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6-08
지난날 보문산에서의 자연스러움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먼저 주 목요일에는 함께 우리글을 배우는 어머니들과 곁에 있는 보문산을 찾았다. 지난해부터 자주 찾은 산인대도 어머님들과 함께 라서 그런지 산도 새로이 나를 찾아 주었다. 산의 취함이 산 밑에까지 이어짐인지 주 목요일에 의무감과 같이도 여겨지는 글 쓰는 일을 잊었다. 그림이든 노래, 글이든 취하였던 감정을 면 위에 옮기려면 취함에서 벗어나 다시 표현으로 취해 들어가야 한다. 산에 올라 햇볕막이를 찾아 널찍한 마루 두 곳을 자리로 정하였다. 진지함의 글 판이 아니라 분방함의 놀이판이라서 햇볕을 피하며, 또한 빛과 같이 찾아드는 그분의 시선을 차단시키기 위하여서였다. 시선을 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무화과나무를 통한 앞가림(창세기3:7), 따가운 볕을 피하기 위하여 박 넝쿨 그늘 밑에 깃들여있는 요나(요나3:5-8)가 생각이 난다. 찾아들 이들을 기다리며 쉬는 사이에 올 이들은 더디 오고, 흥얼흥얼 흥타령이 찾아든다. 장구 장단 소리를 귀에 담으며, 그리고 산에 오면 의래 부르는 노래가 말하듯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눈으로 보는 사이에 어머님들의 어깨춤에 노래하며, 어울리는 곳에는 어색한 나이지만 압도되어간다. 이런 곳에는 배워주는 이들에게는 어색하다. 아니 어쩌면 낯선 척 하여야 한다. 충청도 인이면서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사를 비판하는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충청도 인이 되지못하고 겸연쩍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머님들에 의하여 굳은 손발이 풀려져나간다. 배우는 이들이 주(主)가되고, 배워주는 이들이 객(客과 같이 주위를 맴돌게 되는 마치 주객의 전도라고나 할까?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르익어가는 어울림에의 흡입, 아니 더나가서의 몰입, 이런 모습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끄는 이 없어도 얽히고 섥힘의 어울림 속에서의 끌음, 그것이 무리의 이상이요. 또래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전에 불교적 표현으로 입적(入寂)하면서 한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은 시대가 흐른 요즈음까지도 사람들 입에서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의 깊은 뜻은 모르겠고 그저 산은 산일뿐이고, 물은 물일뿐이라는 쉬운 말로 들려진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이 있다. 곧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 한다는 말이다. 루소라는 이가 이야기했다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생각난다. 도심 속의 갈색, 각진 직선들, 틈새를 비집고 빠르게 다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내 격에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여 질 때는 푸른 곳을 찾게 된다. 바로 코언저리에 다가드는 풀냄새가 더욱 자연 속으로 젖어들게 한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 같이, 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먹는 것도 뿌리고 바르지 않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을 찾고, 보는 것도 도색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된 것을 보려고 하며, 자연스런 산 속에서 목욕을 하는 이들까지 있는 것을 보며 살고 있다. 들풀을 보며, 지으신 이를 보며, 나를 바라보아라. “공중의 새 들를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6-29 -공동번역성서). 이것이 바로 스스로 그렇게 된다는 자연(自然)이다.
공동체 이야기
모순(矛盾) 속에서 조화(調和)
조화로운 옛 여정 속의 날들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파괴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들
여러 무리들이지만 하나라고 느끼는 인간들, 또한 그들과 그것들의 합일(合一) 속에서 뿜어내는 조화로운 빛들, 그러나 조화라는 너무나도 밝은 빛 속에서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모습들을 볼 수 있었겠는가?
조화가 비로소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조화와 조화 사이에 모순이 비집고 들어와서가 아니겠는가?
모순의 암흑 속에서 조화가 빛나지 않겠는가?
조화로운 모습들이 모순으로 돌변하던 날.
조화의 너울이 벗겨지고, 모순의 이끼가 덮이기 시작하던 곳.
그들은 모순의 깊은 개울 속에서 조화의 실오라기를 잡으려고 안간 힘을 썼지만 결국은 역부족.
자꾸만 자꾸만 조화의 수포(水泡)는 깊음 속으로 함몰되어가고 있었다.
여러 세윌 후에 모순의 평지 위에 여디여린 조화의 새싹은 돋아나고 있었지만 모순의 세력에 앞도당하여 잎은 피지 못하고 곧 시들어 버렸다.
조화가 모순의 세상 속에 나타나지는 못하지만 모순의 지하를 헤집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때였던가?
모순의 공간 속에 조화의 구세주(救世主)가 찾아 들었다고 야단들이었다.
“모순아 비껴서라 조화가 나아간다.”
양옆에 비껴선 모순들
얼마나 기다렸던가?
조화의 여명은 밝아 오고야 만 것이다.
비록 모순은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그 모순이 있음으로써 조화의 등불은 더욱 빛난다.
모순투성이만 같이 여겨지는 모습들
모순을 조화로 화(化)하는 것이 신(神)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조화가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잉태된 것이 신이 인간으로 육화(肉化)된 모습이 아닐까?
창(矛)과 방패(盾)가 쨍하고 부딪히지만 그것은 조화의 범주에 있는 것.
(* 모순은 ‘창’과 ‘방패’라는 뜻이다. 옛날, 중국의 어떤 무기 장사꾼이 장터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창은 무슨 방패든 다 뚫는 창입니다. 그리고 이 방패는 무슨 창이든 다 막아내는 방패입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무기 장사꾼은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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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김기필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2006년 7월 30일에 새터공동체가 새로 지은 건물에 입주를 하였습니다. 살림교회(박상용 목사님)에서 이사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에 신평교회 최병창 목사님께서 입당예배를 인도하여주셨습니다.
* 2006년 6월 11일에 천안에서 오신 양승렬 선생님께서 8월 9일에 금산군 복수면에 자리한 구원의 집으로 옮겨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희망찬 생활을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2006년 8월 12일에 희망의 언덕(회장:류상현 선생님)에서 주최한 여름바다 나들이가 남해에서 있었는데 공동체에서 함께 다녀왔습니다.
* 2006년 8월 21일에 신평교회 최영득 장로님께서(충만농장) 가을배추 육묘를 주셔서 진주문교회 여전도회(유운걸 목사님)가 함께 해주셔서 밭에 심었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박종만.주식회사EG(이광형).김기홍.정무래.최영애.라홍채.양승렬.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외6인).국민건강보험공단금산지사(4인).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2인).금산읍교회(김철우.윤이례).금성교회(임헌선).한애자.세광교회.동춘교회6여전도회.진명구.채윤기(박현실).이원교회.대전노회.대덕교회.그리스도의집.동부명성교회.향림원.금산주부클럽(박명희외8인).옥천동부교회.대덕교회(이중삼.백종학.정진일).대전성남교회.향림원(2인).신건태.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정인구).양홍렬.청솔타올(양선석).김포중앙교회.김종택.추부제일교회.최선희.대신가든.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외5인).조정리교회(이정애).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성삼순.임영호외1인)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