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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5장 12-17절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풍성한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할 때 생명을 얻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시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풍성한 열매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고,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로부터 계속해서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신자 스스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그가 신자 안에 역사하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는 말씀도 하시지만, 모든 신자의 중생은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는 것은 너희의 거듭남이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롬10:17) 말씀이 들려지고 들려진 말씀을 믿음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복음에 대한 말씀입니다.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 안에 있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14:26). 결국 신자의 열매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열매란 있을 수 없습니다. 혹 말씀이 있더라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열매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과 함께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여기에 기도할 것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지난 주 살폈던 내용인데, 왜 기도까지 말씀하시는가? 우리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구하되 내 마음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처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들 안에 거한다고 할 때 어떻게 신자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상관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 그 말은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을 구하라는 것이고, 그렇게 구할 때 하나님은 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또한 기뻐하시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바를 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풍성한 열매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기에 앞서 성령을 약속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일치한다고 할 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성령 하나님의 뜻이 일치한다고 할 때 삼위 하나님의 모든 뜻은 결국 신자로 하여금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신자의 풍성한 열매는 결국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자의 풍성한 열매와 관련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하시는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처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자면 풍성한 열매란 계명을 지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에 대하여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너희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단지 그 기쁨을 맛보는 정도가 아니라 그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온통 여기 있는 것이고, 그 기쁨이 너희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이 너희의 모든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데,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방금도 말했지만 이것은 9절과 10절의 연장선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아들도 제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사랑을 요한복음 13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통해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물론 12제자 모두의 발을 씻기셨지만 그들 모두가 사랑의 대상은 아니라는 게 이후 말씀에서 표현되지만, 한번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사랑하기도 한 대상은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드려내셨던 겁니다. 너희는 이런 나의 사랑 안에 거하란 것입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1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내 계명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든 계명은 두 부분으로 요약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한 율법사가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 이때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는 것으로 나와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증거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모든 계명이 두 가지고 요약될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상관없으니 두 번째 부분만 행하라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신 게 아닙니다. 내 계명은 율법의 두 번째 돌판 부분으로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순서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먼저 와야 하지만, 그것에 대한 증거는 이웃 사랑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할 때 하나님 사랑은 버리고 이웃만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 사랑은 너무나도 마땅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버리지 말아야 하고 이웃 사랑도 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이웃 사랑은 무엇과 같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증거와 같다는 것입니다.
특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의 본을 근거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 발 씻기신 것을 염두 해 두고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14절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34절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3장에서 발을 씻기신 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구체성은 10절에 설명되는데,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씻는다는 것이요, 한 번만 씻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씻어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제외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끝까지 사랑하시는 대상, 그래서 죄를 씻고 또 씻기시는 대상은 오직 택자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시는가?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저들의 죄를 씻기고 또 씻기시는가?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하자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지상에 있는 신자의 삶은 천상에 있는 신자처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죄가 있다는 것은 점과 흠이 있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받는 것은 용서함을 받은 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서의 마땅한 열매가 사랑으로 나타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아가 그런 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용서를 받았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게 용서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용서의 목적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까지 열매가 나타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을 심으시는 것이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것까지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할 때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죽음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은 때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 하는가? 결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에서 알리시는 것처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마1:21).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1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했던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3-25)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것은 그의 죽음의 때를 가리킵니다. 어떻게 죽음이 그의 영광인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 생명을 얻는 자가 많아지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생명을 얻는 자만 많아지는가?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생명을 미워하기로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보다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해 내놓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 13절을 보시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그것으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12절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이 말씀에 대하여 자극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1-2)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한다고 할 때 무조건 하라는 식으로 요구하시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보인 사랑이 이러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아까지 않고 내어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랑의 본을 따라 그리스도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가 말씀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물론 우리 마음은 여전히 강퍅합니다.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합당하 열매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이 사실에도 여전히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비길 데 없는 신령한 사랑에 의해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마음은 무쇠나 돌맹이로 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보이신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순종의 열매까지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할 때 지금 예수님께서 의식하고 있는 대상은 제자들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가 아니라 열한 명의 제자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택자에 한해서입니다. ‘친구’(φίλος[필로스])라고 할 때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사랑하는 자’란 의미가 있는데, 사랑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그 사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절로 오시면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에 의하면 이미 그리스도와 제자는 친구 관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랑하기로 하셨고, 그 사랑에 있어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하신 이상 이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상 그 말씀이 폐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절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서로 사랑해야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내 목숨까지 내놓았으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명하는 대로 행하면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친구이지만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는 그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하시는 말씀이 있다고 할 때 명하시는 말씀을 하신다고 해서 그 명령을 이룰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 없이는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당연히 명하시는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지난 시간에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을 인용하면서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정확하게 이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명령하실 때의 말씀은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기에 거룩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부패성이 있는 신자가 그 스스로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게 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할 때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나 스스로 주의 명령대로 행할 수 없다가 사실이요 진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시는 주께서 이루십니다. 