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찜찜한 이야기
내가 오래 전부터 구독 중인 일본의 종합월간지 《붕게이순주(文藝春秋)의 올해 3월호의 표지는 일본 3경의 하나인 '마쓰시마(松島)' 의 그림이다. 담당화가는 해설의 말미에 '아름다운 경치는 아름답다. 그 외는 어떤 수식어도 불필요할 듯싶다'고 적고 있다.
일본의 5.7.5의 짧은 시 하이쿠(俳句)의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마쓰오 바쇼는 오랜 옛날 이곳에서 '마쓰시마야 아아 마쓰시마야 마쓰시마야' 라는 하이쿠를 지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읊었다면 아마 시답잖은 글이라고 여겨져서 그대로 묻혀버렸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쇼의 이 하이쿠는 불후의 명작이라고 하여 오늘날까지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이 빼어난 경관에 대한 감상을 나타내는 데는 이 이상 더 즉묘(卽妙)한 글이 없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다.
나는 월간지의 표지화를 보면서 지난해 가을 이곳의 여행길에 올랐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학창시절에 가끔 들어온 일본 3경중에서 다른 두 곳은 전에 둘러본 터였다. 그리하여 지난번은 3경의 마지막인 ‘마쓰시마'를 주목적지로 삼았다.
일행 40명의 과반수는 70이 넘은 고령자들이어서 '마쓰시마’의 명성은 다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이번 여행은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내용이 알찼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마쓰시마'의 절경과 더불어 다음 일정에서 만난 옛날의 한 지방의 통치자에 대한 강한 인상 때문이었다.
하여간 마쓰시마'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빼어난 경관에 놀랐다. 지금까지는 나는 명성에 끌렸다고는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바다 위에 솟은 몇 개의 소나무섬을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3경이니 8경이니 하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보통학교 6학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우편엽서를 한 묶음 들고 교실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조선 8경을 선정하는 인기투표라며 우리에게 엽서를 몇 장씩 나눠주고 주소, 성명의 뒷면에 '부여' 라고 적어내게 했다. 뒤에 선생님은 부여가 가까스로 마지막 조선 8경에 턱걸이했다고 매우 아쉽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충남의 약한 도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푸념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실경보다는 엽서의 장수가 경관의 서열을 좌우한 셈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마쓰시마' 도 그런 선입관이 작용해서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실지로는 몇 개의 섬이 아니라 26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잔잔한 바다 위에 점재(點在)해 있는데 한결같이 바위섬에 소나무가 울창하다. 이 사이를 유람선을 타고 누비면서 바라보는 그 절경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바쇼 같은 시성이 ‘마쓰시마’야 만 외치고 한 화백이 '어떤 수식어도 불필요하다'고 말한 연유도 공감이 갈 듯 싶었다.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어서 별것 아닐 거라고 여겼던 나의 생각이 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강한 인상의 통치자는 요네사와(米澤)의 어느 공원에 세워진 동상의 주인공이다.그의 이름은 우에스기 하루노리인데 하루노리라는 이름보다는 요오산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듯하다. 200여 년 전의 이 지방의 한슈로서 일제시대의 중등학교 일본역사 교과서에도 언급이 된 인물이다.
‘교육을 장려하고 산업을 일으켰으며 특히 양잠을 권장하여 오늘날까지도 '요네사와 직물'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그의 선정(善政)의 혜택을 후일까지도 두고두고 누리게 되었다.’
이는 어느 교과서에 적혀 있는 그의 치적을 옮겨 적은 것이다.나는 몇 해 전에 앞에서 언급한《붕게이슌주》에 연재된 그의 전기를 감명 깊게 읽은 일이 있다. 작가 후지사와 슈헤이 (藤澤周平)는 이 전기를 쓰는 도중에 타계했는데 임종이 가까워지자 미완성인 채 서둘러서 끝을 맺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기는 길이 남을 역작이라는 평이 높았다. 나는 이 글이 미진한 채 끝난 것을 아쉽게 생각하던 터였는데 마침 요오산이 직접 다스렸던 땅을 찾게 된 것을 지극히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우리 일행이 공원의 광장에 도착하자 나이가 지긋한 영감이 우리 앞에 다가와서 이 지방의 봉사 안내원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이내 공원의 구석구석의 유적을 안내하며 전기에도 없던 요오산의 치적들을 자랑스럽게 신명이 나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오산은 17세 때 멀리 규슈(九州)의 후쿠오카지방에서이곳 우에스기가입양하여 요네사와(米澤)의 한수를 승계하고 73세의 생애를 마쳤다는 것이다.
연조를 따져 보니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의 일인 듯싶다. 그는 평생을 반찬은 일즙일채(一汁一菜)를 고수하고 대량으로 비단을 생산하는 지방의 영주이면서도 무명옷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그는 솔선하여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고 그의 치세동안에 요네사와한의 막대한 부채를 모조리 변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악한 재정에서 벗어나서 민생을 도탄에서 구출한다. 그가 양잠을 권장한 사연은 교과서에도 언급이 되었다.
요오산은 그 부산물인 번데기 가루로 잉어를 양식하여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들에게 보양제로 공급하였다고 한다. 그의 치적이 구석구석까지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백성에게는 한결같이 농업에 종사하는 개농주의(皆農主義)를 펼쳤고 계급주의를 타파한 개혁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공원 안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인물이 이 요오산이었으며, 근년에 이르러 세계의 많은 위정자들이 그의 치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적혀 있다.
요오산은 마음을 비우고 오로지 백성을 위해서 헌신한 어진 통치자였던 것 같다. 어느 나라나 위정자들이 물러난 뒤에는 죽일놈 살릴 놈 하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는 국민에게 헌신하려는 각오가 미흡하고 마음을 비우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치는 정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의 마음자세 여하에 따라서 정치는 식은 먹는 것처럼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의 나의 여행일기에는 '선정을 베풀면 후세에까지 칭송이 자자하고 학정을 자행하면 두고두고 원성이 그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안내원이 한 말인지 아니면 나의 감상을 적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한 천리(天理)일 터이어서 누구의 생각이면 대수랴 싶다. 다만, 위정자들이 이 쉬운 천리를 이해 못하는 것 같아서 의아스럽다.
안내원 영감은 설명을 이어갔다. '일본 각처에 세워진 옛 한슈들의 동상은 모두가 위엄 있는 무사의 모습인데 유독 이곳 요오산의 그것은 온화한 평민의 모습이다' 라고.여행기간에 돌아본 '마쓰시마'를 비롯하여 자오산 그리고 모가미의 급류타기 뱃놀이 등의 경관은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회상하면 우에스기 요오산의 강한 인상에는 훨씬 못 미치는 느낌이다.
오래 전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웃나라의 통치자를 너무 추켜세운 것 같아서 조금은 찜찜한 생각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해방 후 오늘날까지 줄줄이 이어온 우리나라의 많은 위정자님들의 처신이 말이 아니어서 이 노부(老夫)의 심사가 조금은 꼬인지도 모른다.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