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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롭거나 허허롭지 않은 그 안
-김지란, 이재연, 선종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상상력에 대하여 유추해 본다. 신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안에 시간을 구분해 계절을 나누어 다가오는 봄을 선물했다. 우리가 고대하던 봄이 온다. 누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꾼다. 바람을 구체화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것이다. 오랜 시간 꿈꿔온 단상들이 깊은 사유로 이전 축적되면서 그 모습을 세상에 ‘시’라는 형상으로 드러낼 때 심연을 통과한 고뇌와 혼신에 찬 몰입을 환희를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을 긍정으로 바라보고 불안한 순간순간을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의 산물로 봐야 한다. 그런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현재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갈망한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시, 공간에서 새롭게 바라보려는 문학적 의도를 문장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시적 상상력에 대한 생각도 이카루스가 단순하게 미노스 왕이 만들어 놓은 미로를 벗어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겠다는 자유의지인 것이다. 비록 신화 속에 등장한 이카루스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고 시인들이 곧 그와 같은 족속이다. 통속적인 사회 속에 갇힌 일반적인 생각들을 뛰어넘고자 한 시인의 상상력에 찬 발설을 눈여겨보았다. 낯선 시어로 완성된 문장의 내면을 깊숙이 천착하면서 우리가 그 안에서 소중하게 바라봐야 할 것들을 삶의 일상에서 경험한 현재성으로 서정의 그물망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차피 시의 언어가 개별성으로 포착한 대상을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라 사실적 공감으로 환기하면서 공유하려는 데 있다. 결국 시의 세계란 것도 사회 현상을 망라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핸드폰을 요리조리 하다봉깨
사진이 나오더라
그걸 본깨 어찌나 반갑든지
꼭 느그 아빠 살아있는 것처럼
한참을 쳐다봤당께
기운이 내려앉아 당신 몸도 간수 못하는데
그 순간은 생기가 돌았는지
느릿한 말에 곧은 심지처럼 힘이 박혀 있네
이십 대에 남정네 따라와
비릿한 갯벌에 닻을 내리고 살아온 어머니는
아버지의 바다에 정박한
조그만 배였구나
당신 보내시고도
닻을 거둬들일 줄 모르는 배
모진 세월 출렁거렸던 마음은
닻에 붙은 따개비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구나
인연이라는 밧줄로 단단히 묶인
고독한 제자리 향해
바다내음 가득한 사연이
당신이라는,
닻꽃으로 피었다
*닻꽃 : 꽃 모양이 닻을 닮았다
-김지란, 「닻꽃」전문(《시와사람》,2022년 겨울호)
특정하게 인식되는 사물에 자의성이 깃들어있는 소리나 의미한 말이 어느 시점부터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획득해 특별한 명칭이 된다. 그 과정에 학문적인 논박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지만, 우선 그렇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통용된다. 김지란 시인이 생물적인 ‘닻꽃’의 이미지에 담긴 형상을 비유적으로 인용하여 시적 세계를 확장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환기하고 있다. 그 단초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된다. 수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뜨시고 난 뒤에도 생의 고단함을 윽박질렀던 생전 모습을 지워버린 채 오직 지아비에 대한 애틋함을 놓지 못한 어머니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람이 생을 마감하면 먼저 건네는 인사말은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다. ‘산사람이라도 살아야한다.라며 밥 잘 챙겨 먹고 정신부터 차려야 한다’는 말을 못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충분히 깨닫고 남을 수년이 지나서도 못 잊어 애를 태우는 것을 보면 요즘 사람으로선 이해불가한 일이다. 독한 마음먹고 야무지게 잊고 살 법도 한데 간혹 꿈속의 아버지가 보인다 치면 어김없이 첫사랑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것처럼 시간을 거슬러 우울한 궁리로 아련해지곤 한다. 