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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은 줄 모르는 쾰른 대성당과 아우토반 및 유럽열차 1등 칸의 체험
호텔로 돌아오자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독일 뒤셀도르프 소장의 메시지였다. 보훔(Bochum, 영어발음은 보쿰)제철소를 다녀오라고 한다며 파리 여정이 끝나면 바로 뒤셀도르프로 오라는 것이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보흠제철소를 꼭 견학시키라’는 엄명이 떨어졌다며 파리 일정이 끝나는 대로 바로 오라는 것이다 그 일정에 맞추어 보흠제철소와 섭외를 하겠다는 것이다.’
‘보흠제철소는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규소강판(국제명은 Silicon steel, 국내에서는 전기강판, Electrical steel)을 제조하는 공장이라고 했다. 보훔으로 가면 꿈에 그리던 로마투어는 물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쥬몽에서 수리한 전동기 조립팀이 도착하기전에 귀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눈물을 머금고 로마여행사에 15% 페날티를 물고 로마여행을 해약했다. 피같이 아끼던 돈을 페날티로 날렸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세심에 마지막으로 고맙다는 전화를 하고 오후 뒤셀도르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서 회사직원이 픽업하여 우선 사무실로 가는 도중 FAG베아링회사의 선전 간판이 눈에 보였다. 포철에서 제일 먼저 가동된 후판 공장에서 FAG베아링 때문에 당한 고통이 생각났다. 이걸 설비공급사인 오스트리아(Austria)의 베스트 알피네(Voest AlphIne)사를 통해 구입하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제 베어링을 대체해 보았으나 FAG는 인치 시스템이고 일제는 CGS시스템이라 제품에 스크래치 결함이 생겨 고통을 당했는데 그 베어링 회사의 선전 간판을 독일에서 본 것이다.
뒤셀돌프 소장과 함께 보훔제철소 견학일정을 조율했다. 집 떠난 지가 벌써 세 달이 다 되어 되도록 빨리 견학을 마치고 귀국하려고 우선 전화로 보훔에 연락을 했다.
그날 저녁 뒤셀돌프 소장 댁에서 오랜만에 한식으로 식사를 하고 출장비에 적합한 호텔을 예약해서 쉬었다. 그 다음 날도 할 일은 없으나 직원이 가르쳐 준 대로 시내 전차를 타고 사무실로 나갔다. 하루 종일 회답을 기다리다가 퇴근할 즈음 다시 확인을 하니 ‘방문자의 신상과 방문목적을 서류로 보내라’고 했다. 보훔의 요구대로 서류를 보내 주었건만 그 다음날도 회답이 없었다.
그 사이 중식은 함께 시내식당에서 함께 했다. 하루는 맥도날드(Mac Donald)식당에서 빵 두개 사이에 야채와 치즈를 집어넣은 햄버그를 처음 먹어 보았다. 모두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중식은 가끔 이걸로 때운다고 했다.
3일째 되는 날 소장이 재차 전화를 했지만 견학 가능여부를 검토해서 알리겠다는 거다. 무언가 견학을 거리끼는 냄새다.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 알았으면 로마를 다녀와도 충분했는데 페날티까지 물어가며 해약한 게 아쉬웠다.
소장은 회장의 엄명이라 꼭 견학해야 된다고 해서 바로 귀국할 수도 없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곧 주말인데 며칠을 기다려야 할지 하루 빨리 귀국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사이 소장은 직원을 시켜 뒤셀도르프 시가지를 안내해주었다. 뒤셀도르프 구시가지를 보고 공원에 갔는데 두여인을 양옆에 끼고 선 남자의 동상이 보였다. 조각 설명문에 악성 베토벤이라고 했다. 부인이 둘인 것은 이혼이 잦은 서양사회에서 있을 법하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한여인은 의상을 입혔지만 다른 한여인은 반라, 베토벤은 아주 나상(裸像)이었다. 농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국부를 문지르면 아들을 출산한다고 해서 그 부분을 얼마나 만졌는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났다.
그 다음날도 오전 내내 기다렸다 소장은 너무 지루하면 쾰른 대성당이나 보고 오라며 여직원에게 집이 쾰른(Koln)에 있으니 좀 안내해서 보여주고 혼자 오기가 부담스러울 터이니 기숙사 게스트하우스가 어랜지( Arrenge) 되면 내일아침 함께 출근하라고 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그래서 바람도 소일 겸 호텔을 하루 캔설하고 여행가방은 프론트에 맡겨 둔 채 그녀의 안내를 받아 전철을 타고 쾰른 대성당으로 갔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고딕양식의 첨탑에 기가 질렸다 그 높이가 150m를 넘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13세기에 착공해서 공사중단이 있기는 했지만 19세기에 완성했다고 하니 500년 동안이나 건설했다는데 더 놀랐다. 더 놀라운것은 2차대전때 독일이 파리를 파괴하지 않았듯 연합국도 쾰른 대성당은 폭격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의 폭격으로 인해 건물 자체는 검은 얼룩이 져 있었다.
