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섬 제주
한국 관광 일번지로 손색없을 정도로 수시로 비행기가 이착륙한다.
비행기에 몸을 실어 제주에 내리면 삼사일정도 머물기에 안성맞춤 도시가 바로 제주이다.
제주 섬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관덕정을 살펴봐야 한다.
조선조 세종 때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군사훈련장으로 설치되었던 곳이다.
관덕정(觀德亭)의 의미를 되새겨보면 ‘덕을 관조하는 정자’ 이다.
이곳에서는 관주도 행사장이며 특히 활쏘기대회가 개최되던 장소였다.
옛날 선비들이 꼭 익혀야 할 덕목으로 육예(六藝)라 하여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를 꼽았다.
당시 활쏘기는 훌륭한 덕을 보기 위함이었다.
활을 쏜다는 것은 선비들의 기본덕목으로 갖추어야 할 자질인 것이다.
그런 광장이 한국 근대사에서 가슴 아픈 살육의 현장이 되고 말았던 거다.
5일장이 열리던 곳에서 천주교신자들을 학살한 곳으로, 제주 4․3항쟁 발생지로, 항쟁의 지도자들이 처형된 곳이 되었다.
19세기 제주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선교로 복음의 씨앗이 자라났다.
1901년 이재수 민란이 일어나던 때 제주 가톨릭 신자들은 2백 명을 넘었고 예비신자들도 6백 명이 넘었다.
당시 제주목사 이상규, 대정군수 채구석, 조정에서 파견된 세금징수관 강봉헌은 대표적인 탐관오리였다.
채구석은 도민 착취단체 ‘상무사’ 를 설립하여 운영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신자들을 채용하여 그 일을 맡겼다.
일본인 불법조업자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선교사 축출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관노비 출신 이재수가 유림대표 오대현, 강우백과 결탁
1901. 2. 9 도민 오신락 자살사건을 두고 천주교인들의 행위로 몰아붙이면서 민란을 일으켰다.
결정적 원인은 탐관오리들의 착취에 천주교인들이 협력했다는 것이 민란의 원인이 되었던 게다.
노비출신 이재수가 민란의 대장이 되어 제주성을 점령하고
천주교인들을 색출하여 관덕정 광장에서 3백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훗날 난이 평정되고 주동자들은 처형되고 막이 내렸다.
관덕정 앞 광장은 근대사에서 흘린 피를 먹고 긴 세월을 지켜왔던 거다.
제주민란의 장소, 행방정국에서 발생했던 무장봉기에 따른 4․3항쟁의 진원지로 남아 있다.
피로 물들었던 피의 광장은 오늘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모든 것을 뒤덮어버리듯이 검은색 현무암만이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제주의 바람을 받아 내고 있다.
광장 한 가운데 서서 두 손 모아 순교자들을 위해 묵상기도를 바쳤다.
당시는 그릇된 봉건적 사회구조가 민란의 원인을 제공하였으며 그 대가는 천주교인들의 희생이었다.
순교의 피를 먹고 제주에서 복음의 싹이 자라났던 거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관덕정 앞 양쪽 옆에는 두 개의 돌하루방이 서 있다.
왕방울 눈에 주먹코를 하고 꺼벙이 모자를 쓰고 가슴과 배에 손을 대고 수호신처럼 서 있다.
어쩌면 관덕정을 지켜내는 사천왕상처럼 말이다.
제주 도민들이 흘렸던 피의 현장을 지켜내는 수호신 같다.
이젠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 내려 관덕정은 제주 선교의 중심점으로 남아 있는 거다.
제주순례의 첫 번째가 관덕정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내고 있다.
<2018. 2. 18~21 제주성지순례 관덕정에서>
첫댓글 제주도 역사와 천주교 박해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여 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