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소유 중심에서 존재 중심으로
세상은 흑백으로 가를 수 없고, 모호함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한다는 자각
버릴 것을 과감하게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게 문제다.
사람은 새것을 추구하면서도 익숙한 것에 집착한다. 익숙함이 주는 안락함과 위안은 떨쳐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낯섦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익숙한 세계에 매달린다.
매달리는 삶 = 소유 중심의 삶
선포된 말씀을 사건으로 바꾸는 것은 보내신 분이 하실 일이다. 이것이 급진적 희망이다.
듣거나 말거나 자꾸 외치고 글을 쓰는 까닭은 스스로 길을 찾기 위함이다.. 세상에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어디에선가 길을 찾는 이들에게 여기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의 일부다."
1부 나를 옥죄는 감옥
초조함과 두려움
자유 혹은 평화에 이르는 길은 잘 닦인 포장도로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감당할 수 있는 느으력도 함께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사람은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19).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는 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늘 그의 곁에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20).
신앙생활의 보람은 자기를 넘어서는 데 있다(23).
근심과 걱정
제자들은 현실을 현실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희망 사항에 따라 보고 있다.
십자가에 못 벅힌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자기들의 꿈도 그곳에 못 박혔다.
십자가는 모든 익숙하던 것과의 결별이다.
삶의 실상에 눈을 더야, 우리의삶이 가벼워진다(30).
이름을 빌려준다는 의미(예수님의 이름으로) : 그 이름으로 이뤄지는 모든 일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말이다.
그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것인가? 예수님의이름을 사용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 도용하지 말라!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작은 일, 작은 변화가 혁명의 시작이다.
원망과 의심
"나는 만족합니다." 이 한마디를 할 수 있다면 우리 생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면서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것인 동시에,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해 내는 과정이다.
현실이 각박하면 꿈은 뒤로 물러나게 마련,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광야학교 - 하나님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살때 인간을 잡아채는 조바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모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뿐이다.
지금은 말씀기근시대다.
홍수 때에 오히려 마실 물이 부족한 것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면서도 우리는 참 말씀을 듣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시는가?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다. 하지만 잊지말라...임마누엘.
말씀의 바위를 쳐서 생수를 얻으라.
불평과 불만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소리를 만들며 산다. 어떤 소리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우리 자신이다.
불평하지 말라는 말씀은 투덜거리지만 말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라는 말씀이다.
불평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불평은 정신적 허약함의 징표다.
묵묵히 지금 해야할 일을 감당하라. 그때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다.
위선과 겉치레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 위안 - 가끔 선한 일을 함으로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은 심리...장신구에 불과하다.
주는 이들도 잘 줘야 하지만, 받는 이들도 잘 받아야 한다. 주눅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자랑과 과시
누가 보기 때문에 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요, 강요된 노동이다. 이런 노동을 하는 이는 노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에는 내적 기쁨과 감사가 없다.
가장 아름다운 선행은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병적인 자부심
내로라 하는 자부심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기 쉽다.
2부 채워지지 않는 욕심 그릇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끝을 모르는 탐욕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상한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다.
*
조율 - 아주 조금의 차이/ 전문가들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음악이시다....우리는 악보를 해석하고 연주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해외에 소개된 단어 / 갑질, 개저씨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천박하게 변해가는 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
생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은촌이 우리 뼛속 깊은 곳에 새겨져야 한다.
성취에 대한 강박
우리가 빛으로 살 때는 대개 '나'를 잊을 때이고, 어둠으로 살 때는 '나'에게 서로잡혀 있을 때다(102).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걱정은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우리 내면의 힘을 약화시킨다.
'더'가 아니라 '덜'의 삶을 터득하면 삶은 축제가 된다. 덜 갖고 덜 쓰기로 작정하면 삶이 가벼워진다(104)
'하나님의 부력 Buoyancy of God'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고, 하나님께 생을 맡긴 사람은 하나님이 부력을 경험할 수 있다.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은 '스스로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 "내가 다 안다"
삶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마음을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나의생각과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는치열한 과정이어야 한다.
성공을 좇는 조급함
하나님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기에 우리의마음은 늘 조급하고, 안달한다.
하나님의 속도에 적응해야 삶을 즐길 수 있다.
특권이라는 독약
불의한 재물
합일화 - 자기를 주인의자리에 세우고 사람을 바라보는 일
주인이 칭찬한 부분 - 불의한 행동이 아니라, 살길을 찾고자 그가 보인 지체 없는 결단과 실행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옛 삶의 방식을 단호하게, 지체없이 결단해야만 한다(불의한 청지기 비유).
돈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라)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
이신(1927~1981)
그분은 나를 믿어 달라고 요청하시는 것보다 내 속을 좀 알아 달라고 하신다.
"내 속을 좀 알아다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것은 교세확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3부 이웃과 세상을 향한 뒤틀린 생각
사람은 누군가의이웃이 됨으로써 참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 가슴에 담고 살아도 우리의 삶은 맑아질 것이다.
'우리'와 '저들'
요나 - 하나님의 속성은 알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다.
일단,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어떤 일을 이루신다(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자기 행동의 합리화 -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나님이 언제나 내 편이셔야 한다는 생각은 편협한 믿음이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요나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민족주의적인 감정으로 마땅히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들의 수고와 무관하게 존재한다. 존재의 근거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의 수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소중한 것이다...햇살과 바람과....이런 것들은 낭비되면 안 된다.