오랜동안 삶의 반경을 맴돌던 남편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요즘 세태의 매정하도록 단호한 절연으로 이해할라치면 어림없는 순정이 분명하다. 언젠가는 손바닥에 달고 사시는 핸드폰을 요리조리 조작하다 어딘가에 저장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튀어나온 것이다. 생전의 환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 ‘지아비’이니 미몽처럼 아련한 심연으로 빠져들면서 잠시나마 혼곤해졌을 터이다. 평생을 바닷가 외딴집에서 살림 차려 살다 자식들 키워놓았더니 뿔뿔이 제 살겠다고 빠져나가고 난 뒤의 텅 빈 집은 앞으로 돌아가나 뒤로 둘러보나 휑한 기운은 더했을 터이고 그럴수록 서로 간의 애증이 더해졌다 덜해졌다 바닷가 날씨처럼 변덕을 거듭했을 것이다. 집 마당 코앞까지 밀치고 들어오는 바다 물때가 일렁거릴 때마다 마지막이란 말보다 더 지독한 ‘별리’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딸린 자식새끼들이 문제였다. 눈에 밟힌 아이들만 없었어도 신발 바꿔 신고 총총 떠났을 여자(어머니)로써의 순간들을 헤아려봐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그야말로 고달픈 생의 전망은 암혹한 것이었다. 험하게 밀쳐 들어오던 집 앞 바다처럼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평온이 밀려왔을 터이다. 사람은 긴 고통보다 마지막 짧았던 행복을 못 잊어 한다. 그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우리 엄마일 것이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보면서 애틋함이 더해져 오히려 그런 시간들이 행복으로 환치되어 환영처럼 어른거린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왕래해야 할 생과 사를 거쳐야만 한다. 숨을 얻어 태어났으니 죽음을 통해 그 길을 되물어 가야 한다. 요즘 들어 부쩍 쇠약해진 어머니다. 언뜻언뜻 비치는 생의 지평이 간혹 바다 위 노을처럼 붉어질 때면 가슴 한켠을 차지한 아버지가 아련하게 생각난지도 모르겠다. 항상 바다 멀리 수평선처럼 가물거린 한평생을 지아비만 바라보며 살아오신 어머니다. 그 시작도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고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야만 했던 바닷가 아낙의 전부가 된다. 간간히 바닷일 나간 아버지 들어오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을 등대 같은 시간이 온전하게 간직되어 있다. 지금껏 살아온 긴 시간을 되돌아볼 때 어머니의 지극한 마음은 떨어지면 죽는다는 절박함뿐이어서 한시도 여수 화양 바닷가를 벗어나질 못했다. 어머니의 몸은 지아비를 만난 그 순간부터 평생 제자리를 떠날 수 없는 바닷가의 따개비가 되어버렸다. “모진 세월 출렁거렸던 마음은/ 닻에 붙은 따개비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구나”라며 김지란 시인은 어머니의 심연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온정을 알려준다. 심한 풍랑이 일면 접면을 강하게 밀착해 살아남은 따개비처럼 그나마 잡고 있는 이승의 추억을 놓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 햇살 따가운 날 하얗게 반짝이는 ‘따개비’처럼 순정한 ‘닻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맨홀의 덜컹거림으로
정지선 앞에 멈춰선 새벽의 골똘함으로
유리창 밖이 하얗다
북쪽으로 난 작은 창문이 숲의 평화를 주문하는 겨울은
미루나무 꼭대기처럼 더 길어지고
이불을 끌어당겨 잠든 내 어깨를 덮어준다
진짜 모르고 있는 줄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모르는 줄 안다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줄은 모르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지 않을 줄은 안다
그것이 작은 것을 더 작게 하고
숫자와 저울을 경악하게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속삭여 왔는지 모른다
괜찮아 질 거야 괜찮아 질 거야
그렇지만 곧 괜찮아 질 거야 같은 말은
다 이루어 질것 같은 말이지만
잃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말에 더 가까운 말이다
지금은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문제가 쌓이고 있다는 말의 반증 같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배반한다
차가운 건물 속에 갇힌
아주 사소한 개인들 옆에서 한없이 친절하고
내일은 다시 얼어붙을지 모르는 일
지금은 여전히
이유 없는 젊은 병사들
이름 없이 죽은 국경의 젊은 병사들에게 용서를 빈다
들어봐요 둘러봐요
들판의 작은 씨앗들이 얼마나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대지의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고 있는지
