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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루카복음 23:50~24:53은 예수님의 ‘장사와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1) “장사(葬事)”라는 한자(漢字)에서 “장(葬)”은 “장사지낼 장(葬)”입니다. “죽은 사람을 무덤에 놓는 일”을 “장사(葬事)”라고 합니다(룩 23:53).
루카복음에 몇몇 이름이 예수님의 장사 사건의 증인들로 기록되는데, “요셉”이 그들 중의 하나입니다.
루카복음 23:50~56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셨다’라는 것입니다.2)
1. 예수님께서 아무도 장사되지 않은 무덤에 놓였습니다.
루카복음 23장 50~54절에 “의회원인 이름에 ‘요셉’인 사람이 있으며. 이 사람은 아리마대에서부터며 그가 그 하나님의 그 왕국을 기다린지라. 이가 그 빌라도에게 접근하였으며 그가 그 예수님의 몸을 요구하였으며. 그가 그를 아직 아무도 놓이지 않은 바의 바위에 깎아낸 무덤 안에 놓고. 준비의 날이고 안식일이 날이 새었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왕국을 기다리고 있던 자로 묘사됩니다(룩 23:51).3)
요셉은 그 빌라도 총독에 접근하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고, 빌라도는 예수님의 시체를 요셉에게 주도록 허락하였습니다(룩 23:52).
요셉은 예수님을 깎아낸 무덤 안에 놓았습니다(룩 23:53).4)
요셉은 예수님을 아직 아무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에다 놓았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죽으면 묻히려고 만든 새 무덤에다 예수님을 놓았습니다.
이날은 준비의 날이고, 안식일(安息日)이 날이 새었습니다(룩 23:54). 안식일이 거의 되었고(개역)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습니다(새 번역).
“안식일(安息日)”이라는 한자에서 “식(息)”은 “숨 쉴 식(息)” 자입니다. “편안하게 숨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2. 여자들이 무덤에 예수님의 몸이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루카복음 23장 55~56절에 “갈릴리에서 함께 온 여자들이 뒤따랐고, 그 무덤과 그의 몸이 놓음을 받은 것과 같이(how) 바라보았으나. 돌아간 그녀들이 향기들과 향유들을 준비하고 그 안식일을 쉰지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55~56절은 ‘여자들이 예수님의 장사된 것을 목격’하는 내용입니다.5)
갈릴리에서 그에게 함께 온 그 여자들이 뒤따랐으며 그 무덤과 어떻게(how) 그의 몸이 놓인 것을 바라보았습니다(룩 23:55). 여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어디에 어떻게 장사되는 것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녀들이 돌아가서 향기들과 향유들을 준비하였고 안식일을 쉬었는데 “안식일”은 “편안하게 숨 쉬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룩 23:56).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6)
초기 크리스트교 공동체가 유대 율법에 충실한 사실이 언급됩니다.7) 이 여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안식일 계명을 신실하게 지킨 것입니다.
그녀들은 예수님께 존경심을 더할 나위 없이 표현한 사람들입니다.8)
루카복음 24장 1절에 “그러나 그 안식일들의 그 하나에, 깊은 새벽에, 무덤 근처에 그녀들이 준비한 바의 향기들을 가져온 그녀들이 왔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루카복음 24장은 ‘예수님의 부활 및 승천’에 대한 내용입니다.9)
부활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가장 기본적 요소는 ‘빈 무덤’입니다.10)
“안식일(Sabbath)”(삽바톤)은 한 주의 일곱 번째 날입니다. 본문에서 영어 번역본들은 “주”(week)라고 번역하였습니다.
24장 1~12절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로 밝혀졌다는 이야기입니다.11)
“깊은 새벽”은 “이른 새벽”이나 “이른 아침”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햇빛이 처음 비치는 시간을 뜻합니다.12)
일요일 아침이 되자 여자들이 일찍 무덤을 찾아갔습니다(마 28:1). “안식일의 첫 번째”라는 말은 이 부활의 날을 일요일로 명시합니다. 루카복음에는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도착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여자들은 무서울 정도로 어두운 깊은 새벽에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13)
그녀들이 무덤에서부터 굴림을 받은 돌을 발견하였습니다(룩 24:2).
그녀들은 “누가 그 돌을 그 무덤에서부터 굴릴 것인가?”라고 하였는데 그녀들은 그 무덤에서부터 굴림을 받은 그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죽음 그 자체가 어떤 힘으로도 옮길 수 없는 돌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옮길 수 없는 돌이 굴려진 것이 발견되었습니다.14)
“굴림을 받은”은 하나님에 의해 돌이 굴려져 옮겨진 것을 뜻합니다.15) 굴려진 돌은 무엇입니까?