어떤 종교이든 근본주의자들은 다 위험하다. 나만 옳다는 생각, 그 자체에 폭력이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된 종교는 증오를 부추기지 않는다.
고래 힘줄보다 질긴 편견
성령강림주일 - 감리교 운동이 효시 존 웨슬리의 회심일이기도 하다.
성령은 헛된 것을 태우고, 차가운 것을 따스하게 하는 불이요, 매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요, 어둠을 비추는 빛이고, 외로운 이들 곁에 머무시며 돌보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접속시켜 주시는 분..이렇게 하여, 성령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간다.
은총의 경험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스며들자 그의 손과 발이 움지기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감리교회 운동이 되었다.
성령은 열정적으로 기도할 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중에도 임하는 것이다.
노자 -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고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
현재, 하나님의 영이 교회 밖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이 많다.
멀찍이서 구경하는 사람들
인간은 자꾸 멈추어 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자기 마음을 조율해야 인간다워진다.
그래야 모르는 사이 공모자가 되지 않는다.
오바댜의 예언- 에돔의 멸망에 관한 것 / 유다가 바벨론에 유린당할 때 쾌재를 부른 것 때문
멀리 서서 구경을 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 쾌재를 부름...방관, 조롱, 약탈, 강자에 동도, 인신매매 등등....오늘날과 태그ㅜㄱ기부대와 다르지 않다.
마르틴 니묄러(1892~1984) - 처음 그들이 왔을 때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가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체모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은 없었다.
사람은 누군가의 이웃의 됨으로써 참사람이 될 수 있다.
패거리 문화
토인비 - 창조적 소수 / 세상의 변화는 내면에 뚜렷한 비전을 품은 소수를 통해 일어난다.
머리냐, 꼬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와 자기에게 주어진 몫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가의 문제다.
먼저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기꺼이 배우려는 마음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다.
'이쪽' 아니면 '저쪽'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 수 없다. 그가 하는 말은 사사건건 지당한 말씀이고, 그의 행동은 나무랄데 없지만, 그는 누눈가의 품이 되어주지 못한다..여백이 없다. 남을 품을 수 있는....
노신 <썩은 사과 먹는 법>
사람들은 썩은 사과를 보면 아낌없이 버리지만, 알뜰한 사람은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먹는다.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은가?
예화) 지리산 맑은 계속에 산다는 물고기 '가사어' - 소나무 그림자를 보고 제 몸의 무늬마져 그림자처럼 만든 물고기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는가?
권력의 오만
absurd / 불합리하다, 어리석다. surd - 귀머거리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혹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부드러움은 생명에 가깝고 굳어짐은 죽음에 가깝다.
시기 어린 시선
엘라 골짜기 -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던 곳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사울은 이 노래에서 시기심이 발동한다.
권력은 독점을 지향한다...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두려움이 커기조, 그로인해 폭력적으로 변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일곱가지 죄의 뿌리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심, 나태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연약한 이들을 중심에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연약한 이들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취급할 때가 많다.
4부 참된 자유를 향한 여정
익숙한 세계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다.
주님이 계신 곳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어둠의 옷을 벗어야 한다.
예수가 피를 잉크삼아 영으로 쓰신 편지는 바로 우리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새 사람 -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사람
겸손하게 배우려 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이라야 새로운 사람이다.
남에게 숨겨야 할 일이 없을 때 우리는 당당해 진다. 부끄러움이 없을 때 우리는 자유롭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자. 내 눈에 씌워진 너울을 통해 바라보면 하나님조차 왜곡하기 마련이다.
(고후 3:16/고전 8:1 등과 연결...222p)
낡은 삶의 옷을 벗고
야고보서 1:27 / 신앙생활의 목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과 이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것.
이렇게 살려면 우리의 삶을 자꾸 말씀의 빛 앞에 세워야 한다. 신앙이 습관이 되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려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놀람, 경탄- 여기에서 철학이 시작되고, 신학도, 신앙도 출발한다.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도 없고...
구상 <말씀의 실상>
노상 무심이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의 시범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다른 이를 평가하는 나름의 잣대가 있다. 문제는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세상이 믿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이유는 - 그들이 쉽게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되지 않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종교적인 언어에 중독되어 살아간다....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종교적 언어는 다른 이들을 배척하거나 심판하는 독단이 되기 쉽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
주님은 나사렛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즐기지 않으셨다. 그 이면에 숨은 욕망을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예수를 환대했던 이들은 이제 에수의 말에 분노합니다. -결국, 그를 죽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이들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와 평화와 기쁨을 선물로 받게 마련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언어의 장인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246).
익숙함의 함정 - 익숙한데만 머물면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배제한다.
익숙한 세계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다. 신앙은 과감히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모험
선을 붙들고 살아갈 용기
전우익 - 참삶이란 부단이 버리고 끝끝내 지키는 것의 통일 - 삶을 복잡하고 누추하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은 자꾸 덜어내야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 - 삶의 원칙
악에게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까닭은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멍에를 벗고 참된 자유인으로
희망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키워야 하는 가치다. 어려운 때일수록 근본에 충실해야 한다.
거친 세상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사노라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보상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 이미 보상을 받았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라는 확신만큼 나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 마땅히 해야할 일일 뿐이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한다면 여전히 종의 멍에를 진 사람이다. - 지옥에 안 가려고 신앙생활한다면 여전히 죄의 멍에를 지고 사는 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기독교 신앙의 근원적 핵심 = 출애굽사건과 십자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