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거제도 유배지에서 괴로움을 함께 겪은 평생의 도우(道友), 이행(李荇)과 홍언충(洪彦忠) 형제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1504년 1505년 1506년 3년 사이에 대략 25명 정도의 정치인과 학자가 거제도로 유배 또는 이배되어 왔다. 당시에는 거제현 치소가 고현성이라, 대부분 구(舊)신현읍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행(李荇,擇之)은 상문동, 김세필(金世弼,公碩)은 수월리, 홍언충(洪彦忠,直卿)형제는 장평동 바닷가(삼성호텔), 이려(李膂,强哉) 이윤(李胤,子伯) 이육(李育,元淑)형제와 이장곤은 고현동 바닷가에 배소가 있었고, 이행과 홍언충의 배소는 옛 길로 약15리 쯤 떨어져 있었다.
당시 거제도유배자는 이행(李荇, 擇之), 공석(公碩 김세필金世弼), 홍언승(大曜 洪彦昇), 홍언충(洪彦忠, 直頃), 홍언방(君美, 洪彦邦), 홍언국(洪彦國 公佐), 최숙생(子眞 崔淑生), 이윤(李胤 子伯), 이강재(強哉 이려李膂), 이공백(恭伯), 이자선(李子善), 이원숙(元叔 이육李育), 이인지(李守訒, 訒之), 이공신(李公信), 박수위(朴守緯), 이장곤(李長坤), 박봉(朴鳳), 권질(權瓆), 유기창(兪起昌), 홍상(洪常) 등이 대표적인 분들이었다.
거제현령의 배려가 있었던, 1506년 봄(음2월)부터 가을(음9월9일)까지 유배객들은 귀양살이 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장평바닷가, 운문(문동)폭포, 소요동[상문동], 신청담(神淸潭, 문동폭포 웅덩이)과 매립전의 고현바닷가, 그리고 유자도(現 竹島), 주봉 계룡산, 구천동(九川場)까지 함께 다니며 거제비경을 즐겼다. 거제고을 선비인 이악(李鶚, 斯立), 이맹전(李孟全), 이백완(李伯完)도 가끔씩 참석했으며, 또한 거제 관리 이수간(李守幹), 수위(守威), 수인(守訒), 수심(守諶) 형제들과도 시문을 교환했다. 이분들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 거제시 상문동 문동저수지에서 문동폭포까지였다. 그래서 암울한 연산조 시절, 운문(문동)폭포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학공간이 되었다.
●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은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아들, 홍언승(洪彦昇), 홍언방(洪彦邦), 홍언충(洪彦忠), 홍언국(洪彦國) 4형제들과 거제도에서 괴로운 귀양살이를 같이한 계기로, 평생의 도우(道友)로 지냈다. 1526년 뒷날 홍언방(洪彦邦 1470~1526)의 부고를 듣고서 곡을 하면서 애끓는 정을 표현하였다. 직경(홍언충)과 대요(홍언승), 그리고 그들의 부친인 함허(허백정 홍귀달)에 대한 옛 기억과 정(情)을 함께 떠올리고 있다. 이 당시 이행(李荇)은 종1품 의정부좌찬성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다음 해 1527년 10월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1) <군미(君美) 홍언방(洪彦邦)을 곡(哭)하다.> 이행(李荇 1478∼1534)
直卿宰木曾成拱 직경(直卿)의 무덤가 나무 벌써 굵어졌고
大曜山亭久已虛 대요(大曜)의 산 정자는 빈 지가 이미 오래인데,
白首又聞君美訃 백발의 몸으로 또 군미(君美)의 부고 들으니
故人情緖果何如 옛 친구인 내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소.
甲子今垂二紀餘 지금부터 어언 이십 년 전인 갑자년 당시
士林傾倒仰涵虛 사람이 경도하여 함허(홍귀달)를 우러러보았지.
