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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재물 다툼의 복음적 대응법>의 줄거리:
유산을 놓고 벌이는 형제 간의 싸움. 재물과 재산으로 인한 분쟁과 다툼. 크든 작든 이익을 놓고 벌이는 갈등. 즉 돈 문제로 인한 다툼이 삶에서 완전히 제거된 채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으로 다채로운 모든 다툼의 상황에서 십자가 복음은 오직 한 가지의 실제로 유효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툼 앞에서 예수 시인하기입니다.
재물 다툼의 복음적 대응법
(누가복음 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재물 다툼의 복음적 대응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재물 다툼의 복음적 대응법’
우리가 복음을 믿는 사람으로서 재물 다툼에 대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에 대응법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사회의 배경을 이해하면 좋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정하고 있는 재산상속법은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의 2/3는 형이 갖고 동생은 1/3을 가지게 됩니다. 재산 상속이 불공정하게 이루어졌을 때는 랍비들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재산이 정당하게 분배되도록 재판을 해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도 예수님을 랍비의 한 사람으로 여겨 부당한 유산 분배 문제로 소송을 제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청은 유대사회의 랍비라면 당연히 수락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셨습니다. 정당한 재판을 걸쳐 자신의 몫을 찾으려는 태도를 탐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상황만을 보자면 자신의 몫을 찾고자 소송을 하려는 마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마음을 탐심이라 하시며 지적하실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정당한 재산 요구조차 탐심입니다. 이 사람은 당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모세의 율법이 정한 규정에 맞추어 자신의 몫을 요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종이자 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에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에 근거한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것을 탐심이라 하십니다. 탐심을 지적하심은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정당한 유산분배를 바라지 말라고 하시니 동생으로서는 황당하였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해 정당한 몫을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에 억울하여 랍비이신 예수님께 와서 소송을 제기하고 재판을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피해자를 감싸주시기는커녕 소송을 하려는 마음을 탐심이라 하시며 멈추라고 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합법적 대응조차 탐심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랍비에게 재판을 요구하여 법적인 절차를 밟고자 했습니다. 형에게 무력으로 손해를 입히거나 윽박질러서 자신의 몫을 받아내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부당한 유산분배에 대해 대처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합법적 대응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찾으려는 것조차 탐심이라고 못을 박으십니다. 합법적으로도 재산을 찾겠다며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엄격하고 빡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억울함도 탐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유 있는 억울함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또한 탐심의 표현이라 여기십니다. 동생의 입장에서는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형이 괘씸했을 것입니다. 동생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가족 모두가 큰아버지와 그 집안사람들을 모두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돈이 있어야 가족을 부양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고 아내에게도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받지 못한 돈이 아쉽고 아까웠으며 분통이 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유 있는 억울함과 분함까지도 탐심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결국 재산과 재물의 소유에 대해 의식과 마음이 집중되고 있다면 그것이 억울해도 합법적이어도 정당하여도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탐심이 중단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러한 마음이 즉각적으로 중단되지 않는다면 예수 따름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있는 한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재산을 되찾을지라도 예수님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설령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이유 있는 억울함과 분함을 등 돌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상태에 머무른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탐심의 문제는 어떤 대상에 대해 욕망을 갖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 따르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따르기를 포기한다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도 포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탐심을 구분하고 계신 것일까요? 이렇게 정당한 요구, 합법적 대응, 이유 있는 억울함까지도 탐심으로 치부하신다면 우리가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남이 훔쳐간 내 재산을 다시 훔쳐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율법에서 명시한 합법적 수단을 통해 이유 있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조차 탐심이라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엄격하고 빈틈없고 빡빡하게 느껴질 정도로 탐심을 지적하시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먼저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는지를 염두에 둘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별세를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별세란 엑소도스(ἔξοδος)로써 탈출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과 같이 출세상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하실 수 있는 말은 “나와 함께 세상을 탈출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이 사람은 부당한 유산상속의 문제를 시정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을 탈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이 탐심을 버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설령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이유 있을지라도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하지 못하도록 이 땅에 붙잡아둔다면 버려야 할 탐심입니다.
예를 들어 배가 닻을 내리면 육중한 갈고리 모양의 쇳덩어리가 바닥에 박혀있기에 배가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재산과 재물에 마음이 쏠린 사람은 세상에 닻을 내린 것과 같아서 세상에서 탈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탈출할 수 없게끔 하는 재물의 문제라면 아무리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이유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탐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탐심이라는 말 자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탐심이라 번역된 원문을 보면 플레오네크시아(πλεονεξία)입니다. 플레오네크시아는 “더 많음”을 뜻하는 플레온(πλείων)과 “소유하다”라는 뜻의 에크시아(εξία)의 합성어입니다. 즉, 더 많이 소유하려 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뜻은 자신의 합당한 몫을 찾으려 하는 본문의 상황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창조주이시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허락하신 유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유산에 대해서는 욕구하고 간청하는 것이 탐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본래 내 몫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주신 몫은 젖혀둔 채 다른 것들을 향해 마음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을 탐심이라 보시고 문제시하신 것입니다. 비록 유산의 분배방식을 모세의 율법이 정하고 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것으로 삼으라고 주신 진짜 몫은 세상에서의 유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몫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육체의 아버지가 남긴 재산에서 자신의 몫을 찾는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 몫으로 주신 것 외에 가지려고 하는 것이 탐심입니다. 이러한 탐심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전 말씀에서 무엇이 내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내 몸이 죽은 뒤에도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면 내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곡식을 추수해서 창고에 넘치게 쌓아두고는 함포고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 아버지가 부자의 영혼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어떤 재산도 소유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내 것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소유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율법이 정한 유산이더라도 마음을 줄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몸이 죽어서도 남는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내게 주시고자 하신 진짜 몫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바란다면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몫으로 주신 유산은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들어오실 수 있는 큰 주머니로써 마음을 만드셨습니다. 그 마음 주머니에 하나님을 똑같이 복사하신 것과 같은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심으로써 채우시고자 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 주머니 또한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가 우리의 몫으로 챙겨주신 유산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요구해도 탐심이 되지 않는 유일한 유산입니다.