이 오래된 춤을 짊어져야 하는 어머니
대지가 되어버린 어머니
천천히 식기를 씻는 오늘은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딱딱해진 해바라기와 칸나와 함께 헝클어진 덤불 속에서
방금 식은 태양의 한숨을
찾을 거에요
-이재연, 「대지의 춤」전문(《딩아돌하》,2022년 겨울호)
이재연 시인의 시 ‘대지의 춤’이 말하고자 한 시의는 무엇일까? 시를 만날 때마다 갖는 호기심은 이번에도 발동했고 시적 상상력을 통해 발현한 세계에 내재한 충동을 이미저리로 전환한다. 시인은 시의 주체로 타자적 화자를 내세워 단선적 사유가 아닌 전체적인 사유로 외연을 보여주려 한다. 화자는 ‘나’라는 의식을 확장해 시적 사유가 결국은 지구적인 만사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새벽의 골똘한 시간을 방해하는 외부 요인은 “맨홀의 덜컹거림”으로 시작된다. 새벽의 시간은 긴 잠에서 깨어나 몽롱한 상태로 새롭게 시작될 일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그 말은 곧 아직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인 리듬의 정상화가 덜 된 상태인 것이다. 그런 혼몽한 시간에 발생한 소음은 신경을 거스를 수밖에 없고 더욱이 외부로 유입된 정보는 “유리창 밖이 하얗다”는 것으로 감각적 반사망이 흐릿함을 알게 한다. 이미 깊은 새벽이 아닌 아침에 가까운 시간임을 의식하지만, 시적 화자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마음이 없다. 그것은 화자가 선택한 시간이 아니라 신이 강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벽은 신이 의도한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북쪽으로 난 작은 창문이 숲의 평화를 주문하는 겨울은/ 미루나무 꼭대기처럼 더 길어지고/ 이불을 끌어당겨 잠든 내 어깨를 덮어준다”며 어김없이 실행되는 신의 시간을 여지가 있는 시간으로 미뤄버렸다면 화자가 떠안아야 할 삶에 대한 분별이다. 그것을 간파해 버린 화자는 삶에 대한 경험이 깊어 충분한 연륜으로 민감한 변화에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 흐름을 가늠할 줄 안다는 자부심일 수 있다. 새벽의 시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하루의 일상과 그 하루 동안 벌어질 자신을 둘러싼 일들과 사회 일상을 꿰뚫고 있고 더 나아가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실을 가장한 사건들의 이면을 스스로 분별하며 잘못된 일들을 불협화된 문장으로 환기하려 한다. 화자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공의적인 것으로 다가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와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일까지 기계적인 계량으로 질량화하는 세태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그것이 작은 것을 더 작게 하고/ 숫자와 저울을 경악하게 한다”라며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계량 단위가 아닌 인간의 ‘양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곧 “괜찮아 질 거야”라며 위로를 해보지만, 불안한 마음은 해소되지 않고 막다른 ‘사랑’에 대한 회의감에 빠져든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지금껏 사유로 충동한 시적 외연들이 함의한 전반이 결국 지구촌의 현실로 다가오면서 그것에 대한 고뇌를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차가운 건물 속에 갇힌” , “이유 없는 젊은 병사들/ 이름 없이 죽은 국경의 젊은 병사들에게 용서를 빈다”며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전쟁을 정의로 포장한 평화라는 구호로 위장된 이 땅의 ‘대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 대지는 결국 기만과 진실에 대한 선의지가 실종된 우려와 염려여서 더 안타까워하는 마음이고 어머니의 모성으로 상징된다. ‘대지의 춤’은 화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이자 모두의 희망이란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결국 한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세상의 온기를 유지하고 싶은 화자의 자아적 표상은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 내려/ 딱딱해진 해바라기와 칸나와 함께 헝클어진 덤불 속에서/ 방금 식은 태양의 한숨을/ 찾을 거에요”라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시적 화자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은 충동을 문학적인 욕망으로 사유화한 반응체이다.