典刑從此還無托 그 모습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데
悵望名亭只自如 서글피 보니 저 정자는 무심히 서 있구나.
一身多口不遺餘 일신에 얽힌 구설 여지가 없었으니
却掃田園萬事虛 전원으로 돌아오매 만사가 속절없었지.
今日還聞賓館復 오늘 다시 빈관(賓館)에서 초혼 소리 들으니
百年屯蹇莫君如 인생 백 년 기구하기 그대 같은 이 없구려.
乖離今已十年餘 우리가 헤어진 지도 어언 십 년 넘어
契闊還成一夢虛 멀리서 서로가 꿈속에서나 만났었지.
半歲相從憂患裏 반평생을 우환 속에 서로 사귀었으나
平生交道有誰如 평생에 우정이야 그 누가 이만하리요.
위 시(詩) 속에서 함허(涵虛)는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을 가리킨다. 그의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ㆍ함허정(涵虛亭),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그리고 그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홍언필(洪彦弼), 대요(大曜) 홍언승(洪彦昇 생졸년 미상), 군미(君美) 홍언방(洪彦邦 1470~1526), 직경(直卿) 홍언충(洪彦忠 1473~1508), 공좌(公佐) 홍언국(洪彦國 1475~1530)이다. 이 중 맏이인 언필은 일찍 죽었고 언방과 언충이 대과 급제를 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언승은 진사로 거창현감을 지냈고, 언국도 진사로서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 네 아들들은 또한 부친 홍귀달의 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거제도로 유배되기도 했다.
○ 용재(容齋)의 시는 일반적으로 침중(沈重)하고 아정(雅正)하며, 담박하고도 평화로우며, 명쾌하고 쇄락하여 광풍(光風) 제월(霽月)인 양 기품이 있고, 시어도 고박 간결하여, 화려와 멋을 꺼리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에서, '용재는 정각을 얻어 선문에 들었다.'고 평했는데, 이는, 그의 시사(詩思)가 완미(完美)의 경에 들어, 현세적인 고뇌 따위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탈속(脫俗)의 경지임을 기림이었다.
2) <택지에게 보내다(奇擇之)> 홍언충(洪彦忠)
거제시 장평동 1506년 초가을, 해도(海島)에서 귀양살이하는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直卿)이 상문동에서 귀양살이 하는 용재(容齋) 이행(李荇, 擇之)에게 안부를 묻는 글이다. 유배자로서 맡은 임무는 이행은 양을 치는 것이고 홍언충은 채소밭을 가꾸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구석진 바닷가 마을이지만 벗의 안부 편지 하나에 향수병과 앓던 지병이 씻은 듯 나아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不見甑山子 증산자(이행)를 못 본 지 오랜데
窓戶忽已涼 창호가 또 벌써 선선해지는군
君羊肥幾何 자네 양은 얼마나 살쪘나
我圃日以荒 내 채전은 날마다 거칠어가네
圃荒尙可理 거칠은 채전이야 손질하면 되지만
