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자본주의의 교리(1)
커지는
파이 그때 과학혁명과 진보라는 개념이 도래했다. 진보는 우리가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연구에 자원을 투자한다면 나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 아이디어는 곧 경제용여로 번역되었다. 진보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리적 발견, 기술적 발명, 조직의 발전이 인간의 생산, 무역, 부의 총량을 늘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인도양의 옛 교역로를 망치지 않으면서도 대서양의 새교역로가 번창할 수 있다. 기존 상품의 생산을 줄이지 않으면서도 신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가령 기존의 빵집을 망하지않게 하면서도 초코 케이크와 크루아상을 전문으로 하는 제과점을 새로 열수 있다. 모든 사람이 그저 새로운 취향을 개발하고 더 많이 먹으면 되니까. 당신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다. 당신을 굶어 죽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나는 살이 찔 수 있다. 지구상의 파이 전체가 더 커질 수 있다.
지난 5백 년간 진보라는 아이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점점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 신뢰는 신용을 창조했고, 신용은 현실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성장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더 많은 신용을 향한 길을 열었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경제는 풍선이라기보다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오르락내리락거림이 평탄해지면서 전반적인 방향은 오해의 여지가 없이 분명해졌다. 오늘날의 세상에는 신용이 넘쳐난다. 그 덕분에 정부,기업,개인은 현재 수입을 크게 넘어서는 큰돈을 장기 저리로 쉽게 빌린다. 지구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는 믿음은 결국 혁명이 되었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아마도 경제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문일 <<국부론>>을 썼다. 제1권 제8장에서 스미스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주장을 폈다. 지주나 직공이나 구두공이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내면 그는 남는 돈으로 조수를 더 많이 고용해 이윤을 더욱 늘리려 한다. 수익이 늘어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은 조수를 채용할 수 있다. 따라서 민간 기업인의 수익 증대는 공동체의 부와 번영을 늘리는 기초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에게는 이 내용이 그리 독창적이라고 비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미 모두 스미스의 주장을 당연히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에서 이 주제의 변주를 듣는다. 하지만 스미스이 주장- 개인적인 수익을 늘리려는 이기적 인간의 욕구는 공동체 부의 기반이다.- 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에 속한다. 경제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도덕적, 정치적 관점에서는 더더욱 혁명이다. 스미스는 사실상 탐욕이 선한 것이며, 내가 부자가 되면 나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기주의가 곧 이타주의라고.
스미스는 경제를 '윈-윈 상황'으로 생각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나의 이익이 곧 너의 이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둘다 더 큰 파이 조각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파이 조각이 커져야 네 조각도 커질 수 있다. 내가 가난하다면 너 역시 가난해질 것이다. 네가 생산하는 상품이나 용역을 내가 살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부자라면 너 역시 부자가 될 것이다. 네가 내게 뭔가를 팔 수 있으니까. 스미스는 부와 도덕 간의 전통적 대립을 부정했고, 부자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람들은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전체 파이의 크기를 늘림으로써 부자가 된다. 파이가 커지면 모두에게 이익이다. 따라서 부자는 사회에서 가장 쓸모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성장의 바퀴를 돌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전제가 있다. 부자가 자신의 수익을 비생산적인 활동에 낭비하지 않고 공장을 새로 세우고 사람들을 새로 고용하는데 쓴다는 전제다. 그래서 스미스는 "수익이 늘면 지주나 직공은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할 것이다"하는 말을 주문처럼 되풀이 할 뿐 " 수익이 늘면 스쿠르지는 돈을 상자에 숨겨둘 것이고 세어볼 때나 꺼낼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부분은 새로운 윤리의 등장이었는데, 이 윤리에 따르면 이윤은 생산에 재투자되어야 한다. 재투자는 더 많은 수익을 가져오고, 이것은 다시 생산을 위해 투자되어서 더 많은 이윤을 낳으며, 이 과정은 무한정 되풀이 된다. 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공장 확대, 과학연구의 시행, 신제품 개발,.......하지만 모든 투자는 어떻게 해서든 생산을 늘려야 하고 더 많은 이윤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교리에서 가장 신성한 제1계율은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를 위해 재투자되어야 한다"이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단순한 '부'와 구별한다. 자본이란 생산에 투자되는 돈과 개화와 자원을 말한다. 반면에 부는 땅에 묻혀 있거나 비생산적 활동에 낭비된다. 비생산적인 피라미드에 자원을 쏟아붓는 파라오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스페인의 보물선단에서 약탈한 금화를 상자에 담아 카리브해의 어느 섬에 묻어둔 해적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수입의 일부를 주식시장에 투자한 공장 노동자는 자본주의자다.