갯바위까지 물든 남해 늦가을 오후
인적 끊긴 해수욕장 모래밭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다정하였다
나란한 발자국 따라 나도 걸어 보는데
어느 순간 하나는 보이지 않고,
더 깊어진 발자국 하나만
해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추운 파도가 아무리 몰아쳐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발자국 앞에서
혼자 걷는 내 등이 왈칵 따뜻해졌다
-선종구,「발자국」전문(《사람의 깊이》,2022년 26호)
동물의 부류에 포함된 사람도 특별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두뇌 회전이 빨라지면서 환경에 잘 적응하고 우월하게 진화하면서 호모사피엔스란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동물과 같은 먹이사슬에서 생존을 위한 도구를 활용해 살아남기 위한 고투의 흔적을 보면 치열했던 당시를 말해준다. 그런 시기가 분명하게 선사시대 여러 정황으로 증명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마저도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 상황을 유추해 하나의 독특한 세계로 형상화하듯 생명의 진화를 신비의 시간으로 거슬러가며 추정하는 것 또한 시의 상상력을 통해 진전되는 발현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에 따른 사랑의 표현 방법도 사람만이 독특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침 선종구 시인은 남해 해안가의 완만한 해변을 걷다가 특이한 발자국을 만나게 된다. 분명 해변에서 바다를 향해 걸어갔고, 그 방향을 따라 두 명의 족적이 찍힌 걸 보게 되면서 흔적을 상상하며 따라갔을 것이다. 시간은 먼 시간을 빠르게 돌려놓아 현재화되면서 다시 시적인 순간으로 돌아온다. 마침 “갯바위까지 물든 남해 늦가을 오후/ 인적 끊긴 해수욕장 모래밭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다정하였다”며 오붓한 분위기에 다붓한 밀어를 나눴을 당시를 현상한다. 그런 설렌 마음을 조곤조곤 밟아가던 어느 지점에서 의아한 흔적을 의식하게 된다. 어떤 연유인지 모를 상황이 분명히 발생한 듯한데 그것을 말해주는 단서는 아무 곳에도 없다. “어느 순간 하나는 보이지 않고,/ 더 깊어진 발자국 하나만/ 해변 끝까지 남아 있었다”며 다만 파도 출렁이는 바닷가를 벗어나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정황만 남았을 뿐이다. 화자는 다정해 보이면서 예쁘게 찍힌 족흔을 보며 아름다운 해변에 들떠 사랑에 빠진 커플을 상상했을 것이다. 사라진 발자국은 어디에 있을까를 더는 묻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그 답은 “추운 파도가 아무리 몰아쳐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발자국 앞에서/ 혼자 걷는 내 등이 왈칵 따뜻해졌다” 라며 그들을 하나로 옭아맨 충동 기제로 작용한다. 사랑스런 그녀를 품 넓은 등에 업고 행복한 노을을 받으며 뚜벅뚜벅 바다로 걸어갔을 그 남자를 상상한 것이다. 문득 오버랩되는 남해안가에 서식했다는 공룡을 상상해 본다. 그들도 뜨거운 사랑의 낙인을 두 발로 다복다복 찍으며 깊은 바다로 걸어 들어갔을까? 드문드문 짝을 이뤄 노닐었음직한 영원 속에 파묻힐 뻔한 화석에 찍힌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 공룡이 마지막 족흔을 남기고 사라져 간 날도 저토록 행복한 시간에 놓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파노라마처럼 밀려오는 것은 남해안 바닷가와 풍경으로 겹쳐지는 ‘발자국’이 유별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랑의 실체는 경험으로 학습되는 것이고 유사한 일들은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온정 애틋한 눈빛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불꽃같은 가슴에 화인을 찍어 기어이 둘만의 사랑을 불사르고 말기 때문이다. 그 발화점은 쉽사리 포착되는 것도 아니어서 예민한 긴장이 충만해야만 반응한다.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을 기억하는 화자도 결국 체험에 의한 포착 지점에서 적시에 투하하여 얻은 충동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사내의 등으로 후끈 달아 오른 온기는 가슴에서 발화하여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열려 다가가는 내면의 심온深穩이다. 이제부터 해변가 그윽한 곳에 둘이서 걷는 발자국을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어느 순간 발자국이 하나로 포개진 듯 보인다면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져든 것이다.
자꾸만 눈길이 쏠리는 듯 마음이 기우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을 떠나 간절함으로 다가간 까닭이다. 삶의 순간으로 다가온 시 공간 속 제 현상들에 사유로 반응한 세 편의 시를 접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헤아려본다. 그 대상은 누구나 바라본 현상일 수 있다. 그것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으로 입수하여 체득한 내면의 소리란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의 가치가 비록 작다 해도 그렇지 않은 것은 이미 시적 세계로 전환되어 든든한 문장으로 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가 드러내고자 한 이면은 우리가 공히 공감할 수 있는 언어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문장 안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시론의 실천 행위로 그 첨병의 전위가 기꺼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시와사람》2023년 봄 107호