奈此醫膏肓 나의 이 고항병은 어찌 고칠꼬
三歲不可忍 3년 동안도 못참겠거든
八年誰能當 8년이란 긴 세월 뉘 감당하리
對此輒愁思 이런 생각하자 시름에 겨워
有時吐滿床 때로는 상에 가득 토해내기도
精神又惝怳 더구나 정신이 황홀하여서
行坐常若忘 앉으나 다니거나 무엇 잊은 듯
元氣日銷鑠 원기가 날고 쇠해만 가니
槁木凜將僵 고목이 싸늘이 쓰러지려네
隣里跡如掃 동네에 인적이 쓸은 듯하니
況懷尋僻坊 이 구석진 마을에 뉘 찾아오리
頗聞紫騮駒 들으니 혹시 자류 망아지(거제말馬)가
東西恣飛揚 동서로 멋대로 들날린다는데
胡然不入我 어이하여 내 집엔 이르지 않나
思之却望洋 생각하면 도리어 바다를 바라는 듯
折簡將厚責 편지 띄워 단단히 나무래려고
玄穎呼在傍 필묵을 불러서 옆에 있네
長鬚忽闖然 장수(하인)가 문득 뛰어들더니
古字仍疏行 낯익은 글씨 몇 줄 전해주데만
欣然復慰思 반가이 받아 보고 위로 받으니
病十九已亡 앓던 병이 10중에 9가 나았네
出門送長鬚 문을 나서 하인을 보내느라니
海拍靑山長 바다는 물결치고 청산은 머네
● 용재(容齋) 이행(李荇)은 1504년 갑자사화로 이배된 1506년 2월부터 홍언승(洪彦昇) 4형제들과 함께 거제도에서 귀양살이를 함께 하며 거제도 비경을 즐겼다. 당시 거제귀양살이 생활상을 유추해보면, 용재 이행 선생은 세 칸 띳집에서 살았고, 노복(종)이 있었으며, 집주인은 궁핍한 할미였고, 금헌 이장곤은 집주인이 어부였다. 용재 이행이나 상재 최숙생, 십청헌 김세필, 우암 홍언충 등 모두 거제도의 말(馬)을 새로 구입하여, 배소에서 30리 떨어진 구천장으로 유배 온 문인들과 함께 놀려 다녔다. 우암 홍언충은 채소밭을 가꾸는 임무를 맡았으며, 용재 이행은 양치는 일을 했다. 하지만 모두 데리고 온 노비가 맡아서 일을 했지 유배객 본인이 일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유배인을 감시하는 병졸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 다음은 거제시 구천동(九川場)에서 그들이 서로 만나 친교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연시(聯詩)를 소개한다. 이 시는 《용재집(容齋集)》 속 「해도록(海島錄)」에 실려 있다.
3) <제군(諸君)들과 함께 구천(九川)장에 놀러 갔다가 연시(聯詩)를 작은 돌에 적어 바위 구멍에 감추어 두다.(발문(跋文)을 아울러 붙이다)> 이행(李荇 1478~1534)
危壁淸溪上 맑은 시냇가에 가파른 벼랑 -홍언방(洪彦邦)-
玆晨竝馬看 오늘 아침 나란히 말 타고 보노라 -이행(李荇)-
蒼苔今古色 푸른 이끼는 고금의 빛이건만 -김세필(金世弼)-
人事盛衰端 사람의 일은 성쇠가 바뀌누나 -홍언승(洪彦昇)-
雨點催詩急 빗방울 떨어져 시 짓길 재촉하고 -이악(李鶚)-
杯心引興寬 술잔 속은 느긋한 흥을 이끌도다 -홍언방(洪彦邦)-
小篇留姓字 작은 시편으로 성명을 남기노니 -이행(李荇)-
牛斗莫相干 모쪼록 우두일랑 범하지 말아라 -김세필(金世弼)-
부계(缶溪) 홍언승(洪彦昇) 대요(大曜), 홍언방(洪彦邦) 군미(君美)와 덕수(德水) 이행(李荇) 택지(擇之)와 계림(鷄林) 김세필(金世弼) 공석(公碩)이 이악(李鶚)과 함께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시고 한껏 즐겁게 놀다가 자리를 파하다. 이악은 이 고을 선비로 자는 사립(斯立)이다. -정덕(正德) 병인년(1506, 연산군12) 7월 26일에 적다.-
○ 또 율시(律詩) 한 수를 짓다.
