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예술>원고
김양희의 수필세계
- 은은한 향취와 깊은 깨달음의 경지, 그리고 느림의 미학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열며
문학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고, 작가는 자신의 문학세계와 현실세계의 접합을 시도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김양희의 수필은 조금도 그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김양희 수필의 즐거운 가치평가는 사회의식과 탁월한 형상력에서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김양희가 추구하는 세계는 ‘여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오뇌와 폭풍의 마라 강과 풍요와 안일의 가브 강을 수시로 드나들며 종내에는 꺼지고야 말 펄럭이는 촛불 하나 바라봅니다. 갈증처럼 채워지지 않는 선행, 관용, 여유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어느 때는 빈 의자에 앉아 다문다문 살아가는 얘기도 하고 싶었지요.’라는 여는 글에 포커스를 맞추면 대충 김양희의 세계관과 일상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가. 내면의 소리- 여유를 찾다
우리는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 한 작가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고민했던 갈증처럼 채워지지 않는 추구의 시간을 사색과 사유로 승화시켜내는 지혜를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쉼표>라는 수필에서, 그녀는 삶의 영역에서 갖는 사색과 여유의 가치를‘쉼표’라는 제재로 형상화하여 느림의 미학이라는 주제를 잘 의미화하고 있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주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뜸’이라는 어휘를 끌어와 ‘여유의 미학’을 보여준다. 작가의 말대로 ‘마침표는 끝을 내는 일이지만, 쉼표는 또 다른 것과의 연결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일’이다.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여유’요, ‘느긋함’이다. 이 수필 <쉼표>는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오랜 방황과 거친 열정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느림의 미학, 김양희의 수필세계임을 알 수 있다.
나. 관조의 모습- 삶의 근거를 찾다
김양희 수필은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서 인간미가 서려 있던 시간들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필의 특성 중 하나가 자조적 성격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수필 <잡목의 우수>에서 작가는 다양한 나무에 초점을 둔다. 그 나무의 이미지나 속성에 탐닉해보는 데 재미를 느낀다. 작가는 나무에다 인간사를 투영하고, 자신의 삶까지도 포갠다. 잡목의 투사를 통해 작자는 자연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잡목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 수필은 자기 응시의 경로를 통해 문학적 향취를 풍긴다고 하겠다. 어둠이 무너져 내리는 저녁,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는 싸리꽃을 잡목의 우수와 연결한 것은 김양희 작가의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이런 이미지의 결합이 문학적 성과를 거두는 이유는 아버지라는 큰 나무 뿌리의 궤적을 연상케 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뒷받침을 받지 못해 교목이나 관목이 될 수 없었던 유년시절과 성장 과정의 아픔과 상처를 불러내어 치유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우람한 나무는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정이 성장기의 버텀목이 되지 못했던 걸 아쉬워하며, 세상의 미세한 파도에도 흔들리고 아파했던 떨기나무 같은 자신의 삶을 잡목을 통해 길어 올리고 있다.
다. 사회의 소리- 삶을 말하다
삶은 복잡하다. 그래서 세상은 복잡계다. 인생 터에는 오뇌와 폭풍의 마라 강과 풍요와 안일의 가브 강이 동시에 놓여 있다는 김양희 작가의 생각이다. ‘화면 가득히 한 무리의 누 떼들이 아프리카 평원을 질주한다.’는 역동적인 장면으로 시작되는 <마라 강과 가브 강>의 발단부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생의 장을 치열한 생존경쟁이 존재하고 있는 밀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탄자니아 세렝게티 초원에서 수백 마리의 검은 소 떼들이 생존을 위해 모험과 맞닥뜨린다. 굶주린 사자와 악어 떼를 피해 마라 강을 건너야 그들 앞에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수필의 발단에 깔아, 긴장감을 극대화해 놓고, 작가는 이렇듯 생태계나 자연의 순환에도 명암이 엄연히 존재함을 말한다.
이 수필의 요지는 대비되는 인생의 두 측면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운명이나 순명은 신의 장난도 긍정하겠다는 뜻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는 ‘매일 장대비만 쏟아진다면, 매일 직사광선만 내리쪼인다면 어떤 삶도 살아내긴 힘들 것이다.’란 진술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구체적 예시에 힘입은 정서의 객관화가 문학성을 한층 더해 준다.수필이 어떻게 사실의 세계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초월한 상상의 예술세계를 이런 기법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의 하나가 바로 <마라 강과 가브 강>이라 하겠다.
라. 영혼의 소리- 마음의 벽을 허물다
또 하나의 김양희 수필의 중요한 내적 특성 중의에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고백을 통한 구원성에의 기댐이다. 김양희 수필의 상당수 작품들이 카타르시스를 통한 심리 치료, 구원 구제의 문학이라는 특성에 기초하여 영성의 추구로 설정되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김양희는 이런 경향성을 잘 파악하고, 안식의 문학, 영혼의 문학인 수필의 목적을 제대로 살려서 독자로 하여금 이런 부정적 사고로부터의 탈피를 도와주려고 한다. <수도원 단상>은 영안으로 우리 삶과 관계를 꿰뚫고 있는 작품이다. 화해 구도를 보여주는 수필이기도 하다. 그렇다.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동반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인가. 영성을 좇아 생활 속 고난을 승화시키며 세상 속 수도자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녀는 화려한 외관에 초라한 영혼임을 인식하며, 신 앞에 엎드린다. 인간적인 삶의 길을 찾는 그녀의 구도자적 모습이 성스럽기만 한 수필이다.
II. 나가며
김양희 수필들은 맑고 잔잔한 샘물에 비유될 수 있을 정도다. 수필 속에는 잔잔한 감동이 있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정감이 있다. 깊은 깨달음의 경지가 느껴질 뿐만 아니라 수수하면서도 소박하고, 은근하면서도 조용하고 은은한 향취가 풍겨나고 삶의 진솔한 모습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그녀는 깊은 의식과 상념으로 감성을 체계적으로 정리 압축하고, 다양한 시각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인간과 삶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이는 평소에 영혼과 마음을 늘상 갈고 닦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