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소 : 변산반도 일원 기 간 : 2013. 11. 09.(토)~10.(일) (1박2일) 숙 소 : 바다소리펜션 (063-582-7777) 산행참가 : 28명.
< 2013.11.09.(토) 일정 > 07:00 영등포 출발 07:30 서초구민회관 앞 출발 11:00 산행(남여치~쌍선봉~관음봉~내소사) (5시간 예상, 점심 가져오세요) 17:00 숙소 도착 (저녁식사. 남자:식사준비 및 설거지, 여자:해안산책) 20:00 소등 및 취침
<산행 및 산책 코스>
백두 9주년 행사를 어디로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중에 회장님이 변산반도가 어떨까 하는 말씀에 왠지 백두산우회가 이미 산행을 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주저하며 옛날의 기록들을 찾아보았지만 변산반도 산행기록은 없었다. 아마도 3.4년 전쯤 산행에 대해 어떠한 두려움도 갖지 않았던 쯤에 변산반도 종주산행을 검토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에 마치 산행을 한 듯한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몇해 전부터 시작한 창립기념산행은 회원 가족들도 함께 할 수 있는 산행과 행사를 겸해야 하므로 행사지 선정에 여간 고심스럽지 않았는데, 변산반도를 행사지로 본격 검토하면서 참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산과 바다를 함께 볼 수 있으며 또한 다양한 먹거리와 숙박시설 그리고 주변 볼거리가 고루 갖추어진 곳이다.
지난해 너무 많은 먹거리를 준비했던 기억 때문에 가급적 간단하게 준비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준비한 음식들을 남길 수밖에 없었는데, 내년부터는 조금 부족하게 준비하여 현지에서 이렇게 저렇게 구해서 해결하는 즐거움도 가져 보면 어떨까 한다.
7시반에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늦가을 행락차량으로 도로가 많이 정체되는 바람에 예상보다 한시간여 늦게 첫날 산행 출발지인 남여치 분소에 도착했고, 혹시 산행이 부담스러운 분들을 위해 남여치에서 정상적으로 출발하는 팀과 내변산매표소에서 출발하는 팀으로 나누어 산행을 진행하기로 한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남여치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하며,
남여치 매표소 앞에서 단체 기록을 남긴다.
탐방안내도에 고도까지 표시되어 있다.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있는 탐방로를 따라 첫번째 봉우리인 쌍선봉을 향한 오름길을 시작한다.
산행보다 산책이 좋은 분들은 버스로 내변산매표소로 이동하여 산책에 나서는데,
내변산매표소에서 출발하는 분들은 남여치 출발보다 1시간 30분쯤 짧은 코스를 가게 된다.
남여치를 출발한지 20여분도 안 되어서, 잔뜩 찌푸려 있던 하늘이 못내 울음을 터뜨린다.
쌍선봉 오름길 우측으로 분초대와 망포대 방향의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쌍선봉 우회길로 접어들자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가 사뭇 굵어지고,
월명암이 7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다.
산객들의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불경 구절도 읽으며,
비내리는 호젓한 늦가을 산길을 따른다.
쌍선봉 삼거리다. 쌍선봉을 오르지 못하게 우회길을 만들어 놓아서 어느새 쌍선봉을 지나왔고,
낙조대로 이어지는 주능선 등로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등로는 월명암 방향 좌측 사면으로 이어진다.
널찍한 등로를 따르다가 월명암으로 들어서니, 비에 젓어 더욱 선명한 단풍들이 산객을 반긴다.
<월명암(月明庵)> 신라 신문왕 12년(692년) 때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예로부터 백암산 운무암, 대둔산 태고사와 함께 호남 3대 명지(名地)에 속한 유서깊은 수행도량이다. 월명암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여기는 산상무쟁처(山上無諍處)의 한 곳으로, 네 성인(聖人), 여덟 현인(賢人), 열두 법사(法師)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양택지(陽宅地)다. 그리고 낙산 일출과 쌍벽을 이루는 월명 낙조(落照), 운해(雲海)로 어우러진 해돋이야말로 변산반도의 일대 절경이자 월명암의 자랑이다. 월명암은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된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하였다. 1848년(헌종14)에는 성암화상(性庵和尙)이 크게 고쳐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 싸울 때인 1908년에 다시 불타버리자 중고선사(中故禪師)가 어렵게 다시 절을 세웠다. 그러다가 8.15 광복 후 여순반란군이 이곳에 들어와서 6.25 직전 그들 반란군에 의해 또다시 불에 타는 수난을 겪게 되었으나, 1954년 원경(圓鏡)스님이 군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지금과 같은 규모의 암자로 다시 보게 되었다.(펌) 굵어지는 가을비에 떨구어진 은행잎을 즈래밝으며,
월명암으로 들어서는 김용현님.
