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야전 병원 달려간 30대 英간호사… '과학 간호' 씨 뿌렸죠
입력 : 2022.06.08 03:
나이팅게일과 크림전쟁
▲ 크림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 지역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연합군이 공성전을 벌이는 모습을 그린 그림. 크림전쟁은 흑해와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오스만 제국 연합군과 러시아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벌인 전쟁이에요. /위키피디아
지난달 12일은 1972년 제정된 국제 간호사의 날이었습니다. 국제간호협의회(ICN)가 간호사의 사회 공헌을 기리기 위해 지정했는데, 이날은 간호사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이 태어난 날이랍니다. 그는 오늘날까지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이며 '군(軍) 의료 개혁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는데요. 나이팅게일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볼까요?
흑해와 크림반도를 둘러싼 전쟁
나이팅게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크림전쟁'입니다. 흑해와 흑해 북쪽에 있는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 연합군과 러시아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벌인 전쟁인데요.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이후 아시아와 유럽·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했어요. 하지만 19세기 들어 점차 세력이 약해집니다.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특히 러시아는 국외로 뻗어나가기 위해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 필요했죠. 크림반도를 확보하고 있던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바다인 흑해를 건너 직접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했어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제국에 있는 예루살렘 성지에서 가톨릭교도에게 특혜를 달라고 오스만 제국에 요구합니다. 프랑스에 있는 가톨릭 세력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였어요. 그리스 정교를 믿고 있던 러시아는 가톨릭 세력의 강화를 경계하고 있었는데요. 남쪽으로 내려갈 기회를 엿보던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나폴레옹 3세의 요구를 오스만 제국 내에 있는 그리스 정교도에 대한 위협이자 공격으로 정의합니다. 그러고는 "오스만 제국 내의 그리스 정교도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해요. 그러자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는 물론, 러시아가 지중해를 차지하는 것을 경계한 영국과 프로이센 등이 오스만 제국의 편에 섭니다. 전세(戰勢)는 러시아에 불리하게 돌아갔어요. 궁지에 몰린 러시아는 크림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 항(港)'에서 끝까지 저항했어요.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결국 패배했지만, 그전까지 힘겨운 전투는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이어지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전염병인 콜레라까지 창궐하면서 병사들은 계속 죽어갔습니다. 영국군 가운데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이 약 5000명이었는데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는 그 3배인 1만5000명에 달했다고 해요. 다치고 병든 연합군 병사들은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배에 실려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옮겨졌지만, 그곳에는 의사도 간호사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38명 간호대 조직해 오스만 제국으로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나이팅게일이에요. 1820년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인형 이마에 손을 짚어 보고 찬물에 적신 수건을 올려 주는 놀이를 좋아했다고 해요. 또 공부를 하거나 기록을 남기는 일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죠. 그렇게 그는 17살에 "간호사가 되어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러던 중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 발발 소식과 함께 "많은 사상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요. 그렇게 1854년 11월 38명의 간호대를 조직해 이스탄불에 있는 위스퀴다르 영국군 병원으로 향합니다.
야전 병원(전투지역 내에서 지상부대를 지원하는 병원)은 아주 더러웠어요. 화장실 정화조에서 오물이 넘쳤고, 오물이 주위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병원 안은 늘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어요. 하수도 시설도 열악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하수도 청소를 시작하자 배수구에서 폐사한 말 두 마리가 나왔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고 해요.
병원 안은 늘 쥐가 들끓고 파리 떼가 날아다녔죠.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유럽 대도시 최악의 지역에 있는 집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지만, 이곳 막사 병원의 밤 상황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은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해요.
이 상황에서 응급치료를 마친 환자들은 군복을 벗지도 못한 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방치됐습니다. 군 병원의 통계 기록도 없어 사망자 수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지요.
나이팅게일은 혼란스러운 야전 병원의 체계를 하나하나 세워가기 시작했어요. 환자들에게 깨끗한 옷을 입히고, 침대 시트를 청결하게 관리하며 병원 체계를 갖춰나갔습니다. 그는 환자의 수와 환자가 걸린 질병의 종류를 의무적으로 기록하고 보고하도록 병원 내의 체계를 다졌고, 부상자와 사망자 숫자를 꼼꼼하게 살폈으며 치료 등을 위한 물품 보유 현황도 반드시 신고하도록 했어요.
그러면서 밤에는 등불을 들고 병사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돌보고 다녀 '등불을 든 천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나이팅게일을 흔히 흰 간호복을 입은 '백의(白衣)의 천사'에 빗대 표현하지만, 당시 그는 짙은 색의 검소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해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나이팅게일은 영국군 병원 총책임자로 공식 임명됐습니다. 그가 이 병원에 온 지 반년 만에 한때 40%를 넘나들던 환자들의 사망률이 5%까지 떨어지게 됐어요. 부상병의 절반이 죽어나가던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죠.
간호사이자 통계학자인 나이팅게일
1856년 2월 파리 협정으로 크림전쟁이 끝나자 그는 같은 해 7월 귀국해 간호학 발전에 힘썼습니다. 전쟁 기간 800쪽이 넘는 통계 보고서를 쓴 것으로도 유명한 나이팅게일은 의료 개혁을 위해 자료와 통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1858년에는 크림전쟁 기간 발생한 부상자와 사망자 수 등의 통계를 이해하기 쉽게 그림(도표)으로 보여주는 '로즈 다이어그램'(rose diagram)을 발표했어요. 이 그림은 18세기 최고의 통계 그래픽 중 하나로 꼽힙니다. 1860년에는 런던에서 열린 세계 통계학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어요.
나이팅게일은 1868년 영국 왕립위생위원회에서 "주택 위생을 위해 배수·하수 시설 설치를 의무화한다"는 내용의 공공 보건의료 법률 제정을 이끌어냈고, 지역별 보건 진료소 운영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나이팅게일은 헌신적인 의료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는 사회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꾸준히 작성한 병원 기록과 간호 노트 등은 각 나라로 전해져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을 위한 기초 교재로 사용됐어요. 그는 기부금을 받아 런던에 성 토머스 병원 부속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세웠고, 이후 호주·미국 등의 간호학교 설립도 꾸준히 지원합니다. 당시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나이팅게일을 통해 이런 인식이 개선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간호사로 일하게 된 거예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07년 그는 87세 나이에 영국 국왕으로부터 여성 최초로 공로 훈장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어요.
▲ 이 전쟁에서 간호사로 활약한 나이팅게일(왼쪽)이 영국군 병원에서 등불을 들고 병사를 살피는 모습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 1858년 나이팅게일이 발표한 ‘로즈 다이어그램’ 중 일부. 크림전쟁 기간의 간호 기록을 그림(도표)으로 표현했어요. /위키피디아
서민영 함헌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조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