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의 추억
관악산에 위치한 서울대학교는 다수의 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대학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최고 지성의 요람일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시골에서 신입생이 나오면 온 마을에서 잔치하며 축하를 해주고, 그의 출신 집안과 학교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최근 20여년 만에 처남 등 5명이 관악캠퍼스를 찾았다. 처조카가 자연대의 교수로 부임한 후 처음으로 초대하여 교수회관에서 점심을 한 것이다. 마침 그곳에서 우연히 딸의 대학원 지도교수님을 만나 안부를 나누었다. 회관은 과거에 골프장의 클럽하우스로 고도가 높아 학교 전체의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뒤로는 관악산의 주봉(主峰)인 연주대(戀主臺)가 보이고, 앞으로는 저 멀리 안양까지 오밀조밀한 봉우리가 비상하는 용의 허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애당초에 여기는 관악 컨트리클럽(골프장)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동숭동과 여러 곳에 산재했던 서울대학교를 이곳에 이전하면서 폐쇄되었다. 이곳은 부지가 넓고 관악산이 둘러싸 시위대의 통제와 진압이 용이하다. 따라서 도심에 있는 대학생들의 데모예방을 위한 조치였다는 설(說)이 있었다. 여하튼 대학교 부지 선정은 최종 박 대통령의 의지로 결정되었는데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적인 업적의 하나이다. 그 이전은 오늘날 강남개발의 큰 전환점이 되었던 대역사(大役事)의 시발점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학교의 풍경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커다란 운동장과 널따란 잔디밭이 있던 주위에 빼곡하게 들어선 여러 개 동(棟)의 건물은 방향조차 분간하기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초기에 넓은 초원의 푸른 잔디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울려 빛을 발하던 모습은 퇴색하고 마치 성냥갑을 이어놓은 인공의 섬처럼 보였다.
지난 1991년도 새 해를 맞아 눈보라를 헤치고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을 안내하였다. 내심으로는 학교생활에 분발하라는 의미였다. 법과대학 입구의 「법과 정의의 여신상」, 인문대학의 모서리에 있는 「자하연(紫霞淵)」 연못, 「도서관」과 「아크로폴리스광장」, 「학생식당」과 「각 단과대학」등을 구경시켰다.
어쨌든 세월이 지나 두 아이가 각각 사회대학과 자연대학에 합격하였다. 기쁨도 잠시 명분과 실리를 두고 전공에 맞는 학과를 선택하느라 가족회의를 했던 일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였다. 지나고 보니 현명한 선택이라 후회는 없다. 언젠가 손자/녀도 데려와 설명을 해줄 생각이다.
여하튼 자연대학에서 석사를 마친 처조카와 딸이 지난 2007년도에 함께 MIT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재학생들이 주최하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촌 남매가 동시에 입학했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학 전에 결혼한 처조카는 부부가 유학길에 올라 생활하면서 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모두가 국내/외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데, 중학생인 외손을 보면 무심한 세월에 전율(戰慄)을 느낀다.
근 25년 전에 선친께서 동료 교수님들과 함께 포항공대를 방문하신 일이 있다. 막내 동생이 숙소에 찾아와 인사를 드리니 일행들이 정작 교수로 근무하는 아들을 둔 선친을 매우 부러워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선친께서는 진즉에 중학교에 다니던 막내아들에게 ‘중관(中冠)’이라는 호를 지어주셨다. 서울대학교가 있는 관악산을 명중시키라는 뜻인데 결국 그 깊은 뜻이 빛을 발하여 지금은 미국에서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같은 심정으로 젊은 나이에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처조카의 모습에 뿌듯한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한 때 육사교수 요원으로서 근무하기 위해 인문대학에 3학년으로 편입했었다. 4~5년 차이의 후배들과 강의를 들었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 교수님들은 매우 따뜻한 격려로 잘 지도하셨고, 동료 학생들도 친절하게 도와주어 불편 없이 지냈다.
더구나 재학 중에 군대를 다녀와 늦게 재학하던 고교의 친구들을 만나 여러모로 위안이 되었다. 특히 경영대학의 석사과정에서 조교로 있던 K친구의 조언을 받아 경영대 강의를 수강했다. 학부 졸업 직전에 시험을 치루고 다행히 경영대의 대학원과정에 합격을 하였다. 그 해에 막내 동생이 입학하여 기숙사에 거주했는데 가끔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가는 길에 만나보았다. 어찌 보면 그 시절이 젊은 시절의 절정이었을지 모른다. 부러울 것 없이 마음껏 공부하면서 후배들을 가르쳤고, 마침 고향의 본가도 안정되면서 생활에 집중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쉬움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추억일 뿐이다.
여러 가지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옛 추억이 깃든 장소를 돌아보았다. 구석구석은 밟진 못했지만 많은 소회를 느낀 시간이었다. 잠시 학군단에 들렸는데 건물은 낡고 인원이나 직원도 극소수였다. 특히, 연대장님으로 모셨던 분이 서울대학군단장으로 재직 중이어서 종종 만났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았다. 마치 아들처럼 아껴 주시던 인연을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빌었다.
언젠가 추석날에 가족이 찾아와 한나절을 보냈던 잔디밭도 그대로여서 정겨웠다. 「법과 정의의 여신상」은 간 곳이 없어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였다. 대신에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의 의미가 담긴 「정의의 종」과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하여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는 어록을 새긴 「이준(李儁)」열사의 조그만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자하연」을 돌아보니 그 사이에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한시와 묵죽도(墨竹圖)를 모사하여 새긴 조그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어 옛 강의실과 학과에 가보니 모든 교수진의 이름이 생소하였다.
배경으로 우뚝 솟은 관악의 주봉은 푸른 하늘을 머리에 지고 변함이 없었다.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이나 인걸은 간 곳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지금은 요원한 이야기지만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속설처럼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한 훈훈한 미담이 삭막한 우리 사회에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하버드 대학의 교정에 있는 설립자 동상의 구두를 만지면서 기도하면 입학의 행운이 깃든다는 속설이 있다. 모든 방문객들이 사진을 찍는데 구두가 항상 번들번들하다. 이곳에도 마땅한 인물의 동상이 세워져 비슷한 전통이 이어지길 바란다. 가능하면 「다산(茶山)」과 같이 목민관(牧民官)의 전형을 제시했던 분이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하게 오가는 젊은 학생들에게서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보고, 모두 이 나라와 국가의 번영을 위해 큰 업적을 쌓아가길 바랬다. 무엇보다 정의롭고 슬기로운 젊은 야성과 지성이 계승되어 선진 민주사회는 물론이고, 따뜻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구현으로 문화강국을 함께 가꾸어 가는 진정한 위인들의 출현을 염원한 시간이었다.
(2024.1.16.작성/1.31.발표)
첫댓글 그시절 풍경이 그려지듯 아주 자연스럽게
묘사하셨습니다. 재미있게 읽었고요.
감사드립니다.
항상 관심을 주시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