① 굴려진 돌은 무덤의 문이었습니다.16)
② 굴려진 돌은 우리의 우승배(trophy)입니다.17)
③ 굴려진 돌은 우리의 신앙의 초석입니다.18)
④ 굴려진 돌은 우리의 부활의 소리입니다.19)
⑤ 굴려진 돌은 생명과 사망의 경계입니다.20)
⑥ 굴려진 돌은 다가올 파괴의 상징입니다.21)
그녀들이 들어간 때 주 예수의 몸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룩 24:3).
여자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22)
그리고 그것이 이것에 관하여 그녀들이 어쩔 줄 모르는 때에 되었으며 보라 빛나는 의복 안에 두 남자가 그녀들에게 곁에 섰습니다(룩 24:4).
그러나 그녀들이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얼굴들을 그 땅 안으로 숙였고 그들이 말하였기를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들과 함께 찾느냐?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아니하나 일으킴을 받으셨노라, 그가 갈릴리에서 계시던 그때 너희에게 이야기하신 것과 같이 기억하라. ‘인자가 십자가에 달리고 셋째 날에 일어나리라’라고 말씀하셨노라”라고 하였습니다(룩 24:5~7).
두 남자로 나타난 두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들과 함께 찾느냐?”라고 묻습니다(룩 24:5).
여자들은 생명에 속한 것을 죽음에 속한 곳에서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찾으라”라는 말씀을 붙들고서 헛된 것들을 찾습니다(룩 11:9). 찾으면 발견한다고 말씀하셨지만 헛된 곳에서 찾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과 함께 찾기를 기대하여서는 안 되는데 많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교회당에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존 록펠러의 형식주의적 십일조에서는 참 생명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참 크리스트교는 형식이 아니라 영(spirit)입니다.
성령(Spirit)으로 영(spirit)이 거듭난 자만이 생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죽은 형식에서 생명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좋은 돌과 봉헌물로 꾸민 건물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고 건물에 정신을 쏟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예수님이 거주하실 아름다운 성전으로 잘 가꾸어야 합니다.
보이는 건물을 만든 것을 업적으로 생각하고 자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든 것을 헛된 “우상”이라고 하십니다. 보이는 형상을 만드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0:4).
건물 만드는 것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헛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정신 팔릴 때 영(spirit)의 문제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우리에게 참된 예배를 할 수 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산 안에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 아니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 것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21).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아버지께 영(spirit)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지금 왔는데 아버지께 영(spirit)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바른 예배입니다(요 4:23).
“영(spirit)으로” 예배하는 것은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을 뜻합니다.23) 사람의 영(spirit) 안에 성령(Spirit)께서 예배할 수 있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건물이 아니라, 영(spirit)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영(spirit)으로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24) 나이를 먹을수록 사나워지지 아니하고 낮은 영(spirit)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 것은, 그런 기도에 응답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25)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들과 함께 찾을 때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기도에 죽은 것들을 찾는다면 응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안에 있지 않고, 일으킴을 받으셨습니다(룩 24:6). 무덤처럼 죽은 심령은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시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죽은 세상 정신, 바벨론 제국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예수님이 거처할 여지(餘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 사람의 마음 문 근처에 서서 두드리시는 것이지 이미 그 사람에게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계 3:20).
우리의 마음이 죽은 이 세상의 정신을 품은 무덤과 같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age)에 같은 모양이 되지 않도록 하나, 그 정신(mind)에 새롭게 함에 의해 변형시킴을 받아야 합니다(롬 12:2).
바벨론 정신, 세상의 정신은 높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 일에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하늘까지 닿는 건물을 지어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포장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찬란하게 지은 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덤 안에 머물러 계실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떠나신 곳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떠나게 되고 건물만 남고, 이런 휘황찬란한 건물들은 팔려서 술 마시고 춤추는 술집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휘황찬란한 건물을 짓는 일에 열을 올리지 아니하고, 아직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을 예수님이 거할 성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이 세상 바벨론 정신에 물들어서 돌이키지 못하게 되기 전에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하나님의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거주하는 무덤에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무덤에 거하며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무덤으로 온 여자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을 향하여 달려갔고 그 나머지의 남아 있던 여자들에게는 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룩 24:4). 그리고 두 천사가 그녀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룩 24:5~7).