쾰른 대성당은 첨탑까지 한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전망대에서 시가지를 바라보고 다른 쪽 첨탑 계단으로 내려오는 게 관광 코스라며 계단폭이 좁아 관광객 중 노인들이 도중에 쉬면 기다려야 해서 시간이 꽤 걸릴 터이니 한시간 후에 시간에 맞추어 픽업하겠다며 그녀는 자택으로 돌아갔다.
첨탑으로 올라가는 육중한 돌로 된 계단폭은 정말 좁았다. 한사람 밖에 올라갈 수 없어 그녀가 설명한대로 올라가다가 쉬고 쉬다 간 또 올라갔다. 내부는 찜통이어서 외관과 성당내부만 볼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관광객이지만 그래도 어느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고 그렇게 올라가는 것도 신기했다. 처음에는 쉴 때 서서 기다렸지만 나중엔 젊은이고 노인이고 모두 계단에 주저 앉아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외톨이었다.
가끔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지만 ‘코리아’라고 답하면 바로 ‘어디에 있는 나라야?’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서구사회에서 잘 알려진 일본 옆에 있는 나라라고 설명을 해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만큼 한국의 존재는 얼굴이 검지 않아 아프리카가 아닌 것은 알지만 우리가 지금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이름을 듣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첨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볼만했다. 시가지 넘어 독일의 기적을 이룬 라인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하기사 유럽의 시가지를 처음 내려다보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렇게 고생하며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한시간이 좀 더 걸려 내려오니 한 동양남성이 다가오며 Mr. AHn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부군 예비 박사였다. 저녁을 대접하려고 아내가 집에서 조리를 하고 있어 대신 픽업하러 나왔다고 했다. 저녁 초대를 받았으니 빈손으로 갈수 없다고 솔직히 무엇이 편하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쥬몽에서 했던 기억이 나 꽃집을 둘러 꽃을 사서 자택을 방문했다.
자택이라 야 기숙사의 스투디오(Studio)에 취사시설이 전부였다. 예비박사는 소파에 앉으라며 이게 낮에는 소파이고 밤에는 침대라며 소파를 펴는 시늉을 했다. 어떻게 보면 참 편리한 물건이었다.
그동안 부인이 한상을 차려 놓았다. 유학하는 부부가 넉넉지 도 못해 부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폐를 끼치게 되었다. 손님 대접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예비박사님과 함께 그립던 한식으로 식사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약한 대학 기숙사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며 숙박비를 계산하는데 너무 너무 적었다. 뒤셀도르프 호텔의 반가격도 안되었다. 아침에 함께 출근하며 룸 차지가 무척 싸던데 혹시 부담을 주는 것 아니냐 고 물었다. 그녀는 전혀 아니라며 기숙사 학생들을 찾아오는 부모님들을 위해 준비한 거라 장기숙박은 허용하지 않지만 다음에 올 때는 2-3일간이면 호텔에 자지 말고 자기가 주선해주겠다고 하며 웃었다.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후에 야 텔렉스(키펀치로 타공한 요즈음 팩스)한 장이 왔다. 견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포철과 계약서에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장은 회장님의 엄명이니 꼭 견학을 하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보훔은 이 주일에는 틀렸으니 기다리기가 지루하면 세계적인 전기기계 메이카(Siemens)인 지멘스나 보고 오는 게 어떠냐 고 제의했다. 바라던 바라 흔쾌히 그러자고 동의했다. 지멘스는 포철 냉연공장 시설품을 제작하고 있어 쉽게 섭외가 되었다. 월요일 오전부터 견학하고 저녁까지 뒤셀도르프로 돌아오면 보훔 일정은 화요일이후로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또 비행기표를 바꾸어야 했다. 아무리 가격을 100% 지불한 오픈 티켓이지만 같은 곳을 두 번 경유할 수 없어 이번에는 뒤셀도르프-뉘론베르크(Nurnberg)-쾰른으로 돌아와 쾰른에서 전차를 타고 돌아오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귀국길은 쾰른-함부르크(Hamburg)-동경-서울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자 은근히 욕심이 생겼다.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 산업체를 견학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또 보훔 섭외의 난맥이나 내 출장의 연기 명분도 될 것 같았다.