老松疏竹各陰陰 늙은 솔 성근 대는 저마다 우거지고
怪壁嵯峨秋水深 괴상한 벼랑 우뚝한데 가을 물 깊어라
白石題詩着巖腹 흰 돌에 시를 적어서 바위 속에 넣고
淸尊斫膾倚潭心 맑은 술에 회 쳐서 못 가운데서 먹는다
斷雲飛鳥無南北 끊어진 구름 나는 새는 남북이 없건만
落日西風自古今 떨어지는 해 서녘 바람은 고금에 같아라
爲報山靈好看客 산신령에게 이르노니 이들을 잘 보시오
座中應有後來尋 좌중에 훗날 찾아올 사람 응당 있으리니
마지막 “우두일랑 범하지 말라”라는 구절의‘우두’는 견우성과 북두성을 가리킨다. 오나라 때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랏빛 기운이 감돌기에 장화(張華)가 점성술가 뇌환에게 물었더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는데, 정말 풍성의 땅속에서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두 보검을 발견했다는 고사가 『진서晋書』의 「장화열전(張華列傳)」에 실려 있다. 자기들의 연시(聯詩)가 바위틈에 잘 숨겨져 있어야지 용천과 태아의 두 보검처럼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다섯 아들 중에는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이 가장 뛰어났다. 그는 연산조(燕山朝) 을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이조 정랑(吏曹正郞)까지 했고, 시(詩)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또한 기개와 절의가 있었다. 그는 갑자년에 화를 입어 진보(眞寶 청송군) 땅에 귀양 가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스스로 단정하고 옛 사람을 모방하여 자신의 만장(挽章)을 짓고 묘갈명(墓碣銘)도 지었다. 그 묘갈문에, “대명(大明 명나라) 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洪)이며 이름은 충(忠)이요 자는 직(直)이라. 반평생에 오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다. 32세에 세상을 마치니 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며 뜻은 어찌 그리도 긴고. 옛 고을 무림(茂林)에 묘지를 정하니, 푸른 산이 위에 있고 물굽이 언덕이 아래에 있도다. 천추만세 뒤에 누가 이 들판에 지날는지. 반드시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면서 슬퍼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동각잡기》 이후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 중종반정 후에 벼슬살이 하던 이행(李荇)이 본도(本道)의 감사가 되어 홍언충의 묘 밑을 지나가다 글을 지어 제사하기를, “8월 초하룻날 해는 기울어 어두운데 행(荇)이 와서 직경(直卿)의 묘에 잔을 드리노니 해와 달이 얼마이건대 묘역의 가래나무 구름과 연하였는가? 푸른 산과 물굽이는 바로 그대의 글과 같구나. 한 번 울고 물러가니 유명이 나뉜 탓일세”(八月初吉 日將西曛 荇來奠杯 直卿之墳 日月幾何 梓木連雲 靑山灣漪 正如君文 一哭而退 幽明之分) 하였다. 홍언충은 중종반정 이후에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다. 그는 본디 병약하여 10 여년간 지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1508년 36살의 일기로 세상을 버렸다.
● 다음은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直卿)과 용재(容齋) 이행(李荇, 擇之)이 서로 유배지 거제도에서 가깝게 지내며 교분을 이어가던 그 어려운 시절에 지은 시편들이다.
4) <귤도에서 노닐다(遊橘島) 1506년 거제시 장평동> 홍언충(洪彦忠)
海外還爲海外人 바다 밖에서 다시 바다 밖의 사람이 되매
始知身世更無鄰 비로소 신세가 다시 이웃이 없음을 알겠구나
逢迎魑魅新相識 마중 나온 이매(도깨비)는 새로이 서로 알고
邂逅江出舊見親 강산은 옛 친구를 본 듯이 친하네
鞭石擬窮烏兎窟 돌을 채찍질해 오토의 굴을 엿보려 하고
乘槎直泛斗牛津 떼배를 타면 바로 직녀의 나루에 뜨리
平生此興元非淺 평생에 흥취가 원래 옅은 것이 아니거니
何用離騷學楚臣 무엇하러 이소 지어 초나라 신하를 배울건가
[주1] 오토(烏兎) : 진시황(秦始皇)이 동해(東海)에 놀러 와서 해 뜨는 곳을 보겠다고 돌을 채찍질하여 절로 가게 하여 다리를 놓았다 한다. 오(烏)는 해를 금오(金烏)라 하고 토(兎)는 달을 옥토(玉兎)라 한 것이다.
