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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는 사는 동안에도 왜 이토록 힘들게만 살다가 끝내 죽어야 하는가? 왜 삶은 이렇게나 슬픈 것이란 말이더냐? 대체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이는 붓다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물음입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걸작인 이 <플루토>에서도 동일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너무나도 식상해진 까닭에, 이제는 별다른 감흥없는 한낱 심리학적 용어에 지나지 않게 된 이 마음의 문제에 대해, 이 작품은 인조인간의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조명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현실에 다시 접근하고자 하는 기획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현대에 만연한 일그러진 화의 문제, 즉 증오를 주요한 소재로 삼아,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특히 왜 이 증오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만화 속에서 묘사되는 증오의 기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우수한 인공지능을 가진 인조인간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로 정체성의 혼돈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혼돈을 해결하기 위해, 극단적인 감정의 편향성을 인조인간에게 제공함으로써 인조인간이 그 감정에 의탁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여기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는, 대표적으로 편향된 감정의 예가 증오로 묘사되고 있죠.
이는 다시 얘기하자면, 우리가 정체성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증오와 같은 극단적인 감정을 해결책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우리의 현실과 연결시켜보자면, 우리가 삶의 표현으로 증오를 채택하고 있을 때, 거기에는 정체성의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 또한 가능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나름대로의 정형화된 답입니다. 즉, 우리가 쉽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도록 특정한 형태로 규정된 자기 존재의 모습이죠.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정체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정체성의 문제는 곧 존재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분명 이 존재감의 문제는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정보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해 존재감을 확보할지에 대해 늘 헤매게 되니까요. 극단적인 선택으로서, 누군가는 아예 경직되어버리거나, 누군가는 완전히 분열되어버리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이미 이 거대한 정보의 바다는 개인의 뇌가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이 정보현실을 바탕으로 우리의 존재감을 획득하려고 하는 한, 우리는 늘 무기력해집니다. 타인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며,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게 느끼게 되는 위축감의 경험은 우리에게 일상적인 경험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위축되게 만드는 정보를 제공한 이들 또한, 이 정보현실 속에서 우리와 마찬가지의 위축감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도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정보들마다 스스로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호 모순을 야기하기도 하는 그 정보들을 우리는 감히 유려하게 취합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대체 어떤 정보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유의미한 삶을 구성해야 할지를 알 수 없어, 다만 혼란스러워하며 무기력해지기에도 벅찰 뿐입니다. 오늘날, 정보현실은 분명 개인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대한 정보현실 앞에 우리의 작은 개인성이 생리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상실의 위협입니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화가 납니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감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화를 주요한 정서로 채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난 자의 정체성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적어도 화난 자로서의 존재감만큼은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화가 현재의 화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간주되는 대상에게로 향할 때 증오가 됩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제공한 정보현실은 구체적인 대상으로 지정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증오는 불특정다수에게 투하하는 원자폭탄이 되거나, 누구를 향해야 할지도 모르는 소리없는 울음이 됩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결국 우리가 공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거대한 비명이죠.
아마도 이 비명을 형상화한다면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될 것입니다.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누가 좀 나를 알아줘─────."
오늘날, 정보의 바다 위에 부유하고 있는 어느 대륙을 가든, 어느 섬을 가든,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이 목소리입니다. 이 세상에 다양한 정보들을 보고 듣는 무수한 눈과 귀가 있다지만, 역설적으로 아무도 보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목소리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호소하는 이 목소리는 사실, 우리가 감히 맞설 수도 없는 거대한 상대에게, 어떻게든 힘겹게 저항하고자 하는 모든 레지스탕스들의 눈물겨운 투쟁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정보사회에 유효하게 소비될 수 있을만한 특별한 정보적 가치는 없을지라도, 부디 내가 이러한 것들을 느끼며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 달라고 하는 처절한 삶의 기록입니다.
이는 결국, 정보현실에 위협받고 있는 존재의 울분인 것이죠. 우리는 지금 자신의 존재감을 보장받기 위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하기 위해 증오하는 자의 정체성을 채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느낄만큼, 위협이 거센 까닭에요.
그러나 이처럼 우리가 존재감의 문제를 임의적으로 증오와 결합시켜, 증오하는 자의 정체성을 해법으로 삼은 결과는 당연하게도 비극입니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증오는 아무 것도 낳을 수 없기 때문이죠.
증오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존재를 부정하려는 방식입니다. 그건 결국 1-1=0의 제로섬 게임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는 결코 늘어나지 않습니다. 표현 그대로 증오로는 아무 것도 창조되지 못합니다. 증오가 계속되는 한 그저 무한한 0의 세상일 뿐이죠.
