 한방 놓았는데 너무나도 신기하게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닙니까? 나도 놀라고 그 분도 깜짝 놀라면서 “세상에 이렇게 용한 침도 다 있느냐!”고 하면서 툭툭 털고 일어나서 장터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아주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새로 오신 젊은 목사가 왔는데 얼마나 침을 잘 놓는지 한방에 내가 걷게 되었다.”고 하면서 입소문을 내고 다니니 여기저기서 침을 놓아달라고 교회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그저 정성을 다해 안마를 해 주기도 하고, 수지침을 제대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책에 있는 대로 침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구마도 삶아서 가져오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랫방에는 자취하는 어떤 학생이 있고 누구 집에는 어떤 학생이 자취를 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 사는 집을 찾아, 사모는 김치를 해서 자취방 옆에 놓아두고 명함을 두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저는 저녁마다 원리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방학 때는 학생들을 데리고 함께 펀드레이징도 나가서 돈을 벌어서 쌀을 장만해서 마음껏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1일 수련생도 보내고 교구수련생도 보내고 한참 전도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성인들을 위한 전도 목적으로 일화 맥콜공장 견학 및 1박2일 원리수련회를 실시하여 버스로 2~3차례 수련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인사이동으로 인하여 전도된 학생들이 남아지는 수는 지극히 적었습니다. 그래도 3만가정 2가정이 축복을 받게 되었고 그중에 1가정은 목회를 하고 있으니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참부모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지 않았다면 저는 목회를 계속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참부모님께서 저희를 붙들어 주셨고 힘을 불어 넣어 역사해 주심을 깊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환고향 명령에 절대 순종하다
밀양교역장으로 시무하다 환고향 명령을 받았습니다. 협회에서 주는 400만원을 받아 어머니 혼자 살고 계시는 시골의 고향에 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명춘댁 막내아들이 그 좋은 세무공무원도 그만두고 통일교에 미쳐 돌아다니다가 아무 것도 없이 알거지가 되어 동네로 들어왔다.’고 말해 소문이 났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무슨 아이는 많이 낳아 가지고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이냐 하면서, 걱정을 하는 건지 불쌍하다는 건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하였습니다. ‘목사를 하던 양반이 무슨 농사를 짓는다고.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다고 하면서 진짜 농사를 지을 건가?’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단단히 각오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우선 아들이 잠을 잘 수 있는 방을 마련해야 했기에 헛간 사랑채집을 헐고 블록으로 손수 담을 쌓고 집을 지었습니다. 시골 논을 담보로 하여 콤바인을 구입하여 보리 벼 타작을 하고 딸기 시설 재배 농사를 지었습니다.
한편 동네 중고등학생들을 동네 회관에 모아서 매일 저녁마다 무료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세계일보 신문 지국장을 맡아서 신문 배달도 하고, 동네 어른들이 갑자기 아프게 되면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병원에 데려다 주고, 동네 초상이 나면 내가 가장 젊기 때문에 모든 궂은 일 등 도맡아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 달도 못 베기고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1년 2년 열심히 동네를 위해 봉사를 하니 동네사람들은 나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행사가 있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서울 행사에 버스로 가자고 말하면,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종족의 메시아가 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결과 160가정 축복도 하게 되었습니다.
3년째가 되었을 때 경남교구장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시 밀양교역장으로 복직하면 좋겠다는 전화였습니다. 나는 이미 농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농사를 그만두면 많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전화를 받고는 섭리적인 뜻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딸기 시설하우스 농사를 정리하고, 철재도, 콤바인과 트럭도 중고(고철)로 팔았습니다. 금전적으로는 많은 손해를 보게 되었지만, 다시 목회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고 열심히 활동을 하여 밀양교회에서 36만쌍 축복식에 미혼 47가정을 축복시켰습니다. 실적 우수교회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고 교회에 식구가 많아졌습니다. 밀양교회에서 믿음의 자녀를 많이 찾아 세우게 된 것이 목회자로서의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목회자로서의 보람
이후 서울 은평교구장, 경남교구장과 천복궁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어 하늘부모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특히 6남매의 자녀들을 모두 2세 축복으로 봉헌할 수 있게 된 것은 제가 목회를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6남매의 자녀들을 잘 교육해 주신 저희 집사람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어려운 환경가운데서도 불평불만 하지 않고 교회 사모로서 온 정성을 다해 식구님들을 섬겼습니다. 또한 공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참부모님께서 세우신 향토학교를 통해 검정고시를 거쳐 나이 60이 넘어 대학을 졸업하게 된 아내를 존경합니다.
또한 부모의 말을 듣고 1남 5녀의 6남매 자녀들이 참부모님의 2세 축복을 받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2세 자녀들을 통해 12명의 3세 손주들을 갖게 해주신 하늘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축복은 참부모님께서 저희로 하여금 목회자의 길을 가게 해주신 덕분입니다. 목회자로서의 큰 보람을 갖고 자녀들에게 목회자의 길을 가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도의 덕분인지 2세 가정 중에 둘째 딸이 목회자 사모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큰 딸은 참부모님을 모시는 공적인 일을 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큰딸 둘째딸은 한ㆍ한 축복을 받아 2명의 한국 사위를 갖게 해주셨고, 그 외의 자녀들은 국제축복을 받아 ‘한 하나님 아래 지구촌 한 가족’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 또한 참부모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 며느리, 일본 사위, 브라질 사위, 프랑스 사위들이 저희 가족이 되어 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끝>
*이것은 통일세계(천일국 5년 천력 10/11월호)에 나온 것을 파리 가족이 타자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첫댓글 김순환 경북교구 포항교회장의
신앙 간증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