[주2] 이소(離騷) 지어 :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임금에게 바른 말을 아뢰다가 쫓겨남을 당하여, 상강(湘江) 가를 돌아다니면서 이소(離騷)라는 애절(哀切)한 글을 짓고는 물에 몸을 던졌다.
5) <귀양지에 택지가 방문하여(謫中訪擇之)> 홍언충(洪彦忠)
직경(直卿) 홍언충이 이때 배소(配所)에서 채소밭 일을 맡고 있었다(直卿 時定菜園之役). 바다와 접해 있는 거제시 장평(長平)들은 약 10만평이 넘는 넓은 곳이다. 택지 이행이 10리가 넘는 이곳까지 찾아왔다. -1506년 거제시 장평동에서-
我與擇之別 내가 택지(이행李荇)와 작별한 뒤
相逢動一月 서로 만나기가 걸핏하면 한 달
山溪不勞厲 시내에 옷 벗고 건널 필요도 없고
蟻垤非難越 개미 둑만한 언덕 넘기가 어렵지 않건만
實爲窮病欺 실은 곤궁과 병에 몰려서
自與人事絶 자연 인사를 못 차린 탓
數日秋氣佳 며칠째 가을 날씨가 하도 좋아
灑然醒羸骨 여윈 몸에 생기가 산뜻 나기로
勿懷空谷人 문득 빈 골 사람 그리워져서
采葛詠城闕 ‘칡 캐는 시’‘성궐 시’를 읊어 보았네
出門望東南 문을 나서 동남쪽을 바라다보니
已覺風巾韈 벌써 발걸음이 거뜬하기로
披楱尋小逕 가시덤불 헤치며 오솔길 찾아
十里忘飢渴 십 리를 오면서 기갈 잊었네
徑造扣荊門 막상 와 사립문을 두드렸더니
門前眠老卒 문전에 늙은 졸놈 졸고 있더군
喜君尙無恙 그대가 무양한 것 우선 반갑고
幸我亦偸活 나도 아직 살았으니 그것이 다행
論今多失色 시사를 논하니 실색할 일 많고
話舊頻蹙額 옛일 이야기에 자주 이마를 찡그리더니
俄頃隴西公 이윽고 농서공(隴西公 이씨李氏)이
鳴騶入林樾 말 방울 울리면서 숲으로 들고
況有雞林子 게다가 또 계림자(경주 김씨 김세필金世弼)가
疏髯更超逸 성긴 수염 펄렁이며 찾아왔구먼
相携穿翠密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돌아서
古洞得幽豁 그윽하고 넓은 골을 찾아냈것다
仰看佳木稠 쳐다보니 좋은 나무 촘촘히 섰고
俯聽流泉聒 굽어 들으니 흐르는 샘 떠들썩한데
因危累成砌 가파른 데 축대를 쌓아 올려서
經夏蒼苔滑 여름 지나 이끼가 미끄런지고
山禽毛羽怪 산새가 괴이한 털과 깃으로
過溪音淸切 시내를 지나는데 그 소리 맑구나
和之以長歌 긴 노래로 그 소릴 화답했더니
餘響振木末 남은 메아리가 나무 끝을 뒤흔들었네
可憐九死地 가련한 우리들, 사지에 온 몸
得歡聊放達 즐길 수 있는 대로 방달해보세
有形會有盡 유형한 건 마땅히 없어질지나
無形者難竭 무형한 것 중에 안 없어지리니
玆地有時廢 이 땅은 혹시 황폐할 때 있고
玆遊亦易失 이 놀이도 다시 얻기 어려울지나
所恃千載後 믿는 것은 천년이 지난 뒤라도
自有不可沒 없어지지 않는 것 자연 있는 법
何須鐫翠壁 하필 모모라고 이름을 적어
名字記某乙 푸른 벽 위에다가 새겨 들것가
[주1] 빈 골 사람 : 《시경》에, “흰 망아지가 저 빈 골에 있네.”란 귀절이 있는데, 처사(處士)를 가리킨 시(詩)이다.