이런 곳에서 공부하면...ㅋㅋ
날씨가 흐려 주변 봉우리들을 볼 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며 대웅전(우)과 관음전(좌) 사이로 내려가는데,
쌍선봉과 요사체 건물이 꾀나 잘 어울린다.
관음전 모습.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이제는 경내 구경은 제쳐 놓고 비 피하기에 급급한다.
푸른 채소와 단풍 그리고 잎사귀를 떨구고 예쁜 곶감을 달고 있는 감나무는 비가 싫지 않은 듯하고,
백두들은 모두들 처마 아래에서 우장을 갖추기에 여념이 없다.
빨간 단풍, 노란 우산, 설레는 여심!
아래쪽 건물 쪽마루에서 서둘러 점심 식사까지 서둘러 마친다.
흐린 날씨로 월명암의 참모습은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듯하다. 이는 훗날 다시 이곳에 들러 월명암과 아름다움을 겨루는 여러 암봉들과 아울러 월명암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는 날을 만들라는 부처님의 계시 정도로 생각하고, 월명암을 뒤로한다.
월명암 부설전 안내판.
<부설전(浮雪傳)> 부설거사는 애초 출가한 스님이었다. 경주에서 태어나 출가했던 그는, 도반인 영조, 영희 스님과 함께 장흥 천관산 등 남해와 지리산을 거쳐 오대산으로 도를 닦으러 가는 길에, 백제 땅인 만경평야를 지나다가 독실한 불자였던 구무원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구무원에게는 묘화라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었다. 꿈에 연꽃을 보고 잉태해 태어난 묘화는 선녀 같은 용모에 착한 마음씨와 절조까지 지녔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런데 20년 동안 입 한번 벙긋하지 않던 묘화가 부설스님을 보자 말문이 트였다. 그러면서 부설 스님과 자신은 3생에 걸친 인연이 있으니 천생의 배필이라고 했다. 그래도 도반들과 맺은 언약이 있었던지라 부설이 걸망을 메고 집을 나서려 하자, 묘화가 칼을 들고 서서 "만약 스님께서 문지방을 넘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을 하겠습니다. 上求菩利下華衆生(상구보리 하와중생 :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구제함)을 하기 전에 눈 앞의 나부터 구하십시오"라고 소리쳤다. 묘화와의 인연 또한 거스를 수 없다고 여긴 부설은 두 도반에게 부디 도를 이뤄 자신을 가르쳐 줄 것을 당부하면서 헤어졌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뒤 영조, 영희 스님이 오대산에서 불도를 닦고 돌아왔을 때 마을 앞에서 놀고 있던 부설의 아들 등운을 만난다. 부설의 안부를 묻는 두 스님에게 등운은 "우리 아버지는 10년 넘게 앓고 있어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두 도반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부설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후세 사람들은 아마도 부설이 평소엔 병자 시늉을 내고, 모두 잠든 밤에 일어나 수행 정진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시 만난 세 도반은 도력을 겨루기 위해 도자기에 물을 담아 대들보에 걸어 놓고 각자의 도자기를 쳤다. 그러자 영희와 영조의 도자기는 깨어져 물이 흘러 버렸다. 그러나 부설의 도자기는 깨어졌지만 물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이 때 부설거사가 읊은 게송이 이러했다.
