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3막17장 (7부)
당시 휘문고교에는 "농구부" , "아이스하키부"
그리고 전교생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야구부"가 있었다.
고교야구는 197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실업팀 위주의 스포츠는 스릴감이 없어 냉대를 받았으나 고교야구는 젊은이들의 패기와 승부욕에 전국민이 환호하였던 것이다.
라디오로 생방송을 진행할시는 중계방송 소리로 길거리가 진동하였고, 준결승 ,결승시 TV로 생방송할시는 전국이 들썩거리고 신문사들도 취재경쟁에 뛰어들어 전국이 잔치분위기 였다.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선수들이 총집결하는 고교야구는 전국민들의 관심속에 진행되었다.
고교야구가 진행되는 동대문 야구장은 연일 전국에서 모인 야구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중학교까지는 야구를 몰랐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나도 모르게 접한 야구는 축구 못지않은 스릴감과 통쾌감을 느낄수 있는 스포츠였다.
어느날 교실에 실내방송이 울려퍼졌다.
"오늘은 오전수업만 합니다.
1학년생은 점심 먹고 오후2시까지 동대문 운동장에 집결하세요. "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수업을 않하고 야구 관람이라니.
1학년생들은 모두 들뜨기 시작하였다.
오늘 우리학교가 8강전을 치룬다 하였다.
상대학교는 야구 명문고인 군산상고 다.
이기기 힘들것구먼.....
그렇다.
휘문고는 1907년 개교와 동시 야구부를 창설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명문학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할 성적을 이루지 못하다가 전국대회 8강까지 올랐으니 교장선생님의 특별지시로 1학년생들이 응원에 동원 된것이다.
다른학교들은 교가를 조회시간에만 합창하나 우리 학교는 그렇치 않았다.
잘집의 서울을 눈아래 깔고서
뜻있네 볼재에 우뚝선 우리집
즈문의 어린이 숲속에 모여서
뜻있네 이집에 힘쓰는 배움들
교가가 끝나고 나면 밴드부의 반주에 맞추어 야구 응원가가 펼쳐진다.
씩씩하다 우리는 휘문의 건아
.....
휘문 휘문 우리 선수야
휘문 휘문 빅토리
야
우리들은 야외석에 걸터앉아 목소리가 터지게 고함도 치고 응원가를 불렀다.
그당시 전국에는 "충암고"."중앙고"."광주일고"."북일고"."부산고".선린상고"."군산상고"."신일고"."경남고"등 고교야구의 춘추 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부터"황금사자기배"."봉황대기"."청룡기"등 야구시즌이 가을까지 이여지며 전국대회에서 4강에 진출한 학교는 대학교에 진학할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니 선수들은 기를 쓰고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 것이다.
우리 학교는 선린상고 한테 3대1로 패하고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우리들은 터덜터덜 야구장을 나왔다.
그때 모교 선배님같은 어르신들이 무리를 지어 휘문교가를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잘집의 서울을 눈아래 깔고서
.....
그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들은 선배님들의 노래에 맞추어 교가를 따라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졸업생들이 야구장을 찾는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교가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니 동문회에서 공문을 발송하여 선배님들의 야구장 참석을 독려하였고 야구장은 졸업생들의 동문으로 가득차기 시작한 것이다.)
동대문 길거리는 휘문인들의 목소리로 메아리쳤고
선배님들과 어울린 우리들은 야구 응원가 까지 다 부른 다음 버스를 타고 헤어졌다.
W H I M O O M
휘 문
휘 문
빅토리
야
평생 잊지 못할 단어이다.
추후 우리들은 야구 시즌마다 야구장에 동원되었고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여 목이 쉰 학생들도 다반사 였다.
그랬다.
우리는 하나임을 알게되였다.
뭉쳐야 상대방을 제압할수 있다는것을...
모두가 승패를 떠나 서로 즐거워 부둥케 안고 뒹둘었고 패배의 쓴 잔도 맛보게 된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웃음이 나오고 만다.
캉캉 춤을 추던 응원단들.
파도 응원을 하며 얹힌 친우의 어깨를
박수를 많이 쳐 손바닥에 피멍이 진 그때가
사뭇 기억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수 없는 그때
오늘따라
야구장에서의 학창시절이 그립기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