우리가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특정한 정체성을 채택한 전략이, 역설적으로 존재의 세계를 더욱 파괴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른 것이 비극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 비극입니다. 존재의 상실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 방식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존재의 상실을 야기하게 되는 이 비극을 우리는 정확하게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비극을 끝내기 위해, 우리는 증오를 삶의 표현으로 채택하기 이전에, 증오가 유발된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거대한 혼돈 속에서, 작고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자신을 이끌고 어떻게든 임의적인 목표와 의미를 설정해 그에 따라 열심히 살아내보았지만, 삶에 대한 보상은 고사하고, 그 삶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해해줄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이 현실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현실인가요?
이는 대단히 슬픈 현실입니다. 화나 증오가 아니라, 이 현실은 그저 슬픔으로 가득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현실이 슬픈 현실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슬픔에 다름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슬픔이 아무리 압도적일지라도, 우리는 슬퍼해야 합니다. 슬픔을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냄으로써 우리를 통해 슬픔이 먼저 온전하게 존재해야, 비로소 슬픔이 이해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자신도 살지 않은 삶을 이해해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자신이 슬프다는 것도 모르고 화내고 있는 이의 슬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를 통해 꽃피워낼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정말로 밟고 있는 사실뿐입니다. 그것이 슬픔이라면, 우리는 슬픔으로만 꽃피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슬픔으로도 반드시 꽃피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슬픔은 꽃을 피워냅니다. 슬픔을 거부하기 위해 증오의 정체성을 채택한 결과가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현실이었다면, 슬픔은 분명 우리가 연결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낳습니다. 다른 존재를 부정하는 증오의 방식과는 다르게, 슬픔은 오히려 그 자신을 이해해줄 다른 존재를 긍정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요청합니다.
아주 대표적으로 슬픔이 낳은 꽃은, 다음과 같이 묻는 자일 것입니다.
"아, 우리는 사는 동안에도 왜 이토록 힘들게만 살다가 끝내 죽어야 하는가? 왜 삶은 이렇게나 슬픈 것이란 말이더냐? 대체 우리는 왜 사는 것일까?"
붓다는 인간의 현실에서 슬픔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를 깊게 탐구했습니다. 그는 증오하기보다, 슬픔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붓다는 슬픔에 대한 최고의 이해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슬픔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슬픔은 증오로 바뀌어 해결되어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슬픔 자체가 이해될 때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슬픔 자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함께 슬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는 슬픔이 바로 우리의 슬픔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슬픔이 낳은 꽃은, 자신의 슬픔에만 갇혀 세상을 증오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슬픔을 이해하고 그 슬픔에 친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존재의 현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인 아톰이 이 슬픔의 이해자로 묘사됩니다.
아톰은 주변의 인물들이 부당하게 죽어간 기억들을 이식받아 이를 경험하면서 분노하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 일견 악역으로 등장하는 플루토라는 인조인간이 그러했듯이, 아톰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대상의 상실과 그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은 선뜻 화로 반응되기에 쉬운 것이었죠.
그러나 아톰은 붓다와 같은 정직한 탐구자였습니다. 그는 화난 자로서의 정체성을 채택함으로써 현재의 막연한 고통을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에게 펼쳐지고 있는 구체적인 슬픔 그 자체를 더욱 잘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아톰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슬픔이 바로 마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슬픔이라는 마음이 자신만의 전유물이 아닌, 바로 우리 모두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붓다가 슬픔을 정직한 슬픔으로 경험하면서 모든 생명의 슬픔을 보았듯이, 아톰 역시도 슬픔을 정직한 슬픔으로 경험하면서 모든 생명의 슬픔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우리 모두의 공유물인 까닭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에 공명함으로써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것이죠. 그 마음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만의 마음이라는 오해 속에 우리가 자리잡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이해받을 수도, 보살핌받을 수도 없게 됩니다.
지금 내가 슬프다는 사실은, 그 역시 슬프다는 사실과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아톰은, 비오는 아스팔트 위를 힘겹게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를 들어 촉촉한 수풀 위에 상냥하게 놓아준 것입니다. 달팽이를 바라보며 자신도, 달팽이도 똑같은 생명이며, 생명이 살아가는 길이 이렇게 눈물겨운 슬픔을 자아내는 길이라는 것을 이해한 까닭입니다.
이렇게 아톰이 슬픔이라는 마음을 정직하게 경험하고 그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아톰과 달팽이라는 두 존재가 함께 꽃피어났습니다. 슬픔을 경험하는 두 존재가 함께 온전함을 찾았고, 함께 구원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공유물로서의 마음이 발견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존재감은 상호적인 나눔을 통해 함께 확보됩니다.
우리가 존재감을 확보하고 싶어 특정한 정체성을 채택하는 현실을 살게 될 때, 역설적으로 우리의 존재감은 더욱 확보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공유되는 마음의 현실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존재감은 우리 자신과 상대의 것까지 배로 확보됩니다.