目無所見無分別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 또한 사라지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 시비는 모두 놓아 버리고) 但看心彿自歸依 (다만 마음 부처 보고 스스로 귀의한다네) 부설은 많은 게송을 지었는데, 그 중 지금까지 불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팔죽시(八竹詩)이다. 此竹彼竹化去竹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 가는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粥粥飯飯生此竹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是是非非看彼竹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그런대로 보고) 賓客接待家勢竹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竹 (시정 물건 사고파는 것은 세월대로) 萬事不如吾心竹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내.) 부설이 열반한 뒤 자녀인 등운과 월명도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모든 분별을 넘고 생사를 뛰어넘어 해탈자재한 이는 부설만이 아니었다. 부설의 부인 묘화는 110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환한 대낮에 바람과 구름으로 조화를 부려 비와 눈을 내리게 하는가 하면, 그 비와 눈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신묘한 도술을 부렸다고 전하며, 아들 등운은 충청도 계룡산으로 가서 선풍을 드날려 '등운조사'로 알려졌고, 월명은 월명암에서 육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월명암은 바로 부설의 딸 월명의 이름을 딴 곳이다. 딸 이름과도 일치하지만 달을 얻을 수 있는 곳이라서 월명암이라고도 한다.(펌) 멀지 않은 맑은 날에 다시 한번 만나기를 기약하며 직소폭포를 향한다.
사면으로 이어진 호젓한 오솔기를 따르면,
시야가 트이는 지능선 위에 올라 구름에 감춰진 변산의 봉우리들을 마음으로 헤아리며..,
어느 곳이 관음봉이고 신선봉 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날 그날에는 반드시 봉우리들과 통성명할 것을 기약해 본다.
암릉 너머로 펼쳐진 가을산의 전경을 상상하며,
가을비에 흐르는 눈물 자욱을 더듬으며 선행자를 쫒는다.
남여치에서 먼저 출발한 백두들이 아직 자연보호헌장탑에도 못미쳐 있는데, 내변산매표소에서 출발한 백두들은 벌써 내소사로 하산하며 산행을 마치고 있다.
산행을 마친 분들은 근처 원두막에서 느긋한 점심을 할 모양이다.
그 시각 우장을 갖추고 월명암 하산길을 서두르고 있는 백두들!
잠시 비가 멈추는 틈을 타 모습을 드러낸 늦가을 변산의 봉우리가 새롭고,
자연보호헌장탑 삼거리를 지나서,
호젓한 단풍길을 거닐어 오르면,
직소호수 전망대가 나온다.
앞서 간 거북팀들도 이곳에서 관음봉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겼는데,
토끼팀의 거북이만이 고독한 카메라 앞에 잠시 짬을 내어 준다.
직소호수 건너편의 관음봉 정상에는 용이 오르는 듯 구름이 휘감기며 오르고 있다.
전망대를 뒤로하고 직소호를 따르다가,
돌아본 직소호수 전망대와 산그리매가 그림인 듯 사진인 듯!
아직도 관음봉 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구름이 하늘로 휘감아 오르고 있다.
관음봉 정상을 휘감으며 오르는 구름!
굳은 날씨에 인적이 끊어진 등로를 따르고,
잠시 후 선녀탕 갈림길에서 선녀탕으로 향하니,
선녀탕은 대형 욕조와 두개의 조그만 욕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대했던 선녀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등로로 복귀해 잠시 오르니, 직소폭포 전망대에 이른다.
직소폭포를 배경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오롯이 맞으면서도, 물이 없는 직소폭포!
돌아본 선인봉 방향.
다시 한번 직소폭포와 계곡을 담고서, 전망대를 뒤로한다.
화산의 분화구를 닮아 분옥담이라 하는데,
직소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용소에서 잠시 머물며 분옥담으로 이어진다.
건너편 관음봉 지능선은 암릉과 단풍이 잘 어울리고 있지만, 날이 맑았으면 좋았을 걸..ㅉㅉ
직소폭포 갈림길을 지나 직소폭포 상단으로 오르고,
물이 없는 직소폭포 상단을 지난다.
분옥담 전망대 방향.
재백이고개로 향하는 숲길은 가을비로 인해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져 호젓하기만 하다.
신선골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계곡을 건너 재백이고개로 향하는 목교가 나오고,
목교를 건너 재백이고개로 오른다.
계곡 위쪽 신선골 방향.