인간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속성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느냐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남지 않을 것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마음은 타락하게 됩니다. 심지어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몸으로 만나는 가족들과 재물조차도 몸이 없으면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는 대상들입니다. 이러한 대상들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탐심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탐심이 생기면 영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이유 있는 억울함과 분노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재산을 찾고자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 중에 영생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생이란 곧 내 몫으로 정해놓으신 하나님 자신을 나의 마음 주머니에 채운 상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영생에 들어온 사람의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15절에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라 번역된 헬라어 조에(ζωή)는 인간의 육체의 목숨을 뜻하기도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에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영생으로 번역된 말 또한 본문과 동일한 조에(ζωή)입니다. 예수님께서 별세의 여정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의 생명 또한 영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영생을 위해서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주머니를 채우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재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 합법적이고 정당하고 이유 있는 자신의 몫을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동안 마음에는 하나님 대신 재산이 담기게 되고 탐심이 생겨나 영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재산문제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지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재산문제를 생각하면 소송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면 세상을 탈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똑같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되심의 한 꼭짓점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삼위일체에 참여하게 됩니다. 삼위일체에 참여하게 되면 형이 나의 재산을 빼앗아간 상황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형의 목숨까지도 쥐고 계시는 창조주로서 형의 행동을 다 알고 계십니다. 형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생각이 성령님과 예수님께 공유되듯이 성령님을 통하여 내게도 하나님의 생각이 공유되는 것입니다. 이제 나를 통해 형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형에게 하나님의 뜻이 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유 있는 분함과 억울함을 가지고 합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을 써서 내 몫을 찾아야만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인할 때에 설령 그 재산이 없을지라도 마음은 기쁘고 만족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재판관이 보고 있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에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형의 마음을 돌이키게 역사하실 수도 있으며 또는 어떤 계기나 방법을 통해 내 몫을 얻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것입니다. 돈을 안 받는 편이 유익하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형에게 양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그 돈이 나에게 주어지면 안 되는 돈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형에게 악역을 담당하게 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권자이자 창조주로 믿는다면 그 누구도 나의 재산을 하나님 모르게 훔쳐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재산을 훔쳐가려는 형을 그대로 두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이라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면 어떤 식으로든 재산은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꼭 유산 문제가 아니더라도 삶의 모든 문제가 그러합니다. 결코 우리는 돈을 쫓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돈 문제가 발생하면 무조건 예수님 시인하기가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돈 문제에 관여하고자 할 때 비록 그것이 아무리 정당한 요구이고 합법적이고 이유 있는 억울함일지라도 추구할 때에 탐심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탐심이 생길 때에 예수 따르기는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따르기는 세상을 탈출하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돈 문제에 묶였다는 것은 세상에 닻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수 따르기는 포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할 필요 없이 예수 따르기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가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아버지가 보고 계심을 믿기에 안심하고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실 것이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삶의 문제들에 대한 결말도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내게서 없어지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반드시 쓰임이 있다고 확정하신 재산과 재물에 대해서는 과장되게 말하여 미국의 CIA가 동원되어도 나에게 오게 됩니다. CIA가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돈 문제나 재산문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돈과 관련해서 다툼과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예수님 시인하기에 돌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부활의 자리에 가게 되고 내 몫으로 주어진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게 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돈 몇 푼 얻겠다고 이 놀라운 영생의 은혜를 포기한다면 어리석은 부자와 똑같은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의 마지막을 보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 부요함이란 구제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았다는 것은 재물을 많이 쌓음으로써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재물에 드리면서 하나님께는 마음을 조금도 드리지 않았고 채워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에 대해 취해야 될 태도는 명확합니다. 들어온 재물에 대해서 어리석은 부자처럼 만족해하든지, 들어오지 않은 재물에 대해서 본문의 사람처럼 억울함을 가지고 합법적으로 찾으려고 하든지, 재물을 갖기 위해 남의 것을 가지려 하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재물과 재산에 대해서는 마음이 닿고 묶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나와 무관해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재물과 재산에 대해 뜻과 주권을 발휘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나님 아버지로 마음을 채우는 일에 주력하면 됩니다. 그럴 때 성령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절대로 돈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쓸 만큼 아버지께서 주실 것입니다. 나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만큼 돈은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정당한 권리가 있더라도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내 손에 들어온 돈이라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떠올리며 그것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시인함으로써 재물과 재산을 마음 밖에 내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고 세상에서 탈출해야만 합니다. 이미 들어온 재산에 대해서도 성령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받아서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이미 있는 재산들도 아버지의 뜻대로 쓰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시인하기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세상을 탈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탈출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내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시인하기의 예를 재물과 재산의 문제를 통해 보여줍니다. 재산과 재물 문제는 예수 시인하기로 정복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도 세상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으나 예수를 시인함으로써 모든 경제 문제가 해결됨을 가르쳐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아가는 동안 돈과 관계될 때마다 예수 시인하기를 통하여 돈문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