이루시기 위해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우리의 전적인 무능도 알게 하셔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께서 명하시는 말씀을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명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힘쓰게 하십니다. 나태한 우리로 하여금 나태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주께서 명하시기에 명하신 바를 이루도록 노력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명령하시는 이유입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시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4절은 분명 너희가 내 명령대로 행하면 친구라고 말씀하시지만, 이미 친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이런 관계로 말씀하실 때면 종은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인과 종의 관계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9절과 10절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명령에 대하여 순종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보상을 운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의 마땅한 바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순종한다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했을 뿐, 거기에 대한 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종의 자세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에서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종과 친구의 차이를 말씀하시는데,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희를 대하는 것은 종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대하는데, 친구로 대하기 때문에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종은 어떤 면에서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하면 명한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왜 순종해야하는지 이유를 물을 수 없습니다. 종이기 때문에 명하면 명한 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이 이것이라고 할 때 그 명령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리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시는 것은 종에게처럼 숨기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너희에게 다 이른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해야 하는가? 종이라면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이기에, 사랑하는 자이기에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행하고자 하는 바가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아버지의 뜻이다. 그럼 왜 친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려고 하시는가? 너희 죄를 사하기 위해서다. 한번만 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하여 너희로 하여금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있는데,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는 만큼 제자들도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지금은 모르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는 만큼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도 지혜와 키가 자라갔습니다(눅2:52). 당연히 제자들도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다고 할 때(골2:3) 지혜와 지식의 자라남이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늘 불완전합니다. 비록 성령 강림 사건으로 그들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나 죄와 전혀 상관없는 자로 있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의 수준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고 하시는가? 칼빈은 이것이 중보자의 인격과 임무에 국한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모두에게 모든 것을 다 알리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일한 스승으로서 각자에게 지식의 분량에 따라 필요한 만큼 그들에게 주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삼중직 가운데 선지자 직분을 맡으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고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교회의 유일한 지도자요 스승으로 예정되신 만큼 아버지께 들은 것 중 자기 제자들에게 충실하게 가르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가르침이 있는가? 골로새서 1장 28절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그러므로 종이 아니라 친구로 대하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을 재차 강조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택하였다는 표현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매튜 풀 주석 참조), 어떤 이들은 우리 구주께서 그들을 사도로 택하신 것(눅6:13, 요6:70)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해로 보자면 “가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사도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모든 족속으로 세례를 주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우리 구주께서 그들에게 대한 자신의 지극히 큰 사랑의 근거로서 자기가 그들을 택하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사도로 택함을 받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기서 택하셨다는 것은 영생으로의 택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후자와 관련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말씀이 가룟 유다를 포함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사도로는 택하셨지만, 지금은 그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 점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할 때 사도라는 직분으로 너희 11명을 세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택하시기는 12명이었지만 너희 중 한 사람은 제외된다는 것을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지금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저들에게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의 연장선에서 단지 사도로서의 직무만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이고 넓은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 다만 매튜 풀 주석의 경우는 “우리는 이 두 가지 해석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대상들인 열한 제자들은 이 두 가지 모두의 의미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고 많은 사람들을 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여 거룩함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고 설명합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이렇게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언제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와 중보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을 다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럼 이 말씀을 왜 하시는가? 여기까지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12절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데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은 13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친구를 위해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할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14절로 나타나야 하는데,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명하는 대로 행하라고 해서 너희를 종으로 대하는 것은 아니다. 종이 아니라 친구다. 친구기 때문에 내 아버지의 모든 뜻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한다는 것이 15절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앞서는 것이 나의 택함에 있다는 것이니다. 선택이 있기 때문에 효력 있는 부르심이 있는 것이고, 효력 있는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이 있는 것이고, 나아가 선택이 있기 때문에 너희를 사도로 세워 일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런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가 항상 있으면 마치 내게로부터 시작하는 줄 착각하는 것이 인생이지만,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한다는 것은 그 출처가 하나님임을 여전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 17절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모든 말씀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바는 12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앞서 내가 너희를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알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 사랑은 16절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너희를 택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부터 너희를 사랑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로 했다고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랑을 거두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셔서 그 사랑을 이루시기 위해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내어놓으신 것이고, 성자 예수님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까지 하셨던 겁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것이 너희라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 놓으실 정도입니다. 그 사랑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장 내도록 말씀하시는 것처럼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에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경우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까지 가는 것을 주저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사건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느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는 말씀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어서, 사랑할만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데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음 주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겪게 될 어려움에 대하여도 말씀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되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열매가 되도록 우리는 다시금 주의 말씀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고, 주께 구하여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