"생산에 따른 이윤은 생산 증대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생산이 어느 정도 일정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생산이 크게 늘지 않을 텐데 왜 이윤을 재투자하겠는가? 그래서 중세 귀족은 관대함과 과시적 소비라는 윤리를 신봉했다. 이들은 수입을 마상 시합, 연회, 궁궐, 전쟁,자선, 엄청나게 큰 성당에 썼다. 수익을 투자해 영지의 생산량을 늘리거나, 밀의 신품종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알아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근대에 이르러 귀족은 자본주의 신조를 믿는 새로운 엘리트에게 추월당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자 엘리트는 공작이나 후작부인이 아니라 회장, 주식 거래인, 기업경영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유랑자는 중세 귀족보다 훨씬 부유하지만 사치성 소비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덜하다. 수입에서 비생산적 활동에 쓰는 돈이 차지하는 비중도 훨씬 적다. 중세 귀족은 금실과 비단으로 짠 화려한 복장을 하고 연회와 축제와 멋진 마상 시합에 참석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반면에 현대의 CEO들은 까마귀 떼 정도의 스타일을 허락하는 수트라고 불리는 지루한 유니폼을 입고, 축제를 즐길 시간이 거의 없다. 전형적인 벤처 투자자는 회의에서 회의로 뛰어다니며 자본을 어디에 투자해야 좋을지 고민하고, 자신이 보유한 유가증권의 등락을 계속 추적한다. 그는 베르사체 양복을 입고 전용 제트기를 타고 다니겠지만, 이 모든 지출은 그가 생산을 늘리기 위해 투자하는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베르사체를 뺴입은 사업계의 거물만 생산성을 늘리려고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과 정부기관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평범한 이웃간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벌어지는 대화가 저축을 어디에 투자하면 좋은가, 주식인가 채권인가 부동산인가 하는 긴 논쟁으로 조만간 귀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정부 역시 미래의 수입을 늘려줄 생산적인 사업에 조세수입을 투자하려고 애를 쓴다. 가령 새로운 항구를 지으면 공장에서 생산한 생산품을 수출하기 쉬워질 것이고, 공장의 수입이 늘어나면 세금을 더 매길 수 있으며, 따라서 정부의 미래 수입이 늘어날 것이다. 교육투자를 선호하는 정부도 있을 수 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윤이 많은 하이테크 산업의 기반이 된다는 견지에서다. 이런 산업은 세금을 많이 내면서도 비싼 항만시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경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론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이론은 기술記述적인 동시에 규범적이었다. 그 이론은 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했고, 수익을 생산에 재투자하면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아이디어를 선전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점차 경제적 교리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에는 하나의 윤리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아이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 심지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까지 일러주는 가르침들이다. 그중 가장 핵심 신조는 경제성장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 최소한 그 대용품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와 자유, 심지어 행복까지도 경제성장에좌우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자에게 짐바브웨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 정의와 정치적 자유를 도입할 방법을 물어보라. 경제적 풍요와 번영하는 중산층이 안정적 민주제도에 얼마나 핵심적인지에 대한 강의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프가니스탄 부족민들에게 자유 기업과 검약과 자립의 가치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듣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종교는 현대 과학의 발달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과학 연구자금은 정부나 민간기업에서 조달하는 것이 보통인데,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이 특정 과학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질문은 보통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생산량과 수익을 늘려줄 것인가? 경제성장을 만들어낼 것인가?"이다. 이 장애물을 못넘는 프로젝트는 후원자를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근대 과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관련시키지않을 길은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역사는 과학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다. 영원히 계속되는 경제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자의 믿음은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지식에 위배된다. 양의 공급이 무한정 확대될 수 있다고 믿는 늑대 사회가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멍청이들의 사회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의 경제는 근현대 기간 내내 어찌해서든지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왔는데, 이것은 오로지 과학자들이 몇 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발견이나 장치를 들고 나온 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 대륙, 내연기관, 유전자 복제 양 같은 것을, 은행과 정부는 돈을 찍어내지만 궁극적으로 그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과학자들이다.
지난 몇 년간 은행과 정부는 미친 듯이 돈을 찍어냈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경제성장을 멈추게 할지 모른다고 모든 사람이 겁에 질려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난데없이 조 단위의 유로와 엔을 만들어서 값싼 신용을 시스템에 펌프질해 넣고 있다. 그러면서 경제의 거품이 터지기 전에 과학자, 기술자,공학자가 어찌해서든 뭔가 정말 큰 건수를 올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실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생명공학 기술이나 나노기술 같은 분야에서 이룩한 새로운 발견은 온전히 새로운 산업 영역을 창조해낼 수 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수익은 은행과 정부가 2008년부터 만들어 낸 조 단위의 환상의 돈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거품이 터지기 전에 연구실들이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는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