공항에서 오다가 선전간판을 보았는데 FAG베어링 회사도 보고 싶다고 욕심을 내었다. 소장은 그 공장이 어디 있나 체크하더니 뉘른베르크 가는 길에 있다며 바로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 오전까지 일 한다며 프랑크푸르트(Frankfurt) 공항에서 일찍 픽업하면 오전 중에 공장견학을 하고 그곳까지 간 김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며 로렐라이나 구경하고 일요일 저녁에 지멘스로 가서 보고 월요일날 저녁까지 돌아오라고 했다.
또 뒤셀도르프-뉘른베르크(Nurnberg) 티켓을 뒤셀도르프-프랑크푸르트-뉘른베르크로 바꾸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 공항에서 하기로 하고 토요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갔으나 항공사가 너무 붐벼서 프랭크푸르트 항공권만 주면서 그곳 항공사에서 바꾸라고 쪽지를 하나 붙여주었다.
우선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준 안 (영문명,JOON AHN/ KOREA)이라는 표지판을 든 분을 만나 우선 항공권을 바꾸어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주차장 위치를 말하며 그리로 오라고 했다. 찾아갈 자신이 없어서 함께 주차장 위치를 확인하고 공항 항공사에서 항공권을 바꾸는데 쪽지를 본 항공사 직원이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느라고 시간이 꽤나 걸려 나도 신경을 쓰느라고 주차장 위치를 그만 잊어버렸다. 큰일이었다 일본사람들처럼 수첩에 기록을 해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절로 생각났다. 공항 주차장 이곳 저곳 둘러보면서 혹시나 날 알아볼까 해서 그 넓은 주차장을 거의 다 돌아보아도 손을 흔드는 사람은 없었다.
독일어도 안통하고 얼굴도 모르고 차량번호 조차도 모르니 난처하게 되었다. 하는 수없이 경찰과 상의했다. 그는 방송실로 데려가서 방송원이 이것 저것 영어로 물어보고는 다음에는 반드시 차량번호와 주차장 번호를 기록하라며 주의를 주고는 독일어로 장황하게 방송을 하고는 경찰을 따라가라고 했다. 방송한 내용이 궁금해서 영어로 물었더니 FAG회사에서 게스트를 픽업하러 나오신 분은 중앙통로 국기게양대로 오라고 방송을 했다며 경찰을 따라가면 찾을 수 있을 거라 했다.
키가 장대만큼 크고 덩치도 거의 두배 가까이 되는 경찰은 손을 높이 치 들고 흔들며 호루라기를 계속 불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 옆에 조그마한 동양인이 따라다니는 게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어 창피스러웠지만 대안이 없었다. 이렇게 중앙통로를 지나 한참을 따라 가 국기게양대가 있는 주차장 입구까지 걸어갔더니 한 분이 손을 흔들며 ‘헬로우(Hello)’라 하며 불렀다. FAG분이었다. 후유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경찰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차량을 타고 FAG로 향했다.
그의 차는 사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더니 바로 고속도로로 올라갔다. 그 유명한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이었다. 아우토반이 신기해서 좌우를 살펴보는데 자동차는 정신없을 정도로 빨리 달려 안전 벨트를 했지만 겁이 났다. 두손으로 의자를 꼭 잡고 속도계를 보니 180Km를 넘나들었다.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더니 160Km정도로 낮추었다. 하지만 그 속도도 처음 달려보는 속도라서 겁이 났다. 다시 좀 속도를 줄이자고 했더니 차선을 2차선으로 바꾸며 150Km를 넘나 돌며 달리면서 그 다음 선은 할머니들이나 50-100Km로 달린다며 공항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어쩔 수 없다는 거다. 공항에서 지연은 내 잘못이니 할말이 없었다. 이러다 교통사고로 죽을 것 같았지만 바짝 긴장한 채로 도착하니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독일의 그 유명한 아우토반의 첫 경험이었다. 도로 양쪽에는 철망이 쳐져 있었다. 갑자기 뛰어 들어오는 동물들도 보호하고 교통사고 예방을 겸한 것이라고 했다.
FAG에서 세일즈 엔지니어가 공장의 자랑과 베어링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현장 안내도 해 주었다. 공장견학을 마치고 점심을 잘 얻어먹고 사무실로 되돌아와 어떤 베어링을 얼마나 오더(Order)하겠냐고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나는 엔지니어로 FAG베어링 때문에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 공장견학을 원한 것인데 그들은 나를 바이어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돌아가서 필요한 종류를 정리해서 오더를 하겠다고 했더니 알았다며 나가 버렸다.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나가야 되는데 네가 알아서 가라는 식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를 프랑크푸르트로 좀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그는 자동차를 가져와서 타라고 해서 가는 줄 알았는데 전차역으로 와서 2등칸은 복잡하니 1등칸을 타고 가라며 가버렸다. 국제고아가 된 것이다. 몇 번이나 물어서 값은 비싸지만 1등칸을 부킹했다.