[주2] 칡 캐는 시 : 《시경》에, “칡을 캐노라, 하룻동안 보지 못하니 몇 달이나 된 것 같도다.” 하였다.
[주3] 성궐(城闕)시 : 《시경》에, “경박한 자가 성궐(城闕)에 논다. 하룻동안 보지 못하니 몇 달이 된 것 같도다.” 하였다.
● 홍언충(洪彦忠)은 1504년 갑자사화 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송흠(宋欽), 이과(李顆) 등과 함께 상소하여 간언을 올렸다가 투옥되어 장을 맞고 진보현(眞寶縣)에 유배되었고, 다시 해도(海島 거제도)로 이배되었는데,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이후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였으므로 정희량(鄭希良), 이행(李荇), 박은(朴誾)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 뛰어난 문장가 네 사람)로 불렸다.
6) 직경(直卿) 홍언충이 고기를 보내 준 데 사례하다(謝直卿惠肉) / 이행(李荇)
海外歸來常淡食 바닷가 온 뒤로 늘 담박한 음식뿐,
秖今長鋏爲誰彈 지금에 장검 자루를 뉘라서 두들기랴
忽驚異味生盤案 쟁반에 오른 별미에 홀연 놀라노니
賴有斯人解急難 고맙게도 이 사람이 곤궁한 날 보살피누나.
[주] 장검자루 두들기랴(長鋏爲誰彈) : 전국 시대 맹상군(孟嘗君)의 식객인 풍환(馮驩)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칼을 두들기면서 노래하기를, “장검이여, 돌아갈거나. 밥상에 생선이 없구나.”, “장검이여, 돌아갈거나. 문을 나서매 수레가 없구나.”, “장검이여, 돌아갈거나. 편안히 지낼 집이 없구나.” 하였다.
7) 4일, 군미(君美), 공좌(公佐)와 함께 시냇가에서 술을 마시다 군미의 시에 차운하다(四日 同君美 公佐 飮溪上 次君美韻) / 이행(李荇) 고현천변에서....
故人未易常常見 벗님네 늘 만나 보기 쉽지가 않으니
豪氣唯知日日低 호기가 그저 날이 갈수록 낮아지누나.
綠酒嘉蔬拚一笑 푸른 술 좋은 나물로 환담을 나누고
淸流白石有新題 맑은 시내 흰 돌에 새로 시를 짓노라.
○ 중종은 연산주 때 내쫓긴 사람을 먼저 뽑아 썼으니 장순손(張順孫)ㆍ이장곤(李長坤) 같은 이는 모두 좋아라고 나갔다. 그러나 공은 끝내 나가지 않고 시 짓고 술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즐겁게 지내다가 불행히 일찍 죽었다. 연산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킨 사람은 오직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뿐이었다.
8) 밤에 앉아 생각에 잠겨[夜坐有懷] 택지(이행李荇)에게 보이다(示擇之). / 직경(直頃) 홍언충(洪彦忠) 1506년 거제시 장평동.
獨坐茅簷下 띠로 인 처마 아래 홀로 앉아
蒼茫夜氣存 창망한 밤기운을 맞을 때
蟲聲連遠巷 벌레우는 소리가 멀리 문밖 마을까지 이어지고
月影半荒園 달그림자는 황폐한 정원에 드리운다.
滴露光梔葉 이슬이 방울지어 떨어져 치자나무 잎에서 빛나고
孤螢翳菜根 외로운 반딧불은 채소뿌리에 숨는다.
三韓方丈外 삼한은 방장산 바깥에 있다는데
亦有客愁村 나그네 수심은 마을에 있다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