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한수(金漢洙) - 개척자의 고난과 영광
10. 개척자의 피 땀 눈물
1 1968년 6월 12일, 전국지역장 인사이동으로 충남지구로 발령이 났다. 이 소식을 들은 식구들은 남들이 초상난 줄 알 정도로 울음바다를 이루었고 못내 아쉬워 울부짖는 식구들과 헤어져야 할 지역장 자신도 가슴이 아팠다.
2 우리는 세 자녀 손을 잡고 개척자의 보람을 느끼며 정든 김해 땅을 떠났다. 이때 경찰서에서 자동차를 내주어 이삿짐을 쉽게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68년 6월 12일부터 동년 10월 14일까지는 부여지역에서 시무했고 그 이후부터 1969년 7월 1일까지 천안지역에서 시무하였다.
3 1969년 7월 1일부로 전국 지구 개편에 따라 이리 지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리에 도착해 보니 지구본부라기보다는 차라리 개척지만도 못하여 교회는 낡아 철거할 형편이었으며, 교회 대지 또한 주인이 따로 있어서 대지를 구입하든지 건물을 철거해 주든지 결정지으라고 주인의 독촉이 끊이질 않았다. 개척, 개척,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으나 주어진 책임인데 어찌하겠는가.
4 차라리 지구장이라기보다 개척자의 신념과 투지로써 이 어려움을 극복해 보리라고 다짐했다. 지구 내 지역장들과 의논하여 전 식구들의 헌금으로써 대지 131평을 구입하게 되었고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협조함으로써 교회를 다시 보수하게 되었다. 김현숙 집사는 금반지를 팔으셨고, 김봉림, 최성식, 김옥순씨 등 많은 식구들이 헌금을 한 것이다.
5 교회 환경이 깨끗이 정리되자 나의 목회 신조인 매일 강의하기 운동이 진행됐다. 가정 심방, 지역 순회, 수련 강의 등 바쁜 일과 속에 한 해가 저물었다. 그동안 시무하는 동안 교회장 5명을 양성하였고 3명의 축복가정, 기동 대원 4명, 통일 신학생 4명이 배출되었다.
6 부인 식구가 3명에서 12명으로, 학생은 5명에서 40명으로 늘어나 식구는 성화 졸업생 24명을 포함하여 70여 명이 되었다. 승공 강의 역시 3년간 150회 이상 하였고 이리 시내에서 257명을 중앙수련소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7 1972년 10월 10일, 다시 서울 종로교회로 발령을 받게 됐다. 3년 4개월 지구장 생활을 청산한다니 식구들은 인사 보류 신청까지 하는 등 나와 헤어지기를 아쉬워했다. 경찰서에서 또한 더 일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내었으나 협회 명령대로 정든 곳을 떠나야만 했다.
8 그동안 지방에서만 목회를 하다가 서울의 중심인 종로에서 목회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여간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개척이 몸에 밴 목회생활이었건만 목회자의 길은 하면 할수록 두렵고 어려운 길이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신념 아래 서울 장안에서 제일가는 성전으로 발전시켜 보자고 결의했다.
9 종로 3가 유림라사 4층에 자리 잡은 종로교회는 지하철 공사로 인한 소음공해 때문에 예배에 많은 지장이 있었다. 거기에다가 살림집을 따로 얻어 생활해야 할 형편이었다.
10 그러나 전임자들의 수고의 결실로 49명의 식구가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새식구들에게 강의, 노방전도, 특히 파고다공원에서의 전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종로교회는 이렇게 전도되는 식구 외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식구가 있어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식구가 120여 명으로 늘어나자 밖에서 예배를 보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11 이런 가운데서도 시련은 있어서 집주인의 독촉에 의해 집을 옮겨야 할 형편이 됐다. 50여 곳의 복덕방을 찾았으나 적당한 곳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할 때에 교회 건물 아래에 세 든 사람이 이사를 하여 그곳을 월세 8만 원에 들어가게 됐다. 당시로서는 힘든 부담이었다. 식구들의 헌금으로 쉽게 해결할 수가 있었다.
12 실로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 뜻 속에 사무쳐 일하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 힘은 없었으나 하나하나 착실하게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된 것이 이 목회의 길이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