마음의 현실을 산다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이 존재로 가득차게 되는 현실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이해해줄 존재가 부정되지 않고 정당하게 출현하는 까닭에, 우리는 보다 잘 이해받고, 보다 잘 보살핌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받고, 보살핌받은 우리는 또한 우리의 충만한 존재감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게 되죠.
이처럼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마음의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 곧 우리의 존재감을 가장 잘 확보하게 해주는 길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이가 바로 붓다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인공 아톰입니다.
아톰은 인조인간인 까닭에,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다고 간주하는 마음현상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는 마음을 모르는 자로서, 마음을 처음으로 발견해가는 탐구자의 역할에 위치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아톰은 마음현상에 대한 그 어떤 선입견과, 선입견이 만드는 자동화된 반응을 따르지 않고, 정직한 태도로 마음에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을 미지(未知)로 놓은 그 정직함의 결과, 마음이 정말로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사실들이 아톰을 통해 드러납니다. 마음에 대한 사실들은 우리가 선입견을 갖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이죠. 슬퍼하는 누군가가 타인과 세계를 아무리 증오한다 하더라도 그 슬픔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듯이, 우리가 마음의 사실들을 정직하게 이해하지 않고 우리의 작은 선입견을 붙잡고 있는 한 마음의 문제는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선입견이라는 표현을 정체성으로 바꾼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정체성을 채택하고 있는 정체성의 현실을 살고 있는 한, 마음의 현실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더더욱 끝낼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요하게 채택하게 되는 화난 자, 분노하는 자, 증오하는 자와 같은 정체성은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켜주지 못합니다. 그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 보다 1차적인 현실, 즉 슬픔의 현실이 우리에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슬픔이라는 마음의 현실이 전면적으로 드러나서 밝혀져야 합니다.
아톰은 이 증오가 연쇄되는 세상 속에서, 증오하는 자의 진실된 이름이 바로 슬픔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역할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슬픔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 그 슬픔이 아톰을 통해 이해받았을 때, 슬픔의 역사는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마음은 존재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슬픔이라는 마음은 존재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슬픔이 부정될 때, 슬픔이라는 마음은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은 우리를 더욱더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끝내 고집을 버리고, 정말로 이것이 슬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요.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생생하게 인정받기 위해서요.
따라서 슬픔을 멈추는 가장 빠른 길은, 슬픔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아무리 화로 바꾸고, 증오로 바꾸어봤자, 슬픔은 멈춰지지 않습니다.
정말로 슬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가,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봐줄 때, 슬픔은 그 순간 멈춥니다. 슬픔은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이거든요. 슬픔이란 것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바로 그 마음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알고 있는 이가 슬픔의 이름을 불렀을 때, 슬픔에 대한 가장 최고의 이해자가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 이해자로 말미암아 슬픔의 삶은 완결됩니다.
아톰은 악역인 플루토의 앞에서, 그의 삶에 슬퍼하고, 자신의 삶에 슬퍼하며, 우리 모두의 삶에 슬퍼했습니다. 이로 인해, 플루토는 자신의 삶이 정말로 슬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증오의 화신이 아니라, 그저 슬픈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것이죠. 또한 플루토가 자신의 슬픔을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싶어서, 이 증오의 역사를 써내려왔다는 사실 역시도 이 자리에서 명료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아톰이라는 슬픔의 이해자를 통해, 자신의 슬픔이 온전하게 드러나 존재하게 됨으로써 플루토의 고통은 비로소 멎습니다. 그에게는 더는 증오해야 할 필요도, 슬픔이 너무 괴롭기 때문에 이를 부정해야 할 필요도, 슬픔을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을 연장해야 할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플루토의 슬픔이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톰으로부터 이해받았기에, 그 이해의 결과는 세계로부터 이해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 슬픔은 플루토도, 아톰도, 달팽이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 슬픔인걸요. 세상의 어느 누가 자신도 경험하고 있는 그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동시에, 이처럼 세계의 모두로부터 우리 자신의 슬픔을 이해받았다면, 우리가 이 이상으로 더 바랄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냉소, 심판, 증오, 우울, 불만, 짜증, 무기력, 오늘날 만연한 이 정서들은 전부 다 화의 다양한 변종들입니다. 이 화의 불길이 뒤덮은 시대의 한가운데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슬픔의 샘을 목도하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 시선의 주인은 이 모든 뜨거운 움직임을 만들어낸 슬픔을 정직하게 이해하려는 자입니다. 이 세계에 가득찬 슬픔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들음으로써, 모든 슬픔의 역사를 멈추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는 아마도, 새로운 시대의 붓다일 것입니다. 이 작품은 그 상냥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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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증오를, 슬픔을 이리 해석할 수 있었군요....카페지기님 글에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플루토 다시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