1등칸은 긴 로비가 있고 로비 입 구에 승무원이 전차표를 확인하고 룸과 좌석번호를 알려주었다. 작은 룸은 마치 서양영화에서 보던 것과 같이 3인씩 마주앉는 좌석이었다. 조금 후 전차는 출발했지만 나 혼자 뿐이었다. 시발점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어 겁이 나서 승무원에게 프랑크푸르트 행이냐며 다시 확인했다.
처음에는 창밖을 내다보다가 슬며시 잠이 왔다. 누우면 곧 잠이 들 것 같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방도 있지만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반시간이 지나자 목이 몹시 말랐다. 차내 매점도 없고 판매상인도 없었다. 목마름을 참고 한참을 더 가다가 전차가 어느 역에 들어가며 독일어로 20분(Zwanzig)후에 떠난다는 것 같았다. 1등칸 승무원에게 다시 확인하고 플랫폼에 내려도 매점이 보이지 않아 역원에게 물었더니 역사건물을 가리켰다. 뛰어가서. 콜라한병을 사오니 제자리에 있어야 할 전차가 없어졌다. 역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20분후에 떠난다고 했는데 혼비백산했다. 열차 안에 둔 보스톤 백에는 출장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급해서 손을 흔들며 영어로 Help me, Help me(도와 달라)를 외쳤다. 한 학생이 다가와서 왜 그러느냐는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웃으며 자기도 그 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간다고 따라오라며 이곳은 전차가 들어왔다가 되돌아 나가는 곳이라 전차의 앞뒤를 바꾸느라고 플랫폼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를 따라 플랫폼을 몇개를 건너가니 역원과 기차가 보였다.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얼른 차에 올라 콜라보다 가방 밑바닥에 숨겨놓은 남은 출장비를 확인했다. 그게 없으면 국제미아가 될 판이었다. 독일어로 방송을 했는데 내귀에는 20분이라는 말만 들렸던 것이다. 역원에게 시간만 확인하고 내 나름대로 해석한 게 탈이었다.
놀란가슴을 쓰러 내리고 가는 열차는 역마다 서며 사람들이 자꾸 많이 탔다. 하지만 1등칸 손님은 없고 사람들이 꾸역꾸역 로비로 몰려와 서서 갔다. 누가 문을 노크했다. 이제 한 손님이 타나 보나 했더니 겨우 고등학생쯤 보이는 앳된 학생이었다. 그는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며 담배를 달라는 것 같았다. 당시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을 만났을 때 간단히 주는 선물로 고국 담배라고 청자를 갖고 있었지만 어린 아이에게 담배를 주기가 싫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아우토반으로 갈 때는 한시간 조금 더 걸렸는데 전차는 이곳 저곳 두르는지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종착역이라 안심은 되었지만 한시간이 넘어서니 너무 지루하고 심심했다 역마다 누가 탔으면 하고 기대했는데 역시 장거리 구간도 아니고 주말이라 모두들 자가용으로 아우토반을 이용하는 탓인지 한사람도 타지 않았다.
너무 심심해서 담배를 줄걸하고 후회했다. 그러다가 몇 번 망서리다 가 못내 나가서 손짓을 했다. 들어오라는 시늉을 했더니 학생인 듯한 세사람이 들어와서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인사를 했다.
남자아이 둘과 여자아이 하나였다. 노크할 때는 몰랐는데 남자는 키가 나보다 더 큰 것 같았고 가까이서 본 여자아이는 한국에서 본 서양 인형 같이 생겨 인형의 실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자기 이름을 소개하며 형제지간이라고 소개했다. 난 그저 준안 이라고 내 이름만 말했다.
담 배를 달랠 때는 불량아 같이 보였는데 마주 앉고 보니 여느 아이들과 같아 보였다. 그들은 키가 작은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듯했다. 어디서 왔느냐? 한국이 어디 있느냐?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 대었다. 나는 역으로 도이치랜드 학생들은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몇 사람들(Some people)만 피운다고 했다. 슬며시 청자를 꺼내어 담배한가치를 큰아이에게 주었더니 포켓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불을 붙여 피웠다. 둘째에게도 권했더니 사양했다. 어차피 청자 한 갑을 뜯었으니 나도 피우지도 않고 선물용은 되지 못해 통째로 주었다. 그는 특이한 동양담배를 맛보고는 독일 것보다 좀 진하다며 아꼈다가 친구들과 함께 피우겠다고 헸다.
요즈음 같았으면 고등학생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만 그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양아이들은 지금 한국의 고등학생들처럼 당시 피웠던 같다.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서 현재 현재 비즈니스 트래블 중이라고 했더니 프랭크 푸르트에서 로렐라이가 가까우니 꼭 보고 가라고 했다. 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길 하면서 심심치 않게 프랭크푸르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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