마리아는 죽은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좋은 일로 생각하였습니다.26)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욱더 좋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몸에 향유를 못 바름을 슬퍼할 이유가 없으니 조만간에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27)
첫째 날은 금요일이고 둘째 날은 토요일이고 셋째 날은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한 주의 첫째 날인 일요일은 빛의 날이요, 예수님의 부활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천국의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교는 토요일에 안식하나, 우리는 일요일에 안식합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데 만 삼 일이 지난 것이 아니고 죽은 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을 뜻합니다. 만으로는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새벽까지, 2일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향기들과 향유들은 필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자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된 때에 그의 몸은 썩어서 나쁜 냄새가 났지만, 예수님의 몸은 썩지 않고 부활하여서 나쁜 냄새가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릴 신자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을 감싼 아마포 천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신자들의 몸도 수의(壽衣)를 남겨 놓고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수의는 이제 필요 없으니, 우리는 빛의 흰옷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잠옷을 벗고 우리에게 마련된 생명의 예복을 입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보다 아름다운 옷을 입습니다(마 6:29).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들꽃보다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의 몸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때 우리가 입을 옷이 준비되었으며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49).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류는 모두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창세기 2장 17절에 “죽는다(die)”라는 동사(무트)가 처음 나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에 “너는 정원의 모든 나무로부터 먹을 것이고. 너는 좋고 나쁜 지식의 나무로부터 그것으로부터 절대로 먹지 말 것이니 이는 그것으로부터 너의 먹기의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임이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영(spirit)이 그 뱀을 이용해서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28)
창세기 3장 4~5절에 “너희가 확실히(surely) 죽지 않을 것이니. 너희 눈이 열리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됨을 하나님이 아심이라”라고 그 뱀으로 나타난 악마가 그 여자에게 거짓말하였습니다.
악마의 거짓말을 무조건 믿지 말고 논리적으로 생각하여야 합니다.29) 인류는 악마의 거짓말에 유혹되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너는 흙에 돌아가기까지 코의 땀에 빵을 먹겠으니 이는 그것으로부터 너는 취함을 받았음이니, 이는 너는 먼지임이고 먼지에 너는 되돌아갈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인류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창 3:19).30) 하지만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나의 시체가 일어날 것입니다(사 26:19).
하나님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우리의 시체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 없는 이처럼 슬퍼하지 않아야 합니다(살전 4:13).
그녀들이 그 무덤에서부터 돌아온 때에, 그녀들이 이 모든 것을 열하나와 다른 자들에 보고하였습니다(룩 24:9).
루카복음 24장 9~11절은 ‘여인들의 보고’입니다.31) 여자들은 중대한 일에 있어서 결국 사도들의 처사를 구하였습니다.32)
제자들은 빈 무덤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들었습니다.33) 여자들을 무섭게 만든 것은 천사들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 모습입니다. 여자들은 일어난 모든 일을 열하나와 다른 자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34)
그녀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마리아였으며 그녀들과 함께 다른 여자들이 그 사도들을 향해 이것들을 말하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에 대한 복음서들의 모든 이야기에 나옵니다.35)
이 말들이 그들의 견해에 허튼소리인 것처럼 보였으며, 그녀들에게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습니다(룩 24:11).
그때 일어난 베드로는 그 무덤에 달렸으며 몸을 꾸부린 그가 다만 그 아마포 천(cloth)들만을 바라보았으며 그가 행해진 것을 기이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것을 향하여 떠나갔습니다.
3. 그날 그들 중 두 사람이 엠마우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루카복음 24장 13절에 “그들에서 둘이 바로 그날에 한 마을로 가는데, 예루살렘부터 60 스타디움을 떨어져 있는 ‘엠마우스’라”라고 하였습니다.
루카는 그들이 가고 있는 마을 이름이 “엠마우스”라고 밝히고 있는데, “엠마우스”는 “온천”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루카는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부활절 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36)
13~16절은 엠마우스로 가던 제자들이 한 사람을 만난 내용입니다.37)
17~27절은 그들이 최근 일어난 일에 관하여 대화하는 내용입니다.38)
28~32절은 이 사람이 자신이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신 내용입니다.39)
33~35절은 이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는 내용입니다.40)
그들의 둘이 바로 그날 하나의 마을 안으로 가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부터 60 스타디움을 떨어져 있으며 이름이 ‘엠마우스’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 “25리”라는 번역은 정확히 번역되지 않은 것입니다. 직역하면 “60 스타디움”이며 1 스타디움이 200m이니 12km 정도입니다. “25리”는 10km밖에 안 되니 공동번역처럼 “30리”로 번역하여야 합니다. “30리”로 번역할지라도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거리 개념이므로 “12km”로 번역하거나 “60 스타디움”으로 직역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이 일어난 모든 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룩 24:14).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이야기하다”라는 말은 “talk”입니다. “talk”와 “speak”은 다른데, “talk”는 비공식적 이야기에 쓰는 말입니다.