15:04에 재백이고개에 도착하는데, 먼저 간 분들은 한 시간도 전에 이곳을 지났다.
직진 방향은 원암으로 바로 진행하는 길이고, 관음봉은 좌측 내소사 방향으로 가야한다.
비를 맞으면서도 신성봉을 향한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비가 그칠 수도 있으니..ㅋㅋ
우측으로 곰소만 건너 선운산도 보인다.
살짝 당겨본 선운산.
비 내리는 신선봉을 향하는데,
우측으로 석포리 원암마을도 보인다.
비가 와서 미끄러울 듯했지만 실제는 그리 미끄럽지는 않다.
신선봉 방향.
곰소만을 배경으로.
가야 할 관음봉을 배경으로.
바다 건너 선운산의 그리매가 유혹한다,
가야 할 관음봉은 아직 구름 속에 휘감겨 있다.
관음봉 삼거리 직전 봉우리.
신선봉 방향을 배경으로.
신선봉 방향 파노라마
직소호수와 선인봉 방향.
우측 높은 봉이 관음봉이고, 중앙 멀리로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도 희미하게 보인다.
올라야 할 관음봉도 가늠해 보며,
철계단을 내려가서 안부를 지나 오르면,
관음봉 삼거리에 도착한다. 선두들은 어디로 갔을까를 잠시 고민한 후 관음봉을 향한다.
관음봉 오름길에 본 직소호수와 선인봉 방향.
관음봉 오름길이 절벽 사면으로 이어진다.
신선봉 방향으로 구름이 날리는 것을 보며 비가 그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진선봉 방향 조망.
관음봉 정상 도착.
비를 맞으며 관음봉 정상에 선 분들!
아래로 내소사가 내려다 보이지만, 구름으로 인해 곰소만 건너의 선운산 조망이 흐려진 게 아쉽다.
신선봉, 쌍선봉, 선인봉 방향.
석포리 너머로 곰소만이 보인다.
서남쪽 도심봉 방향.
관음봉을 뒤로하고 내려서니 오를 때 보았던 묘지가 있다. 비록 묘가 북쪽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망은 가히 최고일듯하다.
묘지 앞 전망바위.
노란 우산을 쓴 백두가 비를 맞으며 내려가고 있다.
묘지 앞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선인봉 방향.
변산반도 북쪽 파노라마.
비가 오지 않았으면 가려했던 세봉도 담아보고,
멀리 부안댐도 조금 보인다.
관음봉 삼거리로 다시 돌아나와 내소사로 향한다.
관음봉 하산길에 본 좌측 신선봉 방향.
신선봉 방향.
정면 곰소만 방향.
남쪽 선운산 방향 파노라마.
내소사 경내의 노란 은행나무가 선명하다.
곰소만 방향 조망.
서쪽 진서면 방향 조망.
석포리 방향.
돌아본 관음봉.
내소사 방향.
계곡 안쪽에 자리한 내소사 모습.
돌아본 관음봉.
신선봉이 멀리 보인다.
이때 쯤, 세봉을 돌아 청련암으로 하산하신 분들도 도착한 듯하고,
마지막 후미 그룹도 내소사 날머리에 도착한다.
돌아본 내소사 날머리.
내소사 경내로 탐방에 나서는데,
산에서 내려다보았던 노란 은행 단풍이 곱다!
내소사 천왕문.
<내소사(來蘇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백제 무왕34)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는 소소래사이다. 1633년(조선 인조11) 청민(淸旻)이 대웅전(大雄殿:보물291)을 지었는데, 그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865년(고종2) 관해(觀海)가 중수하고 만허(萬虛)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을 이루었다. 이 밖에도 고려동종(高麗銅鐘:보물277),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보물1268), 3층석탑(전북유형문화재124), 설선당(說禪堂)과 요사(전북유형문화재125) 등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정문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移建)한 연래루(蓮來樓)가 있다. 내소사의 유래에 관하여 일설에는 중국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來蘇)라 하였다고도 하나 이는 와전된 것이며, 원래는 소래사(蘇來寺)였음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고,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도 고려 인종 때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도 소래사라 하였는데, 이것이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부속암자로는 청련암(靑蓮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1986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일원이 문화재보호구역(전북기념물78)으로 지정되었다. 일주문(一柱門)부터 천왕문(天王門)에 걸쳐 약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길이 유명하다.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관음봉(觀音峰:433m) 아래에 있는데, 관음봉을 일명 능가산이라고도 하는 까닭에 보통 '능가산 내소사'라 부르기도한다.(펌)
천왕문을 들어서니 천년 된 느티나무, 300년 된 보리수나무 등이 관음봉과 어울려 단풍의 진면목을 보여 준다.