그때 접근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습니다(룩 24:15).
그리고 그들의 눈이 그를 인식하지 못하게 붙잡혔습니다(룩 24:16).
두 사람은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예배자라고 추측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그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41)
루카는 두 여행자가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밝힙니다. 그들의 눈이 붙잡혔기에 그들은 눈은 그를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그들이 모르게 감추신 것입니다.42)
“그들의 눈”이라는 말은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연관을 보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야 하실 것들이 있었습니다. 루카는 영적인 깊은 의미들이 감추어진 것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44)
엠마우스는 예루살렘에서 걸어서 2~3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과 2~3시간을 걸으면서도 그를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그 둘에게 “서로 교환하는 이 말들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름이 “클레오파스”인 사람이 그에 말하기를, “당신은 예루살렘을 거주하고 이날에 생겨난 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룩 24:18).
“클레오파스”가 언급된 이유는 잘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라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며 그는 예수님께 그 사건에 대해서도 듣지 못하였냐는 식으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을 당하신 일은 예루살렘 안에 호외 거리였던 것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셨기를 “어떤 종류의 것들을”이라고 질문하셨고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룩 24:19).
루카복음 24장 19~24절에 “그는 일과 말에 할 수 있는 예언자였으나. 대제사장들과 통치자들이 죽음의 심판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그가 그 이스라엘을 곧 속량하려고 하는 자인 것을 우리가 기대하였으나 심지어 모든 이것과 함께 이것들이 생긴 바에서 그 세 번째 날을 이끄나. 이른 아침 그 무덤 위에 가게 된 어떤 여자들도 우리를 두렵게 하였으니. 그의 몸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가 사셨다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으며. 어떤 사람들이 무덤에 갔고 여자들이 말한 것에 따라서 이것을 보았으나 그들이 그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클레오파스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짐으로 발견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예수님께 전하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최근의 사건은 알았으나 그것의 의미는 알지 못하였습니다.45) 그들은 ‘빈 무덤’에 대한 뉴스는 알았으나 부활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셨기를, “오 미련하고 믿기의 마음에 느린 자들아! 크리스트가 이것들을 겪고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룩 24:25~26).
예수님의 대답은 만국 공통어인 “오”라는 감탄사(O)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미련한 자들과 마음에 느린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예언자들이 이야기한 모든 것들에 대해 믿기에 마음에 느린 자들입니다.
그가 이 일들을 겪으시고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시기가 필요하였는데, 그들은 이 사실을 믿기에 마음에 더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믿는 일에 걸리는 시간이 길고 걸리는 시간이 오래였습니다. 제자들은 믿는 데에 시간이 길게 걸렸고, 믿는 일에 속도가 더뎠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기에 마음이 빠르지 못하였는데, 진리를 마음에 더디 믿지 아니하고 빨리 믿는 사람들이어야만 복됩니다.
제자들은 믿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지만 믿기에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믿는 일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의 하나는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지 않았고 믿는 것에 느렸습니다.46)
우리 중에 쓸데없이 걱정하는 ‘걱정의 달인’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47) 걱정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는 않으니 걱정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루카복음 24장 27절에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신 그가 모든 성경 가운데 자기 자신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해석하신지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모세”라는 말은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을 뜻하는 말씀이며 “모든 예언자”라는 표현은 예언자들이 기록한 “예언서들”을 가리킵니다. “모든 성경”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39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들 안에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을 해석하셨습니다.48)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것에서 강해 설교의 기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풀어서 밝게 가르치는 것이 바로 “강해(講解) 설교(說敎)”입니다. 강해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설명하고 해석하여 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 안에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을 해석하셨습니다. 창세기로부터 모든 구약성경 안에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수 크리스트께 관하여 해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루카복음 24장 28절에 “그들이 간 그 마을 안으로 그들이 가까이 왔고 그가 마치 더 멀리 가기처럼 행동하셨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재촉하여서 말하였기를 “우리와 함께 머무르소서 그것이 저녁때를 향해 있고 이미 그날이 숙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고 그가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기에 들어가셨습니다(룩 24:29).
그때 그것이 그가 그들과 함께 비스듬히 기대어 누우신 때에 되었으며 그 빵을 취하신 그가 축복하셨고 자르신 그가 그들에게 건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눈이 엶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이 그를 인식하였으며 그가 그들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되셨습니다(룩 24:31).
그들이 서로에 대답하기를 “그가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들을 여시니까 우리의 마음이 안에 불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룩 24:32).
시편에서 마음이 불탔다는 것은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시편 73편 21절에 시인은 “내 마음이 몹시 슬퍼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3편 22절에 그는 “나는 무감각하다(senseless)”라고 하였는데, 마음이 불탔다는 것은 마음이 무감각하였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한 그의 상태를 “불탔다”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불탔다”라고 하였습니다.49)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관점과 달라서, 그들의 마음 안에 불타는 갈등이 있었습니다.50)
루카복음 24장 33절에 “그리고 일어난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열하나와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을 발견하였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께서 일어나셨으며 시몬에 나타냄을 받으셨다”라고 말하였습니다(룩 24:34).
그리고 길의 것과 그 빵의 그 쪼갬 안에(in the breaking) 그가 그들에게 앎을 받으셨던 것처럼 그들이 설명하였습니다(룩 24:35).
1) James R. Edwards, 『PNTC 누가복음』, PNTC 주석, 강대훈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9), 912.
2) John Nolland, 『누가복음 18:35-24:53』, WBC 성경주석 35하, 김경진 옮김 (서울: 솔로몬, 2005), 524.
3) Darrell L. Bock, 『BECNT 누가복음 2』, BECNT 성경주석, 신지철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1335.
4) Bock, 『BECNT 누가복음 2』, 1337.
5) Edwards, 『PNTC 누가복음』, 918.
6) Bock, 『BECNT 누가복음 2』, 1340.
7) Nolland, 『누가복음 18:35-24:53』, WBC 성경주석, 532.
8) Bock, 『BECNT 누가복음 2』, 1341.
9) Bock, 『BECNT 누가복음 2』, 1343.
10) Bock, 『BECNT 누가복음 2』, 1345.
11) Bock, 『BECNT 누가복음 2』, 1347.
12) Nolland, 『누가복음 18:35-24:53』, WBC 성경주석, 568.
13) Edwards, 『PNTC 누가복음』, 920-922.
14) C. H.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이중재 옮김 (서울: CLC, 2017), 7172.
15) Edwards, 『PNTC 누가복음』, 923.
16)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73.
17)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75.
18)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77.
19)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79.
20)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81.
21)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82.
22) Edwards, 『PNTC 누가복음』, 923.
23) Gary M. Burge, 『요한복음』, NIV 적용주석, 김병국 옮김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10), 190.
24) James Boice, 『요한복음 강해 Ⅰ』, 서문강 옮김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465.
25)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163.
26)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164.
27) Spurgeon, 『부활절 메시지』, 165.
28) 박종칠, 『바이블 제네시스』 (서울: 아르카, 2021), 108.
29) D. Martyn Lloyd-Jones, 『창세기에 나타난 복음』, 정상윤 역 (서울: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2010), 49.
30) 구자용, “죽음-그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실존: 구약 성서적 창조와 지혜 전승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고찰”, 『구약논단』 제19권 3호 (2013): 356.
31) Bock, 『BECNT 누가복음 2』, 1350.
32) 박윤선, 『공관복음』, 성경주석 (서울: 영음사, 1983), 824.
33) Bock, 『BECNT 누가복음 2』, 1367.
34) Nolland, 『누가복음 18:35-24:53』, WBC 성경주석, 572.
35) Bock, 『BECNT 누가복음 2』, 1368.
36) Nolland, 『누가복음 18:35-24:53』, WBC 성경주석, 585.
37) Bock, 『BECNT 누가복음 2』, 1378.
38) Bock, 『BECNT 누가복음 2』, 1378.
39) Bock, 『BECNT 누가복음 2』, 1378.
40) Bock, 『BECNT 누가복음 2』, 1378.
41) Bock, 『BECNT 누가복음 2』, 1387.
42) Bock, 『BECNT 누가복음 2』, 1388.
43) Joel B. Green, 『NICNT 누가복음』, NICNT 성경주석, 강대훈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0), 1056.
44) Bock, 『BECNT 누가복음 2』, 1388.
45) Green, 『NICNT 누가복음』, 1059.
46) Green, 『NICNT 누가복음』, 1060.
47) Charles H. Spurgeon, 『네 믿음을 보이라』, 배응준 역 (서울: 규장, 2008), 25.
48) Bock, 『BECNT 누가복음 2』, 1398.
49) 이영욱, “누가복음 24:32에 나타난 καρδια-καιω의 의미 재고”, 『신약연구』 제16권 제1호 (2017): 90.
50) 이영욱, “누가복음 24:32에 나타난 καρδια-καιω의 의미 재고”, 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