내소사 경내.
경내 탐방을 마치고 나오던 김용현님이 대웅보전 문살을 보고오라 귀띔해 준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인조 11년 청민선사가 중건한 건물로, 약 400년 전 이 법당을 지을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법당을 짓기로 한 목수가 3년 동안 목침만 깎고 있었다. 이때 이 절의 사미승이 궁금한 나머지 목수에게 물었다. "손님은 목침만 깍고 절은 언제 지을 거요?" 하지만 목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목침만 계속 깎았다. 이에 화가 난 사미승은 은근히 미운 생각이 들어 목침 한개를 감췄다. 꼭 3년이 되는 날 목수는 집을 지어야겠다며 대패를 놓고 일어나 목침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침이 하나 모자란 것을 발견한 목수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망태기에 연장을 챙겨, 절에 온 이후 처음으로 스님에게.. "소인은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에 스님이 연유를 묻자.. "3년간 만든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제 경계가 부족하여 업연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목침이 그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서둘러 법당을 지으시오" "스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법당을 짓겠지만 목침 하나를 빼놓고 짓겠습니다" 결국 목수는 목침 하나를 빼놓고 법당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이 대웅보전은 못하나 박지 않고 지어져 보물 29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다. 대웅보전의 문살.
내소사 대웅보전 문살의 문양은 우리나라 장식 문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살로 손꼽힌다. 그냥 보면 국화, 모란, 연꽃, 해바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극락에서 피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한다.
여유가 있으면 들러서 차 한잔 하고 싶지만...
눈요기만 하고 간다.
내소사 건물 하나하나가 주변과 어울려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대웅보전 앞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3층 석탑이 있다.
저녁나절 비 온 후의 산사는 너무나 아늑한 느낌이다.
내소사란 절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시간이 부족하여 내소사를 구석구석 보지 못함이 아쉽지만~~!
내소사 앞 상가지구를 지나니,
주차장 한켠에서 우리 애마가 기다리고 있다.
격포항 떡집에서 떡을 찾고, 숙소인 바다소리펜션으로 왔다.
바다소리펜션에서 저녁 준비.
아홉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가끔씩 내리는 호우와 바닷바람 속에서도,
백두들의 생일잔치는 무르익는다.
주거니 받거니!
가져온 술을 바닥 낼 기세지만,
산행 때와는 전혀 다른 여성회원들은,
미남 스타 출현에 환호!
장기자랑도 하고,
뭐 하는 장면인지 기억이 없는데..ㅉㅉ
그래도 흥겨운 자리가 이어진다.
잔치 일막의 마지막 건배 후,
남은 것은 뒷일뿐!
반면 여성회원들은 밤바다도 거닐며~~,
조용한 변산 바닷가의 밤은 깊어 간다.
2부는 좀 더 진지?한 분위기!
그래도 업소는 광란의 질주.
우리도 질 수 없다.
혀 불테여!
백두의 여정은 끝나지 않고,
변산의 밤도 백두의 것!
더듬어 보면 오래되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 그렇게 세월이 지나 더듬어 보면 금방의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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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건 올라와 있는지도 몰랐는데 오늘 우연히 보게 되었네요. 옛날 생각 많이 납니다. 비가와서 좀 아쉬웠지만 펜션에서 고기구워먹고 노래하고,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들으며 산책하고, 버스 노래방기계로 노래하며 즐거웠던 시간이 ㅎ ㅎ ㅎ 옛날은 항상 그립지요. 좋은 사진 보게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대장님.
아 옛날이 그립습니다.추억이 새록 새록 떠오르네요.즐감했습니다.감사 감사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